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탈출(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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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정과의 전쟁
황해남도 장연군 박산 리의 박석 산에 위치한 제4군단 28보병사단 포탄창고는 93년 당시까지 약 1600t의 각종 포탄과 수만 정의 각종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박석 산은 황해남도의 장연, 과일, 송화군을 끼고 있는 해안가지대에서 비교적 높은 산이었다. 주봉은 595미터였다. 박석 산의 기반암은 규암이며 층의 두께는 1000에서 1200미터이다.
산마루와 능선은 원뿔모양과 톱날모양으로 남동에서 북서 방향을 향해 뻗어 있으며 북쪽과 남쪽 사면에는 깊은 골짜기들이 형성되어 있고 브이자곡들이 발달되어 있는 산이었다.
산기슭의 경사는 완만하나 해발고도 150미터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급경사를 이루었으며 정상은 거의 70~80도의 절벽으로 되어 있다. 또 북쪽 골짜기에 남천의 지류인 오정천이 시작되었고 남서쪽 골짜기에는 산내천이 발원했다. 산 아래 부분에서는 주로 잣나무와 동백, 산초나무와 같이 기름을 얻을 수 있는 나무들이 자랐고 산 중턱 위는 소나무와 참나무, 주목나무와 같은 혼합림으로 덮여 있었다.
남쪽 기슭에는 과수원과 호두나무들이 있고 황기, 삽주, 족두리 풀과 같은 약초와 고사리, 고비 등의 산나물들도 풍부했다. 또, 멧돼지와 여우, 산토끼와, 꿩, 산비둘기 등의 짐승들이 살고 있었다.
6.25때 국군 장병들과 그 방조자들이 중공군의 공격으로부터 미처 후퇴하지 못한 채 북한군과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산세가 깊고 벼랑지대여서 박석 산의 경치는 그야말로 장수산이나 수양산, 그리고 구월산의 아름다움에 못지않았다. 그런데 해방이 되어 반백년이 지난 지금은 그 아름다운이 독재자의 칼에 맞아 무참히 짓밟혔다.
무지막지한 북한 군 4군단의 군사기지가 들어앉아 일반 국민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수많은 터널을 뚫어 놓아 그 아름다움마저 하나하나 깡그리 빼앗기는 아픔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말 못하는 산천이라고 인간이 마구잡이로 다스리면 그 땅은 폐허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땅은 절대로 속이지 못한다. 그 땅과 함께 한 줄기, 한 줄기 수백 년을 같이 살아오며 깊숙이 뿌리 내린 나무들을 아무 생각도 없이 잡아 뽑아 버리는 인간이나 그 밑으로 터널을 뚫어 놓아 나무들이 생명을 서서히 말라죽게 하는 북한 군부나 김정일 정권의 하수인들은 언제 봐야 양심에 철판을 두르고 다니는 두 개 심장을 소유한 인간들이었다.
그 인간들이 몇 십 년 전부터 박석 산의 남서쪽 골짜기에 산내 천을 중심으로 28보병사단 포탄 창고를 뱀 꼬리처럼 길게도 전개하여 놓았다. 그러고는 수 천 톤에 달하는 각종 포탄들을 보유해 놓고 유사시 남한의 동족들 머리위에 퍼부으려 악랄하게 책동하고 있었다.
포탄창고는 대위계급의 관리장이 책임지고 그 밑에 상위계급의 탄약기수 그리고 중위계급의 자행포창고장과 같은 장교 3명이 15명의 사병들로 구성되어 있는 관리 분대와 탄약관리원, 무기관리원을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15명의 관리 분대와 무기 및 탄약 관리원, 트랙운전수까지 합하여 관리소대라고 불렀으나 사실 소대장도 없는 무소속 부대여 처음에는 이상하기도 했다. 포탄창고는 또한 사단지휘부 병기 과 소속이였다. 박석 산 산골짜기 첫 어귀에 우리 관리 소대병실이 있고 250m정도 골짜기로 더 들어가면 포탄창고구역을 지키고 있는 경비소대 병실이 있었다.
포탄창고관리 구역에는 돌담과 철조망 가시지뢰밭을 만들어 놓고 외부의 출입을 차단하였다. 박석 산에는 포탄 창고 뿐아니라 다른 골짜기에는 사단 특수부대인 경보대대가 자리 잡고 있었고 다른 곳에는 사단 공병대대가 사단 군의소 갱도를 건설하고 있었다.
창고 앞부분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박산 리 소재지와 명천 리 소재지 그리고 낙연 광산 역전골로 연결되는데 창고에서 낙연 광산까지는 약 8km구간이었다.
1992년 3월 초 창고로 배속되어 3개월도 안 되는 어느 날, 나는 포탄창고야간 근무의 첫 교대를 서게 되었다. 그때 소대에는 1983년 입대생인 이진국이가 관리 분대 분대장였다. 소대장이 없으니 사병들의 책임은 전적으로 분대장이 쥐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나중에 알고 보니 나와 같은 고향인 양강도 보천 사람이다. 같은 양강도 출신이라 처음 내가 포탄창고에 배치되었을 때엔 일상 생활에서 많이 생각해주던 그가 언제인가부터 자기 말을 잘 듣지 않는 나를 은근히 미워하기 시작했다.
