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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탈출(5)
Korea, Republic o 백심 3 2265 2010-12-12 11:25:57

3. 퇴학

그해 가을 중대는 평양-희천사이 고속도로 공사장으로 나갔고 나와 중대의 김성일, 유진수는 군관학교에 갈 대상으로 선발되어 6개월 동안 학습을 하게 되었다.

 

김성일은 나보다 한살 더 많았고 고향은 황해북도 사리 원시였다. 그의 아버지는 8.15훈련소후방부의 직급 있는 장령이었다.

 

유진수는 황해남도 해주시 대곡동에 고향을 두고 68년생으로 아버지는 일반 노동자였다. 하지만 친척들은 다 간부급 자리들을 차지 한 성분이 좋은 출신이었다. 그들은 나보다 나이는 많았으나 1년 늦게 군대로 입대한 후배들이어 상급인 나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내가 중학교 졸업 때 희망했던 군사전문학교를 그들은 2년 다니고 나온 뒤라 나이는 많았지만 군복무기간이 나보다 어려도 차원은 완전히 달랐다. 대체로 중대는 90%가 함북, 함남, 양강, 평양, 평안도와 자강도에 고향을 둔 서민의 자식들이었다. 같은 지역의 황해도에서 군복무를 한다는 것 자체가 든든한 백이 없으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힘없는 황해도 지역의 서민자식들은 먼 북방의 함경도지방으로 후방 군단들에서 군복무를 하였다. 그 이유는 부모가 지척에 있으면 아무래도 군 복무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었다.

 

북한 헌법에는 "조국보위는 공민의 신성한 의무이다"라고 하였는데 나와 같은 서민의 자식들에게는 강제성이 많지만 간 부집 자식들은 자기 발전의 발판으로 여기는 것이 보편적인 흐름이었다.

 

김성일과 유 진수처럼 같은 군사전문학교 졸업생들은 군에 입대하자마자 그들의 개인자료가 각 구분 대 간부 과로 넘겨졌다. 그러나 나와 같이 중학교나 졸업하고 일반 사회에서 노동하다가 군에 입대한 서민의 자식들은 대열과가 문건을 넘겨받았다. 그러니 일단 군관학교에 가려면 대열과의 문건을 간부 과로 옳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문건을 옮기고 군관학교 대상에 망라되도록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 중국산 가죽 잠바 한 벌이었던 것이다.

 

외국과의 교류가 차단된 북한에서 80년대에 일본산이나 영국 산의 생활필수품은 수준이 높은 간부급들의 소유였고 직급이 낮은 간부들에게는 중국산과 같은 희한한 제품들이었다. 그 제품들은 그들에게 있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40년을 기껏해야 테트론이나 나일론 천으로 된 옷에 만족했던 사람들이 간편하고 질 좋은 가죽 잠바와 같은 것은 큰 것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연대에는 20여명의 군관학교 대상들이 선발되어 91년 6월까지 군단 간부 과에 시험을 받기 위하여 공부를 하였다. 헌데 필기시험과 체육시험은 엄격했다.

 

사병들의 초급지휘성원인 장교가 되어 수십 명을 김일성부자의 충실한 군인과 싸움꾼으로 키우기 위하여서는 정치, 경제, 군사, 체육을 겸비한 능력의 소유자가 되어야 했다. 그래도 말이 시험이지 군단에서 낙선되는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었다.

 

드디어 나는 91년 7월초 같은 중대에 있던 김성일, 류 진수와 함께 김 철주포병종합군관학교로 가게 되었다. 김 철주포병종합군관학교는 평안남도 순천시 은산 군 숭하 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88년부터 전군에는 중국 옴이라는 피부전염병이 발생하여 사실 말이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피부의 무좀보다 더 지독한 옴을 제거하려 유황으로 약제를 만들고 또, 가려움에 괴로워하던 사병들의 몰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헌데 이놈의 군관학교도 예의가 아니었다. 이유도 없이 학교에 입학하는 모두를 정문 밖에서 홀딱 벗겨버리고 알몸검사를 실시하였다. 수백 명이 도로 위 양 모서리에 한 줄로 서서 검사받는 모습은 그야말로 우습기도 하고 민망스럽기도 했다.

