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광장

자유게시판

상세
위험한 순간
Korea, Republic o 수전노 2 414 2010-01-09 23:04:46
이 글을 탈북자들을 성심성의를 도와주신 모든 중국 조선족분들에게 삼가 드립니다.

잊지 못할 순간

고난의 행군이라는 이상한 칼바람이 지구촌의 폐쇄된 땅만을 강타하고 있던 1990대 후반기.
북한군 전과자와 생활제대라는 딱지로 최하층의 삶을 연맹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 밀수라는 것은 그나마 가족의 생계와 자유의 길을 조금씩 열어주는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사막의 오하시수와 같았다.
위험한 줄타기 놀음이라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밖에 없던 나의 버러지 같은 인생의 생활방식에는 언제나 슬프고 스산한 가시밭길만이 나타나군 하였다.
그러나 그 험한 길에서도 다른 이들이 나의 목숨을 건져 준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많고 많았다.
나는 그 많고 많은 순간들 중 한가지만을 쓰려고 오늘 펜을 잡았다.

1998년12월XX일
새벽5시경 중국 길림성 장춘에서 떠난 장춘-도문 행 열차는 높고 험한 교하의 등판을 숨 가쁘게 톱아 오르고 있었다.
북방의 새벽 찬 공기를 헤가르며 육중한 철마가 용트림을 내면서 최소한의 저항을 줄이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을 때 아무런 생각도 없는 취객들과 공부하는 대학생, 보따리 장사꾼, 출장 가는 사업가 등 다양한 승객들은 고단한 자기 몸뚱이를 조금이라도 쉬게 하려고 별의별 모양을 다하고 있었다.
온도 보장이 잘 되어있는 열차 안에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고 코고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고 동지가 금방 지나간 뒤라 차창 밖은 달빛이 꼬리를 감추어 칠흑 같은 어둠을 뿌려주고 있었다.
그 분위기 속에 유달리 행동이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두 젊은 사나이들이 있었다.
겨울 날씨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얇은 가죽잠바에 천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눈을 도사리고 있는 그들이 범법자라고 불리 우는 탈북자 나와 박XX이다.
박XX은 북한군 공군 상위로 XX부대 비행 기수였고 고향이 청진사람이었다.
1미터76센티미터에 축구 선수이고 미모 또한 뛰어난 그는 고모가 길림 시에 있는 까닭에 중국 형세를 잘 아는 내가 길잡이가 되어 그들의 상봉을 성사시키고 귀향하는 길이었다.
우리가 북한에서 떠날 때 놋그릇으로 된 골동품을 가지고 왔으나 20위안의 현금을 받고 겨우 XX시에 도착하였는데 그 곳에서부터는 기차로 가야하는 처지었으나 노자 한 푼 없으니 나와 박 씨는 생각하다 못해 그 곳 시내에 있는 교회에 찾아 들어갔었다.
마침 일요일이라 오전 예배가 막 끝나고 있었는데 우리는 한국인 목사를 만나자고 그를 따라 갔으나 자기 방으로 바람처럼 사라지고 내가 열리지 않는 문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소리쳤다.
“목사님! 목사님!”
몇 번 소리질렀으나 육중한 문은 꿈쩍을 안했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한쪽 구석 복도에서 안경을 낀 아가씨가 나오며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XXX목사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왜 만나자고 하는데요?”
갸름하게 생긴 아가씨의 냉철하고 반갑지 않는 소리.
“조선에서 왔는데 목사님과 상의 할 것이 있어 그럽니다.”
큰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제법 큰소리다.
“목사님을 그렇게 만나지 못해요.
이것이 교회의 규칙이에요.
절 따라 오세요.”
그의 엄숙한 태도에 심장박동소리가 쿵쿵 뛰며 엔진수를 가동시켜주었다.
나와 박씨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동시에 두 눈을 마주쳤다.
그를 따라 들어 간 것은 여라문명이 앉아 사무를 보는 방.
우리를 안내한 아가씨가 한 사내에게 귓속말로 뭐라 하였다.
“내가 이 곳 전도사인데 무슨 일인데요?”
30대 중반의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가 우리에게 접근하며 물었다.
“조선에서 왔는데 목사님을 만나보려구요.”
“목사님을 만나려면 저에게 먼저 얘기 하여야 합니다.”
그의 말은 친절했다.