분대장은 사병시절부터 군복무를 제대로 하지 않고 탈영과 구타로 세월을 보낸 무지막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도 주먹이 강한 덕분에 관리장의 담보로 하여 대원들 통제를 시키는 분대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날 7.62미리 접철 식 자동보총에 7발의 실탄을 가지고 병실 당직병 겸 정문 보초를 서던 나는 밖이 하도 추워 전실로 들어와 버렸다. 그런데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서는 시간이라 따뜻한 전실에 들어서니 잠이 절로 오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저녁점검시간이 끝나고 조용한 분위기가 시작되자 하루 종일 고된 군사과업 수행으로 하여 피곤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대체로 북한군의 병실구조는 전실을 기준으로 좌우에 병실과 교양 실을 배치하곤 하였다.
무기를 어깨위에 멘 채로 거불거불 졸고 있던 나는 분대장 진국이가 전실을 통과하여 화장실로 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는 나를 보며 그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혀를 차며 돼지 멱따는 소리로 야무지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야, 인마. 졸지 말고 근무를 제대로 서!"
나는 토끼새끼처럼 깜짝 놀라 재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러데 분대장의 얼굴을 들여다 보는 순간 소스라쳐 놀랐다. 어느 영화에서 나오는 무서운 강도처럼 금으로 한 앞니가 얼마나 크고 무서워 보이는지 몰랐다. "알았습니다."
답변은 그럴 듯하게 하였으나 그가 사라지자 나는 너무도 피곤하여 또다시 졸음에 빠져버렸다. 오른쪽 어깨에 멘 무기는 해이 된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하듯이 풀기가 죽어 38킬로그램의 자동보총 탄약 상자보다 더 무거워 보였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침까지 게걸스럽게 흘리며 정신없이 졸고 있은 지도 5분이나 되었을까 나는 내 앞에 갑자기 큰 괴물이 서있다는 느낌을 받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깨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번쩍 떠보니 분대장이 옆구리에 손을 얹은 채, 성난 사자처럼 무섭게 버티고 서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쌍 간나 새끼! 조금 전에 내가 충고했는데 또 졸아? 너 한 명을 믿고 15명이상의 소대원들이 발편잠을 자야 하는데 초저녁부터 졸고 있다 이거지? 이 정신 병자 같은 새끼야! 너는 더는 말로 해결이 안되겠다. 처벌로 내일 아침까지 혼자서 통 근무를 서라! 알겠나?" "예.~"
현장에서 현행으로 체포된 범인처럼 더는 빠져 나올 수 없는 잘못이기에 나는 주눅이 들어 겨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고 말았다. "야, 이 새끼 봐라 이거. 인마! 의견 있어? 왜 대답소리가 약해? 30분에 한 번씩 내가 자지 않고 나와 볼 테니 너 새낀 오늘 진짜 제대로만 근무를 서라. 그렇지 않으면 나한테 죽어."
그는 나의 대답을 들은 척, 마는 척 하더니 무엇이 그렇게도 급한지 씽 하고 문을 박차고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 출입문이 닫히며 안고 가는 바람이 나의 근자를 자극하였고 분대장의 뒷모습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가 들어간 후 조용해진 주위를 둘러보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쩐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기계가 아닌 이상 인간으로서 실수 할 수도 있는 일을 가지고 성난 호랑이새끼처럼 약자를 무자비하게 잡아먹으려 설쳐대는 그가 왜서인지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메고 있는 총대로 그의 머리에 맞구멍을 내고 저 멀리 어디론가 인간이 살지 않는 지구촌 끝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 올라왔다. 몇 년 동안 들어보지 못한 쌍욕이었다. 그러니 더욱 복장이 터져 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직은 힘의 한계가 나에게는 제한 되었다. 새 부대배치도 시작이었고 더구나 상대는 나보다 4년먼저 군에 입대한 구대원이었다. 한참동안 분을 삼키려 씩씩대던 나는 참자고 생각하며 억지로 분을 삼켰다.
입속으로는 오만가지 욕을 다하면서 견디어내자니 그 것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 1시간정도 시간이 지나자 분대장은 무엇이 그렇게 피곤한 지 그대로 꼬꾸라져 잠을 자기 시작했다.
병실 창문으로 그가 잠자리에 눕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그 어떤 남모를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잠들기 바쁘게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다짜고짜 저녁에 정해진 순번대로 다음 대상자인 밑의 사병을 깨워 근무를 인계해 주었다. 그러고는 잠에 취해 실신하다시피 한 몸을 병실에 들어오는 즉시 침대를 향해 거북이걸음으로 접근하여서는 뻐드러져 이내 정신없이 꿈나라에 빠져 버렸다. "기상!"
