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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일성 권총 세례 받은 만경대 까치(펀글)
Korea, Republic o 퍼온글 0 479 2010-02-09 17:01:42
http://kr.blog.yahoo.com/waterview33/1110.html?p=5&pm=l&t=1&tc=470&tt=1265700488

금강산 관광객인 박 왕자씨 살해 사건이 나고 나서
나는 한참 생각해 본 일이 있었다.

북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서 독재 세습 빈곤 침략등등이
있지만 살육이라는 이미지를 빼먹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인권을 뛰어 넘어 인명이라는 인류 기본의 최고 가치마저
완전히 망실해버리고 사람 죽이기를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북한의 고질적인 브랜드는 아무래도 절대
권력자이고 인권 부재 국가 북한의 창업자
김 일성의 본성에서 비롯했다는 생각이 든다.

김일성은 북한에 입국하고 두 달 후 자신의 생가가 있던
만경대를 방문하였다.

이 방문은 당시 평양민보 편집국장이던 한 재덕이
‘김 일성 장군 개선기’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 해서
만경대가 성역화 됨에 기본 주춧돌을 만들었다.

나중에 김일성의 눈 밖에 나서 일본에 밀파되었다가 체포되어
남한으로 귀순했던 한 재덕 씨는 “나는 김일성을 고발한다.”
라는 저서를 남겼다.

이 글은 1965년 먼저 주 일간지에 연재됐었고 뒤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

그가 회고했던 김일성의 고향 방문에는 소련인들을
빼고 조선인으로는 그가 유일하게 동행 했던 것이다.

평양 시내를 빠져 보통문 밖으로 나온 찝차는 진남포로 가는
평남가도를 한 시간도 못 달려 만경대로 구부러지는
샛길로 들어 섰다.

그 길은 좁기는 하나 찝차가 그대로 달리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나 한없이 유쾌해진 김일성은 차에서 내려 걸어서 가자고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어렸을 때 이곳과 가까운 칠골이라는 데에 있는
외가에도 찾아가고 그 곳에서 학교도 다녔었다.

그는 들과 산 들을 그리운 듯이 바라보고 손가락질 하며
도취한 사람인양 비틀거리다시피 걸었다.

그러다가 저만치 들 가운데 높이 서 있는 포플라
나무 꼭대기에 까치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자

“ 우리 저 까치를 누가 떨어 뜨리나 쏴 볼까?!”

하면서 신사복 뒷 꽁무니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까치를 겨누는 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즐거움에 들떴고 흥겨워 있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

우리 일행은 그의 유명한 사격술을 실지로
볼 수있는 기회라고 기대 속에 그의 총 끝을 주시하였다.

“타-앙!”

그러나 총알은 어디로 갔는지 알바 없으나 포플라 나무 위의
까치는 때 아닌 총소리에 저편 낮은 산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 그 놈 재수 좋다.”

김 일성은 껄껄 웃으며 우리 일행을 뒤 돌아 보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사뭇 유쾌한 듯 소련 타스통신 기자에게
서투른 소련말로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르면서

‘ 아무리 명사수라도 권총으로 높은 나무위의 까치를
명중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살생을 좋아 하는 것은 그의 유격대 시절 이래
몸에 젖은 습성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아직 어린 것만은 사실이구나!“하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의 한구석에 남이 있다.
하필이면 금의 환향 길에 왜 까치 한 마리라도 죽이려 하는가1

그런데 얼마 전의 일이다.
나는 평양에서 출판된 < 조선 화보>의 사진 표지를 보고 놀랐다.
그 사진에는 포프라 나무 한 그루가 솟아있고 그 주위에는
단정하게 무쇠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는데 그 울타리 밖에
수 십 명의 어린 학생들에게 여자 안내원이 무슨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 나무 아래 설명 표말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설명에 의하면
이 나무는 김일성 장군께서 어렸을 때 아무도 못 올라가는
것을 장군 혼자서 오르내리던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 포플라 나무가 바로 그의 금의환향의 날 까치가 앉았던
나무였다.

만경대 20여호의 주민들은 김일성을 크게 환대했다.
이날 한 재덕 씨가 쓴 글을 보면 김일성 가족의 묘사가
흥미롭다.

