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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따르지 말고 따르게 하라
Korea, Republic o 수전노 2 382 2009-09-17 00:54:29
나는 아줌마에게 무산사람이며 형이 근처에 있고 장가는 갔으나 처와 이혼하고 혼자 사는 사람이라고 이름도 거짓으로 알려주었다.
대홍단의 감자포전이나 밀 보리포전은 50~60정보로 넓게 만들어졌고 그 주변에는 이깔나무와 가분비,봇나무와 같은 것으로 방풍림을 형성 그 둘레가 무려 3천리가 된다.
우리가 올라 선 등판도 감자포전인데 아직 가을을 하지 않았는데 뭔 놈의 도둑이 많은지 일반 주민 경비들이 38년식 구식보총을 메고 무장경비를 선단다. 하긴 나도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는 1996년 너무도 먹을 것이 없어 감자 밭에 침입 잎도 나오지 않은 종자를 파내고 주린 창자를 달래기도 하였는데 오죽하면 김정일동무가 군을 동원하는 것도 모자라 주민경비들에게도 총을 쥐어주었겠나.
우리는 긴장을 조금 풀고 서리에 쓰러진 포전옆 풀판에 드러누웠는데 개도 잠든다는 이 시간만큼은 쌍심지를 켜고 지킬 이유가 없잖냐고 배짱한번 두둑히 내보내니 두렵지가 않다.
국경에서 벗어난 이상 경비원들과 조우해도 약점을 잡힐만한 것이 없기에 능히 그런 정황은 대처 할 수 있었다. 30분정도 누워있으니 몸이 추워나기에 피부로 땀이 다 스며드니 역시 찬 공기는 이길 수가 없다.
하물며 물오리도 아닌 인간이 두 시간을 물과 전쟁을 치렀으니 젖은 옷은 무엇으로 말린 담. 36도의 체온으로는 부족하다.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아 날이 밝기 전에 다음 작전을 준비해야 한다.
그 아줌마는 어데서 꺼냈는지 나에게 돈 500원을 준다. 하긴 나도 비디오가 젖을 것 같아 미리 중국에서 준비한 비닐봉투에 4겹으로 싸놓아 애기 다르듯 하였는데 그 아줌마야 천금같은 돈을 어떻게 건사했는지는 물어보지 않고도 뻔한 일. 사람들을 될수록 피하면서 집근처에 도착하니 새벽6시가 가까워 오고 변덕스러운 백두산 날씨 땜에 하늘에서는 비가 조금씩 내린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덜미치는 안전한 장소에 그녀를 있으라하고 형네 집서 준비품을 가져오겠다고 하였다.
그 곳에서 백암까지 200여리 걸어서는 너무도 시간이 부족한 곳이니 어떻게 하나 돈 주고 타는 차를 이용해야겠는데 북한 돈도 없고 일단 아줌마의 옷차림을 북한 여성답게 해야 했고 도중식사도 준비해야 했다.
아줌마의 눈썹과 입술은 수술까지 해서 그 것을 감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손톱에 물감을 드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손 가락을 자르라고 할 수 없는 일이고 어하튼 나는 형네 집이 아닌 나의 집에 가서 와이프와 장모에게 사실을 말하고 그녀가 준 한국산 커피를 꺼내 놓으니 별맛이란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커피가 왜 그렇게 맛있다고 하는지.
하긴 나도 수십번을 중국에 왔다 갔으나 커피는 처음이다.
먹어보니 맛은 좋았다. 간부들은 이런 것을 먹고 배가 나왔구나 하고 생각하니 어이없기도 하다. 그들이 쉽게 구하는 것을 나는 목숨으로 구해야 하니 양반과 상놈의 신세를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양반은 못 되도 커피까지야 자연스럽게 먹어보는 것이 인생사는 맛이 아니냐 하고 내가 와이프에게 커피를 먹으며 하는 말이었다.
나는 빨리 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따스한 아래 목에 몸을 맡기고 새 옷도 입으니 졸음이 순식간에 몰려온다. 그러니 긴긴 밤을 한 잠도 자지 못했으니 강철 인간이라도 견디겠나.
내가 국경경비대 초소를 몰래 침입 보초병을 칼로 찌르고 무기를 빼앗아 평소 못되게 굴던 담당 보안원과 보위원의 집으로 뛰어들어가 무자비하게 총을 란사한다. 그들의 가슴팎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고 반정신이 나간 내가 도망을 치고 중국에 건너가 어느 한 숲속에서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는데 이마에는 무엇이 닿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떠보니 한 중국인이 내가 빼앗은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었다.
나의 머리에서 피와 뇌가 쏟아지는 그 순간 내가 소리 지른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니 다행히 꿈이었다. 땀이 비 오듯 한다. 씨발 꿈도 스산하군.
