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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따르지 따르게 하라.
Korea, Republic o 수전노 2 402 2009-09-16 09:01:11
돈을 따르지 말고 따르게 하라


1.값 비싼 한국행

2001년9월10일 중국 길림성 화룡시 버스터미널에서 나는 화룡-숭선-대동촌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10일전에 북한에서 5000원을 빌려 금강산발전소 군인건설자들에게 기념으로 준 31그람의 은이 들어 간 화페 5개를 가지고 중국으로 도강하여 왔건만 물건이 팔리지 않아 연길에 사는 먼 친척 되는 누나에게 주고 일본산 중고 비디오를 가졌는데 그 것으로는 빛을 청산하기가 빡빡히여 점심 먹을 생각도 뒤로 하고 고민하고 있는 터였다.
초 가을이지만 백두산고장답게 제법 날씨는 쌀쌀하고 서리 맞은 나무 잎들이 터미널 주변에 날아다녔다.
어쩐지 이 맘쯤이면 우리 고장은 김치를 한다고 아낙네들이 전투를 벌인다.
김장은 한해 식량의 반을 차지하는 북한에서 여성들이 이를 방심하면 그 만큼 가정살림은 직격탄을 맞는 봐 간부집이나 천한 집 아줌마들은 모두가 죽기내기로 뛰어다니었는데 그러면은 밥상에는 보기에도 군침이 나는 빨갛게 배인 양념장에 속배추를 찍어 먹는 그런 특별 음식을 아직까지 이 곳에서는 느껴보지 못하였다.
목숨 걸고 넘어 온 도강 길이었건만 벌지도 못하고 다시 넘어가야 하는 가긍한 이 신세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고 모양새 또한 불상하기 짝이 없다.
사람이 몇 년을 살겠다고 목숨가지고 장난을 치는기야?
8년전부터 더는 인생을 맡 길 수가 없는 북한 땅을 이별하고 한국 행을 결심하였건만 그래서 밀수를 시작하였는데 앞길은 갈수록 막연하기만 하다.
내가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터미널 마당에서 바투 중국산 담배를 연속 피우고 있었는데 12시가 조금 지나 키가 자그마한 30대 중반의 아줌마가 자그마한 가죽배낭을 메고 옷 차림도 중국인들과는 좀 값 비싸게 입고 한국말까지 쓰면서 때아닌 북한 정세를 물어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때 무작정 한국인들을 만나면 어떻게 한국 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소만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 그 것도 연약한 아줌마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내가 아줌마와 중국 조선족이 하는 대화를 가만히 엿들으려니 그는 조선족 인력거 군에게 라고 하였는데 그 억양과 문구가 한국어와 다른 북한 말임을 나는 알 수가 있었다.
중국 조선족은 그 아줌마에게 북한에 대하여 아는 것처럼 이 것 저 것 대답해주는데 나는 그들의 대화에 호기심을 갖고 한번 저 아줌마에게 말 을 건네야겠으나 조선족이 비켜 주질 않는다.
마침 인력거 승객이 나타나 조선족이 사라진 틈을 타 나는 그 아줌마에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는데 그는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는 그냥 북한이 궁궁하여 국경지역으로 관광을 간다는 것이었다.
어찌 됐던 그 아줌마는 나의 만남을 대단히 반가와 하면서 한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이 것 저 것 물어보았고 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해주었고 그러는 사이 승객을 태워주었던 조선족이 나타나 아줌마보고 자기가 점심을 대접하겠으니 가자고 하자 그녀는 나를 보고 같이 가자고 하고 조선족은 나의 아래위를 흩어보며 그녀의 옆구리를 몰래 당기면서 눈치를 하기에 나는 못 본척하고 점심을 먹었다고 외면하였다.
그들이 가고 굶주린 나의 창자에서 배고품을 알리는 신호가 계속 전달되었건만 빵 한 조각 사먹을 돈도 없는 처지에 참을 수밖에 없던 나는 그래도 행여나 아줌마가 어쩐지 기다리게 된다.13시50분 출발인 버스가 시동을 걸고 승객을 다 태웠건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아 나는 그가 사기군이다 하고 생각하며 무거운 걸음으로 나의 자리에 앉았는데 출발시간 1분을 남겨 놓고 조선족남자와 그 아줌마가 헐레벌떡 달려 왔고 조선족은 얼마나 친절한지 아줌마 가죽배낭까지 버스위에 올라와 옮겨주며 숭선 갔다가 오거들랑 자기에게 전화를 하라고 한다. 그 남자의 말을 뒤로 남기며 보따리 생필뭄을 반 넘게 싣고 버스는 그렇게 화룡시를 출발하고 이내 비포장도로로 먼지를 날리며 속도를 높인다.