조부모는 김일성의 숙부 김 형록이 모시고 살고 있었다.
조부 김 보현은 가는 귀도 먹고 별로 말이 없었다.
그저 평범한 농민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할머니 이 보익은 화랭이라는 별명대로 액션이 심했다.
김일성을 보는 순간 ‘성주야 ! 네가 돌아 왔구나!“
라는 말은 한 재덕 씨에 의해서 “일성아 네가 돌아 왔구나 !”
로 바뀌어 대서특필 된 방문기 기사의 제목이 된다.

이 보익은 ‘증손(曾孫)이! 증손(曾孫)이! 하며 수다스럽게
말을 많이 하고 잔치 술을 마시고 춤도 신나게 추었다.

이 보익의 놀기 잘하는 성미는 나중에 김일성 정권 만들기에
앞장섰던 소련과 북한의 주요 인물들이 모인 평양시내 요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방을 휩쓰는 춤판으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한 재덕 씨의 글에 김일성의 숙부 김 형권의
부인 이야기도 나온다.
설쳐대는 이 보익보다 더 말이 많더라는 것이다.

이 대목을 특별히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나의 군 복무시절 장병들을 교육시키는 정훈 교재가 있었다.
이 정훈 교재는 반공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목적이므로
김 일성에 관한 여러 가지 안 좋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김 일성 집안 험담까지 나오는 중에 이 김 형권의 처,
김 일성의 숙모가 행실이 안 좋아서 인근에 평판이 나빴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정훈교재에 아무리 미운 김일성 집안 이야기라지만
이런 인신 공격성 소리까지 나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북한이 밤낮없이 불어대는 박정희 대통령의
여자 관계 중상 방송에 대응해서 삽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여튼 그 교재 내용의 대부분을 잊어버렸지만
정훈 교재의 이 가십 성 험담은 지금까지 머리 속에 남아있다.

보통의 귀향이 아니었다.

김일성이 아버지를 따라서 만주로 가서 성장 하고 북한 최고의
실력자가 돼 연로한 조부모를 뵈러 가는 길이었다.

더구나 옆에는 이번의 금의 환향을 보도 해주러 언론인이
수행했었고 또 타스 통신 기자를 포함해서 서너명의 소련군
경호원들이 수행했었다.

젊은 김일성이 모처럼 금의 환향하는 들뜬 기분이었다 해도
이것은 너무한 것이다.

한 재덕씨는 지각없이 까치를 쏜 그의 행위를 어린 탓이라고
돌려 버렸지만 그 정도의 사리 분별력은 10대의 젊은이에게도
있는 법이다.
그의 살생 욕구는 그의 병든 심리의 단편을
나타낸 것이다.

김 일성 성장 주변을 간단히 살펴보자.
김 일성은 1910년 산지기의 아들 김 보현과 평양 칱골의
유지이며 기독교 장로인 강 돈욱의 딸 강 반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 형직의 집안이 원체 뒤 처지는 기우는 결혼이었지만
김 형직이 똑똑해서 그 싹수를 보고 강 양욱 집안에서
데릴사위로 데려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데릴 사위를 평양 미션계 스쿨인 숭실 전문에
진학시켜 사위의 앞날을 열어 주려했다.

그러나 타고나기를 안티로 태어 났던 김형직은 학교에서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가 제적당하고 말았다.

하여튼 장인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데도
김 형직 부부는 이 사건 전후해서 기독교와도 절연했다.
[오늘날 기독교 선교사가 교활하고 음흉한 범죄자로
그려지는 곳은 타 종교 국가를 제외하고 북한 밖에
없을것이다. 김 형직을 학교에서 내쫓은[?]
미국 선교사 교장 모페드씨에 대한 두 부부의
증오심이 아들 김일성에게 전승된 덕일 것이다. ]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김 형직은 만주 무송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김 형직은 가짜 세브란스 의전 졸업장을 걸어놓고
무면허 한의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 중에 김일성이 14세 때인 1926년 김 형직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여러 설이 있지만 장 티프스 같은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북한 선전 매체는 그 뒤의 과부 강 반석의 어머니 역할을
엄청나게 선전한다.

