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지만원씨 518관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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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때 저는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 5학년 이었습니다. 그것도 광주의 현장에서요. 코 흘리게가 무얼을 알까마는 자라 오면서 적어도 남들보다는 굉장히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경험이었습니다. 518이 어떤 배경에 의해서 발생했고 전개와 결말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 그때의 "국군 아저씨들이 그럴리 없어 .." 하던 마음이 제가 그러한 군대에 가니 "그러고도 남겠다"하게끔 교육을 받았음도 혹 그런 군대 나온 사람은 다 아실것입니다. 지만원씨가 말하고자 하는것은 소위 "전라도가 아닌 못살고 사회에 불만이 많은 "절라도" 놈들이 공산당 놈들하고 결탁해서 국가에 폭동을 일으킨" 그런사건으로 만들고 싶은 모양입니다. 제가 기억에 남는것은 도청앞 분수대에서 누군가가 나와서 무엇을 낭독하는데 "우리는 왜 총을 들었는가" 뭐라고 하면서 "북한이 쳐들어 오면 북한 하고 끝까지 싸우겠다" 라고 들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북한 이야기를 왜 해야겠습니까 ? 아마 지금의 지만원씨를 예견해서요 ? 그때도 남한정부에서 뿌리는 전단지에서 지만원씨하고 똑같은소리 했습니다 "간첩들하고 폭도들이 퍼트리는 유언비어에 속지마라" 라고요 그래놓고 전두환과 그 일당들은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도청앞에서 집단 총질을 했습니다. 남한의 독재자들이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독재를 했다면 북한의 정권 또한 남한 독재정권에 빌미를 제공하고 독재에 일조 한것입니다. 북한정권 또한 "괴뢰 남조선"하면서 그런짓을 해왔겠죠 그렇게 남북한 국민들은 이념의 노예로 괘롭힘을 당해 왔습니다. 그 공수부대의 광주학살은 몰래 이루어것이 아니라 백주 대낮에 대로변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남들이 보는앞에서요 ... 지만원씨는 마치 북한의 사주로 일부 북한 간첩이 시민을 학살 해놓고 공수부대의 짓인것처럼 위장했다 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한가지 제가 본것을 말해드리면, 광주 중심가 근처 작은 절이 있습니다. 그 뒷골목 사거리에서 걸어가는데 갑자기 왠 군인들이 차에서 내리더니 무차별적으로 시민들을 폭행해고 연행하는것을 봤습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지만원씨가 말한 간첩들일겁니다 공수부대 간첩...참으로 웃긴일이 아닙니까. 자상 ..어떤분이 전에 한국군의 대검은 날카롭지 못해서 자상을 못만들것처럼 말씀하시던 글이 생각납니다. 저 군시절 그 거가지고 산 짐승들 많이 죽였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을 부정한것이 아니고 잘못된역사는 바로잡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18이 절라도 폭동이면 419도폭동이고 31운동도 폭동이어야 합니다. 518은 임진왜란의 의병으로부터 동학 농민 운동 31운동 419로 이어지는 민중의 역사선상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입니다. 지만원씨의 "빨갱이의 선동에 절라도 호남 xx들이 폭동일으킨 사건" 이 아닙니다. 그 일에 관련도 없는 왠 탈북자 까지 끼워넣어 역사를 왜곡하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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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떤 배신감 같은 것에 이성을 잃고 악에 바친 것이지요..갈수록 뭔 소리를 하는지 건질게 없어요.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자신의 예측이 틀리고 역사가 달리 흘러가지, 자존심에 인정을 못하고 갈 때까지 가는 어느 한때 유능했던 전문가의 철저한 몰락이랄까요..
- 통일반대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9-10-14 15:28:31
군 내부 일은 군사 기밀이 되니 되도록이면 말하기 싫습니다.
한가지만 말하자면
당신같은 방위 출신들이 1윌1일은 휴일이라 집에서 쳐 자겠지만
우리는 시무식 이랍시고 전투 준비태세 발령 즉 형식적인 비상을 겁니다.
그래서 하는일이 산에가서 뭘잡습니다. 당신이 못하게 한다는그걸요
형식적으로 대검으로 목을땁니다.
다른 부대는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당신같은 방위들은 전쟁 나면 김일성이가 무서워 한다는 도시락 폭탄들고 적 특수 8군단을 상대 하겠지만 우리는 북한 예비군 내지는 당신같은 방위급인 노농적위대를 상대 합니다.
그런데 쳐 먹을것이 떨어지면 자체 조달 해야 하기 때문에 산에서 먹을것 찾는 짓 많이 했습니다.
당신 엄마가 도시락 싸줄 시간에...
당신의 그말투는 군대 안갔다와 본 말투입니다.
아니면 생존훈련이라는것을 안해본 땅개 출신이든가요
아침에 햄버거는 드셨어요 ?
당신의 뜻에 안맞으면 막말 쳐하시는 분이세요 ?
당신의 그 막말 소나기가 자신의 얼굴에 쳐 내린다는것을
모르시는 분이시군요
군대에서 대검으로 산짐승 잡는경우가 왜 없습니까? 있습니다
18게리님은 군생활을 아주 편하게 도심에서만 하셨나 봅니다.
전 군생활하면서 꿩도 잡아먹고 토기도 잡아먹고
비트파다가 겨울잠 자는 뱀구덩이를 발견해서 밤에 대원들 모두 모여
뱀탕도 끓여 먹었던 적도 있습니다.
당연히 먹을것이 없어서,부대에 식량이 없어서 잡아먹은건 아닙니다
군대 밥 잘 나옵니다 고기도 거의 매일 나오고 라면 빵 초코파이등 먹을거 넘쳐납니다
다만 식량 자체조달이 훈련내용에 포함이되어있거나(전시에 친철하게 식량을 배달해 주진 않죠) 그게 아니더래도 심심해서..또는 술 안주용?으로 잡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뒤질래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9-10-15 00:16:37
그래너 용감하다 조토모르는 무식한놈아
너 대갈빡을 푸욱 과묵어버릴까보다
- 만나자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9-10-15 00:42:11
- 만나자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9-10-15 00:42:29
당신은 천리행군으로 불리는 전술 종합 훈련 같은 그런 훈련 안나가봐서 모르겠지만 불 아무데서나 피워요 ..
하다 못해 대통령 경호작전 나가서도 몰래 불피우고 라면 끓여 먹고 그래요 ..
뭘 알고 쳐 떠드세요
어디 엄청 힘든 방위나 나왔는 모양이지요 ..
저녁에 퇴근하는 ..
연기 안나게 불피우는법 아세요 ?
- 더원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9-10-13 23:37:01
5.18때 외부의 정보차단을 위해 광주 외곽을 봉쇄했던 부대였습니다.
그당시 광주에 가서 직접 진압한 공수부대원들이 현재 군생활 하고 있으신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퇴직을 많이 하셨겠지만 제가 군생활 할땐 많았고 현재도 있습니다
공수부대 부사관들은 부대를 옮길때 보통 다른 공수부대로 옮기기 때문에
그당시 광주에가지 않은 공수부대에도 진압했던 부사관이 존재하죠.
평시에는 대검에 날이 서 있지 않습니다만.
비상이 걸리면 대검 날을 세워서 지급을 합니다.!
그리고 날이 서있지 않아도 자상은 충분히 낼수 있습니다.
일반인 기준으로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공수부대라는것을 전제하고 생각 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람죽이는데 대검까지도 필요 없습니다
50센치 짜리 진압봉 하나만 손에 쥐어주면
눈에 보이는대로 사람 두개골을 깨고 다닐수 있습니다.
미친거죠.
민간인 상대로 공수부대를 투입했다는건 모두 죽이거나 병신 만들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1. 님께선 5.18 당시 실제 그 외곽을 봉쇄했던 그 부대에서 근무하고 계셨습니까?
2. 5.18 당시 실제 그 외곽을 봉쇄했던 그 부대에서 장병들에게 대검 날을 세워서 지급한 것이 사실입니까? 비상시가 아닌 5.18 당시 지급된 대검에 대한 질문입니다.
만약 님께서 이것이 사실임을 입증하실 수 있으면 당시 현장 지휘관의 증언이 위증임을 반증하는 것이 되기에 여쭙는 것입니다.
더불어 군용 대검의 날이 세워져 있었느냐 하는 것은 소수 사망 여성들이 입고 있었던 예리한 자상 등의 원인 규명에도 참고가 될 성 싶습니다.
일반적인 경우 무딘 날의 칼과 예리하게 날 이 선 칼에 의한 자상은 우선 그 상처의 겉부위 등이 엄청나게 다른 것은 아실테고요.
- 더원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9-10-14 05:05:49
가능한한 제가 답변을 해드려야죠
1. 님께선 5.18 당시 실제 그 외곽을 봉쇄했던 그 부대에서 근무하고 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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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5.18 진압에 참여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이가 많지는 않습니다.그런데 부대라는게 나름 역사가 있는것이죠
단적인 예로 파병을 갔다던가(실제 제가 근무할때 저희 부대에서 병력의 절반정도가 파병을 갔습니다 전 가진 안 았습니다 ) 5.18때 광주에 진입 했다던가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굳이 문서를 뒤지지 않아도 산 증인들이 군생활을 하고 있으니.
