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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종석한테 미국이 정보를 줄까?
조갑제홈피독자 1 465 2005-06-04 20:45:41
이 기사는 조갑제 홈페이지 http://www.chogabje.com 에 있는것임.

이런 이종석한테 미국이 정보를 줄까?

李鍾奭 파일 내용
*아래 글은 2003년6월호 월간조선에 실렸던 禹鍾昌 기자의 기사중 일부를 뽑은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대학원 진학한 李鍾奭

李鍾奭(45) NSC 사무차장은 1958년생으로 성균관大 행정학과 78학번이다. 출생지는 경기도 남양주. 이 지역에서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낸 李聖浩(이성호)씨가 그의 삼촌이다.

그가 대학을 다녔던 1978년은 朴正熙 대통령의 維新 말기였고, 이어지는 1980년의 光州사태로 대학가는 反정부 데모로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李鍾奭 학생은 데모와는 거리가 먼, 考試 준비생이었다. 集示法(집회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처벌받은 전력이 없다.

재학 중 考試를 통과못한 그는 1984년 대학 졸업과 함께 직장에 취직,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걷다가 스물아홉의 나이에 성균관大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행정학에서 정치외교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석사 2년차이던 1988년 「한국정치연구회」에 가입하면서 李鍾奭은 진로를 바꾸게 된다.

「한국정치연구회」는 李壽仁(이수인ㆍ사망ㆍ前 영남大 교수, 평민당 국회의원), 崔章集(최장집ㆍ고려大 정치외교학과 교수), 孫浩哲(손호철ㆍ서강大 정치외교학과 교수), 孫鶴圭(손학규ㆍ前 서강大 정치외교학과 교수, 現 경기도 지사)씨 등 소위 진보 성향의 교수들이 보수 성향의 「한국정치학회」에 대항해서 1987년에 만들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서구의 정치이론을 답습하는 기존의 연구 방식에서 탈피해 우리의 시각에서 우리의 문제를 연구하겠다는 의도에서 「한국정치연구회」가 태동했다. 한국정치연구회는 ▲국제정치 ▲한국정치사 ▲정치사상 ▲정치이론 ▲북한정치 연구 등 5개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앞에서 언급한 李鍾奭씨 등 젊은 대학원생들이 북한정치 연구팀 멤버였다. 이들은 한국정치연구회와는 별도로 독립문에 사무실을 얻어 북한 原典 공부를 시작했다.


「독립문 연구회」 탈퇴자 증언

기자는 「독립문 연구회」 멤버로 참여했다가 북한 原典을 통해 북한을 공부하면서 북한체제의 잔혹한 실상을 확인한 후 연구회를 탈퇴한 복수의 교수들을 만났다. 이들은 익명을 전제로 인터뷰에 응했다.

―한국정치연구회는 어떤 단체였습니까.

『우리 사회에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한 것이 1987년입니다. 全斗煥 대통령의 내각제 개헌에 반대하는 국민의 저항이 1987년 6ㆍ10 사태로 분출되었고 6ㆍ29 선언과 함께 우리 사회는 거대한 변화에 돌입합니다. 이러한 사회 변화 속에서 일부 소장파 학자들은 좀더 조직화해서 보수에 대항하는 힘을 기르며 사회 변화에 일정 부분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들은 민주화 바람에 편승해 좌파 성향을 노골적으로 표방하기 시작합니다. 한국정치연구회를 주도한 교수들은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에 가까운 시각을 가졌습니다. 극좌도 있고, 좌파적 성향의 자유주의자도 있었습니다. 한국정치연구회에 가입한 대학원생들은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계급론, 자본론,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집중 공부했습니다』

―「독립문 연구회」는 어떤 성격의 단체였습니까.

『1988년, 1989년 무렵의 대학가 話頭(화두)는 북한 바로 알기였습니다. 이 운동에 편승해 한국정치연구회 소속 대학원생 중 일부가 북한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독립문 부근에 사무실을 얻었습니다. 공안당국에서 말하는 「독립문 연구회」가 이 사무실입니다. 회원은 10명 남짓인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丁海龜, 鄭大和, 李鍾奭씨 등입니다. 북한 原典을 공부하고 통일문제 전문가라는 金南植씨를 초빙해 세미나도 가졌습니다』

丁海龜(49)씨는 연세大 행정학과 75학번이다. 대학 졸업 후 고려大 대학원으로 적을 옮겨 崔章集 교수 지도 아래 석ㆍ박사를 마쳤다. 「남북한 분단 정권 수립 과정 연구」란 제목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 학위 논문은 大邱 10ㆍ1 폭동을 주제로 썼다.