과부가 된 강 반석은 이후 삯 바느질, 삯 빨래로 아들들의
뒷바라지를 해서 김일성이 길림 소재 명문인 육문 중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

이 학교는 중국인 학교로서 조선인 학생은
단지 10퍼센트가 안 되었다.

덕분에 김 일성은 동북 사투리의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강 반석은 남편 사후 그녀에게 눈독을 드린 안도현
경찰서장 목 한장(穆漢章)에게 개가했다.

은 경찰서장이기도 했지만 많은 땅을 가진 지주이기도 했다.
그는 일제에 의해 만주국 성립 후 경찰서장을 그만 두고
안도현의 흥륭촌(興隆村)이라는 곳에서 강 반석과 함께 살았는데
강 반석도 그만 1932년 역시 김 형직을 따라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남한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강 반석의 개가는
중국 안도나 이도백하진의 동포들은 다 알고 있었다.
흥륭촌은 그 지명이 소사하 또는 무수촌으로 바뀌어져있다.
그 녀가 개가했다는 사실을 알았었다면 냉전시대 한국군
정훈 교재는 요란하게 스켄들화 해서 써 댔겠지만 시대가
바뀌었으니 타국 객지에서 자식 교육을 위해서 희생했던
강 반석의 개가를 이해성있게 바라보자.]

김 일성은 재학중 중국인 교사 상월에게 감화되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한국 해군의 초대 참모총장인 손 원일 씨에 의하면
그의 여동생 손 인실[YWCA의 총무를 했었다]도
이 육문 중학교를 다녔는데 김 일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재학시절에도 학생들에게 무산자들이 어떻고 계급투쟁을
어떻고 하고 하며 설쳤다고 한다.

이러니 그는 어리지만 군벌 경찰로부터 당장 요 주의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여튼 공산주의자가 된 후 그는 수배를 받았고 18세인
1929년 봄 육문 중학교 3학년 때 구속되어 7개월간 수감 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었지만 학교를 그만 두었다.

갈 데가 없어진 그는 이 종락 부대라는 비적과 조직 폭력배의
중간쯤 되는 범죄 집단에 들어갔다.

이 부대는 조선 혁명군 길강지부라 자칭하며 혁명이니
해방이니 하는 근사한 말들을 간판에 붙였지만 자타가
알아주는 범죄 집단이었다.

이 집단에서 18세의 김 일성은 단연 두각을 나타내며
이 종락의 눈길을 끌었다.

김 일성이 입단한지 얼마 안 되는 어린 나이에도 신임을
얻은 것은 큰 체격에서 발휘되는 완력과 이때부터 빛을
보이기 시작한 잔인성을 발휘해서 해치우는 살인의 기술이었다.

단지 18살의 틴에이저인 그는 이종락의 강제 세금 징수에
저항적인 두 명의 중국인을 살해한 것은 경찰 수배령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그 외에 김일성이 비밀리에 해치운 살인 범죄로서
숨겨진 것은 더 많다.

이 종락의 행패를 교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군민회라는 교민
자위 조직은 이 부분 책임자인 민사위원 정신[鄭信]이라는
간부를 파견했다.

이 종락은 자신의 부하 중에서 살인으로 솜씨를 보인 김일성을
보내어 정신을 도착역에서 목을 졸라 죽여 버렸다.

설명했듯 역사에 얼굴을 내민 김일성의 첫 등장은 살인이었다.
이 종락이 체포되자 김 일성은 아직 세금을 거두지 않은
지역으로 달려가서 세금을 거두어 하얼빈으로 도주하였다.

잠잠해지자 다시 안도로 돌아온 김일성은 역시 마적이었던
조 전승으로부터 몇 자루의 권총을 구입했다.

이 권총이 김일성을 신격화시킨 빨치산 부대를 만들게 되는
자본이 되었다.

그가 안도현에서 1931년 농사외에 할 일이 없었던
농촌의 껄렁거리는 젊은이들을 모아서 조직한 무장대는
지금 북한에서는 북한군 창군 원조로 지정되었다.