갑자기 나의 뒤에 있던 박씨가 한 발 나섰다.
“군사비밀을 팔아먹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여드름이 많아 험하게 생긴 전도사의 얼굴이 갑자기 찌그러졌다.
“아니 여기 신성한 기독교가 남의 나라 군사비밀이나 뽑아내는 염탐꾼인 줄 아세요?”
그의 피부는 붉어졌고 핏대의 혈관이 당장 튀어날 것처럼 살아났다.
“안돼요. 돌아가세요.
이 사람들, 정말 안되겠구만.
경찰을 부를까요?”
이건 뭐 혹 떼러 갔다가 혹을 붙이는 상황이라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당장 터질 것만 같았다.
“저 사실 그런 것이 아니라 저의 아버지가 어려서 기독교출신이었는데 가장 힘이 들 때면 교회를 찾아가보라고 하여 오늘 이렇게 찾아왔어요.
이 친구의 고모 되시는 분이 길림에 있어 그 곳으로 가야겠는데 노자도 없지, 말도 모르지, 길도 모르니 이럴 때 하느님이 도와주면 안 되겠어요?”
마치 하느님에게 무엇을 맡긴 것을 달라는 식이었다.
“그럼 그렇다고 처음부터 말을 그렇게 해야지 군사비밀이 뭐에요. 군사비밀이.
나 참.
오늘처럼 당신 같은 사람들은 처음이요.”
그의 말의 강도가 다소 누그러들었다.
“친척 분들 주소를 주세요.”
박 씨가 주머니에서 깨알 같이 박아 쓴 손바닥만한 북한산 나무 톱밥으로 만든 진이 다 빠진 허름한 종이를 꺼내놓았다.
그러자 냉큼 그 것을 빼앗아 쥐더니 자기 책상으로 돌아간 전도사가 이내 A4용지 두 장을 가져와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멍하니 쳐다만 본다.
“여기에다 집주소와 이름 나이를 쓰세요.”
나와 박 씨는 손님 접대용 소파에 앉아 거짓으로 이름과 나이 집주소를 썼고 10분정도 기다리고 있을러니 전도사가 어데 갔다 다시 나타나더니 나오라고 하였다.
인적이 드문 복도로 데려가더니 그가 말했다.
“여기서 길림까지 기차요금이 20원이면 한 사람이 충분하니 70원이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이 돈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주는 것이니 언제나 하느님의 은공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50위안짜리 한 장과 10위안짜리 두 장을 주며 사리정연하고 또박또박 침착하게 말했다.
생각지도 않았고 평생 한 번도 쥐어 본 적이 없는 큰돈을 공짜로 쥐고 보니 갑자기 심장은 떨렸고 목이 메어들며 콧마루가 찡해났다.
마음은 하늘을 날 것 같았고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어졌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첫 만남을 사기를 치고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한 무지막지한 인간들이 오늘까지 하느님의 처벌을 피하며 이곳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옆 통로 건너에 젊은 남자 두 명과 한 명의 여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조용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계속 한족말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가죽구두에 값비싼 여우목도리까지 두른 여인이나 같은 비중의 옷차림을 한 남자들은 너나없이 신사다운 감이 들었다.
도문 방향으로 가는 열차 안은 오른 쪽에 두 명씩 앉게 된 좌석이 창문 밑에 붙은 식탁을 마주하고 있었고 건너에는 3명씩 앉게 되어있었다.
나와 박 씨는 서로 마주하고 창문 곁에 앉아 있었다.
내가 금연인 기차 안을 피하여 승강장에 나가고 15분정도 있다가 다시 들어오니 박 씨는 술기운에 잠바도 열어젖히고 코를 골며 머리를 식탁에 박고 정신없이 그냥 자고 있었다.
그때 어느 한 자그마한 산골 역에서 차가 섰다가 다시 출발했는데 우리 옆에 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로 바뀌었었다.
고모 집에서 떠나기에 앞서 유달리 술을 좋아하는 박 씨가 걱정되어 내가 마시지 말 것을 강조했으나 나의 말을 부정하고 들뜬 기분에 충분한 양을 마셨으니 숨어서 다니는 탈북자의 신세에 술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백해무익이었다.