丁海龜씨가 쓴 논문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등장과 한국전쟁」, 「美 軍政과 좌파의 노동운동」, 「美 군정기 인민정권 수립 운동」, 「분단과 이승만」 등 주로 해방 정국에 관련된 것이었다.

성공회 대학 사회과학부 조교수로 있는 丁海龜씨는 盧武鉉 정부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정치개혁연구실 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鄭大和(47)씨는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상지大 교양학부 교수다. 국정홍보처에서 운영하는 K-TV에서 정치ㆍ사회문제 사회자로 활동 중이며 韓總聯 합법화를 주장하는 사람이다.

金南植(79)씨는 日帝시대 조선공산주의 운동을 하고, 광복 후 南勞黨(남로당)에 가입했던 사람이다. 越北 경력도 있다.


李鍾奭과 宋斗律 관계

―金南植씨는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독립문연구회에서 토론회에 초청한 북한 전문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전향한 사람인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가와 재야 세력이 親北으로 쏠리던 1980년대 후반 親北 단체의 행사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가치 중립적이란 입장을 취한다고 하면서 북한 옹호 발언을 많이 했습니다. 독립문 연구회에 나와서도, 예컨대 북한에서 발생한 反종파 사건에 대해 물으면 우리들의 구미에 맞게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李鍾奭 NSC 사무차장은 어떤 성향의 사람입니까.

『삼촌이 여당 국회의원이고, 본인은 대학 시절 운동권이 아닙니다. 親北 좌파적 시각을 가질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나이 어린 후배들과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면서 인생관이 달라졌다고 봅니다. 경쟁에서 처지지 않고 후배들보다 앞서 가려고 하다 보니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에서 자기 것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가 대학원에 들어왔을 무렵,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북한學을 자기 것으로 特化(특화)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1988년 무렵 독일 훔볼트 대학 前 교수 宋斗律(송두율)씨의 「內在的(내재적) 접근론」이 국내 학계에 소개되었습니다. 「북한의 사회주의를 북한의 입장에서 보고 북한을 비판하기 전에 실체를 인정하자」는 것이 內在的 접근론입니다. 宋斗律은 「소련과 중국」이란 책 서문에 「사회주의 체제를 공부하기 위한 방법으로 먼저 이들의 체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비판은 그 다음」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해하고 나서 비판하자는 논리는 말로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이해를 하고 나면 비판이 어려워지는 게 현실입니다.

이 내재적 접근론을 북한학 연구에 깊이 활용한 사람이 李鍾奭입니다. 그는 영민했습니다. 북쪽으로 치우쳤을 경우, 한국 사회에서 발을 붙이기가 힘드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좌우를 균형 있게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宋斗律의 內在的 접근론을 차용하면서도 비판이란 단어를 집어 넣어 「內在的 비판적 접근론」이란 자기 나름의 분석 틀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조선노동당의 지도 사상과 구조 변화에 관한 연구) 앞 부분에 연구방법론이 나오는데 「內在的 비판적 접근」을 취했다고 밝혀 놓았습니다』

李鍾奭씨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內在的 비판적 접근론」을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宋斗律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李鍾奭씨의 북한학 연구에 있어서 방법론의 틀을 제공한 宋斗律씨는 「김철수란 假名을 가진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다(月刊朝鮮 1998년 8월호 참조). 이 사실은 망명한 前 북한 노동당 비서 黃長燁(황장엽)씨의 저서 「북한의 진실과 허위」란 책을 통해 공개되었다. 「김철수」란 이름은 1994년 金日成 장례식 때 장례위원 서열 23위로 발표되었다. 이때 「김철수」는 다른 장례위원들과 달리 직책이 생략되었다.

