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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한 공기의 사연
Korea, Republic o 수전노 0 394 2009-11-05 19:27:14
죽 한 공기의 사연


우리 탈북자들이 한 번쯤은 불러 봤을 이 노래




장군님 안 계시면 조선은 숨졌으리

장군님 안 계셨으면 우리도 없으리라

한 공기 죽도 드시며 인민들 찾아가시는

고난의 행군 그 정신을 우리는 잊지 않으리

.....



중간쯤에 자리 잡은 곳에서 한 아주머니가 부르는 노래는 전체 승객들의 심금을 울리며 합창으로 이어진다.

에어컨도 없는 숨 막히는 버스에서 각계각층의 인파들이 모여앉아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니 어쩐지 나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1997년7월 말 몇 년째 계속되는 식량 공급중단으로 하나 둘 팔아먹은 집 가산도 이제는 바닥을 쳐 더 이상 돈이 될 만한 것도 없는 집안은 누구 말대로 나무막대기 휘둘러도 걸릴 것이 하나도 없다.

방바닥은 시멘트가 없어 불이 잘 들지 않아 여기저기를 뒤져 보았지만 진흙으로 땜을 해 놓아 그 것이 말라 먼지가 날렸고 장판지도 없어 노동신문지를 붙였건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 마저도 진이 다 빠져 너덜너덜하며 돈을 달란다.

무슨 놈의 빈대와 바퀴새끼가 기승을 부리는지 사람이 먹을 것도 없는데 더 많이만 늘어난 것 같다.

집에는 이가 빠진 사발 몇 개와 4인분의 수저만이 전부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일명 꽃분이 살림.

이제는 집까지 헐값으로 팔고 한지에 나 앉을 수밖에 없는 처지, 참으로 기약할 수 없는 고난의 행군의 그 끝은 어데 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직장에 나가 허기진 배를 그러안고 김을 매고 있는데 반장이 찾아 집으로 가보라고 하고 그의 인상에서 묻어나오는 이상한 느낌을 안고 호미를 버리고 집에 달려 가보니 이게 글쎄 웬 일이냐?

언제나 자식들이 배가 굶을 것을 생각하며 잘 살았다던 70년대에도 늘 식량이 모자라서 시라지 밥을 하면 누룽지만 드시고 계시던 어머니가 차디찬 방 한 가운데 조용히 눈 감고 계신다.

동네 어르신 몇 분이 앉아 있고 내가 숨 막히는 심정을 가까스로 누르며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건만 꼭 다문 입술은 파랗게 색이 변하고 왜서인지 입을 열지 않으신다.

어머니 머리 곁에 있는 밥공기가 파리 습격으로 허술한 신문지 한 장을 덮어놓았는데 그 것이 먼지 날아 어머니 숨구멍으로 들어 갈 것 같아 살며시 열어보니 멀건 보리죽이 반 남아 있었다.

가공도 제대로 하지 않아 절구로 어제저녁 어머니가 집적 찧어 아침에 죽을 쑤어 나에게 두 그릇을 먹여주시던 어머니였는데 불과 몇 시간이 지났다고 자신에게 차례지는 죽 반공기도 드시지 않고 이렇게 눈을 감고 계실까?

아마 일 나간 자식에게 그 죽도 주려고 하셨던 것 같다.

보리 겨가 그대로 있는 죽이건만 이런 죽도 먹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던 그 시절, 그런 고통을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시던 분을 이렇게 잃고 보니 억장이 무너지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7살 때 학교에 입학하여 첫 학부형 총화를 하는 장소에서 내가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칠판으로 나가 구두를 써 놓고 읽으라고 하자 큰 소리로 지시봉을 지고 (도마도)라고 읽어 수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를 해주었건만 어머니는 나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그만하면 장하다. 엄마는 네가 앓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는 모습이 더 대견스럽다)라고 하시던 나의 어머니.

세월의 눈비를 다 맞으며 우리 7형제를 어엿한 일꾼으로 키우려고 검은 머리 파 뿌리 되도록 따스한 이밥 한 그릇 잡숴보지 못하신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새벽 5시면 먼저 일어나시어 담배를 가공하시려고 일을 시작하여 저녁 11시까지 땀 흘리시며 하여도 1달 수입이 부족하여 7명의 사내자식들에게 옥수수 밥 한 공기 배부르게 먹이지 못한 것이 목에 걸려 늘 한 숨만 쉬어오시던 불쌍하신 나의 어머니.

추운 겨울 날 손이 얼어 온 나를 찬물에 넣어 입으로 녹여주시고 따스한 아래 목에 옥수수에 시라지가 섞은 밥이라도 놓아 자식들의 속탈이라도 날세라 세심하게 살펴주시던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이 세상 선한 자식 낳아 키운 선한 어머니 따로 없고 이 세상 악한 자식 낳아 키운 악한 어머니 따로 없거늘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7명의 자식 중 3명이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기막힌 현실 앞에 가슴 속에 재만 가득히 남아도 눈물 한번 자식들에게 보이시지 않으시던 존경하는 나의 어머니.

어머니의 그 신념 그 강직성이 있어 나는 사회를 알고 어머니를 알았으며 인간들을 알았다.

나 몰래 밤마다 비개를 적셨을 어머니의 그 눈물, 한 동이가 넘었을 어머니의 눈물과 아들의 장래를 바라시며 하시던 그 목소리는 산천초목이 변하여도 변하지 않는 노래가 되어 다 같이 울고 웃던 노래로 나의 심장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갈라 터지고 피멍만 남은 어머니의 손을 만져 보면서 60세의 젊은 나이를 이렇게 굶겨 사망하게 한 이 아들, 배 가죽이 보태지 않고 등 뒤에 가 붙고 뼈만 앙상하게 남으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얼마나 힘겨우신 고통을 감수하였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맞아 죽거나 얼어 죽는 것도 아닌 굶어 죽는 고통이야 얼마나 참담한지 아마도 배가 고파보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고통을 아들에게도 내색하지 않으셨으니 나 또한 불효막심한 자식이다.