 

옴 환자는 구분대로 돌려보냈다. 아스팔트 포장으로 시내에서 연결된 학교 정문은 농촌해안가 마을의 구분 대와는 자못 희한하였다.

 

4200여명의 학생과 1000여명의 교원(교사),1000여명의 관리인원을 가진 장교학교였다.

 

16개의 각종 군사대학 및 장교학교를 보유하고 있는 북한은 포 무력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보병군관학교인 강건 군관학교에 같이 있던 것을 따로 분리하여 순천으로 옮겨왔다.

 

1개 대대에 4개 중대로 10개 대대를 가지고 있는 학교는 각종 포의 능력에 맞는 장교들을 배출하기 위하여 전투정치훈련을 규정과 교범의 요구대로 진행하였다.

 

일명 "용광로"라고 불린 정도로 학교는 무쇠를 강철로 만들듯 정신력, 기술력, 신 체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강한 요구와 통제를 실시하였다.

 

나는 8대대 4중대에 배속되었는데 그 중대는 축지 중대로서 축지와 기술 인재를 가진 장교들을 키우는 곳이었다.

 

북한군은 12월1일부터 동기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학교는 11월 1일부터 새 학년도 전투정치훈련을 시작했다. 7월에 올라 온 우리는 11월 1일전까지 신입생으로서 분리되어 구분 대에서 입고 온 군복차림으로 그냥 학교의 규율과 군사과업만 수행하였다.

 

나는 상등병(일등병)의 군사칭호를 연대에서 떠날 때, 내 마음대로 하사(이등병)의 계급장으로 바꾸어 달았다. 나뿐만 아니라 전체가 하사가 아니면 중사계급을 자위대로 달고 다니었다.

 

군법에는 군사칭호를 마음대로 옮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관학교는 왜서인지 그런 문제에 별로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단 군관복장으로 된 교복을 입히면 모두가 똑같은 학생의 군사칭호이기 때문이었다.

만 3년을 배우고 최우등(3급)생이 되면 중위의 군사칭호를 수여하고 나머지는 소위의 군사칭호를 수여하였다. 그리고는 하전사생활을 하였던 본구분대로 내려 보냈다.

 

사실 북한군이라 함은 인민무력부인 36개의 군단 급 무력과 김일성 부자를 호위하는 호위총국, 평양시 방어를 위하여 만든 방어사령부가 다 합친 것이었다.

북한군 총참모장이 인민무력부장보다 높은 직급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병군관학교는 무력부소속이다보니 호위총국과 방어사령부는 의탁공부차원에서 부대 병사들을 보냈다. 내가 배속된 중대에도 3명의 호위총국과 방어사령부 소속 병사들이 있었다.

 

일명 840조라고 간단히 부른 중대는 120명으로 구성되고 3개의 중대 중 1중대는 3학년 선배들이고 2중대가 2학년, 3중대가 1학년 선배였다. 우리 4중대는 신입생들이었다.

 

아무리 규정과 교범의 요구대로 하려고 하여도 이런 속에서 주먹이 세고 배짱이 두둑한 자들은 보통 남을 통제하는 것이 보편이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라는 말처럼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북한군전체에서 몰려든 신입병사들은 서로가 자기 자랑들을 하면서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하려 하였다.

 

우리 소대는 특수부대라고 자칭하는 교도지도국 제 11항공 육전대 여단에서 온 김명호라는 84년도 군복무생이 부소대장으로 임명되어 학급을 장악통제하려 했다. 그는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중사계급의 평양시 출신이었다.