독일에 거주 중인 宋斗律씨는 金日成 장례식 때 북한 「장의위원회」 초청을 받아 장례식에 참석했었고, 金正日도 만났다. 이러한 사실은 宋斗律씨가 시사 주간지 「한겨레 21」(1994년 8월1일자)에 기고한 「김주석이 떠난 북한 방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宋斗律씨가 「김철수」란 주장은 宋斗律씨가 黃長燁 비서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國情院이 재판부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더욱 굳어졌다. 국정원도 독자적인 정보수집을 통해서 宋斗律씨와 김철수가 동일 인물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宋斗律씨의 內在的 접근론은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더불어 사회주의 이론이 위기에 몰리고 있던 시점에 발표돼, 국내 좌파 지식인들에게 국면 전환의 논리로 지원되었다.

李鍾奭 NSC 사무차장이 관계했던 「독립문 연구회」는 1989년부터 시작한 북한 연구 결과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북한정치론」이란 이 책은 1990년 3월5일 백산서당에서 출간했다. 주체사상, 혁명 이론, 抗日 무장투쟁, 한국전쟁, 조선노동당의 구조와 발전 등 16장 4부로 이뤄진 이 책의 서문은 당시 한국정치연구회 회장인 李壽仁 교수가 썼다.

이 책의 성격에 대해 「책머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독립문 연구회」를 탈퇴한 복수의 교수들은 『북한정치론은 집필자 이름이 빠진 채 한국정치연구회 이름으로 출간되었지만 金日成의 항일 무장투쟁사와 한국전쟁 등은 李鍾奭씨가 집핍했다』고 말했다.

이 책에 언급된 한국전쟁 부분을 요약, 발췌하면 이렇게 되어 있다. 참고 문헌은 「조선전사」, 「조선통사」, 「조선노동당 략사」, 「조선노동당 력사 교재」 등 거의가 북한 原典이다.



金日成의 抗日 무장투쟁 부분을 요약 발췌하면 이렇다.




주체사상을 실패로 단정

李鍾奭 NSC 사무차장의 석사학위 논문은 「북한 지도집단의 抗日 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연구」이다.

북한정치를 연구한 한 교수는 『보천보 전투를 비롯한 金日成의 抗日 빨치산 운동은 북한의 일방적 주장일 뿐 학계에서도 검증되지 않은 분야다. 李鍾奭씨는 북한의 자료를 제대로 검증 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기관에서 작성한 「李鍾奭 개인파일」은 이 논문에 대해 「金日成 항일 투쟁을 미화 찬양했다」고 평가했다.

「독립문 연구회」의 한 멤버는 『석사학위를 끝내고 박사과정에 들어간 1990년 초반에 李鍾奭씨가 대학 學報나 校誌 등에 기고한 북한 관련 글은 매우 親北的 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93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에서 李鍾奭씨는 기존의 태도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박사학위 논문의 「결론-평가와 전망」에서 그는 주체사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李鍾奭 파일」에 기록된 활동

李鍾奭씨는 2년 만에 석사를, 4년 만에 박사를 끝냈다. 석사 학위 취득 후 경희大, 부산大, 서강大, 성균관 大에서 시간강사로 전전하던 그는 1994년 9월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 되었다. 연구위원이 되는 과정에서 당시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었던 林東源 前 國情院長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 정부 기관에서 작성한 「李鍾奭 파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파일에는 李鍾奭씨가 1988년 이후 대학 學報 등에 기고한 50여 건의 글과 강연회 발언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의 거주 이전ㆍ여행 자유 제한은 사회주의 특성과 남북 군사 대치하에서 택한 방어적 조치이다(1990년 2월호 사상문화운동).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反北 이데올로기를 타파하고 자주적인 통일운동을 촉진시키는 범국민운동이다(1990년 역사비평 가을호).

▲통일의 제1요건은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는 자주성 확립과 평등의 존중이다. 駐韓 미군이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변명이다(1990년 3월 성균관大 學報).

▲문민정부는 反共, 反北에 의존했던 냉전 수구세력과 결별해야 하며, 정권 안보 수단으로 이용되어 온 국가보안법 등 구시대적 反共 反北 관계 법안은 폐기해야 한다(1994년 실천문학 봄호).

▲金正日은 오케스트라 연주 중 특정 연주자의 반음 착오까지 알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으며 종자론이라는 영화예술론까지 내놓을 정도로 문예 이론도 상당한 수준이다(1994년 7월12일자 한겨레신문).

▲金正日 정권은 매우 안정적 구조를 띠고 있으며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金日成 시대보다 더 적극적이다(1995년 2월 金正日 정권의 전망과 우리의 대응방향).


