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길, 6.15 선언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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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공동선언은 실은 2000년 6월 14일에 채택됐다. 서명일을 기준으로 하자면 6.14 선언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왜 6.15라고 했을까? 북한이 4자(字)의 어감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는 설(說)이 있었으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의 경우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나온 합의문도 10.4 선언이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 에는 그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한 마디로 조간신문 때문이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서명은 14일에 하지만 발표는 다음 날 정오에 하자고 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반대했다. 15일 정오에 발표하면 자신이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16일) 선언의 내용이 조간신문에 실리게 되고 그럼 너무 늦다는 것이다. 김이 빠진다는 것이다. "대통령께서 돌아가실 때 개선장군이 되시고 싶다는 뜻이군요?" "개선장군 좀 시켜주시면 어떻습니까?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덕 좀 봅시다." 김정일다운 농담과 김대중다운 응수가 오간 뒤 선언의 내용은 곧바로 공개됐다. 그리고 15일자 조간신문에 무사히 실리게 됐다. 경위야 어찌됐건 6.15는 6.15다. 그 6.15 공동선언 10주년을 맞는 오늘 선언의 산파요 주역이었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그날의 회고로 기뻐해야 할 오늘, 임 전 장관은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며 입을 열었다. 프레시안 : 천안함 사건이 최대 현안이다. 어떻게 보나? 임동원 : 정부는 천안함 침몰이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안이 위중한 만큼 정부가 철저하고 신중한 조사를 했으리라고 보지만, 그러나 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정부는 발표 내용이 진실이라면 중국이 제의한 것으로 알려진 정전협정 당사국인 남북한과 미국, 중국 4개국 공동 조사를 수용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위기관리가 긴요하다.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고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지켜야 한다. 따라서 당장 필요한 것은 남북이 서로 자제하면서 긴장과 위기를 슬기롭게 관리하는 것이다. 어떠한 군사 충돌도 예방해야 하고, 예방에 실패하더라도 확전되지 않도록 자제해야한다. 군사적 충돌은 우리 경제에도 예상할 수 없는 큰 타격을 줄 위험이 있다. 군사적 충돌과 경제위기를 막는 게 급선무다. 프레시안 : 6.15 공동선언 10주년을 맞는 감회는? 임동원 : 반세기 불신과 대결의 시대를 넘어 어렵게 화해·협력의 새로운 구도를 만들었었는데 그게 지금 위기에 처해 있고, 심지어 군사적 충돌, 전쟁 위기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6.15 공동선언 10주년을 맞는다는 것이 정말 가슴 아프다.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긴장이 고조되고 위기가 오면 올수록 6.15 공동선언의 가치와 소중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 6.15 선언은 위기를 어떻게 기회로 전환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6.15의 정신을 계속 이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프레시안 : 6.15 선언의 가치와 소중함이란 무엇인가? 임동원 :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하게 된 배경이 중요하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때는 2중의 위기 상황이었다. IMF(국제통화기금) 금융 위기와 함께 안보 위기, 즉 북한의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가 있었고 미국의 강경파들은 북한에 대한 정밀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2중 위기 상황에서 남북관계는 아주 냉각되어 있는 채로 물려받았다. 대화 자체가 안 됐다. 그런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우선 취임사에서부터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이미 남북 기본합의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이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김 대통령은 이 문제를 가지고 남북 정상회담을 해서 탑-다운(top-down)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자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했다. 언제 어느 때라도 만나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햇볕정책으로 알려진 화해·협력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남북 대화를 하자고 지속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물론 처음부터 순조롭게 잘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었다. 