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금호 조리장의 양심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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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9월 9일, 국회 민주당 원내총무실에서는 김대중 납치사건 관련자의 ‘양심선언’이 있었다.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 납치된 김대중을 한국까지 싣고 온 것으로 알려진 용금호의 조리장이었던 조시환이 기자회견을 갖고 당시의 상황을 처음으로 공개증언했다. 다음은 조씨의 증언내용이다. 용금호는 원래 미군 수송선으로 KCIA가 인수한 공작선이었으며, 73년 8월 8일 부산항을 떠날 때 선원 11명과 정보부 요원 2명이 승선했다. 정보부 요원은 김모, 정모라고 불렀다. 용금호는 8월 8일 저녁 일본 오사카 외항에 정박했으며, 정보부원 2명이 내려가 밤 10시 쯤 보트로 김대중을 데리고 왔다. 선생의 양손은 뒤로 묶이고 눈은 테이프로 가린 상태로 로프에 묶여 배에 태워져 배 선미의 닻 보관창고에 감금당했고, 한 명이 걸상을 놓고 감시했다. 용금호는 김대중을 태우고 오사카항을 출발해 9일 새벽 2~3시 쯤 공해상에 도착한 뒤 기관상의 고장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해상에 갑자기 30분 쯤 정박해 이상하다고 느꼈으며, 그를 살해하려 한다는 육감을 가졌다. 이때 선원들이 “비행기가 떴다”는 외침과 동시에 비행기 소리가 들렸으며, 배가 갑자기 속력을 내 달렸고, 9일 밤인지, 10일 새벽께 쯤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부두에 접안을 하지 않고 외항에 정박했다. 정보부 요원들은 이곳에서 선원들을 2일간이나 못 나가게 했는데, 그때 김대중을 감금했던 ‘창고’의 공간을 메워버리고 용금호의 이름을 지우는 등 배의 구조를 고쳤다. 그리고 선원들의 수첩도 회수하고 배의 이름도 유성호로 바꿨다. 용금호에 타지 않았던 윤진원씨가 총책임자였는데, 그 사람 주관으로 사건 후 두 차례 회식을 가졌다. 당시 선원수첩을 반납하지 않고 아직 갖고 있으며, 사건 이후 그 배는 더 이상 일본 출항을 하지 않았다. 나(조시환)도 이후 4개월 동안이나 다른 배도 못 타게 돼 생활이 어려워지자 아내가 용금호 선장이던 이순계씨를 찾아갔다. 아내는 이순계로부터 “윤진원씨를 찾아가라”는 얘기와 함께 당시 승선했던 선원들이 3백만 원씩을 윤진원씨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아내가 윤진원씨의 주소로 몇 차례 편지를 보내자 윤씨가 부산으로 아내를 찾아와 2백만 원을 내놓고 돌아갔다. 이후 항해에서 돌아와 내가 다시 상경해서 하얏트호텔 근처에 있는 윤씨를 찾아갔으나 “2백만 원만 받으라”는 답변만 들었다. 그후에 용금호 선원이었던 김광식ㆍ정순남씨 등 다른 선원들은 엄청난 사례금을 받고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주석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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