李鍾奭과 黃長燁의 논쟁

2001년 7월23일, 前 북한 노동당 비서 黃長燁씨는 「최근의 비판 글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글을 全 언론사에 돌렸다. 黃長燁씨의 이 글은 李鍾奭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 한국일보에 기고한 黃비서의 미국 방문 부당성을 지적한 글에 대한 비판이다.

李鍾奭씨가 기고문에서 주장한 미국 방문 부당의 근거는 이렇다. 첫째 黃비서의 미국 방문은 국가 이익에 배치되기 때문에 허용해서는 안 되며, 둘째 黃비서는 엄청난 고급 대우를 받고 있는 만큼 국가공무원과 같은 자세로 정부 의사에 무조건 순종할 의무가 있으며, 셋째 특수관리를 받고 있는 망명자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된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黃비서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다.

李鍾奭씨 글에 대해 黃長燁씨는 조목조목 비판을 가한 뒤 이렇게 결론 내렸다.



북한에 대한 李鍾奭 사무차장의 최근 견해는 작년 10월에 발간된 그의 책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에 들어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李鍾奭 사무차장은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보기 위해서는 북한의 공식 문헌이 보여주는 규범과 현실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다.

「새로 쓴 북한의 이해」에서 李鍾奭 사무차장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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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최성재 날 짜 2005년 4월 29일 금요일

도대체 이종석이 누구길래

2005년 4월 26일자 조선일보에 신효섭 논설위원이 매우 조심스럽게 "헌법과 법률 위에 있는 NSC"라는 칼럼을 올렸다.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이종석 사무차장이 국방부, 외교통상부, 통일부의 세 장관을 상대로 수렴청정하는 월권행위를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는 측면이 적지 않다’며 최대한 붓끝을 구부려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한나라당의 김문수 의원은 “의병이 죽창을 드는 심경으로“라는 글을 통해 ‘무식한 자가 가장 용감하다’며 ‘대통령도 외교안보의 비전문가인 상황에서 역시 외교안보의 문외한인 통일부 장관이 NSC에서 상임위원장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전문가의 언로를 가로막고 있는 것도 문제인데, 그보다 한참 아래 서열의 일개 사무차장이 외교․안보․국방을 사실상 주도하게 되어 있다’는 취지로 개탄했다.

이종석은 지금 미국에 가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가 미국에 가는 것은 동북아 균형자론이 나오기 전에 확정되었다며 ‘미국의 NSC 관계자와 상견례차 이뤄지는 것으로 미국측의 요청으로 추진되었다’고 한다. ‘해명’하러 가는 것이 아니란다. 그런데 그가 가자마자 6월에 미국(희망사항은 크로포드 목장)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있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3월 30일자로 청와대에서는 3월 22일 노무현 대통령이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이제 우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며, 대통령이 선보인 연설의 뼈에 아름다운 의미의 살을 NSC 사무처의 이름으로 감쪽같이 붙였다.

2003년 이라크파병으로 대통령과 여당이 역할을 분담하여 대통령은 파병하겠다고 언명했고 여당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다가 파병은 기정사실이 되었는데, 과연 몇 명을 파병하느냐, 하는 것이 또 다시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마침내 보다 못한 대통령이 엄명을 내렸다. 그 규모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그런데, 바로 그 날 대낮에 이종석 사무차장이 파병규모는 3,500명 선이 될 거라고 했다. 후에 일개 과장이 한 말이 빌미가 되어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할 것 같았던 외교부 장관이 경질된 걸 미루어 보면, 그는 바로 파면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한 마디도 않고 그가 발표한 말대로 실행했다.