화룡서 숭선까지 180여리 로가진에서부터는 두만강을 따라 백두산방향으로 북한 무산군 흥암리에서 대홍단군으로 대치하면서 올라가는데 예상치 않았던 두만강의 물이 많이 범람하였다.
나는 내가 수십번 넘어 다니던 밀수 통로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했건만 자연의 현상은 상상으로는 막을 수 없는 법 버스 중간쯤에 자리 잡은 내가 3칸 앞 자석에 앉은 그 아줌마에게 말을 건네기도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내가 공연히 호기심에 사로잡힌 것 같다.
그렇게 3시간 남게 버스는 농촌의 국경 두만강연선을 따라 달려 땅거미가 기여다니는 때가 되니 숭선에 도착하였다.
숭선에는 북한으로 넘어가는 다리(교두)가 있었고 넘어는 대홍단군 삼장리라는 곳이었다.
버스는 그 곳에서 8킬로 더 올라 가 숭선진 대동촌 마을까지 간다.
나는 그 곳에서 내려 50리길을 더 올라가 길 아닌 숲을 헤치며 밤도와 국경을 넘어야 하는 순서였는데 글쎄 그 아줌마가 내린다는 숭선에서 내리지 않고 몇 명밖에 남지 않은 승객속에 남아 내가 가는 마을까지 따라오기에 내가 왜 오냐고 하니 그는 귓속말로 나와 함께 북으로 가겠다고 한다.
나는 왜 따라가자고 하냐고 묻자 그는 자기는 북한사람이고 고향은 백암이며 무산에 시집을 갔다가 몇 년 전에 중국으로 넘어 온 탈북자라고 하면서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나에게 이야기 하였다.
나는 아직 내 소개도 덜 했는데 그는 왜 자기 소개를 하는지 그 것도 만나서 몇 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사람한테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한쪽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히는 드라마 같은 내용이었다.
그녀는 무산에서 한 동료와 함께 남의 돈을 빌려 웅담 수백그람을 가지고 중국에 팔아먹으려고 도강했는데 조선족 사기군이 웅담을 가지고 도망가서 빈손으로는 북한에 갈 수 없는 상황이라 돈이라도 벌자고 생각했는데 사기군의 친척이 된다는 용정시의 어느 중학교 교원이 그녀들을 중국 흑룡강 어느시에 있는 한족들에게 팔아먹었다는 것.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한족과 결별하고 거간군에게 다시 도망 왔건만 그놈은 다시 그녀를 다른 곳에 팔아먹으려 하였고 마침 그 집에 물건을 사려 왔던 한 중소기업의 한국인이 그녀의 사정을 들어보고 중국 조선족 거간군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그녀를 대련에 있는 자기 집에 데려왔는데 그 집에 후실로 들어 온 조선족 여자가 그녀를 질투 내며 팔아먹으려 하였다는 것이다.
그녀의 아빠는 6.25때 북한군에 강제 징집 된 의용군으로 한국에는 형제들이 있었으나 친척들이 그녀를 믿지 않아 북한에 직접 건너가 아빠를 데려와 인정시키고 그들이 방조해주는 돈으로 한국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두만강만 무사히 건네주면 중국 돈 500원을 주겠다고 또 아빠를 대련까지 데려다주면 500원을 더 보태주겠다고 하기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내가 찾고자 했던 그런 위인을 이런 곳에서 만나고보니 더 이상 주저할 것이 없었다.
나에게는 천번 중 단 한번의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
그가 주겠다는 돈을 떠나서 그를 잘 도와주면 내가 그리던 한국행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그를 도울만한 능력이 있었다.
아직도 녹슬지 않은 단단한 체력과 수십 번의 밀수로 다져진 도강생의 노하우가 있었던 것이다.
쥐구멍에도 해 뜰 날이 있다더니 나의 하찮은 운명을 두고 한 말 같았다.