5분도 잠을 잔 것 같지 않는데 기상소리가 자그마한 병실의 천정을 무섭게 두드렸다. 5시 45분만 되면 치차처럼 맞물려 매일 들려오는 아침 기상 소리다. 마지막 근무자의 소리에 방금전까지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던 사병들은 모두가 숙련된 동작으로 5분 내에 하의 군복을 차려 입고 소변까지 본 다음,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 대오가 정렬되자 부분대장이 분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분대, 나란히 차렷! 분대장동무! 분대는 당신의 명령대로 모였습니다. 부분대장 하사 박광호!"
사실 일과표는 아침 달리기 및 체조를 하여야 하나 분대장 진국이가 자위대로 병실에 모이도록 하였다. "쉬엇 하시오."
분대장은 보고에 답례하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대뜸 머리를 돌려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공고롭게도 어제저녁에 있는 나의 근무 상황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야 인마, 너 아침까지 근무 섰어?" "너무 피곤하여 11시까지 서고 조 성철동무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뭐이야? 이 새끼 이거 배짱 좋구나. 분대장의 말이 말 같지 않다 이거지? 좋아. 더 말하기 싫으니까 10분 내에 식당을 인계받고 처벌로 식당근무를 이 시각부터 수행하라. 알겠는가?"
성이 잔뜩 오른 분대장의 벼락같은 소리에 다른 사람들은 어떨른지 몰라도 나는 놀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갑자기 말 못할 그 어떤 사연을 담은 울분에 속이 울컥했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았다. 속에서는 반항의 뜨거운 불길만 무섭게 치솟아 올랐다.
분대장은 나의 반발심을 읽지 못해서인지 대원들에게 아침 운동대신 병실 주변의 이것저것에 어질러진 모습으로 방치된 부분들을 청소할 임무만 분담하고는 이내 대열을 해체시켰다.
나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사실 식당근무는 혼자서 15명의 밥을 해야 하는 어려운 근무였다. 옛날 같이 인원이 많은 중대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에는 배고픔에 견디지 못하여 식당근무를 나가는 것이 어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그때처럼 어려운 중대 생활도 아니고 자체로 농사를 지어 옥수수의 뻥튀기도 마음대로 해먹는 관리 소대이다 보니 배고픈 걱정은 이미 사라진지가 오래다. 그러니 말을 듣지 않는 사병들에게 처벌로 식당근무를 세우는 방법을 상관들은 상급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도 분대장의 말과 행동이 도수를 넘어 하도 기가 막힌 나머지 병실 옆 칸에 있는 교양 실로 들어가 환경과 마음의 무게에 얽매인 몸을 그대로 쓰러뜨리며 긴 의자를 향해 길게 누워버렸다.
다른 대원 한 명이 밀대로 교양 실 청소를 열심히 하고 있었고 내가 누운 지 5분이 되었을까 갑자기 분대장 진국이가 나의 위치를 어떻게 알고 나타났는지 교양실로 달려 들어왔다. "이 간나 새끼! 분대장의 말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봐라."
그는 내가 누워있는 옆의 책상을 순간적으로 힘차게 걷어찼다. 소나무로 만든 무거운 책상은 그의 타격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나 뒹굴고 그러는 내가 예상외로 아무런 피해의식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그는 나의 얼굴과 배를 향해 손과 발로 다짜고짜 강한 타격을 가했다.
그의 주먹이 나의 상판으로 무섭게 날아들고 눈앞에서 번갯불 수 만개가 순식간에 왔다가 사라졌다. 그러자 살을 째는 아픔이 발바닥으로부터 전율을 타고 숫구멍으로 뜨겁게 전해졌다. 불쑥 악이 솟아올랐다. 왜서인지 어제 저녁부터 참아 왔던 모든 분노가 그의 매 한방에 반발하여 자제력을 잃고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야. 이 XXX야. 내가 네 밑에서 일을 할 바엔 내 성을 갈겠다. 더럽다. XXX야."
그는 늘 그랬다. 자기의 기분에 맞지 않으면 허구헌 날 사병들과 구타로 세월을 보냈다. 그 주먹에 무서워 사병들은 분대장의 말을 법처럼 여겼다. 하지만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분대장이 악을 쓰며 연속으로 들이대는 주먹질을 양 손으로 막으며 교양 실문으로 빠져나와 병실 마당에 뛰쳐나왔다. 진국이는 미친개를 쫒는 주인처럼 제 정신없이 하나도 없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나의 뒤를 따랐다. "서지 못하겠나? 이 새끼야. 끝까지 맞서겠다는 거야?" "이 바보, 등신 같은 새끼야, X이나 처먹어라. 너 따위 새끼하고 말 할 거면 개하고 말하겠다. 더러워서 너 같은 XX밑에선 더는 군복무를 할 수가 없다."