모를레야 모를수가 없죠.!
제가 근무한 부대는 광주 외곽을 담당했던 부대 맞습니다
그리고 제 선임 하사만봐도(제가 근무당시 원사)5.18 때 기존에 전두환이가 여단장으로 있었던 공수부대에서 근무하다가 광주 시내에서 진압을 했었고 그후에 저희부대로 전출되었던 사람입니다.
2. 5.18 당시 실제 그 외곽을 봉쇄했던 그 부대에서 장병들에게 대검 날을 세워서 지급한 것이 사실입니까? 비상시가 아닌 5.18 당시 지급된 대검에 대한 질문입니다.
만약 님께서 이것이 사실임을 입증하실 수 있으면 당시 현장 지휘관의 증언이 위증임을 반증하는 것이 되기에 여쭙는 것입니다.
더불어 군용 대검의 날이 세워져 있었느냐 하는 것은 소수 사망 여성들이 입고 있었던 예리한 자상 등의 원인 규명에도 참고가 될 성 싶습니다.
일반적인 경우 무딘 날의 칼과 예리하게 날 이 선 칼에 의한 자상은 우선 그 상처의 겉부위 등이 엄청나게 다른 것은 아실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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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을 세워 대검을 지급한것은 사실입니다.
산 증인들로부터 직접들은 말입니다 그 것도 한 두명도 아니고요.!
대검에 날 세운건 세발의 피죠
국민을 상대로 실탄을 지급하고 발포까지 했다고 증언합니다.(당연히 언론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선 함부로 말을 못합니다 신분이 군인인데다가 본인에게 불이익이갈 염려 때문이죠)
본인들도 압니다 잘못됐었다는걸.
그런데 군대라는게 위에서 까라면 까고 박으라면 박는게 군대죠.
공수부대는 아주 심합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하셔도
공수부대에서 비상시에도 대검 날을 세워서 지급을 하는데
광주진압은 비상시를 넘어 실전입니다
날을 세워서 대검을 지급하지 않았다는게 더 이상한거죠.!
군 생활 하실때 비상걸리면 만사 제치고 대검 날만 세우는 보직 없었습니까?
아~~! 그리고 자상은 검의 날이 서있냐 아니냐에 따라 많이 차이 납니다
굳이 법의학자가 아니더래도 압니다
그런데 날이 서지 않은 대검이여도 사람 죽이는데 아무런 문제는 없습니다
저때는 구형 대검(한국군에 대검 종류가 2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과 신형 대검(검이라기보단 단도라는 명칭이 더 정확합니다 날이 한쪽만 있어요) 중에 신형대검을 사용했습니다 어느쪽이건 날을 세우지 않아도 베는데는 한계가 있겠지만 찌르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대검의 날이 서있냐 아니냐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이 있었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검 없어도 진압봉으로 충분히 사람 죽일수 있으니 굳이 대검을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옷에 피 무칠요 없이 곤봉 한방이면 보낼수 있는데요..
여담입니다만
제가 군생활 하던중에
우연히 창고에서 진압봉을 발견했습니다
그 진압봉엔 계급과 이름이 써있었고 그중에
제 선임하사 이름이 있길레 갖고 가서 이런게 나왔다고 했죠
그리고 물었습니다 이게 뭔 물건이냐고요?
제가 근무할때도 그렇고 지금도 공수부대에서 진압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국민을 상대로 시위진압을 특수부대인 공수부대가 한다는건 말이 안되죠
그건 경찰이 할일이죠 공수부대 투입되면 사고 크게 납니다.
암튼 진압봉을 가져다가 뭐냐고 물으니
하는 말이 80년도에 광주에서 이걸로 대갈통 엄청깨부셨다고 말을 하더군요
눈 하나 깜짝 안하면서요.
그 사람은 전형적인 군입니다
진압봉 하나로 사람을 죽인다?그것도 한방으로.. 이해가 잘 안가실수도 있겠지만
제가 현역때 생각해보면 아주 당연한겁니다(제대후엔 그냥 아저씨지만요)
민간인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부분 가지고 오해는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저도 제 지인들(실제 진압에 참여했던 공수부대 부사관들)을 통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만 당시 진압에 참가했던 대대장의 진술에 대검에 대한 부분이 있었기에 질문드렸었습니다.
또한 5.18 이전에 공수부대가 충정훈련(데모대 진압훈련)을 해 왔었는지 여부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하군요.
하지만 우리가 좀 더 유의해서 조사해야 할 부분은 좀 더 있을 듯 합니다.
지금까지 진행돼 온 5.18 청문회 결과는 다소 일방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까지의 일반적인 정서는 5.18 발발 원인이 군의 강경진압에 있다고 인식돼 있는 듯 하며, 5.18 당시 시민군들 중에서도 간첩 등 불순분자가 있는 듯 하였다는 증언들도 없지 않으니 이 점도 마땅히 검토돼야 할 듯 하고요.
참고로 5.18 당시 저는 대학생였습니다. 고교 동기 두명이 전남대에 다니다가 당시 광주에서 고생고생해 가며 빠져나온 이야길 직접 들은 적도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더원님과의 토론 말씀 중에 잠깐 끼어 들겠습니다.
산노루님께서는 진압 당시에 참가했던 대대장의 진술을 말씀하셨는데, 상식적으로 볼 때 당시 지휘선상에 있었던 사람들 중 공식적인 자리에서 '민간인에 대한 살상'을 솔직히 말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간단히 생각해 볼 때, 군 내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인명사고에 대해서조차 당시 주변인들이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위증을 하는 경우는 흔합니다. 하물며 날선 대검으로 민간인들을 도륙했다고 증언할 지휘관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그 지겨운 간첩, 불순분자론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립니다.
저는 솔직히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에 시민군 중 간첩 등이 있었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간첩이란 언제 어디에나 있을 수 있죠. 그렇다면 북으로서도 그 좋은 호재거리를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따라서, 수천의 특수부대 얘기는 솔직히 믿기 어렵지만, 소규모 단위의 간첩이나 무장세력이 시민군 내에 침투했을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시민군 세력에 간첩이 침투한 것이지, 간첩 활동에 의해 광주시민이 폭도로 변했다는 의미는 아니며, 이것은 분명히 다른 사실입니다.
즉, 광주민주화 운동을 폄훼하는 이들의 주장을 어느 정도 수용한다 하더라도 엄연히 5.18의 발발원인은 명분이나 정당성 없이 권력을 손에 쥐려는 쿠테타 군부세력에게 있습니다.
산노루님께서는 당시 대학생이었다니 그 상황을 잘 아시겠군요.
당시 광주에서 시위가 촉발된 원인은 바로 군부의 쿠테타와 그 독재세력에 대한 저항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항이 광주에만 있었고, 광주에만 더욱 유별났습니까?
아니잖아요. 군부와 독재에 대한 저항은 전국적인 규모였고, 결렬하기로 따지면 부산, 마산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도 광주 못지 않았습니다. 그 현장에는 간첩이 없었을 것이다 라고 자신할 수 있으십니까?
저는 그곳에도 그런 세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군이 투입된 지역이 광주입니다.
왜일까요?
왜 유독 광주지역에만 군, 그것도 공수부대가 작전명까지 갖고 무자비한 진압을 했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산노루님의 말씀처럼 간첩 등 불순분자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은, 수많은 국민들의 저항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군부의 명분없는 쿠테타와 독재 시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국민적 저항을 소위 '본보기'를 통해 짓밟고 겁을 먹게 해 입막음을 한 군부독재 세력의 파렴치함에 있슴을 분명히 아셨으면 합니다.
언제나 확신에 찬 어투의 님 꼬리글들을 대하노라면 좀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님이 가지신 그 지식에 그렇게 자신이 있으신가요?
과거는 물론 현대에도 바로 옆에서 바라보는 현상에 대해서도 그 진실을 알기가 어렵거늘 늘 단언적인 님의 글투는 좀 피곤하군요.
우선 5.18과 관련하여 님이 알고 있는 것들과 다른 점들을 지적해 보겠습니다.
당시 군이 투입된 유일한 지역이 광주였다고요?
정말 이 말에 자신 있으십니까?
심지어 공수부대가 대학가에 진출한 것도 광주의 대학들이 처음이 아닙니다.
아직도 광주의 진실은 멀고도 멀었습니다.
그리고 똑 같이 공수부대가 대학에 주둔하며 대학가의 데모를 진압할 때 어떻게 광주가 다른 지역과는 다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아래 글이 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에 옮겨 적어 봅니다.
"저는 우선 광주사태가 과격해진 중요한 원인이었던 호남인맥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호남은 김대중정권 이전에는 중앙권력에 진출하는 비율이 낮았기 때문에 영남에 비해서 인물이 희소했습니다. 거기에 비극이 있었지요. 영남인들은 인구도 많고 수십년간 집권하는 동안 양성된 인재의 풀이 풍성했습니다.