술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사람이 그 것을 먹고 다음은 술이 술을 먹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는 격언이 있듯이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꼭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나는 술을 즐기는 사람들을 될수록 대상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새로 들어 온 사람들의 냉기가 그대로 스며들고 그들이 서두르며 짐을 챙기며 한창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정숙으로 돌아 간 것이 아침 7시를 가까이 하고 있는 때였다.
나는 잠시도 긴장을 놓지 않으려고 내려 감기는 눈을 계속 껌벅이며 지랄을 부렸으나 그 놈은 얼마나 무거운지 도무지 감당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이때 갑자기 차표검열이 시작되고 한족 여성 3명으로 구성된 검열 단이 나의 좌석으로 다가오고 말은 모르지만 뒷좌석에서 하는 행동대로 나도 차표를 보여 무사히 통과하였지만 박 씨에게서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그들이 박 씨에게 뭐라고 하자 그를 깨워 차표를 보여주라고 하였더니 그가 주머니를 뒤져보더니 차표가 없단다.
단속자들의 언성은 높아졌고 바빠 맞은 박 씨가 덩지 큰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아무리 올려 쓸고 내리 쓸고 하여도 무정한 그 놈의 차표는 하늘로 날아났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단속자들이 영수증 판을 들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갑자기 주위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 동물안의 짐승을 구경이라도 하듯 우리에게 눈길을 던졌다.
나의 등에서는 저도 모르게 진땀이 흐르고 박 씨는 얼굴에까지 땀이 비 오듯 하였다.
그들이 주고받는 소리가 무슨 돈 같은 소리어서 박 씨가 중국 돈 50위안을 주머니에서 꺼내자 그 것을 빼앗듯이 가로챈 그들은 볼펜으로 영수증에 뭐라고 한족 글을 쓰더니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계속 뭐라고 부르고 쓰고 하는데 우리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바보처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당신들 북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요?”
이때 어데서 들려오는 고국의 목소리.
나의 머리는 순간에 앞이 탁 트이는 착각이 들면서 (살았구나.)하는 안도의 숨이 나갔다.
사람들을 가로지르며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40대중반의 아줌마가 다름 아닌 우리가 탄 열차 당번차장이었다.
(하느님, 정말 고맙습니다.)
바쁠 때는 하느님이라고 정신 나간 이놈들이 인간이 옳은지 아닌지 돌아다니는 곳 마다 하느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있었다.
“예. 고모 집에 도움 받으러 갔다가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좀 도와주세요.”
나의 대답은 길지 않았으나 그가 우리 마음을 다 읽은 듯 단속자들에게 뭐라고 한족 말로 설명을 하자 그들은 머리를 끄떡이며 서로 핏대를 세우던 인상들을 식히고 있었다.
분위기가 한창 역전되고 있어 마음을 조금 놓으려는 그 순간도 잠시,
갑자기 어데서 나타났는지 공안 두 명이 달려들었다.
검은 제복에 닭이 다리까지 옆구리에 차고 무섭게 달려드는 그들은 사람들의 포위 속에 있는 우리의 몸수색을 하며 난리를 부렸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예견하고 나와 박 씨는 다리에 칼을 차고 있었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한담.
나에게 달려든 젊은 녀석이 온 몸을 두 손으로 흩기 시작하였고 40대 초반의 다른 경관은 박 씨를 맡고 인형 다르듯 하였다.
머리칼은 곤두섰고 심장은 토끼새끼처럼 콩콩 뛰고 귀가 윙윙거리며 디딜방아를 세차게 찧었다.
경관의 손이 목으로부터 자개미, 팔 그리고 옆구리들을 스치고 지날 때면 피부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경련 초기를 유발시켰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며 바지 주머니와 허리춤을 이어가는 경찰관의 손이 나의 다리 관절부위까지만 가면은 그를 쓰러 눕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여기서 잡히니 차라리 모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죄가 없어요.
당신들 이 사람들 잡아가면 가만 두지 않겠어요.”
한창 열기를 돋우며 품새를 내는 경찰관들에게 조선족 열차원이 그들의 몸을 밀어내며 소리 질렀다.
그 여인이 행동에 경찰관들도 주춤거리고 우리에게서 두 걸음 떨어지더니 서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니 몸수색이 그쯤해서 끝나고 다행히 그들은 우리들이 차고 있는 칼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박 씨가 북한 군인들이 쓰는 훈련용 단도를 찼고 나는 식칼을 가공하여 만든 자그마한 크기의 칼을 차고 있었는데 얼마나 속이 덜컹했는지 식은땀이 피부 속의 내의를 젖어들게 만들었다.
