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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중국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맞는 악몽"
Korea, Republic o 김신호 3 541 2008-12-06 23:59:13
조선일보 2008-12-06 13:3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05/2008120500872.html



최영훈씨와 아내 김봉순씨가 퇴근길에 만나 다정히 집으로 가고 있다. 최씨는“아내의 믿음과 헌신이 없었으면 아직도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탈북자 돕다 中서 4년 복역… 2006년 귀국한 최영훈씨

귀국 직후 심한 정신적 후유증, 극복하는 데 1년 걸려

'中에선 탈북자 돕는게 죄' 뒤늦게 알았지만 情때문에…

가족 소중함 새삼 느껴… 지금도 '탈북자 탈출' 도와

2006년 11월 29일 최영훈(45)씨가 자유의 몸이 돼 조국에 돌아왔다. 그는 탈북자들의 보트 해상 탈출을 돕다 체포돼 중국 감옥에서 3년11개월을 보낸 중장비 임대 사업가다. 인천공항에 들어선 그의 비쩍 마른 얼굴엔 병색이 짙었다. 그 후 2년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1일 만난 그는 "지금도 악몽을 꾼다"고 했다. "감옥에서 헤매다 중국 죄수들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는 꿈. 좁은 공간에 들어가면 심장이 떨려서 지하철을 못 타요." 그는 "감옥에 있을 때는 집에만 가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와보니 내가 가족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며 "처음 몇 개월 동안은 '빨리 죽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고 했다.

귀국 후 그는 심각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아내 김봉순(41)씨는 "집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공안이 폭탄을 장치했다'고 소리쳤고 겉옷도 안 걸치고 놀이터에 나가 몇 시간씩 서 있곤 했다"고 전했다. 병원에선 '정신분열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내렸다. 20㎏ 넘게 빠진 살은 곧 회복됐지만 정신적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는 1년 넘게 걸렸다고 했다.

그는 "아내한테 붓을 사달라고 해 그림을 그리며 안정을 찾았다"고 했다. "아내와 손 잡고 처음 연애할 때 다녔던 을지로3가를 걸어 다녔어요. 아, 그땐 그랬었지. 맞아… 하면서 옛 기억을 하나씩 떠올렸죠."

그리고 "탈북자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들은 나를 정상으로 대했어요. 얼굴이 좀 야위었구나 하는 정도죠. 또 탈북자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용기를 많이 얻었어요."

그는 귀국 3개월 만에 취직했다. "중국 가기 전의 경력을 인정받아 건설 관련 자문 일을 하게 됐다"고 했다. "주변에선 '어떻게 네가 취직을 할 수 있느냐'고 신기해했죠. 한 3개월 다녔는데 TV에서 취재하러 오니까 회사에서 싫어하길래 제가 관뒀어요. 그 뒤 3개월간 백수로 지내다가 지금 회사에 들어왔죠."

그는 스스로 "지금 정착 중"이라고 했다. "제가 탈북자가 된 것 같아요. 감옥에서 4년, 그 전에 중국에서 살았던 세월까지 10년 만에 한국에 왔는데, 그새 달라진 게 왜 이렇게 많은지. 버스 탈 때 전자카드 찍는 것도 몰랐고. 하나씩 배우고 있습니다."

최씨는 1997년 중국에 갔다. 중장비 10대를 갖고 들어가 임대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중국동포인 줄 알았던 직원 한 사람이 알고 보니 탈북자였어요. 그전에는 탈북자가 뭔지 아무것도 몰랐죠. 술 사주면서 사정을 듣게 됐고 그 친구를 통해 탈북자 네트워크를 알게 됐어요. 저희 아버지 고향이 황해도 해주입니다. 20대 후반에 임진각에 모시고 갔다가 아버지의 눈물을 봤어요. 아마 그때 느꼈던 연민 같은 게 작용했을 겁니다."

그해 겨울 브로커에게 몸값 1000만원을 주고 직원을 한국에 보냈다. "그 다음 해에 또 한 사람 보내고, 몽골·라오스·미얀마 등으로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을 조금씩 배우게 됐어요. 네트워크도 점점 커졌죠. 나중에는 중국 동북 삼성까지 가는 차비만 주고, 그 뒤부턴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처음엔 탈북자들을 돕는 게 죄가 되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어차피 불법으로 온 사람들 불법으로 내보내는 게 무슨 죄가 되나 생각했죠. 한참 뒤에야 내가 평생 이뤄놓은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발을 빼려고 했을 때는 이미 너무 깊게 들어와 있었어요. 잘하자, 갈 수 있다, 날 믿어라 해놓고 정(情)을 배반할 수는 없잖아요."

국경 경비가 점차 강화되자 그는 '대량 해상 탈출'을 고안했다. 2003년 1월 최씨는 80여 명의 탈북자들을 두 척의 보트에 나눠 태우고 한국과 일본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국경없는의사회(MSF)', 일본의 북한난민구호기금 등 여러 단체의 도움을 받았다. 직접 배를 몰고 가려고 연습까지 마쳤고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하지만 옌타이(煙臺)에는 이미 중국 공안 100여 명이 깔려 있었다. 그는 프리랜서 사진기자인 석재현씨, 탈북자 50여명과 함께 체포됐다. 이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나머지 탈북자들의 행방은 모른다고 했다. 함께 잡힌 탈북자 50여명은 북한으로 강제 송환됐다.