인맥의 깊이도 있고 폭도 넓었습니다. 그러므로 뭉치더라도 수평으로 뭉쳤습니다. 정치인은 정치인끼리, 기업인은 기업인끼리, 관료는 관료끼리, 검사면 검사끼리, 판사면 판사끼리 뭉칩니다. 그러면 최소한 아니꼽더라도 수긍은 하게 됩니다.
그런데 호남인맥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뭉칠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수직으로 뭉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어떤 郡(군)에서 검사 한명이 배출됐다고 하면 그 동네 출신 관료, 언론인, 기업인은 물론이고, 농사꾼, 장사꾼, 심지어 여운환이 같은 조직폭력배까지 뭉치는 식입니다.
무슨일이 생기면 누구네 동생, 누구네 조카 하면 다 아는 처지니까, 안 봐주다가는 "썩을 놈"으로 왕따를 당합니다. 김대중 정권 들어와서 왕따를 당했지만, 한 때 동교동계의 2인자 역할까지 하던 마당발 정치인 김상현씨의 호칭은 호남에서 "상현성님"으로 통했습니다.
운동권 학생, 신참 정치 지망생은 물론, "동네깡패"들까지 김상현씨를 그렇게 부릅니다.
1980년 5월의 "광주사태"도 그러한 "형님, 동생"하는 지역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한 군부의 진압 때문에 사태가 심각하게 커졌을 것입니다.
서울의 학생데모 때나 부마사태때 강경 진압책을 써서 성공했던 군인들은 광주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같은 진압을 바라본 광주 사람들은 서울, 부산에서와는 달리, 너도나도 달려들어 격렬하게 대들었습니다."
그리고 님에게 충고 하나 하리다.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제 현상들에 대해서는 님처럼의 그런 단언은 상당히 가벼운 것일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5월 18일도 아닌 5월 17일에 자칭 시민군들이란 이들이 광주에서 외지인을 상대로 저지른 납치테러에 대한 증언도 있으며, 윤상원이 이미 5월 9일경 무장 유혈폭동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량배까지 뭉쳤다하는 것은 비약적인 논리로 보입니다
그정도까지 호남이 인물이없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호남인들이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꼈다는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잠재적인 요인에 지만원이주장하는 간첩행위라든가
호남소외감이 자발적니 봉기가 되기에는 굉장히 부족한 논리입니다
이유는 그시대는 호남 소외라기보다는 영남을 제외한 전국의
인물들이 중앙에 진출하기에는 힘든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호남인들이 민주주의에대한 의식이 남달리 깨어있지도 않은시기었습니다.
즉 518전까지의 시위란 광주에서도 대학생들이나 하는것이었습니다.
공수부대가 광주에 올 이유도 없었습니다.
즉 극히 의도적인 이유로 광주에 온것이라고 밖에 볼수 ㅇ벗습니다.
그리고 "그시민군"은 518이전엔 존재 하지도 않았습니다.
윤상원이는 "들불"이라느 야학을 했었는데 즉 학교 못 가는애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것보고 폭동을 준비했다고 하면 할말이 없습니다.
코흘리게 들하고 폭동준비했다고...ㅎㅎ ㅊ
그증언을 누가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주십시오
대한민국이는 "아"라고 이야기했는데"어"라고 말했다고 하는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하기야 전사모 가니 시민군이 애국가 부르는것 장면에다
주석을 달았는데 폭도가 시민들을 위협하는 장면이라고 묘사해 놨습니다.
먼저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이 갖고 있는 자의식 또는 가치관이 있으며 그로 인해 특정 사안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도 조금씩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참고로 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도 아니며, 5.18 발발의 원인에 대해서도 초기 투입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초기의 공수부대 투입 단계부터 과연 님이나 샌드맨님이 언급하시듯 특정 의도를 갖고 있었느냐 하는 것을 검증하는 것은 오히려 쉬울 겁니다. 당시가 아닌 일정 세월이 흐른 지금은 과정이 아닌 결과 이후의 싯점이므로 그 전개과정들을 참작하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할 것이니까요.
그리고 아래 부분을 보니 님께서도 역시 글을 함부로 적으시는군요.
"윤상원이는 "들불"이라느 야학을 했었는데 즉 학교 못 가는애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것보고 폭동을 준비했다고 하면 할말이 없습니다.
코흘리게 들하고 폭동준비했다고...ㅎㅎ ㅊ"
5.18은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며 엄연한 우리나라의 주요한 현대사 중의 하나입니다.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스스로의 인식과 편협한 지식을 기준으로 폄하부터 하고 보는 어설픈 지식인들이 이 나라엔 좀 많지요.
윤상원이 무장봉기계획을 밝힌 회합 내용을 밝히기 전에 먼저 다음 사항들에 대한 님의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1. 1980년 5월경 당시 외국 순방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이 모든 일정을 접고 급거 귀국한 이유를 혹시 알고 계십니까?
2. 1980년 5월 20-22일경 북한이 남침할 수도 있다는 정보가 중국을 통해 일본에 알려지고 또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알고 계신지요?
3. 당시 김대중씨를 국가수반으로 옹위코자 하는 군사쿠데타가 당시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이종찬 등에 의해 추진되어지고 있던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4. 1980년 5월 17일 중정요원 이기동씨 등에 의한 김대중씨의 소환 당시 이휘호씨가 숨기다가 들킨 후 중정요원에게 어쩔 수 없이 건넨 내각 구성 명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참고로 당시 김대중씨는 1980년 2월 신민당에 입당한다고 했다가 4월에 입당 취소를 발표하였습니다. 당시 특정 당 소속도 아니었고 정당에 등록조차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압니다.
5. 잠수함을 타고 미리 목포에 내려와 있던 북한 특수부대요원들이 현지 친북인사들 및 부마사태 당시 암약했던 대남공작원 6명과 조우한 후 1980년 5월 12일을 전후하여 광주지역과 주변의 예비군 무기고 위치 등에 대한 정보 취합을 한 것에 대해 당시 남파됐던 특수부대 요원이 자신의 내연녀에게 진술한 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6. 마지막으로 님이 '들불'야학의 운영자 정도로만 알고 있는 그 윤상원씨는 1980년 "5월 초순 전민노련 결성식에 참가하고 돌아온 직후 지역의 청년 운동권들과 향후 정세와 전술방침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계엄이 확대되면 무장이 불가피할 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며, 군대 투입과 무장진입에 대항해서 쇠파이프, 각목, 화염병 등을 준비하고 만일의 경우에는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기를 확보하고 TNT를 제작해서 자체 무장을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고 하는 증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참고로 이 내용은 박노해씨가 쓴 <윤상원열사평전>에 나온다는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최규하 대통령의 귀국 사유는 광주와 전혀관련없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학생운동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15일이후 학생들은 시위를 슷로 자제하였습니다.
즉 최규하 대통령의 귀국사유는 광주와 전혀 관련없습니다.
2. 솔직히 그런 내용은 좀 지겹습니다.
신빙성이 떨이지기도 하구요
그런정보를 입수 했다면 정부에서 그정보를 국민들에게 충분히 공개할 이유가 된다고 보며 실제로 그런상황이 사실이라면 518이전까지 특별한 소요도 없는 최정예 군인들을 후방인 광주까지 보내서는 절대로 안되는일입니다.
3.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들어본 말이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518하고 무슨연관이 있는지 근거를 설명해주시고, 국가내란음모 사건인데 그런재판이 열렸다는것 또한 들어본 일이없습니다.
4. 그것이 내란음모의근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80년초에 분명히 최규하 정부에서 정권을 이양할것이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것 또한 전두환정권에 의해 조작된사건으로 알고 있는데 설사 내각 명단을 가지고 있더라고 그게 법에 저촉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아니면 그것이 내란 음모라고 생각하십니까 ?
5. 먼저 그것이 518하고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여 주십시요. 지만원씨 주장을 하고 싶으신건지 ...
간첩이 서울시내 경찰서 위치 파악하면 작년 촟불시위하고 연관이 있는것이다 라고 그런식으로 말씀하시는듯한 뉘앙스입니다.
간첩이
518에서 언떤 역학 관계를가지고 역할을 했는지 구체적 사실을 가지고 이야기 해주십시요.
6. 박노해씨는 그때 그현장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윤상원씨가 무장의 필요성을 주장한 때가
518이전이 아닌 5월 21일 이후 시민군 대변인을 맏은
이후입니다. 그때 한참 강온파가 갈라져 논쟁을 하고 있을때 윤사원씨는 어느정도 강경파 였습니다
님의 그 말씀은 마치 윤상원씨가 518이전 사전에 반란을 모의한것처럼 왜곡하고 있습니다.
윤상원씨의 무장논쟁은 이미 군인들에시민들이 학살을 당한이후 시민들이 자위적 조치로 무장을 한 상태에서
무장 해제 할것인가 말것인가 하는 논의과정에서 이루어진것입니다.
'
평양에서 평소 김정일 정권에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와중에 김정일이가 정권 유지차원에서
시범조로 인민군을 동원하여 몇몇 시민을 학살 했는데
원래 시나리오 대로라면 시민들이 겁먹고 찌그러져야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평양시민들이 그사건을 계기로 들불과 같이 일어나 반정부 무장투쟁을 했다고칩시다.