 

물론 민주주의 선거아래 선출한 것이 아니고 교육당국의 독단적인 처사였다. 학교당국은 특수부대의 병사로서 벌써 다른 학생들의 기선을 제압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에 보답이라도 하려고 그는 우리를 통제하려고 미쳐 날뛰었다.

1소대였던 우리 소대를 다른 소대보다 더 규율 있고 절도 있게 만들어 앞으로 정식 1학년 학생이 되면 더 높은 자리인 사관 장(특무상사)이 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는 그가 왜서인지 나는 처음부터 미웠다.

멀쩡한 허우대를 가지고 분별없이 설쳐대는 그가 아무 이유 없이 밉게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어리석게 행동하는 그와 다투기로 결심하고 허구한 날, 많이도 싸웠다.

 

그는 자기보다 마음이 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주먹을 쓰곤 하였다.

교원인 중대장, 정치지도원들의 눈에 날 것 같아 바른 소리 하나 제대로 못하는 동료들은 그의 주먹대상이 되어 날마다 코피를 쏟고 눈이 부어올라 늘 붕어눈으로 하루 일과를 보내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한 번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는 나를 그는 말로  얼려보려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시도하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한번은 나에게 달려들었다.

 

유도를 잘하는 그의 특기를 알고 있던 나는 그의 목덜미를 같이 단단히 잡고 똑같이 주먹을 날렸다. 그가 한번 얼굴을 치면 나도 치고 그렇게 서로 교대하면서 때리다시피 하였다. 그랬더니 10여매가 똑같이 돌아가자 둘 다 코피가 나고 눈이 부어올랐다.

 

정신을 가다듬고 맞서보니 어렵게만 보아왔던 특수부대원도 힘에서는 나와 비등할 뿐이었다. 그러니 더 성수가 나 그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했다.

저녁시간 병실에서 벌어진 싸움은 다른 병사들의 말림에 의해 가까스로 끝나고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는 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피하려고만 했다.

같은 양의 밥을 먹고 같이 규율생활을 하는 속에서 지조가 없다 보면 갖은 심부름과 청소는 도맡아 해야 하는 것이 약자의 설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철 같은 규율 속에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많지도 않는 량의 밥과 영양가 없는 반찬으로 지내다 보니 배고픔과 힘겨움은 찰거머리처럼 따라 다녔다. 그러니 그 모진 시달림에 늘 견뎌야만 했다.

 

학교 식당은 1000여명이 한 번에 식사할 수 있는 방이 3개 있었는데 일명 1공구라고 하는 한 개 식당 칸은 약 천 평정도 되었다. 출입문에서 배식구를 바라보면 그곳에 서있는 사람이 작아 보일 정도였다.

 

동방아시아에서 제일 큰 식당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어서인지 처음에는 어느 대기업의 현장생산라인에 들어온 느낌으로 대단히 커 보였다. 태어나 그렇게 큰 식당은 본적이 없다. 선배들의 말에 의하면 그 식당이 작아보여야 3년이 되어 졸업한다고 했다.

 

우리 병실에서 식당까지는 약 500m 거리였다. 하루 800g의 양곡을 공급하였는데 그때 다른 나라에서 원조한 밀쌀을 타개하여 증기밥통으로 만든 밥을 주었다. 그런데 한 끼에 269g정도의 밥을 먹고 훈련에 정신이 없다 보면 도저히 배고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식당까지 가면서 열을 맞추어 합창을 목청껏 부르다보면 더 허기가 졌다. 또, 학교당국은 도중에 정보구간들을 표시하여놓고 당직 장교들로 하여금 메가폰을 직접 들고 나와 행진을 요구하여 나서곤 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사관장이 "앉으시오"라는 구령소리에 맞추어 밥을 먹고 그가 다른 사람의 식사와는 관계없이 "일어섯!"하고 구령을 주면 남은 밥도 먹지 못한 채 일어서야만 하였다. 그러니 재빨리 눈치를 보면서 먹지 않으면 차례진 것마저 놓칠 수가 있었다.

