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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할 때의 심리적 고통(나의 탈북수기6)
Korea, Republic o 이민복 2 760 2010-01-19 23:50:28
절망뿐인 북한을 하루빨리 벗어나 자유롭고 풍요한 세상을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탈북 할 때의 심정은 이것만이 아닌 고통도 뒤따른다.

탈북을 결심할 때 심리적 고통은 가 된다는 죄책감이다. 조국반역자 걱정부터 하는 북한사람들은 끊임없는 사상 선전으로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의 갈등은 남조선도 내 조국 땅인데 그 곳에 간다고 조국반역자로 될 수 없다는 이해로 해소하였다. 이렇게 금방 깨닫는 것을 지금껏 수 십 년 간 생각해 보지도 않고 살았다는 것이 참 이상할 정도였다.

다음으로 무섭고 두려운 것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와 희망이 없는 북한에서 이렇게 살 바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각오를 가졌다. 죽음을 각오한 다음의 걱정은 가족연대처벌문제였다. 가족연대처벌은 북한당국이 쓰는 가장 악랄한 통제방법이며,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인질범죄정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03.3) 런던주재 세계기독교연대(CSW)의 초청으로 유엔인권위원회를 방문하여 북한 인권문제를 고발하였다. 탈북자들이 처음으로 제네바유엔인권위원회에 간 것이라고 우리와 함께한 인권운동가인 김상헌 선생은 말하였다. 우리뿐 아닌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결국 북한 인권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유엔 인권위 결정이 다수 가결되었다(중국은 반대. 남한은 기권). 앞으로도 가족연대처벌을 비롯한 북한 인권문제 개선을 위해 앞장서려한다.

아무튼 남는 가족에 대한 걱정은 탈북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민거리이다. 가족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어쩔 수 없는 급작스러운 탈북이 아닌 조건에서는 더욱 고민거리이다. 그렇다고 같이 탈출할 수는 없다. 우선 가족은 탈북 할 만큼의 정신적 준비가 안 돼있었다. 북한사람들은 대개 세뇌교육의 포로가 되어있다. 그 정도는 표류하여 남한에 넘어왔다가 다시 가겠다는 인민군 병사나 어부들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천국 같은 남한 현실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세뇌를 털어버리기 힘들어한다. 물론 점차 깨달아 가기는 하지만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우리가족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족 동반탈북의 또 하나의 어려움은 생소한 죽음의 길을 장정인 나 혼자도 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요즘은 가족 동반탈북이 많아 졌지만 당시는 어림도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법을 자세히 살펴보니 묘안이 생겼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오랫동안 고심한 것이다. 묘안이란 다음과 같다. 이혼한 경우에는 남, 남으로 되기에 가족처벌하지 말라는 북한 법이 있다. 또 고발하면 오히려 잘한다고 평가를 받는 다.

나는 이혼함으로 처자식은 무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당국에 자발적으로 고발하라고 하였다. 물론 이혼은 간단 한 것이 아니다. 흔히 이점 때문에 탈북자들의 인간성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탈북자의 인간성을 비평하기 앞서 그들의 처지, 북한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아니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 고통을 다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동정하기를 바란다.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탈북자의 북에 남은 가족들은 차라리 탈북하기를 잘했다고 한다고 한다. 같이 있어봤자 굶어죽고 헐벗기 보다는 누구하나라도 탈북하여 남은 가족을 도와주니 차라리 낮다는 것이다. 이산의 고통보다 살기위한 고통이 더 심한 북한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족의 안전과 함께 나와 연관된 사람들도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심사숙고 하였다. 나와 직접 연관된 직장책임자, 당 비서, 담당 정치보위지도원, 안전원(경찰) 등을 피해주지 않기 위한 일환으로는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핑계이상 없었다. 모든 적을 뗀 상태에서 탈북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차후 문제가 나도 어느 소속도 되어있지 않아 누구도 책임추궁을 받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훗날 체포되었을 때 나를 살린 요인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누구도 감정을 내며 나를 잡자고 문제를 악화시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준비를 갖춘 후 탈북하는 날로 정한 것은 1990년 11월 29일 야밤이었다. 북방의 추위는 벌써 탈북해야 할 압록강 가에 살얼음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굳어진 결심은 국경을 넘는 사선도 살을 에이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게 만들었다. 당시는 탈북자가 극히 드물 때이다. 그만 큼 잡히면 추호의 용서도 없던 시절이다. 대량 탈북이 90년대 중반부터인 것을 볼 때 나의 탈북시도는 누구보다 앞서도록 하늘이 선견을 주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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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너구리 대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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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현의자유 2010-01-20 04:20:02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돋보입니다...북한인민들 뿐만 아니라 남한 국민들에게도 많이 결핍되어있는 자질이기에 그만큼 더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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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럭가락 2010-01-20 04:34:10
    북한에서 이혼의 자유가 있습니까? 아니 마음대로 이혼을 할 수 있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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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림이 2010-01-20 10:39:04
    탈북수기5는 어디 있죠.. 저만 못찾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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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씨 2010-01-28 10:26:25
    탈북수기 5 어디에 있나요?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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