그런데 우연찮게 탈북자중 한사람이 평양에가서
무장투쟁하는사람들의 대변인을 맡았다면,
그럼 그 탈북자분이 평양 무장투쟁을 기획했고 그 탈북자 분 의해서 무장투쟁이 일어 났다고 말할수 있습니까 ?
즉 광주의 의의는 어느 한사람에 지도 의해서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민중의 각성에 의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알기로 남한에서 북에 전단지 보내는 분들의 기본적인 목적은 북한의 광주를 만들려고 하는것 아닙니까 ?
참고로 위 질문들 대부분은 적어도 5.18 전후에 있었던 사실들로서 어떠한 이유에서든 5.18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란 어렵다고 봅니다.
위 내용 중 3번은 초기 그 쿠데타계획에 참여했다가 후에 자진하여 빠진 김지하씨도 그 사실을 증언한 바 있습니다.
4번은 그 당시 어느 정당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던 김대중씨에게 왜 예비내각 명단이 필요했을까요? 혹시 그것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 외국의 새도우 캐니닛이라면 이희호씨는 이종찬씨의 심복격인 이기동씨의 김대중씨 소환 당시 그것을 급히 숨기려고 하였을까요?
묘한 시기에 예비 내각명단이 작성돼 있었던 그 점이 설사 법적 판단을 받은 바 없다 할 지라도 이상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5. 우선 관련 탈북자 증언에 의하면 당시 남파된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과 조우한 인사들 중 미리 남파되어 부마사태에 개입했었던 인사들의 수는 6명이 아닌 7명이더군요.
제가 이 내용을 적은 목적은 5.18이 심화된 배경에 바로 북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 5.18 당시 광주에 횡행했었던 유언비어들 중 "계엄군이 여고생의 젖가슴을 도려냈다, 계엄군이 대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 등등의 실제 장면들이 5.18 당시 북의 텔레비젼에서 방송된 것으로 압니다.
우리 상식선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당시 광주시민 누구나 그런 사체를 보거나 그 소문을 들을 때 분노할 수 밖에 없을 그 영상 속의 살인행위들은 누가 자행하고 누가 촬영하였을까요?
5.18 당시 광주시민들이 더욱 분노할 수 밖에 없었을 그런 일들이 그들에 의해 자행되었을 개연성이 더욱 높을 것임에도 이것도 5.18 광주와는 무관하지요?
저는 당시 순수 광주시민들의 자위적 행위까지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5.18의 진실 규명을 위해서는 좀 더 많은 관련 자료들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6. 노동시인 박노해씨가 쓴 <윤상원열사평전>에서 인용된 글을 두고 당시 박노해씨가 현장에 없었다는 말은 곡해의 여지가 있겠지요.
우리가 글을 쓸 때 특히나 자서전이나 회고록, 어떤 조직의 역사 등을 기술할 때 어떤 방식에 의한다는 것은 님께서도 혹시 해 보셨다면 알 것이니까요.
그리고 님의 참고를 위해 5.18에 관련된 탈북 동포분들의 증언들을 인용합니다.
이것들이 비록 시스템클럽에서 발췌된 것일지라도 그 내용들이 지박사님에 의해 가공된 것이 아닐 것이니 그분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5.18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참고는 될 성 싶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시절에 은인으로 나타나서 나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두 아이의 아빠가 바로 5.18광주사건 때 북한의 임무를 받고 남조선에 내려왔다가 부상 당한 몸으로 북한으로 돌아가서 영웅칭호를 받은 당사자이다.
(내 내연의 남편인 공화국 영웅은)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게 안방이었다.
침투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요원들(그들 일곱 사람은 이미 전에 북한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공작조)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산, 마산사태가 전국적인 인민봉기로 확산되지 못하고 조기에 진압된 것은 폭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확대될 수 있는 명분이 취약했으며 부마사태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 민심의 합법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했다. . .
그들이 남조선전라도 지역에 침투하여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데서 관건인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북한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광주폭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
북한이 봉기시기를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인 3월로 택한 것은 폭동이 일어나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신속하게 번지려면 농사철과 같은 불필요한 계절요소들의 제한적인 방해를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1980년 3월로 계획되어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1980년 4월말에 일어났던 강원도의 사북탄광사태와의 밀접한 연관 때문이었다.
사북탄광에서의 폭동조짐을 첩보망을 통해서 사전부터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북한은 3월로 예정되었던 광주폭동을 4월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내려 보냈고 득보다 실이 많은 산발적인 소요보다는 전국각지에서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전국 규모의 항쟁이 성격으로 보나 위력으로 보나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계산하였다.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80년 5.18을 전후로 하여 북한이 남조선에서의 전 인민적인 항쟁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인 작전을 세웠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단편적인 내용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쪽의 입장에서 사북탄광사태는 치명적인 실패작이었고 그것이 무산됨으로써 광주폭동은 부득이하게 5월 중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당사자들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내가 북한에서 이런 내용들을 들을 때는 신기할 정도로 희한했었지만 지금 남한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 .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전라도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감옥소(남조선의 교도소)에 죄 없이 감금되어 있는 혁명적인 투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안창식의 일행들도 참가했었고 그중 한명이 심한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총탄이 복부중심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그 사람은 과다출혈로 치명상이었다고 했다.
안창식(나의 내연남)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대원 세 명에게 여자를 추격해서 그를 조용히 처리하고 시신을 소각하되 사진기는 무조건 회수해 올 것을 명령했다.
분명히 다른 냄새를 맡고 따라다니는 남조선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니면 정체를 숨기고 광주 시내를 뒤지면서 색다른 냄새를 맡고 있는 어느 특수기관의 스파이라고 짐작되었다.
그 여자는 북한요원들에 의해서 광주시내 모처로 납치되어갔고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초기에 임무를 받고 타격대에서 파견되었던 안창식을 포함한 10명의 요원들 중에서 한 명이 숨지고 안창식과 함께 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부상자중 1명은 북한으로 돌아가서 치료받다가 1년 뒤에 사망) 부산, 마산폭동에 참가하기 위해서 먼저 남파되었다가 그들과 합류한 7명의 일행 중 3명은 행불이 되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공화국 2중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을 비롯해서 살아생전 당과 수령,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싸우다가 애석하게 전사하였다.
조국을 위해서 젊음을 바친 고 장중한 동지의 투철하고 고귀한 혁명업적은 조국의 미래와 더불어 후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애석하게 전사한 장중한 동지에게 영광이 있으라!”(북한 어느 남성 무덤의 비문 내용)
"자서전의 내용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그가 남조선에 내려와서 대남공작을 시작하면서 진행한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친척들의 이름을 비롯해서 자기가 공작한 대상들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적혀있었고 특히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종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 속에 있던 죽은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었다."
특히 1980년 5월 달에 있은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 전후 배경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런 식의 내용으로 적혀 있었다.
“남조선의 전라남도 광주는 해방 전부터 인민들의 애국심과 혁명적인 열기가 다른 곳에 비해서 특별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5.18이 시작되기 전부터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잠재해 있는 혁명적인 사고방식은 5.18사건이 시작될 수 있는 충분한 원천이었고 원동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남조선의 재야인사들은 이미 북조선의 지령을 충실히 집행할 수 있는 정신적인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고 그들의 주위에 결집되어 그들을 추종하고 있는 많은 친북한적인 세력들도 남조선에서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있는 집단으로 충분히 장성되어 있었다.
5.18광주인민봉기가 차질 없이 무장폭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전적인 배경은 북조선에서 파견된 대남공작원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먼저 있었고 남조선 지하조직들의 꾸준한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조선에 내 집처럼 수없이 드나들면서 정보, 정찰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광주인민항쟁처럼 남조선정권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준 대형사건에 공개적으로 참가해 보기는 처음이였다”
"저는 올해 1월 달에 1980년 5월18일 광주봉기에 직접 참가하고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지금 다시 남한에 내려와서 소문 없이 조용히 살고 있는 50대의 남성분을 만나 보았던 일이 있습니다.
그는 현재 신변상의 문제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많이 꺼리고 있지만 5.18광주사건이 국민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기회가 조성되면 자기가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증언을 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 .
2006년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합동조사반에서 조사를 받을 때 그는 자기가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 당시 북에서 임무를 받고 내려왔었다고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조사관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사관들의 입에서 앞으로 그런 쓸데없는 말을 두 번 다시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협박을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광주봉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중대병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광주 봉기참가자들이 장갑차를 끌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자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중대 군인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했다고 한다.
중대 군인들 중에서 성근이보다 몇 년 선배인 사관장이 텔레비전에다가 손짓을 하면서 고성을 질렀다고 하였다.
“야, 저거 광수가 아니야? 광수가 어떻게 저기 나가있어. 저자식이 별을 달고 승진해서 어느 분계선 일대의 특수부대로 간다고 하더니 저기 나가있네. 세상일은 참 모르겠다.” 라고 소리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수의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 .