 

8월의 무더위에 제대로 된 한풍 설비가 없다보니 더운밥에 더운 국 또, 땀이 나는 몸으로 다시 중대까지 구보 및 정보행진을 하며 오다 보면 밥을 먹은 것은 금방 꺼져 버리곤 했다.

 

그때부터 기나 긴 다음 식사 시간까지 기다리는 것은 한마디로 고역이었다. 정말 힘들었다. 점점 체력은 하강하고 손맥마저 잃게 만들었다. 힘든 훈련으로 피곤에 쌓였지만 배고픔으로 하여 밤에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늘 하늘에서 떡이라도 한 대야 떨어졌으면 목구멍까지 채우고 입에 물고자는 환상에 사로 잡혔다. 그러던 끝에 나는 끝내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을 쳤다.

 

8월 중순 어느 날, 취침시간을 이용하여 야간에 학교울타리를 넘어 빵이라도 사먹으려 자유주의를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부대밖에 나가 빵을 실컷 먹고 다시 들어오다가 보초병들에게 걸려 그들과의 싸움이 벌어졌다. 총을 든 그들은 상황이 바빠지자 메고 있던 AK자동보총을 난사하여 부대 직일 관까지 뛰어나오고 내 문제는 학교당국에 그대로 제기되고 말았다.

 

사실 보초병들은 공탄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도로 세부화 되고 정규화 된 교육 단에서 이런 일은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 사건의 장본인이 되어 학교에서 추방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 것도 개학을 앞둔 5일전 날, 발표로 하여 더욱 가슴이 아팠다.

사건이 터진지는 2달 전이었다. 학교의 대대장은 괜찮으니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생활만 잘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것은 한 갓 사탕발림의 소리였다.

 

본 부대로 쫓겨 가는 퇴학생들의 확정되자 개기름이 번질번질한 대대 보위지도원은 거드름을 피우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같이 정신무장이 안되고 자유주의를 일삼는 자들은 필요 없다. 어떻게 성분도 좋지 않은 자식이 이 학교까지 올라왔어?"

"가죽잠바 한 벌을 뇌물을 주고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뇌물 좋아하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 말랬다고 아무리 네가 날고뛰어도 너는 태어나서부터 정해져 있어. 그러니 다시는 이런 신성한 군관학교와 같은 곳에 올라 올 생각을 하지 말고 부대로 내려가서 생활이나 잘 하다가 집으로 가라. 알겠지? 감옥에 넣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해야 돼?"

그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혔다. 가죽잠바 한 벌을 그는 아주 우습게 여겼다. 거기에 나의 성분은 하찮은 것이라고 못 박아 꼬집었다. 또, 무서운 눈초리로 위협까지 했다. 나는 떨려 오는 주먹을 가까스로 참았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 보위지도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나와 함께 군단에서 3명이 같이 내려왔다. 군관학교는 신입생들에게 정식 학생으로 인정하고 군관 복을 입힌 다음, 11월 1일부터 새 학년진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진입시키기 전인 10월말 환자라던가 나처럼 제기되는 병사들은 무조건 부대로 추방시켰다.

 

나는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마치 꿈을 꾸는 환각에 사로잡혀 어리둥절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피땀으로 이루어준 값비싼 가죽잠바가 물거품이 되어 돌아오는 현실 앞에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

그래도 속은 살았다. 무지하게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군단 간부 과를 거쳐 사단 대열 과까지 오는 내내 앞으로의 운명에 대하여 저울질을 해봤다.

 

물론 나의 문건은 간부 과에서 대열과로 넘겨졌다. 형량이 무거운 죄수처럼 발목에 쇠고랑을 두른 듯 힘겹게 대열과 출입문을 여는 나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어떤 형태의 처벌이 기다릴 것인지도 모른 채 두려움에 눈만 사렸다.