내가 밀수를 하면서 칼을 차고 다니게 된 것은 1년전에 중국에 왔다가 두만강의 순찰 로를 벗어나 걸어가는 노상에서 두 명의 자유주의를 한 국경수비대원들을 만나 결투를 벌여 승리한 다음 그 자신감이 붙어 그 이후부터 항상 다리 장단지에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업으로 여겼던 것이다.
밤 12시경이었는데 하늘에는 보름달이 떴고 10월초의 날씨라 백두의 찬 공기로 물에 흠뻑 젖은 두 인간의 육체를 추위로 무지하게 괴롭히고 있을 때 갑자기 풀숲에서 나타난 군인들을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무작정 우리를 초소로 끌어가려고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을 저지시키려고 허리뒤쪽에 차고 있던 식칼을 꺼내자 순간에 그들과 우리들 사이의 거리가 5미터이상으로 벌어졌고 달빛에 번뜩이는 칼날을 내가 서너 번 허공으로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자 병신들인지 군인들이 우리에게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그들이 순찰근무를 수행하지 않은 자들이어 총이 없었기 망정이지 총이 있었으면 그 칼이 속수무책이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사람의 일은 모르는 법, 그 칼이라도 없었으면 그날 우리는 영락없이 감옥의 콩밥 신세를 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니 그 흉기의 위력을 알고 있는 나였지만 아직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나는 박 씨에게 눈짓으로 그들을 때려눕히자고 신호하였다.
그런데 그 놈의 박 씨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겁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살아 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는지 그가 자못 태연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잘못이 없다니까요.
아까 그 도둑놈들이 전에 역에서 내리는 것을 내가 봤어요.”
열차원의 머리는 헝클어지다시피 하였지만 그냥 자기의 육중한 몸으로 경찰관들을 우리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 밖으로 밀어내며 필사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가 하도 몸을 아끼지 않는 투혼 정신에 모여선 사람들 속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두 경찰관은 잠시 자기들의 무지막지한 행동이 오버였는지 머리를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그 행동들을 지켜보고 있을러니 40대 중반의 경찰관이 조선족이었고 젊은 놈은 한족이었다.
한족은 키가 1미터 80이상으로 컸고 조선족은 중키에 몸이 다부졌다.
열차원이 조선족 경찰관의 팔소매를 잡고 분노와 애걸에 가까운 목소리로 계속 촉구하고 조선족은 알았다고 하면서 머리만 끄떡이고 그런데 그 한족 경찰관은 우리에게 다시 달려들려고 하자 조선족이 한족경찰관의 오른 팔을 잡고 다른 칸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나의 섣부른 행동이 감행되었다면 어떤 비극을 초래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절해고도에서도 침착, 이것은 놓치지 말아야 할 나의 열쇠임에도 급한 성질 때문에 나는 종종 일을 치군 하였었다.
내가 열차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원인을 물어보았다.
“글쎄 여기 있던 도둑놈들이 앞좌석 손님들의 주머니에서 4000원(위안)을 갈취하고 바람처럼 사라졌지.
도난당한 손님들이 공안에 신소하고 그들의 말을 듣고 공안들이 마치 당신들을 도둑놈으로 보고 달려든 것이야.
너무 걱정들 말어.
조선족공안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니 무사할거다.”
마치 누나와 같은 이해와 넓은 도량의 열차원의 말과 행동에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전에는 조선족들에게서 많이 당하던 일만이 생각나 언제나 속을 주지 않던 나였는데 오늘 이 순간은 어쩐지 새로운 각도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그들의 인간됨을 보고 있을러니 아직도 내가 설익은 인간임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들은 여기서 잡히면 안됩니다.
열차에서 뛰어내려야 하겠습니다.
차창유리를 부시고서라도 가야하겠습니다.”
내가 고마움과 두려움에 섞여 애걸하다싶은 어조로 그에게 결심을 표하였다.
얼굴이 우리어머니와 같이 후답게 생긴 열차원아줌마는 긴장에 떨고 있는 나와 박 씨를 의자에 눌러 앉혔다.
“내 다시 가서 조선족 공안에게 물어보고 올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봐라.