그때 광수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지만 그와 생활했던 중대의 구 대원들은 모두가 다 광수를 정확히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성근이를 비롯한 중대 사람들은 그날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광주폭동이 가열되고 있는 장소에서 광수가 장갑차에 올라서 괴뢰군들의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남조선에서 벌어지는 인민항쟁에 어떻게 되어서 북한에 있을 사람들이 나가서 참가하고 있는지 참으로 희한안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부대에서 한가마 밥을 먹던 사람이 광주에 나가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을 본 성근이네 중대 사람들은 그때부터 광주사건이 남쪽에서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만든 것이 아니라 북쪽에서 특수부대사람들이 나가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북한 특수부대 요원으로써 광주사태에 참가하였다가 북한으로 돌아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이 직접 발언한데 의하면 광주무장폭동은 그자체가 어떤 면에서도 전쟁 이상의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참으로 광주사태가 남한이 전복될 수 있는 위기의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광주사태 때 전쟁이 날 뻔 했다. 김일성의 지시로 본격적으로 밀고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런 시점에서 광주사태는 중요했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 인민군대는 광주와 남조선의 전역에서 신호가 오면 즉시 무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군부가 우리의 활동에 대해서는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만 공수부대들을 진압군으로 대거 투입하는 바람에 무장폭동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문제가 생각 외로 불가능해 졌다.
남조선으로 드나들 수 있는 루트는 해상뿐만이 아니라 육지 쪽으로도 정교하게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고가는 데서는 큰 지장이 없었다.
광주에서 대학생들의 소요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우리 쪽에서 남조선에 나가서 활동하는 특수부대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남조선에 침투하여 단기 소부대작전을 하던 사람들은 게릴라전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광주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남조선시민들이 아니라 다 우리가 한 일이었다”
또한 그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훨씬 전에 북한군 특수부대인 61저격 여단과 62저격 여단에서 상당수의 소부대들이 남조선에 파견되어 있었고 61저격여단의 소부대를 인솔한 사람은 대대장 이봉원이라고 까지 구체적으로 증언하였다.
북한의 강건 군관학교(평양시 순안구역에 있는 보병군관학교) 출신의 한 탈북자는 광주사건 당시 투입된 병력은 모두가 다 태천 군관학교(저격, 경보 병 지휘관들을 양성하는 특수군관학교) 출신들이었다고 말한다.
광주사건에 남파되었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비석은 강원도 김화(북한군 5군단 지역) 인근에 안치되어 있고 61저격여단의 소부대를 책임지고 남파되었던 대대장 이봉원은 광주사건 이후 북한으로 귀대하여 김일성으로부터 공화국 영웅칭호와 함께 일당백이라는 별도의 칭호를 받았으며 태천 군관학교 소장으로 승진했다고 하였다. . . ,
남조선에 와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만일 광주의 무장폭동이 성공하여 북한의 사주를 받는 김대중을 비롯한 친북좌파들의 손에 정권이 넘어갔으면 지금쯤 한반도는 어떤 식으로든 통일이 되었을 것이고 그 통일은 자유민주주의 통일과는 거리가 먼 북한체제가 지향하고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적화통일이었을 것이다."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에서 무장폭동이 전개되기 바로 하루 전인가 이틀 전에 그 책에는 광주라고 정확히 대상은 지명하지 않았지만 남조선의 전라도 지역에서 대규모의 반정부 인민항쟁이 일어난다는 내용과 함께 전당, 전국, 전민이 여기에 동참할 수 있는 만단의 태세를 갖추며 공장 기업소들은 생산라인을 군사지휘체계로 긴장하게 운영할 데 대해서 지시하였습니다. . .
바로 이틀 뒤인 5월 19일 아침 노동신문을 비롯한 각종 신문에는 드디어 남조선에서 우리 공화국 북반부 인민들이 학수고대하던 전 인민적인 무장 항쟁이 일어났다고 대서특필하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광주의 무장폭동 첫 시작부터 얼굴을 가린 광주의 계엄군들이 부녀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장면들을 반복해가면서 집중적으로 내보내었고 광주무장폭동이 남조선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지금이 바로 통일의 대 사변을 맞을 수 있는 기회라고 폭동 전 기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변을 토했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광주시내에서는 폭동참가자들을 싫은 장갑차와 트럭들이 위엄을 내 뿜으며 무질서하게 질주하였고 길거리에 나섰다가 괴뢰군들에게 붙잡힌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은 개처럼 질질 끌려서 차에 태워졌습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은 임신을 하여 만삭인 여인의 배를 총창으로 갈라서 태아를 꺼내는 모습과 벌거벗은 젊은 처녀의 팔을 도끼로 자르고 어떤 새파란 아가씨의 옷을 홀딱 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한 목소리로, “국제적인 식인종인 미국 놈들의 식민지로 있는 남조선 괴뢰도당들은 정말 인간의 가죽을 쓴 짐승들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지독한 살인백정이라고 해도 어떻게 백주 대낮에 여자들만 골라서 발가벗기고 도끼로 내리쳐서 죽이며, 살겠다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처녀의 젖가슴까지 도려낼 수 있단 말인가” 라고 규탄하면서 남조선괴뢰군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정말로 이빨이 갈리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국적인 공장 기업소들에서 청년조직들은 매일과 같이 남조선 괴뢰도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주먹을 휘두르며 복수를 다짐하였습니다.
눈 뜨고 멀쩡한 정신으로는 차마 볼 수 없었던 그 때의 치 떨리는 장면들은 내가 땅속에 묻혀도 영원히 잊지 못 할 정도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5.18광주폭동에서 저질러진 살인 만행들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들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만들어진 내용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놀라움과 함께 경악을 금할 수 없었었습니다.
아무리 통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야만적인 살인 자작극까지 만들어서 남조선 인민들을 이간질 시키고 순진한 사람들을 죽게 만들 수가 있었는지, 한평생 북한체제에서 세뇌된 머리지만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그 앞잡이들이 민족 앞에 또 하나의 역사적 비극을 만들었음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광주사건은 김일성이가 남조선에서 일어나는 평화적인 시위를 이용해서 친북좌파세력들과 짜고 인민군 특수부대들을 내려 보내서 만들어낸 사건입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무장폭동을 전후로 북한의 민간사회에서는 별의별 이상하고 흉한 소문들이 다 나돌았습니다.
남조선에 파견되었던 특수부대 전사들이 다 죽고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등 누구네 집 아들은 광주에 갔다가 죽었는데 당원증만 집으로 보내어 왔고 또 뉘 집 친척의 아들은 남조선에서 죽은 시체는 못 가져 오고 손목 하나만 잘려서 들어왔다는 식으로 참으로 광주사건과 관련된 하도 많은 이야기들이 항간에 많이 떠돌았습니다.
당중앙위원회에서 간부들에게 보내는 지침서에서도 광주무장폭동에 참가한 동지들은 조국통일을 위하여 크게 헌신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하는 것은 당에서 응당 해야 할 일이고 영웅 전사들의 모범을 따라 배우기 위한 운동을 강력히 전개해야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1만 톤 프레스와 같은 이름 있는 대형기계에 까지도 5.18광주무장폭동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5.18청년호 라는 명칭을 달아주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비극을 만들어 냈습니다.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이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 2월 16일,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일군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직부지도원은 광주사건 당시 북한 해주시에 있는 대남연락소에서 근무하였으며 광주인민항쟁에는 소수의 대남연락소 관계자들만이 나가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그 목적이 광주라는 일방적인 지역을 노렸던 제한적인 작전이 아니라 남조선 정권 전복이라는 큰 그림이었던 것만큼 특수부대에서 잘 훈련된 사람들이 대거 투입되어 사건을 주도했다고 이야기 하였다.
북한 제3군단 승용차 관리소 정치부소장(남포시 연락소 초급당비서의 조카)은 동료와의 발언에서 광주사건에 개성시 연락소도 개입하였는데, 남조선 전역에서 인민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광주가 봉쇄되고 아군과 시민들의 대량적인 희생만 만들었을 뿐 최종적으로 실패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토로하였다."
"군단조직부지도원이 우리에게 들려준데 의하면 대한민국에 침투하여 광주사건에 직접 참가한 “북한전투원”은 자기들은 북한의 명령에 따라서 처음에 광주시에 들어가서 대학생들의 시위만 지켜볼 뿐 며칠 동안 전투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처음부터 주동적으로 나서서 과격하게 이끌어 가면 단번에 정체가 노출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 이유라고 한다.
광주시내가 해방되기 전까지는 뒤에서 조종을 하면서 광주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내는 작전을 수행하였고 광주가 해방된 다음부터 복면을 하고 주동적으로 개입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국군의 장갑차며 중무기들을 노획하여 봉기군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으며 무기와 각종 장비들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시가전에 맞게 주요 전투들을 조직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광주의 일반적인 시위를 무장봉기로 확대하는데서 자신들이 빌미를 제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절대로 가능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당사자 본인의 설명이었다는 것이다.
능력적으로 대학생들과 함께 시민들이 완전무장한 정규군과는 절대로 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항쟁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들이 국군복장을 하고 배후에서 시민군을 죽이고 시민군과 국군 사이를 철저하게 교란한 작전의 효과라는 것이었다."