와이프가 갑자기 소리치기에 놀랐다며 내가 꿈 얘기를 하니 피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한다. 북한은 여러 가지 전설이 많기도 하다. 뭐 굴둑이 불이 달리면 그 집안은 그해 돈이 많이 생긴다더니만 우리 집은 굴뚝이 세 번이나 불에 붙었는데도 사는 데는 하강선만 긋는다. 내가 벽시계를 보니 아침 8시가 가까워 오고 서둘러 준비품을 가지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는데 물론 뒤처리는 와이프에게 맡기고 가보니 그녀는 젖은 옷을 그냥 입고 많이 추위에 떨었는지 서성거리고 있다.
그 것을 보니 내가 나쁜 놈이라는 자책감이 온다. 사람을 한지에 놓고 졸린다고 잠드는 인간이 무슨 인간이여 그가 얼마나 가슴 조였겠냐 그도 나에게 오지 않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시간 관념이 없는 인간은 좋은 사람들을 잃을 수 있다.
내가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 하고 일단 식사를 시킨 후 옷을 갈아 입혔다. 모자는 북한녀들이 쓰는 흰 채양모를 눈썹까지 눌러 쓰게 하고 허룸한 동복과 꿰진 바지를 입히니 겉보기에는 영낙없는 꽃제비 직전의 아낙네다.
그러나 관심있게 찬찬히 살펴보면 얼굴에 주름살이 없고 어여쁜 피부와 물감을 드린 손톱까지 그런 나이에 그렇게 젊은 여인은 이 땅에서는 찾기가 힘들다.
나는 백암으로 가는 길목에서 장사군들에게 중국산 담배 두 보루를 사고 그 것으로 백암군 천수까지 간다는 수출용 임업국차 기사에게 한 보루를 주니 그는 반가워하며 운전 칸에 앉힌다.
트럭기사면 웬만한 간부 수준이다. 오죽하면 그들에게는 도로 굽이마다 이쁜 여자들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가 생각지도 못한 큰 대가를 받자 아마 횡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적재함이 통나무를 싣게 만든 중국 산 동풍트럭은 담배 한갑이면 적재함 대상이 충분하다.
그런데 그 것을 10갑 주었으니 그의 눈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 역시 돈의 힘은 무궁무진하다. 공산국가라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돈의 맛은 여기보다 더 한 것 같다.
우리는 백암 천수까지 쉽게 갔고 그 날은 더 전진 할 수가 없어 대기숙박집에 돈 50원을 주고 숙식했고 주인에게는 부부라고 하였다. 나보다 두 살 더 많은 그 아줌마가 어찌보면 동생같이 보인다. 그 곳에서 그녀의 부모집까지 60여리 우리는 다음날 차가 없는 이유로 비포장도로를 서두수 강을 따라 걸었다. 전날 숙박 할 때 때때로 한국말을 쓰는 그녀 땜에 나는 가슴을 몇 번 조였다.
나처럼 예민한 사람들이었다면 수상하게 생각하고 신고하였을 것이다.
저녁녘이 되어 집에 도착하고 내가 먼저 마당에 들어가 보니 그의 어머니가 돼지 죽을 주려고 밧게쯔를 들고 나오는 터라 딸이 왔다고 하자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 앉는다.
이렇게 그녀와 부모와의 상봉은 7년만에 이루어졌고 3살 때 헤어진 딸도 만났으나 그가 엄마 앞에 다가 서지 않는다. 참 딱한 일이다.
이런 비극을 만든 인간이 이 하늘아래 아직도 같이 살고 있으니 하늘도 무심하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모녀와의 상봉을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나의 가슴도 슬픔을 금할 수가 없다. 그래도 봉가는 1동2세대 북한 일반인들 치고는 큰 집이다.
그녀가 자기가 차고 있던 브래지어에 감추었던 중국 돈 2000원을 내놓았고 돈 보다도 새끼를 만난 부모의 마음이야 얼마나 좋으랴.
그녀의 아빠는 몸이 아파 누워 있어 갈 수가 없다고 한다.
내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업어서라도 데려다 주겠으니 생각을 달리 해보라도 몇 번 설득했는데도 당원인 아버지가 고심이 많은 것 같다. 생명은 물론 그 후과는 장담 못하는 도강 길을 법없이 살아 온 어르신에게는 너무도 감당하기가 무거운 것이었다.
3일이 지나자 아버지가 결심을 내리고 우리는 집을 떠나 다시 그녀와 넘어 왔던 국경으로 왔다. 나는 쇠약해진 아버지를 내가 맡고 밤이 아닌 낮 3시를 선택하였는데 이유는 수십번의 밀수 중 60%가 낮에 진행 된 것이었다.