 

중좌(두 줄의 별 두개)계급의 대열과장은 178cm의 큰 키에 덩지가 큰 사람이었다. 면도칼로 얼굴 앞면도를 한 자리가 확연한 그는 털보였다.

"너 이놈새끼! 사단의 명예를 더럽히고 추방되어 온 나쁜 놈. 너 같은 자식은 공병대대에 가서 혁명화를 하면서 갱도 공사나 실컷 해보아라. 그 곳에서 노동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아마 정신을 차릴 거야. 알 갔어?”

 

대열과장은 물고 있는 중국산 권연을 깊숙이 빨아 동그라미를 천정위로 올려 보내며 입에 거품까지 물려고 했다.

그가 내 뿜은 연기는 가득이나 희박한 자그마한 방안의 천정으로 멋진 동그라미를 그리며 올라가다가 물에 떨어진 수채화물감처럼 허공으로 천천히 풀어져 버렸다.

“야! 정말 너 같은 놈들을 보면 짜증나 못 견디겠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선거 때문에 눈코 뜰 새가 없는데 너 새끼 때문에 문건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되지 않아! 미친놈의 새끼! 눈 대충 감고 학교생활이나 잘 하다 올 것이지 왜 돌아다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키며 지랄이야? 이 쳐 죽일 새끼야?”

 

그는 자기가 마치 겪은 사람처럼 더 날뛰다 시피 핏대를 돋쳤다. 그러던 그는 옆에 앉아 있는 부원에게 한 마디로 나의 문건을 가져 오라고 하더니 잠시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젖힌 채 담배연기를 연 거푸 뿜어댔다.

“미운 놈 떡 한 개 더 준다고 너 자식은 정말 운이 좋은 녀석이다. 생각 같아서는 오늘 당장 데려가고 싶은데 선거기간이라 선거가 끝날 때까지 이동배치가 중단되었거든. 그러니 당분간은 나와 같이 사단 선거 상무에 동원되어 사무실 청소와 심부름을 하여라."

 

과장은 마치 자기가 선심이나 쓴 듯이 마지막 마디에서는 동정어린 말투로 달래이려고 하였다.

"알았습니다. 대열과장 동지, 앞으로 똑바로 생활하겠습니다. 잘 돌보아 주십시오.”

나는 부끄러움을 집어던지고 씩씩하게 대답하였다.

"좋아, 한번 두고 보자."

 

대열과장은 보고 있던 서류들을 정돈하며 나를 선거 상무사무실로 데려가더니 이것저것 임무를 주는 것이었다. 평안남도 순천에서 군단지휘부가 있는 해주를 거쳐 장연까지 오다나니 11월초 순이었는데 날씨는 조금 추웠고 그 해 11월 17일에 지방주권선거가 진행되던 때였다.

 

2층으로 된 사단 지휘부는 1층에 각종 부서들이 있었다. 선거 상무 사무실도 체육기자재 창고 건물에 방을 내고 임시로 쓰고 있었다.

 

대열과장이 상무이고 3명의 사단 지휘부 군관들이 동원되어 1만 5천여 명이나 되는 사단 병력인원을 하나한 명부에 정리하여 나갔다. 과장의 지시대로 나는 장작을 패서 난로에 불을 지피어 방안 온도를 보장하는 한편 책상 및 바닥청소를 하루 4~5번씩 하면서 열성을 부렸다.

 

한편으로는 대열과장에게 아첨을 부려 공병대대가 아닌 좋은 구분대로 배치되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이런 기회에 그를 잘 삶아놓아 향후 대학입학의 발판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낙후 분자로만 생각했던 내가 눈치껏 청소와 잔심부름을 잘 하자 과장은 물론 동원된 군관들까지도 서로 말을 건네기 시작하였고 저녁이 되면  그들과 카드놀이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1월 8일 저녁 6시경에 나는 과장을 조용히 만났다.