"창고장(공화국영웅) 일행이 서울을 떠나서 광주시내로 이동했을 때는 폭동이 시작된지 이미 이틀정도가 지난 뒤였다고 하였다.
시내는 대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의 폭동으로 마구잡이 판으로 변해 있었고 각처에서는 전두환을 타도하라는 크고 작은 프랑카드들을 들고 데모꾼들이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것을 첫눈에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서울에서의 모습과는 정 반대로 광주에서는 정권에 분노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사생결단으로 진압군에 저항하면서 국가기관을 습격하고 광주의 ‘해방군’으로 등장해 있었다고 하였다.
창고장의 일행은 광주 인근지역에 있는 군수품공장을 습격해서 장갑차와 군용트럭들을 탈취할 때 북한에서 파견되어 나간 알 만한 사람들의 얼굴들을 적지 않게 보았으나 적후활동에서 지켜야 할 엄격한 준수사항이 있는 관계로 서로 침묵 속에 무언의 대화만 나누었다고 한다.
탈취한 장갑차는 시민군들이 기술부족으로 다룰 수 있는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북한에서 나간 특수부대요원들의 몫이었고 군용트럭들도 일부는 북한요원들이 사용하면서 대부분은 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기동성을 보장하게 하는 한편 항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땅굴은 시멘트로 구축해서 영구화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고 규모는 탱크(북한말로 땅크)나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폭 정도는 안 되지만 순수 전투부대들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남한의 어느 지역까지 와서 갱도바깥으로 나왔는지는 한밤중이어서 지도상으로 계산해도 잘 알 수 없었다고 했고 밤중에 살펴봐도 주위가 한산한 농촌마을은 분명하였다고 하였다.
남쪽 갱도의 출입구에서 그들을 마중한 것은 두 늙은 내외라고 하였다.
소부대작전은 주로 대낮보다는 밤에 진행되는 것이 관례지만 23명이라는 인원이 밤길에 동시에 움직이면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분명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여러 개 조로 분산되어 전라북도지역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344쪽 하1줄-345쪽 10줄)
2) 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눠주는 장소에서 광주시민 한 사람한테 정체가 노출될 번한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여성(대학생정도로 생각했다고 하였음)에게 무기를 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쌍간나 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머하고 서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남조선 사람들과는 어떠한 대화도 주의해야 한다고 사전에 작전에 침투되기 전부터 상급으로부터 언질을 받았지만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괴뢰군”이라는 표현과 같은 북한말을 하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앞에 있는 여성이 자기의 말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봐서는 무언가 다른 것을 눈치 채지 않았는지 불안한 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복면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으니 그 여성은 그의 정체를 충분히 의심할 만도 한 일이었다.
“나는 강원도 태생이야요. 광주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야요” 그는 그 여성에게 자기가 강원도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다가 전라도 광주로 돈벌이를 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여성은 그가 아무래도 수상해 보였던지 총을 받지 않고 이내 골목 쪽으로 줄행랑을 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냥 놔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는 무기를 나눠주는 일을 대원에게 눈짓하고 젊은 여성의 뒤를 다급히 쫒아 갔다고 한다.
개인 살림집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을 따라 여자의 뒤를 쫒던 그는 대문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발견하고 그리로 달려갔다.
여자가 들어간 대문밖에 도착해서 잠시 안의 동정을 살피는데 여자가 집안안의 누군가에게 벌써 자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복면을 한 이상한 사람들이 만이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히 아니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 같아보였어요.”
순간 귀가 멍하고 가슴이 철렁 하였다.
적후에서 이런 순간에는 어떻게 행동하고 상황처리를 해야 하는지 그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환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좀 전에 만났던 젊은 여성과 그의 동료인 뜻한 남성이 마주서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성은 대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자기가 금방 말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남자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가 총을 꺼내드는 순간 위험을 눈치 챈 남자가 도망치려고 집안 담장으로 뛰어 올랐다.
그는 남자를 향해 총탄 한발을 쏘았다.
담장 밖으로 도망치던 남자가 총에 맞고 떨어지는지 소리가 쿵 하고 들렸다.
그는 파랗게 질려있는 여성의 가슴에 총탄 두발을 날리고 남자가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 쪽으로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피자국은 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핏자국이 향한 방향으로 따라가니 허벅지에 총을 맞은 남자가 몇 미터도 못가서 신음하면서 골목길에 쓰러져 있었다.
그가 총을 꺼내서 들이대자 남자는 절망에 휩싸여 어디 가서 절대로 말하지 않겠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고 한다.
그는 살려두면 절대로 안 되는 그 남자의 심장에다가 총탄 한발을 쏘아박고 그 자리를 신속히 피했다고 말하였다."
"중앙당에서 내려온 지도검열부장은 광주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확실한 계획에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남연락소가 아닌 조선인민군 정찰국과 특수부대들을 비롯한 전투무력들을 직접 광주에 파견하여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도울 데 대해서 특별히 지시하고 진두지휘까지 했다고 하였다.
광주인민봉기에 참가하였다가 살아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은 사람이 광주사건의 내막을 증명하는 것도 물론 놀라운 일이었지만 중앙당의 한다하는 위치가 있는 간부의 입에서 광주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소리가 나왔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전국적으로 광주인민항쟁의 여파가 퍼져나가게 만드는 것이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임무였지만 생각처럼 사건이 번지지 않자 북한에서는 현장에 파견된 특수부대 요원들에게 될수록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고 주도적으로 폭동을 유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하였다.
북한으로 부터 새로운 지시가 떨어지면서 특수작전요원들은 시민군들 속에 위장 침투하여 본격적인 살인, 파괴활동을 조작하면서 광주시민들을 자극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광주인민봉기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 실제로 진압군에게 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요원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었다고 공화국영웅의 말을 빌어서 친구는 말했다.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원들의 정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눈치를 채거나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만 하면 그들은 두말없이 즉석에서 시체가 되어 처리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르지 않거나 그들의 요구에 불응해서 도망가면 그 사람들 역시도 절대로 살려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5.18광주사태 당시에는 북한군 전 부대가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우리부대도 진지에 나가서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에우면서 신발도 못 벗고 대기상태에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2시간씩 진행하는 정치상학시간에는 방어사령부에서 나온 정치소조 원들이 남조선광주에서 일어난 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북한의 계획된 작전이며 많은 특수부대들이 침투해서 남조선괴뢰군들을 제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무장시켜 인민항쟁을 지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광주폭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때를 맞추어 대규모 특수부대가 남조선으로 침투해서 전면전을 피하면서 배후교란작전으로 주요시설물들을 파괴하면 사회혼란이 조성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남조선해방은 거의 확정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평양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알려주던 말대로라면 남북통일은 아무리 길어야 몇 개 월정도 안팎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더 있습니다만 이만 올리며 적어도 이 내용들을 보며 5,18 당시 광주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든 처절한 살육의 진정한 원흉이 누구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거 퍼 오실때는 소스도 제공을 해주시는 친절함
이 필요한데요.!
왜냐면 제가 써도 이정도는 쓸수 있거던요.!
김대중이가 지령을 받았다.!?
분명 이사람은 대한민국의 최고권력자의 위치까지
간 사람인데요.!
1980즈음에 종복을위해 북에서 지령을 받을 정도의
사람이.
최고권력자가 되었을땐
북과의 사이가 나뻤었나 봅니다
원조만 한것 보면요.!
산노루님에게서 이렇게 천한 지역색 발언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습니다.
제게 성급히 충고를 말씀하시기 전에 스스로의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차별의식부터 없애시길 충고 드립니다.
전라도의 형님, 동생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고요? ㅋㅋㅋ
참 재밌군요. 그런 마초적 문화라면 경상도도 못지 않잖아요?
그쪽 사람들도 '행님', '동상' 많이 하던데요?
저같은 서울 샌님이 보기엔, 산노루님께서 말씀하시는 전라도의 형님문화나 경상도의 '우리가 남이가~'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 욕하는 것은 참 양심없는 짓입니다.
그동안 지역감정에 힘입어 이익을 본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경상도 사람과 그 지역입니다.
전라도 지역 가보셨습니까?
요즘은 조금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거긴 될법한 공단 하나 없습니다. '택시 드리버'라는 연극의 대사를 한마디 밀려 말한다면 '호남지역은 하다 못해 고속도로마저도 새멘바닥'이예요.
제가 처음 차를 이용해 여행차 전라도 일대를 갔을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전에도 경상도 지역은 자주 간 적이 있는데, 전라도 지역을 경유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 '지방이 낙후되었다'라는 말이 어떤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어요.
이 지역도, 저 지역도 아닌 제 3자인 제 입장에서 볼 때, 마땅히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비록 그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피해자 입장인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앞서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인간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측은지심은 커녕 되려 그 지역 사람을 싸잡아 참담한 폄훼까지 하다니, 그건 양심이 없어도 아주 심하게 없는 겁니다.
별 근거도 없는 지역감정을 부추키는 말씀을 이리도 태연히 말씀하시는 분께서 보는 '광주민주화 운동'이야말로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만.
님 글을 보니 한숨이 나오는구려.