그들이 끝내 자네들을 잡아가겠다면 열차 승강장 문을 내가 직접 열어주겠으니 너무 덤비지 말아.”
그는 추슬러진 모자를 바로 쓰고 머리도 다듬더니 이내 사라진 경찰들의 뒤를 쫒아갔다.
달리는 열차는 모든 출입문들을 봉쇄하였는데 그 문의 키를 열차원들이 쥐고 있었다.
나는 열차원이 가자 박 씨에게 차에서 뛰어내리자고 하였다.
“조금만 참아보자.
저렇게 많은 짐을 어떻게 버리고 간단 말이냐?
그게 얼마나 큰돈인데.”
그가 가리키는 위쪽을 올려다보니 우리가 땀을 뻘뻘 흘리며 길림 역에서 메고 기차에 실었던 중고 옷 두 자루가 흉한 모양을 하고 처박혀 있었다.
(에익, 숮 방망이 같은 자식, 그래도 5년짜리 공군대학을 나오고 수재라고 자처하는 녀석이 상황판단이 이렇게 까지 느리단 말인가?)
내가 술을 먹고 도둑놈들이 자기의 주머니를 뒤지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을 데리고 다닌다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고모가 준 중고 옷의 가치가 몇 천 만원이라도 우리의 목숨하고는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팽개치고 혼자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저 조선족 아줌마를 기다려 보기오.
만일 그에게서 더 다른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으면 저 옷이고 뭐이고 다 버리고 도망가는 거요.
알겠소?”
생각 같아서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래. XX이 아버지 말대로 할게.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오.”
북한군 공군 상위가 얼마나 돈에 대한 애착이 그리웠으면 자존심을 구기며 빌다시피 하는지 차마 그 것도 봐주지는 못하겠다.
주위 사람들은 우리가 부르고 쓰고 하는 소리가 이상한지 지들대로 자리들을 챙기고 앉아 너스레를 떨었다.
5분정도 있으려니 조선족 아줌마가 나타났다.
“조선족 공안이 한족을 잘 설득했으니 다른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네.
그리고 이자 정차했던 역에 한족 공안이 도둑놈들을 잡으려고 내렸으니 마음들을 놓으라고.”
“정말이에요. 아줌마.
정말 고맙습니다.”
박 씨가 문뜩 아줌마 손을 잡으며 기쁨에 겨워 어쩔 줄을 모르고 그 모양새가 어린애와 같아 보여 자기도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뒷머리를 손으로 긁었다.
나도 그 소리를 들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십년 묵은 때를 한 번에 씻겨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방심은 금물, 나와 박 씨는 번갈아 앞뒤의 통로를 거위 목을 빼들듯 쳐들고 경찰관조선족의 일거일동을 주시하면서 눈을 굴렸다.
열차원이 그 모습들이 우스운지 붉어진 보조개로 “허 허”하고 웃고 있었다.
긴장의 순간들이 꼬리를 물어서인지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돈하라는 시골 역에 기차가 들어서자 깊고 깊은 분지와 같은 곳으로 따스한 햇볕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그 빛이 다져진 온 강산의 눈에 스며들고 그 것이 반사되어 마치 금빛 무지개를 장식하며 경쾌함을 자아냈다.
이런 아름다운 경치도 처음인 것 같았다.
무섭게만 느껴지던 그 눈과 모든 산천초목이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읽으니 어쩐지 남의 나라 땅이 아닌 자기 땅이라는 착각이 다가왔다.
하긴 이 땅이 어떤 땅이냐?
우리 선조들의 뼈가 묻혀있고 넋이 살아있는 천년의 역사를 기록하는 고국산천이 아닌가?
그런 감상을 느낄 정도이니 긴장이 풀린 것만이 확실하였다.
다시 기차가 역을 출발하자 아까 우리에게 달려들었던 한족 단속자 아줌마들이 도시락을 들고 오면서 먹으라고 하였다.
그들이 뭐라고 조선족 열차원아줌마에게 말을 하였고 그 말의 뜻은 알 수가 없었으나 나와 박 씨는 일어서서 머리를 숙이고 고맙다고 하였다.
그들도 웃음꽃을 피우며 제법 엄지손가락을 추켜들고 놀리는지 아니면 진짜로 그러는지 서로서로 우리를 격려해주었다.
그러나 50위안의 돈은 돌려주지 않았다.