당국간 대화가 잘 안 되는 상황에서 민간 차원에서라도 먼저 접촉을 하게하고, 정치 문제를 논의하기 어렵다면 우선 경제적 접근부터 하자, 즉 정경분리 정책을 쓰면서 우리 기업인들이 북한과 경제협력을 위해 접촉하는 걸 대대적으로 장려했다. 정주영 현대 회장이 1번 타자로 나서서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실현시켰다. 금강산 관광은 남북간 긴장 완화에 크게 기여하고 당국간 대화를 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또한 금강산 관광은 IMF 금융 위기를 극복하는데도 1등 공신이었다. 관광이 시작되면서 한반도 안보 위기 때문에 투자를 꺼려했던 외국인들이 '그게 아니구나' 하고 다시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국가 신용도가 몇 달 사이에 2등급이 올라갔다. 이 가치라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 번째 포인트는 미국과의 정책공조였다. 과거 노태우 대통령 때 남북 기본합의서를 만들어 놓고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는 한 남북관계가 진전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정부가 출범하지마자 미국 클린턴 정부를 설득해서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건 곧 미국과 북한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그렇게 되면 핵·미사일 문제도 다 해결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걸 클린턴 행정부가 받아들여서 페리 프로세스, 즉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했다. 한미가 정책을 공조하면서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렇게 세 가지 접근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그렇게 볼 때 남북 정상회담의 1등 공신은 회담을 제의한 김대중 대통령, 제의를 수용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민간 차원에서 길을 뚫은 정주영 회장, 우리를 지지해준 클린턴 대통령이었다. 프레시안 : 정상회담을 하러 평양에 갈 때 가졌던 최소 목표와 최대 목표는 무엇이었나? 임동원 : 가장 큰 목표는 남북간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싶었다. 남북관계가 좀 되어야 미북관계도 잘 될 수 있고, 그래야 한반도 평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남북이 서로 오고 가고, 돕고 나누는 사실상의 통일 상황을 만드는 게 최대 목표였다. 그런데 당시 여론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들이 만났다는 것만 해도 의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 이상을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최소 목표도 있었다. 정상이 흉금을 털어 놓고 한반도 평화, 통일, 남북관계 개선 문제를 논의해서 방향을 잡겠다는 건 추상적이었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실천적인 목표 딱 하나만이라도 달성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이산가족 상봉이었다. 그거 하나라도 합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6.15 공동선언을 만들면서 그 이상의 것을 이뤄냈고 실천에 옮기게 됐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정부 임기 딱 중간에 정상회담을 했다. 약간 늦은 감이 없지 않았나? 임동원 : 일찍 하고 싶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부터 언제 어디서나 만나자고 했는데, 북쪽에서 호응이 안 왔다. 무르익지 않았다. 98년 11월에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시작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정상회담을 빨리 하도록 현대 측 창구를 통해 노력했지만 안 됐다. 호응을 해온 것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윌리엄 페리 미 대북정책 조정관이 99년 5월 평양에 가서 '우리 미국과 한국이 같이 이렇게 하려고 하니까 당신들도 이 기회 놓치지 말고 같이 합시다'고 제의했다. 그에 대해 북한은 '미국을 과연 믿을 수 있나' 반신반의했는데, 당시 미북간 미사일 협상이 본격화되면서 신뢰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비료, 식량 지원 의사를 표명하면서 적극 나섰다. 특히, 북한 사람들이 나중에 들려준 얘기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과 일본에 대해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하라는 외교적 노력을 계속 하는 걸 보고 '얘기 상대가 되겠는데' '신뢰할 수 있겠는데'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게 99년 말 쯤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그런 행보를 상당히 고맙게 생각했다고 나중에 말해줬다. 그리고 2000년이 됐고, 연초부터 발동이 걸렸다. 물론 더 일찍 됐으면 더 좋았겠지. 우리도 그걸 원했는데 역시 분위기와 조건이 숙성되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안 : 6.15 공동선언이 그렸던 미래상과 성과는 무엇이었나? 임동원 : 6.15 공동선언을 합의하면서 우리가 그리고 있던 그림, 미래상은 남북이 서로 인정하고 화해·협력하면서 오고가고 돕고 나누면서 '사실상의 통일 상황'을 실현하는 길을 닦는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길을 닦고 다음부터는 길이 열리길 바랐다. 사실상의 통일(de facto unification)이란 말은 독일에서 나왔다. 독일은 전범국가여서 주변 어느 나라도 통일을 바라지 않고 반대했다. 그래서 서독은 법적 통일 대신 동독과 경제협력과 교류, 인도적 지원, 왕래를 통해 민족의 고통을 덜어 주면서 통일은 안 됐지만 통일된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 그게 바로 사실상의 통일이다. 