나는 이 말을 남기고 부대를 탈영해 버렸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직급이 낮고 또, 육체적 힘에서나 성분 등 기타 문제에서 상대보다 약해도 일단 싸움에서는 자기의 약점보다 무조건 이긴다는 배짱을 가지고 덤벼들면 무서울 것이 없다는 진리는 내가 집단생활의 여러 단위를 옮겨 다니면서 얻은 값비싼 경험이었다. 설사 힘이 약해 상급에게 피 흘리며 매를 맞아도 꺾이지 않는 신념으로 맞서는 그 정신이야말로 상대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에게도 "저 녀석은 간단한 자가 아니다,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이다."라는 인식을 주는 때였다. 그런 인식이 기득권이 판을 치고 폭력마저 앞세운 집단생활에서 자기의 생활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한번은 사단 공병대대 1중대의 한 병사가 황해남도 장연기차역에서 부대가 맡은 통나무를 혼자서 지키고 있었는데 야밤에 그 것을 도둑질 하려던 21항공 육전대 대원 3명과 싸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특수부대원들인 육전대원들은 신체조건이 자기보다 왜소한 그에게 수적우세까지 믿고 덤벼들었는데 그 병사는 달려드는 제일 큰 녀석을 팔꿈치 타격으로 한방 먹이었다. 헌데 그 타격이 얼마나 강했던지 1미터 80센티미터의 큰 키와 체구를 가진 녀석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1미터 거리보다 퍽 멀리도 나가 떨어졌다. 그러니 다른 두 놈은 그에게 덤벼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누구 보아도 무모한 짓이었다. 설마 키가 작은 사병이 이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때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 설마가 결국 대결의 크나큰 상대를 이겼다. 그 사병은 8년 동안 중대의 돈사 근무나 서면서 돼지 먹이를 만드는 칸에서 자체로 타격훈련으로 몸을 갈고 닦은 도술 벌레였다. 얼마나 훈련을 했는지 그의 손칼에서부터 팔꿈치는 길게 썩 살이 배겨 있었다.
사실 키도 작고 몸도 왜소한 그가 특기라면 가라데 쓰는 것밖에 없었다. 문제는 자기 마음의 지구력을 보강하는 것이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만능의 보검임을 특수부대원들은 알 수가 없어 결국 패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날 분대장과의 화풀이로 나는 낙연 광산 역전골에 있는 혜산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정권호가 와 있었다. 그때 낙연 광산에는 총 대신 삽과 곡괭이를 메고 광석을 캐려 다니는 사회 안전부(경찰) 소속 인민경비대 군인들이 많았다.
공병 국 제 81여단이었는데 그들은 중대도 대대도 없고 여단에서 직접 1대, 2대 라고 하면서 부대를 편성하였다. 1대는 150여명의 인원을 가졌으며 군대와 같은 규율을 가지고 10여 년간을 굴 안에서 군복무 하였다. 우리와 달리 그들은 영장도 파란 색이었다.
그 1대에서 정권호는 군복무를 하였다. 그는 나보다 2살 이상의 형이었다. 그는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 옆집에서 기계공장 노동자로 2년 동안 일을 하다가 입당하려 군에 나왔지만 공병 국으로 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혜산에 있을 때, 태권도훈련을 본격적으로 수련하여 그 누구도 자기 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특수부대의 경 보병출신 제대군인들이 공장에서 그를 무시하고 부려 먹으려 하여 한번은 권호가 그들과 싸움이 붙었는데 멋있는 돌려 발차기로 상대를 완전히 꺾어 놓고 용서까지 받아 냈다.
그의 별명이 "미국 콧대"었는데 코가 매부리코 형식으로 끝이 뾰족하여 미국사람 같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나는 중학교 때, 그에게서 태권도를 배우려고 많이 따라다니고 훈련도 같이 하였었다. 특히 그와 중심잡기 수련을 많이 하였다. 5mm 철사를 6~7m거리의 나무에 50~60cm의 높이로 연결하고 그 위로 걸어 다니며 몸 중심을 바로 잡는 것이었는데 상대와의 공격과 방어에서 몸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한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랐다.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절대로 상대에게 쉽게 넘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훈련하면서 정을 쌓았던 형님을 뜻밖에 3년 만에 다시 만났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상은 넓기도 하지만 좁다더니 이런 말을 두고 한 말 같았다. 만나고보니 나는 빨간 연장을 단 북한군이고 그는 청색 연장을 단 공병 국 군인이다.
그 날도 마침 권호는 갱 안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버티기를 하던 중 상급들에게 무리 매를 맞고 부대를 탈영했다는 것이었다. "형님 이 기회에 둘이 저기 서해바닷가에 가서 놀기도 하고 구경이나 합시다!” "그래, 이참에 마음껏 뛰놀아보자! 가서 지금껏 놀지 못한 한을 다 풀어보자!"
자유의 몸이 된 나와 권호는 들뜬 기분에 군복을 벗어던지고 주인의 옷을 빌려 입고 황해남도 용연 군으로 향했다. 이유는 도처에 경무 원(헌병)들이 눈을 도사리고 있어 그들의 부대 탈영병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낙연 에서 약 80리 떨어진 용연 군 구미 리에 도착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하지만 돈 한 푼 없는 바닷가 어촌에서 두 젊은이들이 무엇으로 마음껏 먹고 뛰논단 말인가?