밀수라는 것이 원래 앞날을 장담하지 못 하는 것이라 나는 그에게 나의 이름과 집 주소를 다 거짓으로 알려주었다. 대동촌에서 북한 국경까지 50여리. 중국말을 잘 아는 그녀 땜에 그 날은 쉽게 중국 한족들의 경운기를 타고 걷지도 않고 도강지점에 왔는데 참으로 인생길이 갈지자도 있고 우물정자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이 아줌마를 있는 힘 다해 도와야겠다는 각오로 더욱 불타 있었다.
중국시간이 6시면 북한시간 7시라 백두산원시림은 벌써 어둠을 우리에게 선사했고 아무런 준비도 없는 저에게 아줌마는 메고 있는 배낭에서 밥과 사과 심지어 한국산 커피까지 내놓으며 점심을 굶은 나의 창자에 에너지를 불어 넣어 주었다.
나는 늘 이 길을 혼자 다니면서 서글픔과 증오로 살을 저미었으나 그날만큼은 그런 느낌이 전혀 없이 누이에게 몸을 맡긴 동생처럼 오히려 내 마음이 더욱 든든해지는 것 같았다.
이 아줌마라면 천 길 벼랑도 단숨에 날아오를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의 만남 그 자체가 어느 소설 속 내용 같다. 그런 생각으로 도강지점에 도착한 것은 그날 밤 11시경. 예견한대로 늦장마속에 두만강물이 많이 높아졌고 상류지대인 것으로 사품 치는 물소리는 연약한 두 인간을 통째로 집어삼킬 것 같다.
백두산천지를 50킬로미터 정도 남겨 놓은 그 지점은 경사각이 높아 조그마한 비에도 물이 빨리 불고 빨리 지는 곳이었고 폭이 60미터이지만 물이 다 마른다는 5월에도 건너가는 지점보다 항상 건너 간 지점은 백수십미터를 더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었다.
골짜기로 이루어진 깊은 큰 계곡 같은 그 곳에는 강물의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많이 건너 다니던 물이건만 어쩐지 소름이 온 몸에 돗는다. 내가 먼저 강에 들어가 보니 아니라 다를가 3미터도 못 가 물이 목구멍에까지 올라 온다. 그녀는 나에게 자기가 연길에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10여일을 놀다 오면 물 수위도 낮아지니 그때 오자고 하여는데 나는 그 뜻을 따를 수가 없었다.
우리가 슈퍼에서 물건 사는 일도 아니고 비행기를 타자고 예약한 그런 것도 아닌 목숨을 건 도강길은 나에게 그런 한적한 여유시간을 허용 하지 않았는바 보위부나 안전부 요시찰 인물인 나의 입장을 그에게 설명하고 경험으로 건늘 수 있다는 신심을 주었는데 그녀는 나만 믿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다니던 통로보다 조금 200미터 위로 더 올라가 강폭이 넓은 곳을 선정하고 결심을 굳혔는데 이유는 강 폭이 넓은 것이 그만큼 경사가 느리고 물의 스피드도 작고 깊이도 낮기 때문이었다. 한가지 더 유리한 것은 강 한 가운데 자그마한 섬이 있은 것이었다.
때가 가을이지만 그 곳은 샘물줄기가 많은 곳이라 물의 온도는 매우 낮아 대단히 추웠지만 긴장된 사람의 육체는 추위를 모른다. 영하 30~40도씩 오르내리는 한 겨울에도 그 곳은 얼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겨울에는 속 옷과 바지를 입은 상태로 양말을 신고 그 위에 비닐봉투로 싸고 신을 신고 강을 건너가면 눈보라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발이 얼지 않았다.
밤 12시경 어디선가 잠복근무를 보내는 국경수비대병사들도 감히 이런 물로 사람이 건너오리라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을 감안하며 달빛과 밤을 도와 그녀와 나는 천천히 희망을 향해 같은 목표를 맞받아 물로 들어섰다. 내가 강 위쪽에 서고 그 녀가 나의 팔을 껴안고 아래쪽위치에서 나의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었다. 나는 그에게 강바닥의 돌을 딛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사품 치는 거센 물결에 몸 균형도 맞추기 힘든데 물때가 오른 돌을 밟았다가는 미끄러져 넘어지지가 일수였다.
그런 강물에서 웬만한 사람도 세 번만 넘어지면 살아나오지 못한다.
사람 두 명이 서로 팔을 껴안고 지탱하니 혼자서 물을 넘을 때보다 훨씬 쉬웠다.