우리도 법적인 완전 통일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만 사실상의 통일 상황은 마련할 수 있지 않겠나 싶었다. 그를 위해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이뤄져야 하는데 첫째, 평화와 통일의 과정을 공동으로 관리·추진할 기구가 필요하다. 그게 '남북연합'이다. 둘째,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유럽국가들이 경제공동체를 통해 국가연합을 거쳐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것처럼 경제적 접근을 해야 한다. 그 시범 사업이 바로 개성공단이다. 셋째, 군비통제를 해야 한다.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과 군축을 포함한 군비통제를 병행하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본다. 서로 영향을 주면서 맞물려서 나간다. 넷째, 더 나아가서는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통일지향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그건 남북연합에 기초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정권이 들어서도 이것과 마찬가지의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정·보완은 할 수 있겠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 그런 청사진을 가지고 6.15 공동선언 후 남북관계를 추진하면서 소중한 성과를 올렸다. 시작으로서는 큰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결과 불신의 시대를 넘어서 화해·협력의 새 시대를 연 것이다. 5대 중점사업, 즉 철도·도로 연결, 개성공단,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사업, 다방면에 걸친 접촉·왕래·교류를 했다. 2007년까지 44만 명이 남북을 왕래했다. 과거 남북 합의가 있었지만 실천된 적은 없었는데, 6.15 공동선언을 통해 처음으로 실천에 옮겨진 것이다. 두 정상은 '처음부터 욕심을 내지 말고 몇 가지만 먼저 해 봅시다. 그리고 나중에 확대합시다' 이렇게 합의했다. 서다 가다 난관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가 됐다. 그 결과 어떤 현상이 나타났느냐. 꽉 막혀 있던 남과 북이 상대를 더 많이, 더 잘 알게 됐다. 북쪽 주민들도 남한에 대해 좋지 않게 세뇌됐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우리의 의식도 많이 변했다. 이렇게 서로 소통과 공개를 통해 상대를 알게 되니까 적대 의식이 점점 수그러들고 긴장이 완화되기 시작하고 민족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다. 우리가 북쪽에 비료·식량 지원을 해주면 북쪽 사람들이 '피가 물보다 진하구만요'라고 했다. 그런 민족공동체 의식이 생기면서 상호 신뢰도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신뢰가 싹트고 다져진다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 6.15 선언 4항에 보면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고 했는데,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프레시안 : 지난 10년 간 난관도 있었고 현재는 6.15 선언의 이행이 사실상 정지된 상태다. 어떤 부정적인 요인들이 작용했나? 임동원 :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부시 팩터(요인). 부시 대통령은 집권 후 부시 독트린을 통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군사적 선제공격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면서 적대시 정책을 폈다. 그러다 보니 남북관계에도 계속 제동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노무현 두 지도자들의 강력한 의지, 통일 철학, 비전을 꺾지는 못했다. 가끔 제동이 걸려서 노무현 정부 때 오다가다 한 적은 있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시가 집권 말기인 2006년 11월 과거 6년간 해 오던 대북 제재와 압박을 풀고 정책을 완전히 바꿨다. 북한과 상대하지 않겠다던 부시가 직접 협상을 시작하고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하고 적성국 교역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6자회담을 진척시켰다.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자 노무현 대통령이 2차 정상회담을 하고 10.4 선언을 채택했다. 여기서 잠깐 10.4 선언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10.4 선언은 6.15 선언에 기초해 남북관계를 확대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6.15 선언 직후에 5가지로 합의됐던 남북 협력 사업을 40가지로 확대하기로 했다. 특히 1단계 추진 과정에서 제동 요소로 작용했던 군사적인 문제를 풀기 위한 시도가 10.4 선언에 들어갔다. 긴장의 바다, 충돌의 바다인 서해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자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라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91년 남북 기본합의서의 불가침 부속합의서에는 '서해 해상 경계선을 남과 북이 앞으로 계속 협의해 나간다'고 되어 있다. 서해에 경계선이 없고 NLL(북방한계선)에는 문제가 있다는 걸 전제로 한 합의였다. 그 기본합의서 이후 15년 동안 협의해 온 결과가 10.4 선언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주 중요한 대목이었다. 서해에 평화 수역과 공동 어로구역을 설정하고, 해주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하고, 해주에 개성공단 같은 걸 하나 더 만들고, 한강 하구를 공동으로 이용하자는 합의를 한 것이다. NLL은 선(線) 개념이다. 