애초 님이 주장한 바가 있었습니다. 5.18은 신군부가 기획적으로 발발시킨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기본 구도 아래 당시 유일하게 군을 투입한 것도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도 그런 목적에 따른 조치들였다는 식이었고요.
5.18의 단초인 군의 강경진압이 다른 곳과는 달리 전개되어 살육전까지 갔었을까에 대한 가능 요인들 중 하나로 님의 논리 보다는 위 꼬리글 중 뒤에 부분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을 법 하여 인용해 온 것을 알 것이언만 저게 지역감정을 부추길 목적였다고 몰아 가는군요.
당시 유일하게 군이 투입된 지역이 광주였다고 주장하다가 그게 아니었다고 하니 그것엔 일언반구도 없이 지역감정론이라...참 어이가 없습니다. 얼렁뚱땅 엮어가는 그 궤변이 대단도 하시고요.
영호남인 간에 지역감정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런 글을 두고 호남인들에 대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라고 표현하는 님이 정말 궁금합니다.
모쪼록 세월이 흐르다 보면 5.18 광주의 진실은 좀 더 명백해 지겠지요. 한번 지켜 보십시다.
그리고 향후엔 제 글엔 님의 꼬리글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세상에 뭇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이왕이면 말이 통하여 마음 편한 이와의 대화가 누구에게나 나을테니까요.
니가 안 잡아 먹었다고 남들도 안 했을것이라 단정하지 마세요.!
불을 피울때도 연기 안나게 피우고.
굳이 불 피울필요도 없습니다.
전문 산악이들이 사용하는 코펠 및 버너 다 있어서 아무 문제 없어요.
식량을 자체조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준비를 해가요
그리고 먹는것도 공수부대는 보급이 굉장히 잘되요(장비도 그렇지만)
모르면 아갈 닥치고 그냥 지나가시는것도 현명한 방법입니다
님의 부친께서 원사이시니 군에 대하여 많은것을 알고 계시겠지만
때로는 모든것을 정확하게 안다는것은 아닐것입니다.
님의 논리라면 현재의 대검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뜻이됩니다.
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현재의 대검은 베지는 못합니니다 하지만
찌르는 자상은 깊이 입힐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수전 부대는 총검술은 안합니다.
나름대로 부대마다 독특한 무술을 개발하여 이름 붇이고 있습니다
특이한것이 반드시 "대검형" 내지는 "단검형"이라고 불리는 무술이 있습니다 대검가지고 하는것이죠 거기에는 찌르는것만 아니라 베는형이 형이있습니다.
현재의 대검가지고 베어지지는 않죠.. 그의미는 상황이 발발하면 적당히 날을 세우라는 의미입니다.
부대원 에 대해 말하면 이런것도 안 믿겠죠?ㅎㅎㅎ
절대 밖으로 안 새어 나갑니다
헌병에 잡혀서 실형을 받았고
그정도면 9시뉴스 메인감인데
언론은 조용하더군요.!
믿던 안 믿던..모든건 본인의 자유입니다
원사? 육군 행보관 말씀하시나요?
군인입장에서 군인을 변호 하겠죠.!
그리고 하나 물읍시다
아직 어린것 같은데
무식한 시민들이 선동질 했다고 칩시다
그걸 진압할려고 공권력이 국민을 상대로 공수부대를 보내는게 정당한겁니까?
진짜 무식한 사람들 많네요.!
그냥 웃을게요.!
대검이 특별한 무장??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보급도 안되는거고..귀한건데요
그거 남자한테 얼마나 좋다고요
그리고 실탄으로 멧돼지 잡았다는 말은 언급 안하지 안았습니다
이건 진짜 미친거죠.!
뱀은 좋아하는 사람들 많았습니다.!남자한테 좋다면서.
나도 첨에 반신반의 했는데
그날 소주 대꼬리 하나 먹은거 같어요.!
그러면서도 담날 쌩쌩
입만 앞서는 젊은이 정도??인것 같네요.ㅋㅋㅋㅋ
뭐가 순서가 잘못된것 같은데요.
공수부대가 학살을 하니 시민들이 들고 일어 난것입니다.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공수부대가 투입이 된것이 아니고요
그리고 18게리님이나 지인님은 특수전부대 안나왔으면 찌그러져 계세요 .
뱀을 배고파서 쳐먹는것 아니니까요...
우린 배불렀어도 먹었습니다.
니가 안먹으면 다 안먹은줄 아세요 ?
진짜 이정도일줄이야.!ㅋㅋㅋㅋㅋㅋ
막사? 내부반 말하는거죠?
독신자 숙소 있고..
요즘은 건축자재로 사용을 하지 않지만
석면으로된 천장 마감재로 된것은
드라이버만 있으면 바로 풀었다 다시 붙일수 있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본인이 안봤다고...못 믿겠으면
그냥 아가리 닥치고 지나치시는것 괜찮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만 할때도 되않았나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긴 그게 정권유지하는 힘이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기와 생각다르면 빨갱이고 간첩으로 몰고는 습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사람은 참...
군대에서 행정 해서 그런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수는 13명 비상시 13명중에 한명이 대검을 갑니다.!ㅋㅋㅋㅋ
아~~~~~~~~~~~~~~!!주...자기 기준..ㅋㅋㅋㅋㅋ
당신 아버지 원사라면서요?
아버지한테가서 공수 1개 중대 병력이 몇명이냐고 물어보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만약에 아버님 모르시면.
군생 헛 하신것입니다
아니면 본인이 맡으신 업무 이외에는 관심이 없으시던가..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압하러 가는데 오대기가 가나요 ㅋㅋㅋㅋㅋㅋㅋ
어디서 주서 들은 소리 하다가 더이상 창피 당하지 마시고 전 자러 갑니다...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겠네요
전 분명히 1개중대만 비상걸린다는 말 안했습니다.
그냥 중대 병력이 13명이라 했죠..
조금씩 감이 오네요
지능이 정상인분은 아니라는 느낌이...
그거 난독증 고칠수 있다고 하던데..ㅋㅋㅋㅋㅋ
지금 대검 논란도 본질적으로보면
님의 난독증에 의해 비롯된겁니다
제가 오늘 시간이 남아서 그부분 지적안하고 친절하게 답변해드리는겁니다.ㅋㅋㅋㅋㅋㅋ
갖고 노는 재미도 있고 해서요.ㅋㅋ
미쳤다고 얘들이 대검 날을 세웁니다.ㅋㅋㅋㅋ
안그래도 바쁘 얘들인데
평시에는 안해도 되니까.평시 보직은 아니고요
대검이 날이 안세워진 상태에서
부대로 들어옵니다.!
비상걸렸을때마다 지속적으로 날을 세우는거죠.
중대가 10 또는 11명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공장에서 나올때 날 안세워서 나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군 박사 자체 새거 안 뜯었냐??
지뢀병신짓도 좀 적당히 해라.!
니가 군생활한 것만 진실이고 진리냐?
하긴 이러니까
아비가 광주사태.
시민들 선동질이라니까.
그걸 고지고때로 믿지..
병신같이..
원래 싸움에 진 개가 짖는 법입니다...
진작 좌빨 패턴으로 나오셧쎼요?
말 놓길래 같이 놓은건데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좌빨은 뭔가요?
오늘 부로 저 빨갱이 되는건가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지가지 하시네요..ㅋㅋ
군 구성원은 군사기밀이 될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인님은 한국의 공수부대를 미국의 101공수 사단과 같은개념으로 이해하는것 같습니다.
적군과 맞붙어서 직접전투하는..
병력이 소수인것에 대하여 이해를 못하는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런사람에게 이해하고 상대 할려고 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자인님이 어디 사단 수색대만 나와도 이해 할것입니다.
작전의 개념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군요..ㅋㅋㅋㅋㅋㅋ
군인이 사용하는 중화무기를 빼치카위 테라스에 몰래 숨겨놓는다고 하지를 않나? 훈련나가서 산짐승,들짐승을 술안주로 잡아 구워먹고 삶아먹었다고 하지를 않나? 여기 고정간첩으로 들어난 사람이 두놈 있죠..Garry,더원...ㅋㅋㅋㅋ.. 수류탄,총,총알,대검을 하전사 개인이 보관한다면 지들 마음대로 사회에 가져나갈수도 있겠네? 안그래? 대한민국 군대가 병사들 개개인에 개인무기를 지급하면 그걸로 땡하고 병사들 개개인이 관리해? ㅋㅋㅋㅋ.. 그럼 지금 사회에 수천만정의 총과 총알,수류탄등 개인화기가 돌아다니겠네? ㅋㅋㅋㅋㅋㅋ...그리고 군인이 훈련가는데 코펠과 버너를 메고 다녀? ㅎㅎㅎㅎ...당신이 근무했다던 특전사는 대한민국 특전사가 아니라 저기 달나라 특전사요? ㅋㅋㅋㅋ... 이봐 특전사고 특전사 할아버지고 군인이 훈련을 받으면 실전과 똑같이 훈련을 받는거야.. 알어? 미쳤다고 코펠,버너를 무겁게 들고다니냐? 그러면 휘발유도 메고 다녀야겠다. 안그래?