우리는 생각하던 끝에 돈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을 그었다. 그래서 국가 공공기관인 자그마한 분주 소(경찰파출소) 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이왕이면 당 간부들이나 법관들처럼 기름진 배를 내휘두르며 나와 같은 서민들을 괴롭히는 자들의 재산에 손을 대기로 했다. 그들의 것이라면 당연히 무서움이 없어졌고 부끄러움마저 없어졌다. 그래서인지 도처에서 조절위원회의 명칭으로 움직이는 우리와 같은 군인들이 많은 때였다.
파도치는 바다가 기슭의 작은 어촌마을인 구미 리는 예로부터 구미포라 이름 부르는 경치 좋은 곳이었다. 백령도가 60리 밖에 있고 간첩소굴이라 소문난 백령도에서 60~70년대 초까지 용연군의 여러 지방에는 백령도 간첩들이 나타나 당 간부들을 살해하고 소와 돼지 등 집짐승들을 잡아가군 하였는데 그것을 막기 위하여 4군단 28보병사단이 배치되었단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부터 용연군은 조용해 졌다는 것이었다.
나와 권호는 다짜고짜 구미 리 근처에 있는 분주 소를 그날 밤으로 습격하고 말았다. 때마침 경비실에는 당직 경찰관이 술을 처먹고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그래서 틈을 타 그들의 허접한 창고에서 쌀 50kg을 획득했다. 그것을 메고 500m 떨어진 어느 한 동네에 찾아 들어간 것이 밤 12시경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집은 모녀가 사는 평범한 집이였다. "어머니, 저희들이 28사단 132연대 양식 창고 장들인데 쌀을 장연에서 실어오다가 돈이 필요하여 이렇게 팔아먹자고 가져왔습니다. 어떻게 도와주실 수 없습니까? 도와주면 쌀 20kg을 그냥 주겠습니다." "아유 감사하이. 도와주고말고. 어서들 들어 오시까." 전형적인 황해도 사투리를 하는 어머니는 누구 보아도 이 곳 토배기 같았다. "어머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저쪽에 쌀이 더 있으니 가져오겠습니다." "그러시까, 그사이 밥을 차려 줄 터이니 근심들이랑 마시까."
나와 권호는 신이 나서 숨겨둔 나머지 쌀도 그의 집에 가져왔다. 어머니 같은 분에게 거짓말을 하자니 가슴은 무한정 떨려왔다. 그러나 낮도 코도 모르는 첫 인상에 도둑놈이라고 자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집의 딸은 우리 나이 또래였는데 이 사로청부위원장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집에서 7일간 있으며 닭곰도 해먹고 군대에서는 명절만 차례지는 해산물과 돼지고기를 비롯한 많은 고기들을 먹었다. 50kg의 쌀 절반은 그 집 어머니가 수소문하여 구미 리 재래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주었는데 나와 권호는 그 돈을 반으로 나누었다.
한 주가 지나자 왜서인지 덜컥 겁이 났다. 너무나 많은 시간을 탈영하다보니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 온 몸으로 저려왔다. 그래서 나와 권호는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그곳을 떠났다.
헌데 공교롭게도 가는 도중 우리는 권호를 잡으려고 포위망을 쳐놓은 그의 부대원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광산 어귀에까지 들어섰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권호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식칼을 꺼내들고 벼락같이 소리쳤다.
나와 권호를 둘러싸고 있던 무리는 순간에 6~7m의 간격으로 벌어졌다. "이 X새끼들아. 너희들과 부대로 들어가면 마치 잡혀서 들어가는 기분이니까 나 혼자 갈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너희들대로 가라. 달려드는 새끼는 칼로 찌르겠다."
구름한 점 없는 맑고 푸른 늦겨울의 파란 하늘에서 비쳐오는 햇빛에 비친 권호의 얼굴은 투명하다 못해 서릿발같이 비장했다. 마치 그 모습은 성난 호랑이 같았고 8명의 대원들은 고양이 앞에 쥐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들만 떨고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많으면서도 한 명도 달려들지 못했다.
권호는 위치 선택하나만 잘 잡았다. 돌멩이 하나도 없는 광산미광처리장 한 가운데에서 벌어진 일이어 수많은 젊은 군인들이 속수무책이었다. 미세먼지처럼 가라 앉은 얼어붙은 미광을 쥐어뿌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러는 그들의 모양은 더 처량해 보였다. "야 XX아 너는 너의 부대로 가라. 나도 나대로 갈 테이니 근심마라."
권호는 나를 보고 소리 질렀다. "알겠소. 형님. 나도 광일이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부대로 가겠소."
나는 그 형의 용감성에 절로 탄복했다. 비록 흉기는 들었어도 혼자 8명을 상대하여 나서는 그 투혼 정신에 사실 나도 한동안 넋을 잃었다. 그런 형님을 데리고 다닌다는 생각에 말못할 흥분으로 하여 가슴이 다 뿌듯하였다. 그렇게 권호와 헤어진 내가 역전골 혜산 집으로 오니 나의 분대장 이진국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2일동안 이 집에 틀어박혀 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관리장의 충고로 나를 데리려 왔던 것이었다. 들어오는 나를 반가움 반, 놀라움 반으로 바라보던 분대장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XX아.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겠으니 부대로 돌아가자."