"과장동지, 낙연광산에 저의 6촌 되는 친척이 있는데 오늘 밤 시간을 주면 안 되겠습니까? 한 턱 내려고 합니다."

 

나의 뜻하지 않은 질문에 과장은 선뜻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한턱내겠다는 소리에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 말을 왜 이제야 하는 거야. 제기되지 말고 내일 아침 8시까지는 도착해야 돼. 한번만 제기되면 너는 끝장이야."

"고맙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사단 지휘부를 나섰다.

낙연 광산에는 친척은 없었고 고향이 혜산에서 온 한 가정을 알게 되었다. 장연 읍에서 기차역으로 한 정거장 가고 거리로는 4km정도인 낙연 광산은 내가 1990년 사단체육 조 레슬링을 하면서 훈련하려 왔다가 사람들을 알게 되고 신세를 졌던 곳이었다.

 

그때 기차역 맞은 켠 골짜기에 역전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에 36세의 나이에 인민군 4.25체육 단에서 10년간 레슬링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60kg급에서 활약했던 그는 오른쪽 귀가 전문적인 선수답게 부어있었고 기술도 좋았었다. 그에게서 많은 기술을 배웠고 그의 동네에서 숙식하며 훈련한 덕에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광산에는 맥주공장과 기타 식료공장들이 있었는데 질 좋은 옥수수 술을 많이 생산하였다. 옥수수 1kg이면 500g의 술을 바꾸어 주었다. 나는 대열과장에게 술을 뇌물로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친척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나는 낙연 광산에 가기 전에 명천리 농장 2작업반 옥수수 창자(저장하는 곳)를 습격하여 옥수수 50kg을 도둑질 하여 가지고 광산 역전골의 회령 집에 가져다주고 옥수수로 만든 술 25리터를 가지고 새벽 6시에 출발하여 7시전에 대열과장에게 뇌물을 주었다.

"과장동지, 밤새 건강하셨습니까? 6촌 누나네 집에 가니 누나가 과장동지에게 드리라고 술을 주어 가져왔습니다. 받아주십시오."

 

속내의 바람으로 나를 반겨 맞은 과장은 애써 못마땅한 눈치였다.

"왜 이런 것을 들고 다니면서 그래, 누가 너더러 이런 것이나 달라고 했나?"

나는 그의 속마음을 인차 읽고 더 대담하게 속을 터놓았다.

"늘 수고하시는 과장동지이신데 성의가 작다고 나무람 하시지 마시고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제기 할 수 있습니까?"

"무엇인데?"

"군관학교에서 쫒겨내려오다나니 본 중대로는 돌아가기가 창피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과장동지가 저의 구분 대 배치문제를 혁명화단위인 공병대대로 보내지 마시고 조금 편안하고 좋은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신세를 잊지 않고 꼭 보답하겠습니다."

"이 자식 이제야 본성이 나오는 구나. 나도 네가 처음에는 그다지 않았는데 며칠 지내보니 꽤 괜찮아 보인다. 그러니 조금 생각해 볼 테니 너무 근심하지 마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너무나도 애걸하다 싶었던지 아마도 그가 불상해보였던 것 같았다.

 

그날부터 나는 더욱 성수가 나서 제기되는 일을 풀어나갔다.

 

그 다음날 저녁 5시 30분 밖의 날씨는 겨울을 예고하듯이 영하권에 머물렀다. 갑자기 사단 참모장 연락병이 대열과장에게 자그마한 서류를 넘겨주었다. 서류를 읽어보던 과장이 혀를 차는 것이었다.

"이거 큰일 났다. 사단 내에서 키가 165cm~175cm가 되는 병사 250명을 4일내에 어떻게 모집하는가? 허참. 선거 때문에 바쁜데 또 이것이 겹치니 난리 났다."

"무엇인데 그럽니까?"

옆의 동원된 군관이 과장에게 물어보며 손에 쥐고 있는 서류들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나도 그 서류를 넘겨다보았다.