이종석이란 존재가 4천8백만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그는 후에 대한민국의 별들을 우르르 대강당에 모아놓고 ‘냉전의 시대를 지나 평화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여 북한을 이해하고 포용하라’고 정훈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런 막강한 권력은 고려말 무신정권의 정방이나 도방에서나 가능했던 일이다. 국방․외교․통일 세 장관을 얼굴 마담을 내세우고 대통령의 말씀도 소신 있게 거스르는 이종석!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1995년 이종석은 [현대북한의 이해: 사상․체제․지도자]로 일약 최고의 북한 전문가로 떠올랐다. 북한과 쿠바 외에는 전 세계의 공산권이 깡그리 무너진 벼랑 끝 상황에서, 그것은 조악한 평양 말투를 앵무새처럼 흉내 내는 운동권에게 한 줄기 광명이었다. 그것은 그저 가벼운 평론을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단숨에 뛰어넘는 역작이었다. 흥분하지 않고 서울 말씨로 북한에 대해 자근자근 인용할 수 있는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1997년 북한의 최고 이론가 황장엽이 망명함으로써 이종석은 보름달 아래 반딧불 꼴이었지만, 외환위기 이후 잇달아 ‘민족’정부가 들어서면서 도리어 황장엽의 입에는 재갈이 물리고 이종석의 입에는 고성능 마이크가 달렸다. 방송에 고정 출연하는 등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이다. 그는 2000년에 [현대북한의 이해]를 새로 썼다.

이종석은 그러면 북한 대가(大家)인가. 분명 그는 북한에 대해 많이 안다. [현대북한의 이해]에서 그는 나름대로 상당히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국내외의 북한 비판도 두루 실었다. 전문가는 전문가이다. 그러나 그는 대가엔 어림도 없다. 북한의 전술전략을 속속들이 아는 이동복, 정형근, 홍관희 등에 비하면 그는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는다. 황장엽에 비하면 숫제 강가에 노는 어린애 수준이다.

북한에 대해 안다고 자부하려면, 북한의 독재와 북핵과 북한인권에 대해 아리송한 침묵이 아닌 섬뜩한 비판을, 안개 같은 희망이 아닌 섬광 같은 예측을, 소극적인 외면이 아닌 적극적인 개입을 우선시킬 줄 알아야 한다. 언제 어느 때든 사서삼경을 달달 욀 수 있다고 해서 유학을 잘 아는 게 아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성리학이 기득권의 방패막이로 전락하여 고려말의 불교와 똑같이 백성을 억압하는 족쇄와 육모방망이와 칼과 창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사실을 직시하고 그 거대한 철옹성을 부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바로 유학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비판하고 응용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보와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 2300만 중에 300만이 굶어 죽었다. 2000만 중에 1200만이 영양실조이다. 이를 ‘무조건 돕자’식으로 교묘하게 외면하는 것은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백성을 착취하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사오경을 달달 외면서 열심히 당쟁이나 일삼던 위선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국과 미국과 일본과 중국이 지난 10여년 간 갖다 바친 달러와 식량과 기름과 비료와 의료품이 얼마였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핵을 개발하던 연구원도 굶주리던 북한이 이제 당당히 핵무기가 있다고 밝히고 유엔이 3년 연속 대북한 인권결의안을 냈지만 UN 특별보고관은커녕 북한이 그렇게 대견스러워 하는 KBS나 한겨레의 기자도 한 명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국 어디나 돌아다니며 취재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국의 초등학생도 보여 주면 하품할 가짜 전시물을 무슨 대단한 자랑이라고 안내원 동무가 ‘구연동화’를 들려 주면서 보여 주는 것밖에 없다. 만약 북한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처럼 자유롭고 풍요롭게 산다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그게 내심으로는 남의 평판을 엄청나게 의식하면서도 겉으로는 ‘우리끼리’를 외치는 한민족의 독특한 특성이니까.

5,000명 탈북자 중에 그 어떤 사람도 이종석보다는 북한에 대해 잘 안다. 독사가 허물을 벗으면 더 큰 독사가 되듯이, 김정일은 남북정상회담으로 세계의 이목을 속이고 재래무기보다 천만 배 무서운 핵무기를 갖게 됨으로써 ▲군사를 경제에 앞세우는 先軍정치를 더욱 강화하고 ▲‘식민지 해방’을 공언하고 ▲그를 빌미로 공포와 기아를 영구화시키고 ▲독재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한국의 권력과 방송이 침묵하는 것을 방패막이로 인권탄압을 한층 더 자행할 것이라는 것을! 탈북자들은 이종석보다 열 배는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북자의 진실 증언은 방송과 신문에서 거의 사라졌다.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길면 70년 짧으면 50년, 마르크스-레닌의 대가로 서방세계의 아인슈타인 이상으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던 학자들이 하나같이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것처럼, 김정일이 끝내 개혁개방을 거부하고 핵무기 보유와 인권탄압에 목숨을 건다면 비참하게 몰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와 더불어 이종석도 파리 한 마리 쫓을 힘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2005.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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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의 이종석 비판

2001년 黃長燁 선생은, 李鍾奭(당시 세종연구원)씨가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김대중 정부가 黃씨의 미국방문을 저지하는 것을 옹호한 데 대하여 반박하는 글을 써 언론기관에 보낸 적이 있었다.