나는 언제나 도강 할 때면 다른 앞날은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물을 건너 갈 때에는 그 한 가지만 생각하고 몸을 움직이군 하였다.
강을 무사히 넘으면 다시 국경경비대 녀석들의 때 아닌 돌발 상황을 예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총검의 숲을 헤치 군하는 그런 버릇을 가졌던 것이다.
그래도 중국 쪽에서 가운데 섬까지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게 넘어왔다. 그 곳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니 중국 쪽보다 10여미터 더 가까워보였다.
나와 그 아줌마는 섬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물에 몸을 담갔다.
그런데 어이하랴.
북한 땅을 6미터정도 남겨두고 그 녀의 눈에까지 물이 차오르고 큼직한 바위들에 몸을 부딪치며 나도 물을 몇 번 입으로 삼켰는데 아줌마가 더는 못가겠다며 중국으로 다시 건너가자고 한다. 문제는 그녀의 말대로 다시 돌아서면 이미 깊은 수위로 밀려내려 온 터라 자멸을 요하는 길.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그에게 조금만 힘을 내면 된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무주고혼의 신세가 된다. 힘을 내라고 소리치며 앞장서 헤쳐 나갔는데 나도 기운이 다 빠지고 물은 이미 나의 키를 넘어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발을 굴렀다.
하도 물살이 거세여 중국 쪽으로 기울어진 굽이에 닿았는지 희미한 의식 속에 나의 손에는 무엇인가 큼직한 것이 잡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글쎄 나무뿌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내 팔을 잡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는 잠시 강역에 그를 눕히고 깨여나기를 기다렸는데 5분정도 지나자 그가 눈을 뜨면서 여기가 어디냐고 하기에 내가 북한 땅이라고 살아서 넘어 왔다고 하자 그는 울면서 나를 부둥켜 안는다.
조금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 이곳 저 곳에서 아픔이 알려온다.
보태지 않고 무릎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앞만 살피다나니 언제 물속 밑에서 돌에 다리들이 부딪치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였는데 물에서 나오니 그 아픔이 제일 크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곳에 한가한 시간을 두고 몸을 맡길 수가 없는 처지. 국경경비대 순찰로가 바로 우리 옆을 지났기 때문이었다.
강물의 우람찬 소리는 우리의 소곤거리는 말소리를 순찰병들에게 전달해 주지 않는다.
이렇게 그녀와의 첫 만남과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조국의 국경을 철벽으로 지키자는 군인들의 수비진을 하나하나 돌파하고 있었다.
강을 넘는데 아마 두 시간은 지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순찰 로에서 100미터 더 떨어져 위험구간을 지나고 지친 몸을 달래이려고 그녀에게 사과를 먹자고 제게 하였고 그녀는 무엇이든지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한다.
해발 1000여 미터의 대홍단 등판으로 올라가는 길은 심심야밤에 그 것도 원시림이나 같은 골짜기를 타고 가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수십 미터나 되는 벼랑지대로 들어서다나니 한참 앞은 보이지 않지 그러니 손 더듬으로 개척하자니 시간이 많이 흘렀고 온 몸은 강을 건너다 젖어 추워야 하겠으나 오히려 땀으로 우리 몸을 지치게 하였다. 위험구간은 넘겼으나 아직도 방심은 금물. 긴장과 긴장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도강의 어려움도 결심 품은 인간의 힘을 이길 수는 없다.
드디어 대홍단 등판에 올라서니 새벽의 찬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가슴을 벅차게 한다. 귀청이 찢어지게 들리던 두만강의 물소리도 골짜기에 휘감겨 내려가고 조용한 대지의 흙냄새와 찬바람은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느낌을 들게 한다.
저 멀리 백두산너머로 동이 터오기 시작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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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 서울토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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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로베르 2009-09-17 02:04:58
    수전노님..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십니다...한국의 내노라하는 작가들 뺨칠 정도의 필력을 지니셨네요...님이 겪으신 경험도 참으로 귀하고 값진 것이려니와 그것을 펼쳐보이는 솜씨가 가히 최서해의 '탈출기'만큼이나 강렬하고 황석영의 처녀작 '입석부근'을 능가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 수기를 마무리하시면. '문학동네'같은 이름 있는 출판사에서 출판을 하시어, 남한사람들의 북한에 대한 관심도 높이고 큰 돈도 버시기 바랍니다...좋은 글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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