이들 부대도 초기에는 소위 군자금 마련이라는 명목으로
동포들 등치는 일로 원성이 자자했었다.

김 일성이 산속에 아지트를 차리고 자기의 부대를 키워 갈 때
일본군에게 잡혀갔던 전 상관 이 종락이 전향하여 그에게
‘귀순’을 권유하러 산중에 찾아왔었다.

김 일성은 그를 나무에 묶어놓고 잔인하게 직접 칼로 난자하여
죽여 버렸다.

김일성 연구가인 전 성균관대 이 명영 교수는 김 일성의
살인 취미를 권총이 있어도 이를 잘 쓰지 않고 때려 죽이거나
목을 졸라 죽이는 잔인성이 있었다고 했다.

혹자는 김일성의 이상 심리가 파란만장했던 가족사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을 하지만 그 당시 그 정도의 어려운
생활사를 거친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닐 것임으로 별다른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북한 문제 전문가 이 기봉 선생은 이런 김일성의 살인추구
심리를 일종의 병적인 심리로서 주위의 못 마땅한
사람을 골려주는데서 묘한 병리적인 쾌감을 느끼고
마침내는 무엇이든지 때려 부수고 실어지며 전쟁 파괴 살인등의
상황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끼는 이른바 네크로 필레[neclo phile]
라는 이상 심리라고 했다.

이 이상 심리가 심해지면 인간의 사체와 해골, 피등을 보고도
쾌감을 느끼는 극단적인 지경에 까지 이르는데 김일성의
젊은 시절 행각을 보면 이런 단계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김 일성의 정신세계를 정신 분석학적으로 진단한 글을
많이 썼던 백 상창 박사도 비슷한 진단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 유 영철이니 강 호순이니 하는 살인범들이 자주 출연하자
쾌감을 쫓아 살인을 하고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정신병자를 의미하는 사이코 패스라는 명칭이 널리 퍼졌다.

범죄 심리학에 문외한이지만 내가 보니 위의 김일성의
네크로 필레라는 용어가 사이코 패스와 증세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물론 심리학적으로 같은 말은 아니다.]

부대가 커지면서 그는 직접 살인을 하는 일은 드물어 졌지만
그의 유격대 생활동안 그의 부대는 반동 또는 주구,
또는 배신자 처단이라는 명목으로 숱한 살인을 저질렀다.

그의 주변에 몰려든 젊은 인간들도 농삿일 빼놓고는 할 일이
없었던 만주의 농촌 청소년들이 많았고 사리분별의 능력을
충분히 갖출 정도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없어서
김일성의 하는 짓을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만주 빨치산 부대에서 살인이 어느 정도 일반화 된 개념이
되었는지 알만한 일화가 있다.

625 사변때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 105전차여단장
유 경수는 김일성이 총애하던 부하였다.

그의 부대는 서울 점령후 서울대학 병원에 찾아가
국군 포로 300명을 모두 색출해내서 학살했었다.
적십자 마크가 그려진 건물이나 기차나 항공기나
선박은 절대 공격하지 않는 것이 제네바 협정에서
규정한 인도주의적 행위이며 인간다운 행위였다.

그런데 유 경수는 타민족도 아닌 운신을 못하는
동포 중상자까지 들것에 싣고 나가 모두 사살했다.
잔인 하기 짟이 없는 행위이다.
김 일성 방식으로 살인행위를 거듭했지만
유 경수는 김일성의 총애를 받아 군부에서 크게 출세했다.

빨지산들의 살인 취향을 나타내는 실화는 또 있다.

만주 빨치산 부대 멤버중에 최 용진이라는 인간이 있다.

[북만의 최 용건 부대 소속이었다.]
그 아비도 빨치산 부대의 일원이었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일제 경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자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최 용진은 아버지를 자기 총으로 직접 처형한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었다면 자기의 모든 것을 내걸고 아버지를
살려내기를 노력해야 했는데 자기 살겠다는 얄팍한
처세적 계산으로 아버지를 제 손으로 처치했으니
빨치산 부대의 살인에 대한 감각이 어떤지 알만하다.

최 용진은 6.25 사변 때는 북한군 사단장이 되어서
다부동에서 국군 1사단을 공격했다.

