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어에 하반신 먹혀도 살고 싶다”김대중 자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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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뒷날 온 몸이 묶여져 바다에 던져질 절체절명의 순간을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양 손을 가슴에 모으게 하고 다시 묶었다. 양 발도 묶고 등에 판자를 대고 세 군데를 그렇게 묶었다. 그리고 입에는 나무조각을 물게 하고 붕대를 둘렀다. 오른팔과 왼쪽 손목에는 각각 30~40Kg의 추를 달았다. 그 작업을 하면서 그들은 시종 아무 말도 없었다. 바닷 속에 던져진다면, 물속에서 추를 벗길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무리일 것이다. 바다에 던져지면 몇 분 안에 끝날 것이다. 그리고 고통도 사라진다. 괜찮지 않을까? 아니다. 상어에게 하반신을 먹혀도 상반신만으로라도 살고 싶다. 그런 생각들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양 손목의 로프를 끊을 수 있을지 힘을 주어 보았다. 전혀 되질 않았다. 그런데 내 눈앞에 돌연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나는 기도할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다. “살려 주십시오. 아직 제게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을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이 있습니다. 죽으면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게 됩니다. 구해주십시오.”하고 말했다. 나는 평소에도 기도를 해왔지만, “구해달라”는 말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나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감고 있던 눈에 붉은 빛이 번쩍 비쳤다. 배의 엔진이 미친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비행기다”라고 말함과 동시에 일제히 갑판으로 뛰쳐나갔다. (주석 10)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된 김대중은 뒷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한국어를 아주 잘한 것으로 미루어 재일교포는 아닌 게 분명했다. 나는 이제 마지막 던져질 단계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으로 예수에게 기도했다. 당분간은 나를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살려달라고 했다. (얘기 도중 약 2분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흐느꼈다). 이때 갑자기 발동소리, 비행기 엔진소리 같은 소리가 터져나오면서 미친듯이 배가 요동쳤다. 그때 큰 배였고 롤링도 없고 빨라, 1,000마력은 되는 것 같았다. 붕대 위로 얼핏 보니 빨간 불빛이 번쩍여, 이것이 고비라고 생각했다. 배는 또 10여 시간 달렸다. 그때 “시고꾸(4國) 도꾸야마” 라는 소리가 들렸다. 항해를 계속해 11일 오전 한국 연안에 이르러 모터보트로 옮겨 상륙했다. 상륙하기 전, 배 위에서 의사가 와서 치료해 주었다. 혈압을 재어보고 혈압이 낮다고 혈압을 올려주는 주사를 두 대 놓아주었다. 40세 가량의 의사는 얼굴이 넓적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나를 잘 알아보았다. 육지에서 자동차를 두 번 갈아탔다. 두 번째 차는 침대가 있는 앰블런스 같았으나 약냄새는 나지 않았다. 2 ~ 3시간 후 어느 집에 도착, “집이 누추하지만 며칠 있어야겠다”고 누가 말했다. 땅바닥을 만져보니 한국 땅바닥의 촉각이었다. (주석 11) 납치범들은 이렇게 납치해온 김대중을 6일 만인 13일 오후 8시경 서울 동교동 자택근처에 풀어주고 사라졌다. 자신들을 ‘구국동맹행동대’라고 불렀지만 그런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고 중앙정보부의 짓이었다. “그들이 동교동에 있는 동교동사무소 근처에 나를 내려놓으면서 ‘3분 동안 돌아서서 용변을 보는 체하다가 안대를 풀고 집으로 가라’ 고 말하기에, 진짜 용변을 본 후 50 ~ 60m 떨어진 집으로 걸어갔다.” (주석 12) 필자가 섬 마을에서 살던 어릴적 얘기다. 어부 2명이 고기잡이를 갔다가 풍랑을 만났다.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서 가족은 죽은 줄 알고 장례를 치루고, 7일 째 되던 날 당시 풍습대로 무당을 불러 씻김굿을 하였다. 그런 도중에 어부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귀신인 줄 알고 놀랐다. 김대중의 가족도 그러했을 성 싶다. 행방불명 6일째 되던 날인 13일 저녁에 나는 마지막 방법으로 국제적십자사에 호소하기로 했다. 여권발급을 요청하기로 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데, “국제 적십자사가 가족이 요청하면 여권을 발급할 용의가 있다고 9시뉴스에 보도했다.”라고 전화로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희망을 갖고 서류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그때 구속자 가족을 돌보던 김한림 여사와 안순덕씨, 그리고 김정례씨가 걱정된 나머지 우리집에 와 있었다. 안방에서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응접실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오셨어요!” “의원님이 오셨어요!” 여러 사람이 외치며 우르르 대문으로 몰려갔다. 급히 현관으로 나가니 남편이 들어서는 게 아닌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정신이 혼미했다. 한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서면서 맨 먼저 내 손을 잡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다. 감사 기도를 바치는 내내 눈물이 흘러 목과 가슴을 적셨다. (주석 13) 김대중은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용금호(龍金號)에 실려 태평양 바닷속에 수장될 뻔 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귀환하였다. 용금호는 북한의 대남공작원들의 해상침투를 막기 위하여 1966년경 김형욱의 특명으로 건조한 시속 10노트, 전장 51.97미터, 고성능 무선장치를 갖춘 대간첩용 공작선이었다. 외형상 나타나 있는 시속은 10노트였으나 실제는 시속 20내지 30노트로 달릴 수 있는 쾌속정이었고 승무원은 20명이 탈 수 있었다. 이 대간첩용 공작선 용금호가 김대중의 납치에 동원되었다. 용금호에는 선장 이순례, 1등 기관사 정운길, 2등 기관사 정순남을 비롯하여 주정효ㆍ박재열ㆍ이점조ㆍ박용승ㆍ감순근ㆍ오정수ㆍ김명호ㆍ임익춘ㆍ김동일ㆍ이종조ㆍ박해천ㆍ김광식ㆍ윤창수ㆍ강영길ㆍ정용석ㆍ조시환ㆍ박정열 등이 타고 있었다. 중정의 에 따르면 중정은 1980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될 때까지 공작 가담자와 용금호 선원들의 비밀누설을 막기 위해 ‘특별 관리팀’을 구성하고 이들을 ‘보호’해 왔음이 드러났다. 이후락이 중정에서 물러난 뒤에도 중정은 이철희 차장과 해외공작국(8국)을 중심으로 특별관리팀을 구성하고 이들을 지원해 왔다. 중정은 공작 가담자 46명의 동향을 정기적으로 파악하고 이들의 입을 막기 위해 생계보조금과 보상금 등을 지원해 왔다. 1977년 6월 22일, 미 하원 프레이저위원회 공청회에서 김형욱은 ‘김대중 납치사건에 직접, 간접으로 가담한 인물들로부터’ 자신이 모은 정보를 기초로 하여 그 명단을 공개했다. 6월 24일 프레이저 위원장은 그 리스트를 보고 “미 국무성으로부터 입수한 정보와 일치하므로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신빙성을 보증ㆍ발표했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미국 정부와 의회가 인정한 명단인 셈이다. 주석 10) , 32~33쪽. 11) ,1973년 8월 14일. 12) 앞과 같음. 13) 이희호, 앞의 책,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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