어쩐지 그렇게도 냉철하고 똑 부러지던 그에게서 한 수 누그러드는 소리를 들으니 나도 기분이 다 이상해졌다. "분대장동지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지켜줄 것은 지켜주는 놈입니다. 분대장동지도 나와 이제 있어야 얼마나 더 있겠습니까? 1년 정도인데 좋게 헤어지면 안 됩니까?" "그래. 너 말이 맞아. 같은 양강도 출신인데 내가 너무나도 경솔하게 행동했다."
나는 분대장의 정식 사과를 이끌어내고 그와 함께 그날 기쁜 마음으로 부대에 들어갔다. 그 이후부터 분대장은 나에게 함부로 다른 사병들처럼 삿대질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지세 따라 아름다운 산은 산대로, 숲은 숲대로, 실개울은 실개울대로, 이름도 없는 푸새들의 꽃은 더욱 예쁘고, 지천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각가지 야생화들, 그 속에 자태를 드러낸 수수꽃다리, 진달래꽃, 범꼬리, 요장나물, 백당나무, 함박꽃, 세잎종덩쿨, 새우난초, 맴무, 근낭화, 큰 연영초, 종덩쿨 등등 숲은 항상 푼푼하면서 다채로워지던 92년 7월 중순 어느 날, 나는 포탄창고 관리장과의 면담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제기하였다. 그때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군대에 나온 김영호라는 중사계급의 탄약관리원이 있었다.
그는 1983년에 군대로 나왔다. 그런데 그와 같은 년도에 나온 분대장과 부분대장은 다 북한노동당으로 가입하고 제대 날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생활도 건전하고 모든 군사과업수행에서도 언제나 후배들의 모범인 그가 입당하지 못한 것은 나에게 있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주에 한 번씩 매 사병들과 개별담화를 하는 책임자인 관리장 정성철에게 그 이유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담화는 그의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사무실이라야 관리 분대 성원들이 병실과 교양 실 건물 오른쪽에 같이 붙어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의 정성철은 평안도 사람으로서 소심하고 이해가 많은 장교였다. "김 영호동지가 신망이 있고 군사복무도 잘 하는데 왜 입당을 시키지 않습니까? 어머니 당은 모든 전사들이 생활을 잘하면 넓은 품에 안아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군사복무 10년 동안 청춘시절을 다 바쳐 뼈짠 물을 뽑아내며 혁명하는 것이 무엇인지 관리장동지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동지가 무엇을 가지고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들에게 가겠습니까? 그를 입당시켜주십시오. 정식 제기합니다."
나의 말에 정성철은 간장을 녹아내리는 듯한 사늘한 소리로 분개하다시피 입을 열었다. 마치 거품을 입에 물고 악을 쓰는 늑대처럼 이성마저 잃은 듯 싶었다. "모르면 아무 소리나 하지 마라! 물론 영호는 맡은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하는 믿음직한 군인이다. 나도 안타깝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으니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냐? 상부에서는 영호가 너와 같은 다른 병사들보다 백배 천배로 뛰어다니며 잘 해도 될 수가 없다고 한다. 이유는 바로 그의 할아버지가 6.25 때 치안대(국군, 및 미군 방조자)를 하였기 때문이다. 성분이 걸리는데 나더러 성분을 고치라고야 말하지 않겠지"
그렇게도 내성적이고 온순해보이던 양반 같은 관리장이 나의 호소에 갑자기 악을 쓰는 모습은 처음으로 보았다. 나는 온 몸이 다 바들거렸다. 그래서 그의 말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하였다.
할아버지의 과거가 손자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9미리 권총 탄부터 시작하여 152미리 평사포탄까지 귀중한 포탄을 관리하는 무거운 책임을 지닌 김영호는 정말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고정한 선배였다.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가졌으면 그는 위험한 폭발물로 어떤 일을 쳤을 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제대 되는 날 그는 많이도 울었다. 흐릿한 눈빛으로 며칠째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고 나는 절망이었다. 그래서 애써 그 절망을 지우려고 어색하게 알찐거렸다.
10년 동안 정들고 손때 묻은 고향집과 같은 병실 마당 앞의 소나무를 부둥켜안고 서글프게 울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또, 같은 2명의 동료들은 입당도 하고 기분 좋은 자세로 웃기만 하는 상반되는 행동에서 나는 그의 처지와 비등한 나의 기약할 수 없는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영호는 자행포창고장의 여동생과 좋아 하였는데 오빠가 끝까지 반대하여 첫 사랑에도 실패하였다. 며칠 동안 울분으로 몸을 떠는 영호선배의 형색에 나의 가슴이 얼마나 아렸는지 모른다.