黃씨는 최근 기자에게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아내는 내가 탈출한 직후 자살했고, 둘째 딸은 수용소로 가는 트럭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알고 있어요."

金大中 정부의 한 짓 중에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많지만 그 중 으뜸은 황장엽 김덕홍 두 사람을 새장에 가두어놓다시피해놓고 입을 막고 발을 묶은 일일 것이다. 가족과 친지를 死地로 보내는, 인간으로선 못할 일을 하면서 김정일 타도를 위해 조국을 찾아온 두 사람에 대한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부의 인권탄압에 [민주변혁]을 주장한 이종석씨가 동조했다.

송두율식 내재적 접근법으로 북한체제를 연구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북한동포들에 대한 김정일의 무자비한 인권탄압에 냉담하다는 점이다. 원초적으로 정의감이나 분노가 결핍된 사람들 같아 보인다. 북한체제의 논리나 기준으로 북한을 연구한 사람들에겐 아예 탈북자, 수용소, 납치, 학살 같은 종목이 끼여들 여지가 없었다.

로동신문에도, 김일성이 썼다는 책에도 그런 단어들은 나오지 않는다. 송두율과 그 제자들은 남북관계에서 북한동포들에 대한 인간도륙적 탄압을 빼고 김정일 정권을 대하려 한다.

최근 우리 정부가 유엔의 對北인권규탄결의안 표결 때 불참한 것은 외교부의 뜻이 아니라 청와대측의 지시 때문이었다는 말이 돌고 있다. 이 결정에 이종석씨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다. 논리상 황장엽씨에 대한 인권탄압을 옹호한 그가, 또 북한 연구가라면서 북한인권탄압이란 세기적 사건에 대해서 침묵했던 그가 불참으로 결정하는 방향으로 역할을 한 것이 정상이었을 것이다.

황장엽 선생은 李鍾奭씨에 대한 반박글을 이렇게 끝맺었다.


북한인권 문제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감각한 자칭 북한 전문가들이 추진하는 對北정책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그런 무감각과 무지의 연장선상에 김정일에 대한 굴종과 동족의 고통에 대한 외면과 이런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철면피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전문가로서 가장 큰 죄악은 김정일에 대해서 분노할 줄 모르는 양심의 마비인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對北정책에 대한 찬반은 북한을 가슴으로 이해한 사람과 머리로써 이해한 사람의 차이이다. 선전 문서로써 북한을 들여다본 사람과 인간을 통해서 북한을 느낀 사람의 차이이다. 북한의 본질을 이해한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의 차이이다. 내재적 접근법이란 것을 경멸하는 사람과 추종한 사람의 차이이다.

좌파적 관점에서 북한을 연구한 사람들은 나중에 전향하더라도 반드시 이념적 흔적을 안게 된다. 교회에 다니다다 안 다니게 된 사람도 예수 욕을 하지 않듯이 좌파 경험자들은 노선 수정을 한 다음에도 김일성 김정일을 비판하지 않으려 한다. 대한민국 국민, 그리고 對北 종사자로서 이런 자세는 자격 미달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사람들을 골라서 국가 안보-정보기관의 사령탑에 앉혔다.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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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27일 일요일

이종석NSC 처장,軍에 ‘對北 적개감 교육 말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이종석 사무처장이 최근대북 적개심을 해소하는 쪽으로 장병 정신교육을 하도록 군 장성들에게 주문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27일 합참에 따르면 이 처장은 이달 19일 육군사관학교에서 개최된 `2004년 무궁화 회의'에 강사로 초대돼 각군 장성 70∼80명을 상대로 안보관련 현안을 설명하면서 문제의 발언을 했다.


무궁화회의는 합참이 국방정책이나 군사 현안에 대한 장군단(團)의 공감대 형성과 의견 수렴을 위해 매년 준장∼중장급 장성들을 대상으로 마련하는 행사로 올해는육.해.공군 장성이 5개 그룹으로 나뉘어 참가하고 있다.