남북은 20년 전에 해상경계선을 설정하자는 선 개념의 합의를 했었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그걸로 해결이 안 되니까 면(面) 혹은 지대 개념으로 바꾼 것이다. 지상에 비무장지대(DMZ)가 있듯이 해상에 상당히 넓은 폭의 평화지대를 만들어서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참 슬기로운 합의였다. 그걸 실천하기만 했다면 작년 11월 대청해전 같은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이명박 정부가 6.15 선언, 10.4 선언을 다 부정하면서 충돌이 일어났다. 그게 바로 부시 팩터에 이은 MB 팩터다. 이명박 대통령이 들어서서 이전 정부와 차별화하는 정책을 취하고 부시처럼 ABR(Anything But Roh.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을 모두 거부함)을 하면서 선(先) 핵문제 해결 후(後) 남북관계라는 핵 연계 전략으로 돌아섰다. 또 이명박 정부는 북한 붕괴론적 시각으로 접근했다. 북한의 정치 상황이 불안정하고 식량난·경제난이 심각하니 조만간 붕괴되거나, 아니면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어 굴복할 거니까 기다려라,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면서 웨이팅 게임(waiting game)을 계속 해왔다. 그리고 성과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남북관계가 경색을 넘어 냉각되고, 냉각을 넘어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어떤 부수적인 효과가 나타났느냐. 아주 두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북한이 중국에 기울어지고 중국 경제권에 종속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북한 교역량의 70%가 대중 교역이고, 중국이 나진·선봉 지역과 북한 지하자원에 손을 뻗혔다. 경제 공동체 건설을 위해 우리가 다 하려던 게 모두 중국한테 넘어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와 가 '이명박 대통령의 강경정책이 북한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다'는 기사를 썼다. 중국이 전략적으로 북한을 어떻게 해보려고 해서가 아니라, 한국이 북한을 강하게 밀어제치니까 중국 경제권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경제적으로 예속되기 시작하면 정치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남북간 평화와 통일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설사 북한에 급변사태가 나더라도 오히려 중국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잘못된 접근 방법인가. 마지막으로 노스 코리아(North Korea) 팩터도 있다. 북한의 강경일변도의 경직성이 문제다. 이렇게 세 가지 요인 때문에 노무현 정부 때에는 강한 제동이 가해져도 남북관계가 어렵사리 이어졌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미국이 아니라 우리가 나서서 6.15 공동선언 이행을 중단하고 북한과의 대화를 단절되면서 남북관계가 파탄되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6.15 공동선언 후 한국 사회 내부에 일어난 변화가 있다면? 임동원 : 6.15 선언 후 처음으로 그해 8.15에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이상가족 상봉 행사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남쪽 사회에서 이산가족이라고 하면 주로 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을 의미했다. 남에서 북으로 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연좌제 때문에 쉬쉬했다. 그런데 남쪽의 이산가족을 만나러 북쪽 사람들이 내려왔는데, 거의가 다 월북자들이었다. 가슴에 훈장 달고 내려왔다. 월북을 했거나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인민군 복무를 하고 북한에서 대학 나와서 북한 사회에서 나름대로 지위에 있는 사람들만 골라 보냈다. 이때부터 이산가족이라고 하면 월남자만이 아니라 월북자도 있구나 하는 걸 우리 사회가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좌제라는 구속으로부터 해방됐다. 연좌제는 법적으로는 이미 풀렸지만 정신적인 구속만큼은 여전했는데, 거기서 해방된 것이다. 그때부터 월북자의 가족들도 '우리 형님이 평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두려움 없이 하게 됐다. 그 전엔 빨갱이로 몰릴까봐 그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다녀오면서 북한 동포들의 삶이 참 처참하고 불쌍하니까 이념을 떠나서 같은 동포로서 도와줘야 한다는 민족 공동체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요즘 다시 북한을 도와준다고 하면 빨갱이로 몰아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을 도와주자는 사람들이 빨갱이라서 도와주자는 게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들도 도와주는데 우리 동포를 왜 못 도와주느냐,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뭐가 문제가 있느냐 지배자들이 문제지, 이런 의식이 싹트고 적대 의식이 완화됐다. 그게 우리 사회에 나타난 커다란 변화다. 또, 차원을 달리 해서 말하자면, 남북관계에 대한 시민사회의 활동 공간이 넓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북쪽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대화할 수 있었다. 맨 첫 만남을 금강산에서 했는데 남북 노동자 대회, 농민 대회, 대학생 대회 같은 걸 했다. 그런 행사를 한다니까 우리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에서는 아직도 피해 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가서 말이라도 잘못하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허가하지 말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자신감을 갖자. 