백두의 원시림 또한 좋은 위장막이었다. 아직 나무 잎이 다 떨어지지 않았다. 또 혜산이나 무산처럼 조밀한 봉쇄는 아니어서 순찰병들과 조우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재수 없을 때에는 근무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는 순찰병들에 의해 잡힌 적이 몇 번 되었지만 어쩐지 오늘 만큼은 하늘이 우리 앞길을 지켜 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수위도 4일전보다 많이 내려가 나의 배곱까지 왔고 아빠를 가운데 세우고 3명이 팔을 껴 안으니 그이상 안전한 버팀 목이 뭐가 필요한가.
몇분도 안돼 일행은 중국 땅에 발을 얹고 두만강 시야를 벗어난 것은 오후 6시 경이었다.
아줌마는 아빠를 중국 땅에 모시고 넘어오니 너무 좋아 한다.
그녀는 힘이 마를 줄 모르는 샘물 같았다.
나는 중국 땅을 많이 두려워했는데 그녀는 자기 집 텃 밭에서 고추를 뜯는 주인처럼 당돌하였다. 백두산관광도로를 한다고 원시림을 개척하는 공사가 한창이어 그녀는 트럭 한족기사에게 한족말을 유창하게 하면서 차를 길 가운데서 세워 돈을 주고 50리 길을 단숨에 달려오게 하였다. 1년전에 숭선에 와서 숙박하며 아빠를 데려 올 작전을 했으나 실패한 일이 있는데 다시 그 집에 들어가니 주인은 반가와 하면서 우리에게 저녁을 주었고 택시가 없어 콜로 화룡택시를 부르다나니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어 그 날 밤 12시가 되어 연길에 도착하였다.
그러니 오전 11시에 백암에서 떠나 밤 12시에 중국 연길에 도착하였으니 도합 600여리 그 것도 두 나라 국경을 도강으로 넘어 왔으니 실로 인간의 힘과 돈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개도 먹지 않는 그 놈의 돈이 무엇인데 사람은 그 것을 위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단 말인가. 그 무시 못 할 놈이 글쎄 날개와 같아 2000여리의 대련까지 우리 일행은 무사히 오게 하였다. 한국 친척들의 방조로 대련에 집을 마련한 아줌마의 집에서 우리는 친척들이 오기를 기다려 7일만에 그녀의 아빠와 사촌형 조카들의 상봉을 지켜 보았는데 반세기가 넘은 친척들의 상봉을 보니 이 세상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내 마음이 이럴진데 본인들의 심정은 뭐라 표현하랴.
아빠와 사촌형은 6.25당시 북한군에 강제징집 되어 변변한 싸움도 못하고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3년간 투옥되었는데 포로 교환당시 가고 푼 곳에 가는 자유를 아빠는 북한에 사촌형은 한국에 선정하여 비극의 역사가 초래되었는데 7만여명의 포로들도 자유가 없어 형제는 그 곳에 있는 것도 모르다가 오늘 이렇게 만나 서로 얘기 하면서 알게 되어 놀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나라 민족 분단이 낳은 역사의 산물이다.
그 녀의 아빠가 김일성을 믿고 북한을 선택했지만 그는 머나먼 북방의 산간오지에 갇혀 놓을 줄이야 어떻게 알았으랴.
그렇게도 순진하고 깨끗한 인간을 포로 귀환병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일가 친척 하나 없는 험준한 산골에 보내고 보위부 제1감시대상에 오르게 한 김부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답이 없다.
이산가족들의 서로 부둥켜안고 울며 부르는 소리는 눈물 한점 없는 이 사나이의 가슴을 흔들어 놓아 걷잡을 수 없게 한다. 남북이 합쳐 천만 이산가족이라니 언제면 한많은 이런 말을 우리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지겠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그 날 참 많이도 울었다. 삼촌을 애기 때 보고 50년이 지나 만난 조카들은 진심으로 머리숙여 삼촌에게 인사를 드리는데 삼촌은 독재자의 칼에 맞아 육체는 망가졌으나 정신 하나로 살아 온 내가 따라 배워야 할 이 나라의 강철의 사나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아빠를 서울로 데려가려 하고 아빠는 그 만류는 거절하고 이유는 북한에 있는 처와 자식들 땜. 그리고 이제는 그 산골의 기후나 물이 자기 몸에 맞아 복잡한 서울 환경이 힘들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자기 딸을 꼭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한다.
그렇게 이산가족 상봉은 남의 나라 땅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3일이 지나 다시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집에까지 데려다 달라고 한다. 남자 조카분은 삼촌을 따라 북한에 가겠다고 하기에 내가 안된다고 하였다.