 

봉투에는 "극비문건"이라고 되었다. 2장의 A4용지에 타자로 된 글귀가 안겨왔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 xxx호

영웅적 조선인민군 창건 60돐 경축 열병식을 진행할 대 대하여

1992년 4월 25일은 영웅적 조선인민군 창건 60돐이 되는 뜻 깊은 날이다.

이날을 맞이하여 조선인민군 육해공군 장병들의 경축열병식을 진행하기 위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1. 참가대상 : 조선인민군 제4군단 28, 26보병사단

2. 대상기준 : 키 165cm~175cm정도의 대원들로 선정할 것

3. 28보병사단 참가인원 : 2xx명

......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

1991년 11월 xx일"

 

다른 용지에는 군단에서 명령서에 맞추어 세부적인 사항들을 적어 보냈는바 선거후 4일안에 인원을 모집하여 군단 지휘부에서 12월 31일까지 기초 동작훈련을 실시하고 92년 1월부터 4월까지 무력 부 미림비행장에서 전군적인 합동훈련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한두 명도 아닌 2백여 명을 몇 일안에 골라낸다는 것은 힘든 문제였다.

 

그 이유는 그만큼 사단내의 사병들의 키가 165cm이상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특수부대인 정찰, 경보대대에서 대량으로 데려가면 부대의 전투력이 약해진다.

 

보통 한개 중대에서 2~3명만 뽑으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군대에서 명령만큼은 신속 정확하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최고사령관인데 누가 감히 허리 질을 할 수가 있겠는가?

 

92년의 열병식은 성과적이었다.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철저한 준비 밑에 진행된 열병식은 전당, 전군, 전민을 당과 정부에 묶어세우기 위한 가운데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 이곳에서 이따금씩 나오는 군인들의 김일성광장에서 재래식무기와 미사일을 가지고 행진하는 모습은 그때 진행한 장면들이었다.

 

마치 그 열병식을 보며 요란하고 대단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은 신심에 넘쳐 있었다.

 

세상에 북한군과 맞서 싸울 대상은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 가지고 북한군을 평가할 수는 없다. 모두가 열병식에 참가한 군인들처럼 의젓하고 늠름하였다면 정말 강대한 나라라고 하겠다.

 

열병식 참가자가 도합 3만여명이었는데 이는 백 수십만 명의 대군의 3%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 유사시 이 인원만 타격하여 소멸한다면 북한군은 중심이 무너지고 주도권을 잃지 않을까 싶다.

 

적수와의 대결에서 약점을 잡고 중심을 헝클어뜨린다면 기센제압은 물론 승리는 자기의 것이 아닌가?

 

열병식의 10분의 1이라도 하부말단 단위인 28보병사단까지 위상과 전투력을 가졌다면 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군인들이 탈영과 국가재산을 절취하여 심지어 강도 행세를 하겠는가?

 

국력도 일정한 경제밑천이 있어야 따라간다.

핵무기나 만들고 자기 위대성만 쇠뇌 시키며 사람의 운명은 말로만 해결한다면 그 군대는 표면에 반듯한 페인트로 번들번들하게 색만 멋있고 안은 녹이 쓸 대로 쓴 너절한 가짜가 아니겠는가?

 

어찌되었던 나는 술을 뇌물로 바친 덕에 선거가 진행되고 나서 대열과장의 힘에 의하여 서민의 자식들은 함부로 갈 수 없는 포탄창고에 가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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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별림 park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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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rk5286 ip1 2010-12-28 17:52:35
    재밌유. 고생하셨구유. 한 편의 소설 같어유. 책으루 내두 되겄유. 그런데 남한의 독자들은 낙후된 나라의 이야기는 좀 추하게 느껴서 잘 안 사 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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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철 ip2 2010-12-28 22:21:31
    1편부터 보고 싶은데 5편부터밖에 없네요. 5편을 봤는데도 정말 내용의 깊이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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