민주주의의 장점이 뭐냐.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다. 지금 남쪽 사람 중에서 공산당 찬양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오히려 우리의 다양성을 보여주면 북한을 제압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 허가해 줬다. 그리고 과연 우리 정부의 판단대로 그렇게 될지 아주 정밀하게 관찰했다. 그랬는데 사상적으로 문제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접촉을 통해서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 후로 남북 접촉이 많았는데, 북한이 좋아 보이니까 거기서 살고 싶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건 대단히 중요한 변화였다. 강경 보수 진영에서는 안보 의식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자꾸 한다. 그 사람들은 6.25 때의 피해의식·패배의식, 그리고 1950~60년대의 멘털리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우리 안보의 가장 큰 문제는 군사력·경제력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북한보다 다 앞선다. 문제는 우리 지도층 인사들이 안보에 대한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는 게 안보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같은 걸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반 국민의 수준에서는 안보 문제를 이미 초월한지 오래다. 그 역시도 6.15 공동선언의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또 시민사회의 큰 변화 중 하나는 우리 국민들이 평화와 통일의 주역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6.15 공동선언에서 제시한 대로 우리가 참여해서 평화와 통일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모두가 통일운동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도 큰 변화 중 하나다. 프레시안 :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임동원 : 통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 통일은 목표인 동시에 과정이다. 프로세스다. 완전 통일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늘에서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지거나 누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으로 달성해야 하며, 따라서 점진적 단계적으로 이룩해 나가야 한다. 법적 통일에 앞서서 통일은 안 되었지만 통일이 된 것과 비슷한 상황, 즉 남북이 서로 오고가고 돕고 나누는 사실상의 통일 상황부터 실현하고, 법적 통일을 지향해 나가야 한다. 먼 훗날 법적인 통일(de jure unification)이 됐을 때를 기준으로 보자면 노무현 정부 말기까지 통일이 15% 정도는 되지 않았나 싶었다. 물론 지금은 더 후퇴했다. 프레시안 : 현 시점의 남북관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임동원 : 다섯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더 이상 대북 강경정책을 고집하지 말고 철회해야 한다. 남북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선언은 연속선상에 있는 합의들이다. 어떤 면에서 하나의 합의다. 이걸 존중하고 이행하는 길에 나서야 한다. 둘째, 냉각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도적 지원을 무조건 재개 하고 금강산 관광 사업도 북이 우리의 조건 들어주겠다니까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개성공단을 활성화하고, 교류·협력도 궤도에 다시 진입시켜야 한다. 셋째, 당장 중요한 것은 천안함 사건 이후 조성된 긴장을 완화하고 군사 충돌을 방지하는 것이다. 우발적 충돌이 확전되면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든 전쟁을 피해야 하는데 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고 동시에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가 이미 합의됐으니까 구체적인 협의를 해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대청해전이나 천안함 문제 같은 게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계속 같은 일이 일어난다. 넷째 뭐니 뭐니 해도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해야 한다. 작년 여름 이후 북측이 정상회담을 적극 추진하려고 하다가 대청해전 이후 깨졌는데 다시 재개해야 한다. 우리의 의지만 있다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다섯째, 정전상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협상에 우리가 선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 문제는 9.19 공동성명에서 이미 합의를 봤고, 미국도 작년 11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평화협정 논의 의사를 밝혔다. 북한은 금년에 시작이라도 하자는 것이다. 몇 년이 걸릴 수 있으니까 시작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 남북관계를 개선·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00615102454§ion=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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