내 경험에 무사히 모셔 갈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정황이 발생하면 그 것은 큰 문제이다. 그분의 심정은 이해되나 앞날은 기약할 수 없는 길. 나의 설득에 효가가 있었는지 그 분은 국경근처에까지 가겠다고 하여 내가 넘어다니던 그 곳까지 그녀도 따라왔다.
조카분은 나에게 중국 돈 천원을 주면서 무사히 삼촌을 데려다주고 다시 오면은 500원을 더 주겠다고 한다. 오후 3시30분경 그렇게 소박한 중국의 국경근처 원시림 도로에서 그녀와 아빠가 헤어지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순간이 연출되었다.
나는 어쩐지 쓸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빠도 꿈만 같던 순간이 단 몇일안에 이루어진 것이 믿기지가 않는지 5킬로미터 구간의 두만강가에 도착할 때까지도 말이 없이 나의 뒤를 묵묵히 따라 온다. 나도 더 말을 시키지 않았다.
북한 땅이 바라보이고 윤곽으로 순찰병들의 행동이 보이는 거리까지 접근하여 우리는 몸을 숨기고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10일 지났는데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 앞이 더 선명하게 보여 정황을 판단하기는 좋았다.
떠날 때보다 아버님은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별식을 드셨다기보다는 평생 소원을 풀었다는 마음이겠지
아버님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기운이 넘쳐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저녁 6시 나는 순찰교대시간을 이용 1시간 반이라는 짧은 시간에 강을 도강하여 험준한 대홍단등판을 단숨에 올라섰다. 그렇게 나이 드신 분을 데리고 강을 넘어서기는 처음이며 그렇게 빠른 것도 처음이다.
그날 밤은 아버지를 친구 집에서 쉬게하고 그 다음날 나는 아버님을 데리고 백암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트럭에 앉아 적재함이 추우니 자기의 외투를 입으라고 준다.
문제는 그 옷에 친척들이 주는 많은 액수의 돈이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인지는 모르나 많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아버님이 나에게 속도 주지 않는 이 녀석에게 맡기다니?
나도 머리가 어리 둥절하다.
돈 앞에서는 목숨도 바치는 인간들이 많다만 나도 그런 인간들과 다름이 없으리라.
아버님이 조수석에 앉아 눈을 감고 쉬고 있고 굽이굽이 산길로 달리는 차 적재함에서 나는 능히 몸을 날려 도망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그 것이 뭐냐면 사람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양심이겠지.
내가 그 돈이면 북한에서는 얼마든지 쉽게 살며 한국까지는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침 뱉고 돌아 선 정권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것이 아닌가?
애타게 아빠의 무사함을 기다리는 그 아줌마의 심정을 그려보니 그녀는 어떻하고 내가 나쁜 짓을 하면 인간이 아닌 김정일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나의 어리석은 생각이 부끄럽다.
내가 아버지를 데리고 그의 집에 도착하니 온 가족이 얼마나 반가워하던지 인간이 사는 맛이 아마 그런 재미인 것 같다.
같은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것 인생은 짧아도 사랑은 길고 긴 것이라더니 그 말의 뜻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그녀의 아빠를 이렇게 데려다주고 다시 그녀가 있는 중국으로 가면 500원을 가질 수가 있었으나 어쩐지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집에 들어서니 안해가 법관들의 감시가 이만 저만이 아니라 하고 긴장이 풀려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인간의 능력도 한계가 있는 법 그러고 보니 약 보름기간 내가 두 나라 국경을 도강하며 도합 오천여리를 왕복했다. 또 그동안 갚지 못한 빚 끈질긴 법관들의 감시를 무마시키는 일 또한 쉽지 않다. 다니면서 속이 없는 캔처럼 소리만 요란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자기가 살 구멍은 파 놓고 있는 것이 한 가정을 책임진 가장으로서 역할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애타게 기다릴 그녀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으며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잠시 쉴 수밖에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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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 서울토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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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로베르 2009-09-17 02:07:07
    다음호가 기대됩니다...빨리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만나요 2009-09-17 10:15:55
    플로님/ 안녕
    너무도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신것 아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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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나요 2009-09-17 10:34:11
    탈북자들중에는 참 재간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수전노란 분이 쓰신 글을 잘 보았습니다.
    또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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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로베르 2009-09-17 16:30:11
    만나요님/ 아직도 저를 기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먹고 사는 일이 만만치가 않네요...우선 돈을 먼저 벌어야 북한동포들을 위해서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시작할텐데...돈 벌기가 쉽지가 않습니다...돈을 벌자면...돈 버는 일에 집중을 해야 하는데, 매일 머리 속으로는 김정일 정권을 어떻게 전복시킬 것인가만 생각하게 되니 돈 버는 일에 진척이 없습니다...아무튼 틈나는대로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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