(그 돈이나 돌려주지.)
나는 어쩐지 돈을 돌려주었으면 하는 욕심까지 생겼다.
조선족 열차원은 사과와 배 등 과일들을 가져왔고 우리들에게 중국에 오게 된 경위를 들어보더니 눈가에 손수건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어찌 한 민족이 이렇게도 고달프게 살아간단 말인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사람들을 굶겨죽이며 지랄하는지.
우리 삼촌도 조선에 있는데 작년에 내가 2000원어치 물건들을 가지고 삼촌의 집에 갔다가 세관에서 한국 상표가 붙었다고 절반이나 다 빼앗기고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이 가슴에 불이 인다오.
왜 김정일이가 정치를 그렇게 한다오.
이해가 안 가오.”
25년을 그 곳에서 산 우리도 예측하지 못하는 그 놈의 김정일이의 정치를 이 아줌마가 어떻게 알겠는가?
아줌마는 그때 그 소리를 하며 삼촌과 조카들의 이름을 계속 부르며 슬프게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아까 자네들을 보니 딱 조카들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내가 (저들을 구해야겠다. 조카들에게 주지 못한 사랑을 저들에게라도 주자.)
라고 생각하고 접어드니 무서운 것이 하나도 없지 않겠소.
이제는 그만큼 속을 썩이고 배도 고프겠는데 아침밥을 먹어야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겠건만.”
그는 자기의 정성이 모자라는 것만 같아 계속 근심하면서 혀를 찼다.
그러면서 담배 보루의 포장지를 찢어 그 곳에다 자기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는 것이었다.
“다음번에 중국에 들어오면 나한테 전화를 하쇼.
내가 힘자라는 것 도와줄테니.
어데 갈 일이 있으면 나에게 와서 같이 기차를 타면 안전하게 내가 데려다 줄게.”
정말 그의 정성은 어머니와 같았고 맏누이와 같은 것이었다.
이런 분들에게 어떻게 감사의 말을 표현해야하겠는지 나는 말마디가 떠오르지 않았고 목이 메어들기만 하였다.
열차원아줌마는 자기 호차의 방바닥과 승강장주변의 어지러운 쓰레기들을 쓸어내며 왔다 갔다 하면서 부지런히 다니다가도 우리에게 와서 사과를 먹으라 과자를 먹으라고 하면서 계속 걱정만 하였다.
조선족 경찰관은 세 번이나 우리 옆을 지나면서 무슨 일이 그렇게 급한지 아무 말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1시쯤 되자 경찰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나하고 얘기나 하자.”
그가 우리 앞 의자에 스스럼없이 앉았다.
“조선이 진짜로 그렇게 곤란하나?”
청진 수남 구역에 있는 북한 공군대학 5년제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수재로 소문난 박 씨가 두 손을 써가며 설명을 하였다.
“사실 미국이 경제봉쇄와 위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국방공업에 투자를 많이 하다나니 생활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경찰관이 모자를 벗으며 이마에 내 돋은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렇지. 나라는 지켜야지.”
박 씨가 경찰관의 호응에 성수가 났다.
“저의 삼촌이 미사일기지에서 신형미사일을 연구하고 있어 알고 있는데 미국 본토에까지 타격할 수 있는 신형미사일을 연구 제작한 것이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진짜 조선에 미사일이 있기는 있냐?”
“미사일 뿐 아니라 핵과 화학, 가스 등 전략무기들이 많습니다.
한 마디로 전쟁준비는 완성되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닙니다.”
경찰은 머리만 끄떡이고 더 말이 없었다.
“아까 한족경찰이 너희들을 끌고 가자고 계속 우기는 것을 내가 이해시켜 도둑놈들을 잡으려 보냈으니 더 근심하지 말고 이 기차가 도문까지 가니 연길에서 내려 너희들이 선택한 길로 무사히 가거라.
기차에서는 더 근심을 안 해도 될 거다.
나는 근무 중이어서 그만 가보아야 한다.
다른 일이 제기되지 말고 잘 가.”
그분은 오른 손을 내놓으며 악수를 청했다.
나와 박 씨는 허리를 숙이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고맙습니다. 이 은공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분은 더 말이 없이 입가에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는 그 분이 입가에 띠는 웃음의 의미를 나는 안다.
(같은 민족으로 남에게 굴욕을 받는 모습은 보기가 싫다.