그와 다른 2개 사단이 협력한 북한군 1개 군단이
한국군 1개 사단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와해되어 북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총애를 받던 그는 군단장까지 진급했다.
나중에 뇌일혈로 죽었지만 저세상에 가서 무슨 얼굴로
자기 아비를 보았을지 궁금하다.

빨치산 부대 대장으로 10년 가까이 혁명과 투쟁과 해방이라는
맑시즘이 제공하는 미사여구의 명분아래 갖은
살인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던 김일성은 개인의 천운,
민족의 악운으로 북한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는 만주의 산중에서 맛본 살인의 쾌감은 남쪽 민족에게
확대해서 동쟁 상쟁의 큰 전쟁을 벌이는데 주요 요소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엔군의 개입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자
수없는 대남 간첩들을 파견해서 이 살인의 쾌감을 즐겼다.

그의 아들인 김 정일도 권력을 승계 받은 뒤 내부에서
정적들에게 해댄 무자비한 보복과 숙청은 물론이요,
그가 사주했던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이며 대한항공
폭파 사건등을 보면

아버지의 병적인 심리를 이어받았을 가능성에 심증이
안 갈 수밖에 없다.

아무 죄도 없는 여성 관광객을 경계선을 넘었다고 가차없이
사살하고 살해 일주년이 다 되었는데도 자신들의 태도를
정당화하며 최소 유족들에 대한 사과없이 뻣뻣하게 버티는
북한 당국의 심리상태를 거슬러 올라가면 만경대에서
새 손님을 반기던 까치에게 권총 세례를 가한 김 일성의
이상 심리가 보이는 듯하다.

몇 달전, 북한군 총참모장인지 뭔지 하는 친구가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와서
트릿하게 노는 이 명박 정부의 남한을 그만 두지 않겠다는
협박 발언을 해댔다.

그들의 공갈 협박을 여러 번 경험해봐서 익숙해진
한국 국민은 동요하지 않았었다.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 하면서도 김정일의 핵무기와 까치를
겨냥했던 김 일성의 권총이 오버 랩 되면서 은근한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일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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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심타 2010-02-11 00:42:08
    답답하죠...
    태백산맥이란 소설에선 이들을 고뇌하는 지식인양 표현하고 있죠..
    소설은 소설일뿐이라고 믿고 싶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렇게 돌아갑니까..
    에둘러 말하자면 그소설을 읽고 빨치산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연민과 동정에 기대어 막연히 시대의 아픔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생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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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으흠 2010-02-11 02:09:40
    영화 한반도만 봐도 안성기가 노무현으로 인식되고 당시 총린가 하는 사람이 이명박으로 중첩되면서 국민들에게 좆불시위를 일으키도록 유발했죠. 진보측 인사들은 문화에도 수없이 많은 이데올로기를 주입해 왔던 겁니다. 누구나 분노하게 되죠. 남부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권으로 묘사하고 은연 중 북괴를 정통성 있는 정부로 인식하게 만들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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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맞아요 2010-02-11 02:13:18
    <한반도> 보고 놈현 탄핵과 좆불시위에서 들고 일어나지 않을 젊은이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난 그 영화 보면서 참 좋은 영화지만 언제 큰일 한번 내겠군!하고 생각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난리부르스를 쳤죠. 태극기 휘날리며 역시 마찬가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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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손02 2010-02-11 02:30:07
    위 내용도 볼만 하지만 이 글의 출처인 블로그 내용들 중 읽을만한 것들이 많아 보여서 추천합니다.

    http://kr.blog.yahoo.com/waterview33/MYBLOG/yblog.html?pc=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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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 2010-02-11 03:57:55
    남한의 군인들과 당국자들 착하기도 하지... 북한 같았으면 그렇게 저항하다간 일단 초죽음 상태로 만들어놓고 시작하지. 어디 혼자서 살쾡이처럼 대들고 할퀴려 들어??? 이것이 민주와 독재의 차이인 줄 모르고 지 잘난 맛에 용감해서 남한 괴뢰들이 꼼짝 못했다고 이빨을 까는군. 참 인내심 많이 필요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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