한 회의 참석자는 "이 처장이 한.미동맹과 장성급 군사회담 등 안보현안에 대한정부 입장을 설명하면서, `앞으로는 병사들을 교육할 때 북한에 적개심을 갖도록 해서는 안되며, 대신 시민정신과 국가에 대한 자존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언급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이 처장의 발언이 끝나자 한 장성은 `북한군에 대해 적개심을 갖지 말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그렇다면 대적관 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고질문해 한동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처장이 당장 북한군에 대한 적개심을 없애라는 의미가 아니라 향후 남북관계가 급속히 개선된 이후 상황에 대비한 장병 정신교육의 지향점을 말했다'고 해명하면서 오해가 풀렸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처장의 발언이 군내부로 전해지면서 "북한군과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분단현실을 무시한 채 대북 적개감 해소를 주문한 것은 장병들에게 정신적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라는 격앙된 목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있어 당분간 파문은 진정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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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3일 화요일

"이종석의 他부서 조정행위는 不法"

對北 및 對美 정책에 대해서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장 이종석씨가 하고 있는 역할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불법행위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權炅錫 의원은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가 통일, 외교, 국방분야의 업무를 조정하는 행위는 자문회의의 직무범위를 벗어난 월권행위로서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국가안전보장회의법중 개정법률안을 발의해놓은 상태이다.

權의원은 헌법91조 제1항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대통령 자문기구로 못박고 있으므로 사무처가 할 수 있는 일은 회의운영보조, 문서기록, 상황종합정리에 국한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盧武鉉 정권의 출범 직후 대통령령으로써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가 안보정책의 기획, 조정, 정보전파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은 헌법과 母法을 위반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대통령령으로써 상위법에 규정된 자문기관을 집행기관으로 둔갑시킨 위법, 위헌이란 것이다.

鄭東泳 통일부 장관이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지난 3월17일에 對日 독트린을 발표한 것도 위법행위란 것이다. 상임위원장은 대통령에게 자문을 하는 자리이지 외교부 장관이 해야 할 일을 대신 집행할 권한이 없다고 權의원은 주장하고 있다. 權의원은 "鄭장관의 발표는 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이 對北정책을 발표하고 경제관련 자문회의 대표가 금융정책을 발표하는 것과 꼭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고 했다.

權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사무처 직원수를 10인 이내로 제한하고 이들 직원의 직무범위를 자문회의 보조에 국한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사무처 직원의 정원은 45명이다.

權의원은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가 정부조직법에도 없는 권한을 행사하여 국방부, 외교부, 통일부 등의 업무를 기획, 조정하도록 한 대통령령 자체가 위헌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법치국가에서 대통령은 법을 어겨도 되는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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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최근 일본의 행태를 ‘대한민국 해방의 역사를 부인하는 제2의 한반도 침탈 행위’로 규정하고 강력 대응하기로 했다. 정부는 17일 NS 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 회의를 열고 앞으로의 한·일 관계에 대한 4대 기본기조와 5대 대응방안을 담은 ‘신(新) 한·일 독트린’을 공식 발표했다.

정동영(鄭東泳) NSC 상임위원장 겸 통일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독도 및 과거사 관련 행태를 과거 식민지 침탈을 정당화하려는 의식이 내재해 있는 엄중한 사안으로 보고 단호하게 대처해 나갈 것”이라며 “일제에 강제로 편입됐다 해방으로 회복한 우리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일본이 주장하는 것은 단순한 영유권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해방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런 판단 아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철저한 진실규명과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기로 했다. 또 일제 피해자 문제에 대해 “기존 한·일협정과 관계 없이 일본측에 적극 해결을 촉구하겠다”고 밝혀 한·일 추가 협정의 여지도 시사했다.

정부는 이와 함께 일본이 추진 중인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진출에 대해 “이웃나라의 신뢰를 얻는 것이 첫걸음”이라고 말해, 제대로 된 반성과 조치가 없을 경우 반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 정부의 강경 독트린 발표에 따라 한·일관계는 장기간 교착될 전망이다. 정부 당국자는 “일본측의 성의 있는 대응이 없다면 정상회담이나 한·일간 협력 사업에 적극 나설 수 없게 된다”며 “1차적으로 오는 4월 왜곡교과서 검정에 어떤 결과를 내놓느냐에 따라 양국 관계는 빙하기에 접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권대열기자 (블로그)dy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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