요즘 인터넷에서 간첩들이 활동한다는것 다 알어.. 일반 국민들이...짱구야!! 니들이 사회혼란 일으키고 소요일으키고 우리 국민들 분열시킬려고 하는것 다 알고 있다고..저기 북한 군대는 군복무중 산짐승,들짐승 술안주 하려고 잡아먹고 부대내 막사위 지붕사이에 병사들 개인화기 숨겨놓고 그러는줄 모르겠는데 남한군대는 그렇게 관리안해..ㅎㅎㅎㅎ.. 공작을 할려면 좀 잘아와서 공작을 해라!! 이 바보 간첩놈아!!ㅋㅋㅋㅋ
대통령 경호작전 나가서도 라면 끓여 먹었습니다.
존나 군기빠지게 겁대가리 없이..
코펠에 버너가 좋은게 뭔지 알아요 ?
연기가 안납니다.
흔적 제거 금방합니다.
정확하게 버너 코펠에다 라면 끓여 먹었습니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콤퍼지션은 아마 지금도 조금씩 짱박아 놀걸요..
카운터 스트라이크라는 자인 고딩은 콤퍼지션이 뭔지 알걸요.
지금은 정식명칭이 5공수가 아닐거야
전역후 부태가 바뀌었다.설명하고 싶지만 더이상은 곤하다
그리고 병사라는 말은 좀 빼라..ㅋㅋ
니들이 징병제로 가는 허접한 부대가 아니라니까..ㅋㅋㅋ
18게리나 자인 둘 말하는거 수준을 알아.
딱 사병 권한 범위내에서 말하는거야 니들은.
이곳에 국정원및 기무사 관리 사이트일거다
그래서 함부로 더 세밀한 정보를 언급 안 하는거다..ㅋㅋ
암튼 아가들..ㅉㅉ
그리고 버너는 휘발류나 가스 연료가 아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전문 산악인"들이 사용하는거라고 했지..ㅋㅋㅋ
위에서 몇번 말했잖아
모르면 그냥 아가리 닥치고 지나가게 현명한거라고..ㅋㅋ
주어들은 말가지고 뻥티기지 말았으며 합니다
처음에 마산사태가 처음 일어나서 군인과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산사태가 일어났지요
사실 이때까지만해도 군부독재 타도라는 전형적인 데모였습니다
그다음 광주에서 발생했는데
광주시민들중 동참하는 사람들이 얼마없자 유언비어를 퍼트립니다
경상도출신 병사들로해서 광주시민 죽이러 온다고요
지역감정을 이용하기 시작하지요
그러던중 그 당시 양평에 있던 00사단이 탄약휴대를 않은채 광주에 열차로 도착하려던 순간 폭도들이 급습해서 많은 병사들이 초죽음이 됩니다
과 과정에서 사단장도 폭도들에게 끌려나가 두들겨 맞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고 그 무렵 경찰서 무기고가 일제히 폭도들에 의해 탈취되었스비다
그 사건이후 일반 군부대는 철수하고 00공수부대가 진압봉만 가지고 진압하다가 폭도들의 총질에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고
그 다음부터 무장한 다른 00공수부대(특전사)에서 진압작전에 들어갑니다
물론 그당시 광주시내의 치안은 무질서 그자체였구요
동네 불량배들이 총기를 들고 마을에 내려가 돈 뺐고, 여자 강간하고 자기끼리 총질해서 죽은자도 엄청 많았습니다. 그야말로 엉망이었지요
사실 그 당시 군인들은 이동중 서로 확인이 안되어서 군부대끼리 충돌하는 사태로 많이 죽었구요
광주시내에서는 폭도들에 의해 죽은 민간인이 많았어요
전라도 사람들외에는 김대중선생 만세를 열번이상 큰소리를 외치지 않으면 차량에는 기름을 않주고 사람들에게는 죽을 정도로 폭행을 했습니다
아닌가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이야깁니다
물론 시내 한복판에서는 국가를 상대로 지역감정에 분개한 시민들과 뒤에서 유언비어를 퍼트리던 빨치산의 후예들과 북한 간첩들의 조정이 있었구요
저도 그당시 전두환 엄청 싫어합니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진실을 이야기 해야 하니까요
사실 부마사태는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어도 광주사태는 분명히 지역감정을 이용한 폭동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왜 군인들이 시민(폭도)들 죽인거는 나쁘다고 하면서 폭도들이 군인들 죽인것은 왜 언론과 사회전반적으로 침묵하는 겁니까
그 당시 그곳에 갔던 나이어린 병사들이 무슨 잘못입니까
그들은 선량한 우리들의 아들이었고 그들도 우리나라의 국민이었습니다
그 당시 부대원들 중에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사람들이 다 섞여 있었는데 무슨 대검에 날을 세워 사람을 죽여 이 철없는 사람들아
제가 본것 또하나 이야기 해드릴까요 ?
광주은행 사거리가 있습니다
좀더가면 현대예식장이 있는데 주차장에 전경1개중대정도가
시민들을 피해 짱박혀 있는것입니다
그때 시민들은 무장도 안한상태였고 몽둥이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경들이 있는데도
시민들중 한사람이 "저 새끼들은 죄없어 공수부대 죽이러가자"라고 말하는것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이말은 이미 공수부대에 의해 학살이 자행된의 일이라는것입니다.
거기 나이어린 병사를 죽이게 한것이 시민 입니까 ?
전두환입니까 ?
토를 달 가치도 없는수준.
명령에 항명할 권리가 있나?ㅋㅋㅋ
군대 명령체계도 지역감정??
이건 개그지..
제가 쓴것은 소설이라 ㅎㅎ
그럼 한가지 더 이야기 할까요
전남도청 앞에서 폭도들에게 밀리던 특전사부대원중 일부대원들이 고립되자 도청앞 8층건물로 도망을 갔고 옥상까지 올라가다가 붙잡히자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병사들을 한명한명씩 집어던진 사람들이 전두환입니까? 폭도들이었습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저도 전두환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전두환 물론 나쁜*이였지만 폭도들도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김정일이가 전쟁를 결심하고 인민군에게 남침지시를 했다고 칩시다
그상황에서 남한군인 북한군을 죽였다고 칩시다
그럼 남한군이 개씨끼입니까?
전쟁일으킨 김정일이가 개새끼입니
까?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십시요
공수부대는 광주에 온 목적이 그냥 시위 진압하러 온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실재로 학살 행위를 했습니다
공수부대는 살려달라는 시민들을 살려줬습니까 ?
그것도 애국가 나오는데서 총질을 했습니다.
여기에 사진 올리는방법을 몰라서 안올리지만
증거사진 올릴수 있다면 그 잔학한 장면을 충분히 증거 할수 있습니다.
폭도라고 이야기 하지 마십시요
당신이 말한 그 폭도들의 죽음으로 당신이 지금말할 자유를 얻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들은 기본적으로 제가보기에는 양심에 문제가있는것으로 보입니다.
그증언이라고 하는사람들의 대부분은 역사의 현장에 있지도 않은 분들입니다.. 카더라~류의 말들을 증언으로 둔갑시켜 버린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전두환이도 나쁘시만 시민군들도 나쁘다는 양비론을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애초에 두세력이 대립되서 발생한것 이라면 양비론이 성립되겠지만 518은 원인에의한 전개 과정에서 발생한것입니다.
민간 방송인의 논리라면. 봉오동 청산리 대첩이 서로 죽였으니
일본군이나 독립군이나 똑같이 나쁜놈들이다 라고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때의 그 잔압군인 공수부대나 광주 시민이나 같은 피해자입니다
공수부대와 광주시민의 대립이아닌 ...
그래서 전두환이와 그일당들이 역사의 되는것입니다.
솔직히 공수부대가 뭔 죄가 있습니까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는것이죠
이 사이트 도대체 왜이래? 폐쇄시켜!!
그당시 광주에 투입된 대원들이
명령에 의해서 행동했다고
인정하는데.
산증인들이 있는데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사도 찾아가면서 부정하는건 뭔 시츄에시션?
대한민국 참 불쌍하다.
나는 다시 독재자가 나타나도 상관없는 사람이다.
아부하면서 살면 되니까.
내가 살면서 배운 지식이니라.
순국선열 분께 죄송할 따름이다.
대한민국 참 불쌍하다.
나는 다시 독재자가 나타나도 상관없는 사람이다.
아부하면서 살면 되니까"
한마디만 님의 위에 글은 많은 댓글 속에서 찾을수 없었던 정답 입니다.
산노루
민간방송
자인
18게리
니들 모두 온라인에서 찌질대지말고
오프에서 그딴소리 지껄일수있는 용기가있는 넘들인지 궁금하다..
내앞에서 그딴 망발 지껄이는 넘들은 한넘도 본적이없어서 말이다.
오프라인에서 아무곳에서나 그딴소리 지껄이지말라 잘못하면 뒈지는수가있단다.
저위에 사회주의 애찬론가들! 이땅이 싫으면 넘어가서 살어!! 아니면 여권나오는 중공으로 합법 이주 하시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