그들의 각이한 운명을 보는 나에게는 생각되는 것이 많았다. 그때 나는 상등병의 군사칭호에서 승진하지 않고 군관학교에 갈 때, 마음대로 하사칭호를 달고 간 것을 사단 대열과장에게 솔직하게 말하였는데 그는 나의 요구대로 포탄창고배치와 하사계급장도 자기 결심대로 올려주었다. 그런데 포탄창고에 배치되고보니 나보다 1년 먼저 군대로 나온 원광남이와 홍명철이는 상등병(일등병)의 군사칭호를 달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자기보다 후배인 내가 한 등급 높은 군사칭호를 달고 온 것에 대하여 은근히 배아파 하였다.
이 진국분대장과 같은 83년도 선배들이 제대되자 나보다 1년 먼저 군대에 나온 86년도의 홍명철과 원광남은 그래도 상급이라고 하면서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보다 군사칭호가 낮은 것을 두고 늘 아니꼬운 눈초리로 약점을 잡으려고 하던 그들로서는 어쩜 당연한 것이었다.
큰 쇠가 나가면 송아지가 멍을 지게 마련이라고 선배들이 제대되자 그 자리를 놓고 후배들은 서로의 말못할 승벽내기로 혈투를 벌이다 시피 하였다. 특히 누구보다 상급에게 아첨이 많고 하급에게는 잔소리만 하고 무시하는 원광남이와 평안북도 양정국장을 하는 아버지를 등에 업고 거들먹거리는 홍명철은 진급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정성철과 사단 지휘부 병기 과를 찾아다니며 복잡하게 행동하여 나섰다.
결국 그들의 힘에 내가 밀리여 끝내 원광남이가 분대장자리를, 홍명철이가 탄약관리원자리를, 내가 부분대장자리를 차지하였다. 원광남과 홍명철은 두 달 사이에 중사계급의 영장을 달았고 나는 그냥 하사로 직무를 맡았다.
군사칭호가 높은 것에 대한 질투를 느끼며 홍명철은 늘 나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며 마치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처럼 자처했다. 그는 다른 사병들에게 도둑질을 시키면서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얘들아!, 절대로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자기 집 텃밭에서 고추를 뜯는 심정으로 마음을 편안히 먹고 도둑질을 하여야 잡히지도 않는다."
도둑질도 제일 힘이 없는 국민들의 개인 집을 털고 나온다던지 아니면 개인들의 농장물을 털어 오면서 매일 큰 소리를 쳤다. 그러면서 언제나 편안한 자리, 남을 이용할 생각, 그리고 자기의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이를 천 길 벼랑에 밀어 넣는 파렴치한 짓도 거리낌 없이 하군 하였다.
그는 보위부 스파이로서 자기가 사병들을 데리고 도둑질을 하여도 주동이 아니고 피동으로 만들어 놓고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그러던 그가 83년도 선배들이 제대되자 하루가 멀다하게 술 추렴과 계집질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더니 아버지의 힘을 빌려 어느 날, 뜬금없이 북한 최대의 민족간부양성기지라고 자처하는 김일성 종합대학으로 입학했다. 그런데 그런 홍명철이 일보다 더 기가 막힌 사례가 발생했다.
무기 관리원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사단 정치부장의 조카 이영선이에게 맡긴 것이었다. 물론 빈 자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메우는 것이 맞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자리에 우리보다 3년후인 1990년입대생으로 앉혔다는 것이었다. 관리장은 정치부장 조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포탄창고의 무기 및 장 구류와 관리소대의 양식창고까지 책임지어 줬다. 쌀값이 1kg에 10원을 하던 그때 서민의 집에서는 사실 쌀밥을 먹기가 힘들었다.
탄약관리원보다 더 중요한 직책인 무기관리원을 훨씬 어린 대원에게 맡긴 것은 물론 관리장의 단독 처사는 아니었다. 그의 삼촌인 사단 정치부장의 압력 때문이었다. 정치부장은 사단의 4번째로 급 있는 인물이었는데 그에게 잘못 보이면 먹을알이 많은 포탄창고관리장 자리를 한 순간에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관리장은 이영선이보다도 많은 선배들인 우리를 무시하고 말았다. 그때 영선이와 같은 사람들을 가르켜 일명 북한군에서는 부탁자라고 하였다. 하도 배고픔과 고생이 덜한 창고가 군 복무하게에는 손색이 없는 곳이어 사단의 중요한 간부들은 자기들의 피줄이나 먼 친척들이라도 이런 곳에 맡기려 했다. 그래서 사단 병기과 상급참모의 조카와 사단 양식관리장의 처남, 그리고 사단 보위부장의 조카가 우리 소대로 들어왔다.
나는 관리장의 옳지 못한 처사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하였다. 하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들을 적수공권인 내가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는가? 생각할수록 미칠 것 같았고 도저히 그 분풀이를 풀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분대장이라는 권한을 가지고 관리장이나 사단 지휘부군관들의 불의에 항의라도 하듯이 부탁자라고 거들거리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사단 병기 과에는 상급참모의 조카가 나의 분대 대원으로 있었다. 그는 삼촌을 믿고 군관들과 분대장의 말도 늘 가볍게 여기며 제 마음대로 행동하려 하였다. 엎디라면 엎디고 기라면 기는 철저한 명령지휘체계가 없으면 군대는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잔설을 핥는 찬 기온이 무섭게 파고들기 시작하던 92년 12월 중순 어느 날, 분대장 원광남이가 외출로 몇 일간 나갔고 그래서 내가 소대의 일과를 집행하고 있던 때였다.