"감옥에 있을 때 가장 가슴 아팠던 게 가족들이 면회 왔을 때예요. 체포되고 1년 만에 아이들을 처음 봤어요. 내 아이들을 보면 어떤 얘기를 할까, 기다렸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까 해줄 얘기가 없는 겁니다. 나는 죄수복을 입고 있고, 양옆에 교도관들이 서있는 상황이…. 그냥 제 아내만 보고 얘기하고 애들을 보면 눈물만 났어요."

그는 "마지막 3개월이 정말 지옥 같았다"고 했다. "2006년 9월이었나 갑자기 8~9명의 중국죄수들이 들이닥쳐서 끌고 가더니 날 침대에 눕히고 약물이 든 주사를 놓았어요. 나는 고혈압 환자라 안 된다고 발버둥쳐도 소용없었어요."

그는 "왜 약물을 투여하는지 어떤 약물인지도 알 수 없었다"며 "그후 온몸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하반신이 굳어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주사를 맞은 후엔 죄수들이 번갈아 가며 때렸고 기절한 후에도 다른 감방으로 끌려가 맞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기독교 신자라고 십자가형으로 매달아놓고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안 나요."

그는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혼자 돌아다니면서 웃고 막 떠든 건 어렴풋이 생각나요.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거죠. 그놈들도 와서 툭툭 건드려보고 미친 것 같으니까 더 이상 안 때리더라고."

그가 감옥에서 분투하는 동안, 나머지 가족들의 삶도 힘겨웠다. 살림만 하던 아내는 봉제공장에 다니면서 서울 중화동에 월세 20만원짜리 반지하방을 마련해 두 딸을 키웠다. 틈틈이 남편의 석방을 위해 뛰어다니고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중학생이던 큰딸 수지는 고2가 됐고 막내 선희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됐다. 노모 이씨는 충격으로 쓰러져 큰 수술만 세 번 받았다.

그는 "나와보니 가족들이 모두 강해져 있더라"고 했다. "이젠 아내랑 둘이 벌고, 큰 딸 수지도 같이 벌어요.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 보냈어요. 가슴 아프고 미안하죠. 막내는 한 달 전에 처음으로 학원에 보냈어요. 내 기억 속 딸들은 다 어린 애들인데, 갑자기 훌쩍 커졌으니 적응이 안 됐죠. 많이 싸웠어요."

집에 돌아온 후 뭐가 가장 달라졌을까. "예전에는 가족을 몰랐어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진짜 중요하구나. 그래야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아내한테 정말 감사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아주 어려운 순간에는 여자가 강하다는 걸 아내를 보면서 느꼈어요."

여전히 월세 20만원짜리 중화동 반지하에서 살지만, 행복하다고 했다. "부모님도 다 건강히 살아계십니다. 지병이었던 천식·고혈압약은 계속 먹고 있어요. 어제는 500원짜리를 모으던 저금통을 깨서 다같이 연극을 보고 왔습니다."

그는 탈북자 단체인 '자유북한인협회'에서 대외협력국장을 맡고 있다. "탈북자들의 한국 정착을 돕고 있죠. 그 분들이 한국 실상을 잘 모르니까요. 법률적인 부분, 취직, 생활 전반적인 면을 돕고, 북한 인권 실상을 알리는 캠페인도 하고 있어요.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 탈출시키는 일도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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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천사 쑥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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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안 2008-12-07 05:58:07
    중국공안개새끼들....
    인간들도 아닌새끼들...
    님이 자랑스럽습니다....
    나도 남한사람이지만 아마나도 중국에서 탈북자를 보면 아마도님처럼 탈북자들을 도왔을것입니다..그게 조국.. 동포심..그런거겟죠..
    어찌 그냥 지나치겠습니까...? 같은나라말을하는사람을 어찌그냥지나치겠습니까..? 있는돈없는돈다꺼내서 주고왔을겁니다..하지만 님처럼 그렇게까지 할수있는용기가 있는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막상나에게 그런상황이닥쳐오면 많은갈등을하겠지요...
    어쨋거나 고생하셧습니다...그리고 빨리 정신적으로 회복되서 행복한생활하십시요...건강하십시요...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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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경 2008-12-07 12:16:40
    최영훈씨 정말 존경합니다.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를 읽어보고 감동받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는데 중국놈들때문에 모든것을 잃을뻔했던 사연 정말 감동입니다. 감사하다는 말밖에 드릴수가 없네요.
    최영훈씨가 지금까지 한국으로 보내준 탈북자들이 최영훈씨를 잊지않을겁니다. 아마 훗날 그들이 감사의 마음을 안고 찿아오게 될것이라 봅니다.
    부디 건강하셔서 행복한 가정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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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경1 2008-12-07 17:31:06
    최선생님 고생 많으셧습니다,
    이제는 한국에 오셧으니 발펴고 편히 주무시고 하시는 일들이 잘되길 바람니다,
    최영훈 선생님을 자주 뵙습니다만 아무런 도움도 드릴수 없어서 미안하구요,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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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경합니다 2008-12-07 22:37:31
    이런분이 계시는지도 모르고 사는 저희들이 부끄럽습니다
    고생 많으셨구요,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좋은일 많이 하시는 최선생님한테 축복만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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