갑자기 어머니의 입술이 떨고 계신다.

나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이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나가야 한다고 말하시는 것 같다.

이 사나이의 두 손으로 연약한 어머니에게 이밥 한 그릇 대접시키지 못하는 가긍한 처지를 생각하며 나오는 눈물을 나는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누워 계시던 자리를 걷어내고 보니 먼지가 오르고 빈대와 이들이 버글거린다.

이렇게 졸지에 어머니를 여이고 살 길 찾아 행방 길에 오른 이때 아낙네들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니 어머니와 함께 왜 김정일이가 불쌍하게 생각된다.

우리 어머니와 같이 불상한 인생들과 동고동락 하시는 장군님이 오늘도 죽 한공기로 연명하시며 현지시찰을 하는 모습을 그려보니 이 세상 그 어느 지도자도 따를 수 없는 위대한 어버이를 내 한생 끝까지 따르고 받들리라.

나 역시 행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웃음을 피어나갔다.

혜산에서 삼지연 가는 노상에 압록강연선을 따라 백두산 방향으로 올라서는데 포태라는 곳에 이루어 보니 갑자기 버스가 멈추더니 노상에서 200미터 옆 좁은 도로로 물러서라 한다.

2월의 찬바람에 군관 띠를 차고 털 솜옷을 입고 무선전화기를 멘 사내들이 손에 자그마한 빨간 깃발을 들고 통제하고 있고 이들을 못 마땅히 여긴 3명의 버스 승객 군인들이 술을 먹고 반정신에 그들에게 시비를 걸고 달려들자 한 사내가 그들을 순간에 쓰러 눕힌다.

그 광경에 모두가 겁을 먹고 범상치 않음을 느끼며 차를 대피시켰는데 우리 차 뿐 아니라 벌써 수 십대가 대기하고 있다.

이렇게 추운 겨울 노상에서 6시간을 묶여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명 1호 행사라고 하는 김정일의 현지시찰이 진행되는 시간이었다.

이런 시찰에서 우리 어머니가 새끼들을 위해 드시지 못한 그런 죽도 같이 먹는다하지 않았나?

나는 어쩐지 그 분이 오늘도 죽을 먹고 혹시 빈혈로 쓰러지지 않으셨는지 걱정이 된다.

그 날 저녁 집에 도착하니 포태지구 산림단속초소에서 경비를 서던 앞집 어르신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자기도 오늘 1호 행사 땜에 군인들이 초소에 들어와 8시간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여 갇혀 있었는데 저녁이 되자 그들이 자기에게 통졸임을 던져주며 먹으라하여 뚜껑을 열어보니 흰 찹쌀 죽에 참깨기름이 얼마나 많던지 60평생 살면서 그렇게 맛있는 죽은 처음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군님을 호위한다는 그 군인들은 이상하게 통졸임에 있는 기름을 찌여 내며 찹쌀죽만 먹기에 그들의 하는 소리를 들으니 너무 느끼해서 이제는 먹기가 싫다고 하였다면서 그들이 버리는 기름이 얼마나 아까운지 몰랐다고 하였다.

소위 성분이 좋은 사람들로 환영객을 만들었다만 그들의 몸에 휴대한 라이터까지 쇠붙이라고 생긴 것은 다 빼앗아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도로 옆에 있는 집들에 운신 못하는 어르신들이 있으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백주에 자물쇠를 걸었고 그것도 믿지 못하여 보초병이 서있었다고 하였다.

김정일과 악수하는 상봉자는 몇 일전에 군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 분과 악수를 하면 미리 전에 소독약으로 손 소독을 하고 시킨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으니 참 내가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든다.

수하 군인들이 먹기 싫어하는 흰 찹쌀 죽보다 김정일의 먹는다는 죽이야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들어온다.

아마 어느 아첨꾼이 마치 그 것을 가지고 노래를 지어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을 감안하니 굶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와 김정일을 비교했던 내 생각이 민망스럽기만 하다.

아 우리어머니가 드시지 못하고 가신 보리 죽 반 공기와 김정일이 먹는다는 미지의 죽에 대한 의문은 언제면 이 세상에 알려 질까?

허나 비밀은 세상에 없는 법, 그 비밀이 시간 상 관계이지 반드시 드러나게 되는 세상이치를 우리 장군님은 아무래도 아셔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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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을 2009-11-05 23:23:48
    이 원한을 어떠케 다 갚아 줄고. ㅜㅜ힘 내세요. 이말 밖에는 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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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슴아파 2009-11-06 01:14:21
    수전노님께서 쓰신 죽한그릇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이 지난시기 다 겪은 일 이 되여 그런지 가슴이 져리고 눈물이 남니다.고난의 행군시기 강연을 듣으며 우리 장군님께서 우리 인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이 밥을 먹을수 있느냐"며 죽을 드셨다는 소리에 다 감동은 하면서도 그 죽은 우리가 먹는 죽과 다를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은 했댔습니다.남한에 오신 우리 탈북자들은 그러기에 더욱더 성공하여 보란듯이 통일되는 그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며 자식들에게 죽 한그릇 배 불리 먹지 못해 애타하시던 조선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야 합니다.그러자면 우리 탈북자들이 지난날을 순가도 잊지 말아야 하며 늘 감사하고 부지런히 착하게 살아. 우리 어머니들의 한을 반드시 풀어 들여야 합니다.그날을 위하여 모든 탈북자 형제 여러분!힘내시고 파이팅입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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