떳떳하게 가슴 펴고 남에게 흉악한 짓을 하지 않고 살아갈 때 그런 인간은 반드시 존경받고 사랑받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 곁을 떠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은 흉악범들에게는 맹수와 같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순한 양과 같은 진심출사의 마음을 가진 참인간이었다.
내가 탄 그 날의 열차 행군은 어쩐지 맏형이 지켜주고 맏누이가 살펴주는 것으로 하여 더 이상 무서움도 괴로움도 그리고 서글픔도 없는 진짜로 여행다운 해외여행이었다.
사실 그 분들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이면 남이다.
경찰관이 자기의 직무에 충직해 범법자인 우리를 체포했으면 승진도 될 것이며 월급도 올라가고 훈장도 받을 것이었다.
한마디로 시끄럽고도 시끄러운 그런 존재에 불과한 우리들을 성심성의로 도와준 그 의리와 혈육의 정을 생각할 때면 지금도 이 가슴은 뜨거워지군 한다.
달리는 차창 밖을 바라보는 나의 입에서는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하나 민족도 하나 하나 핏줄도 하나
하나 뭉치면 하나 둘이 되면 더 큰 하나
긴긴 세월 눈물로 아픈 상처 남기며
통일의 그날로 우리는 함께 가네
하나 우리는 하나 태양민족 우리는 하나

노래는 뼈아픈 배달민족의 역사와 참다운 순결성으로 하여 나의 가슴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태양민족이라,
어두움을 벗겨주고 생명을 자라게 해주고 새 날을 밝혀주는 불덩어리의 에너지가 오늘도 민족의 이름과 더불어 나의 심장을 격동시켰다.
눈가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선족경찰관님, 당신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나는 심장으로 소리 높이 외쳤다.
그 소리가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하늘가에 영원히 메아리쳤으면 하는 바람으로 두 번 세 번 달리는 차창 칸을 향하여 외쳤다.
조선족아줌마와 경찰분의 성원에 힘입어 나와 박 씨는 몇일이 지나 성탄절에 가벼운 걸음을 안고 완전무장한 이리떼들이 먹이감을 노려보는 양육강식의 삶과 죽음의 혈전장인 북-국경을 향하였다.
그 이후 그 아줌마와 조선족 경찰을 나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다.
박 씨가 조선족 아줌마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가졌으나 북한군 보위사령부에 체포되어 그때 있은 사실을 다 진술하여 나도 3개 월동안 그들의 조사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때 나를 구원해주었던 생명의 은인들을 찾을 길이 없었다.
오늘 나는 이 글을 빌어 그들의 귀한 몸 건강과 앞으로의 사업과 생활에서 보다 큰 성과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뿐이다.
혹시 그들과 연락이 된다면 그때 받은 은공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싶다.
10배 100배로 되돌려주고 싶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 같은 사람들을 성심성의로 도와주고 계시는 모든 조선족 동포들에게도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나라와 권세와 돈을 떠나서 같은 민족으로서 같은 인간으로서 여러분들이 해주는 한마디의 동정과 한 숟가락의 밥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자양분이 되어 투지와 열정을 불러일으키는지 모른다.
산천초목이 열 백번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노래, 다 같이 울고 웃던 풀잎의 노래를 천년이 흐르도록 부르고 부른 이 나라 모든 어머니들의 목소리에는 언제나 우리 중국 조선족 분들의 뜨거운 애국심도 함께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까운 앞날에 그 위대한 어머니의 나라가 지구촌에 우뚝 설 것이다.
민족의 얼과 혈육의 정이 차고 넘치는 다정불심의 민족, 슬기롭고 지혜롭고 용감무쌍한 우리 민족의 이 무궁무진한 힘을 깨뜨릴 자는 이 세상에 없다.

-지금까지 저의 글을 보아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수전노)
좋아하는 회원 : 2
이민복 서울토박이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이민복 2010-01-10 00:42:21
    아름다운 멜로디입니다.
    분명 동포는 동포지요.
    부족됨은 우리가 신이 아니기때문으로 이해하고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코비아 2010-01-10 00:50:07
    한문장 한문장 마다 다 시 같아여
    고생 하셧네요.. 행복 하세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김정일과 結託하는 美國이라면 종이호랑이가 된다.
다음글
이승만 박사와 울밑에선 봉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