저녁 식사와 오락시간이 지난 후 취침을 위한 명령지시로 나는 분대를 병실 안에 모여 놓게 하고 매 대원에게 일일이 점검준비에 돌입하도록 임무를 주었다.
나보다 키도 크고 몸 중량도 많았던 병기 과의 상급참모 조카 김영수는 정치부장 조카 영선이와 같이 90년도 입대생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병실 바닥을 밀대로 깨끗이 청소하라는 특별히 임무를 맏겨주었는데 모두가 나에게서 받은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분주하게 뛰어다니었지만 10분이 지나도 도저히 그가 맡은 바닥청소는 진행이 되지 않았다.
대원들이 움직임을 예리하게 주시하던 내가 김영수와 친한 동료인 경수에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하였는데 그가 세면장으로 갔다 와서 하는 소리는 20대 열혈청춘인 나의 가슴을 흥분의 불도가니로 끓게 하였다. "부분대장동지, 영수동무가 식당에서 식당근무인 창도동지와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득이나 관리장이나 사단 지휘부의 독단과 진행되는 모든 흐름에 불만으로 가득차 있던 찰나 그의 대답은 나의 성질을 한 층 더 돋워 놓았다. "뭐야? 알았어. 모두가 내 말을 들으라. 점검준비를 그만두고 100%로 병실로 모이라. 직일 병 알았나?"
나는 밖에서 7.62미리 자동보총을 메고 당직근무 겸 정문보초를 서고 있는 신홍철이에게 명령하였다. 그가 모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나는 몸에 걸치기도 무거운 겨울용 피복상의의 단추를 벗어버렸다. 성이 오를대로 오른 나의 기색에 분대원 모두가 긴장된 표정으로 서있었다. 병실은 순식간에 정숙해지고 나의 숨소리만 거칠게 들렸다. "분대 차렷! 부분대장동지, 분대는 명령대로 모였습니다. 상등병 이일호."
나보다 1년 늦게 군대로 입대하고 분대에서는 나의 밑 부하인 일호가 보고하였다. 나는 그의 보고를 받자마자 상의를 침대에 벗어 던지고 철호 앞으로 다가갔다. "네가 건방지게 분대장이나 관리장에게 하던 본새를 나에게 하려고 어리석게 노냐? 야! 이 등신같은 새끼야? 얼마나 네가 배짱이 있냐? 너 같은 부탁 자들이 우쭐대는 꼴이 보기 싫어 나는 오늘 말로는 해결하지 못하겠다."
내가 성이 나 다가서자 그는 더욱 긴장된 자세로 서있었다. 어쩐지 친척들을 믿고 거들대는 그가 그때만큼은 짐승처럼 여겨졌다. 독이 오르면 이성을 잃은 나의 나쁜 버릇때문에서인지는 모르나 암튼 수습하기 힘든 먹이를 덮치는 호랑이 새끼처럼 그를 덮쳐버렸다. 나는 그의 배를 연거푸 주먹과 발로 차고 얼굴을 팔 꿈치로 연결 타격하였으며 허리를 구부리며 배까지 그러안는 그에게 옆구리와 목으로 체육 조와 신병훈련에서 배운 격술기술을 쓰면서 때려눕혔다. "부분대장동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야! 이 새끼! 배짱이 있으면 달려들어야지 몇 대 맞고 사내답지 않게 빌어? 너는 더 맞아야 정신이 들어."
나는 나에게 비는 그가 더 미워 무릎과 발, 손으로 많이도 때렸다. 순식간에 그의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흘렀고 눈이 부어올랐다. 그의 빌 붙음 소리도 이제는 더 들려 오지 않았다. 쑈크를 먹은 것이었다. "모두 똑바로 들어라. 언제 내가 너희들에게 분대장처럼 잔소리를 하길 하나 아니면 구살을 주려 했나? 그럴수록 너희들이 판단하고 지켜줄 것을 지켜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 꼭 이렇게 손을 대야만 정신을 차리겠냐? 정말 말하기 싫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렇지만 그 누구라도 나를 무시하고 분대장을 무시하면 이 자식처럼 될 줄 알라. 알았나?" "알았습니다." 나는 힘차게 대답하는 대원들을 모두 자리에 눕혀 재웠다.
그 다음날 나는 관리장의 호된 추궁에 처벌로 3일간 식당근무를 서게 되었다. 대원들 통제를 폭력으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의 삼촌의 호된 추궁이 관리장에게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때때로 쓰는 나의 주먹에 그나마 소대의 군사규율은 유지되었고 사병들은 장교들보다 나를 더 무서워하였다. 관리 분대장 밑에 부분대장으로서 나는 사실 부탁자들을 통제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친척들을 믿고 설쳐대는 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 듯 했다. 창고의 장교들인 대위계급의 총책임자 관리장이나 상위계급의 탄약기수의 말도 날이 서지 않았었다. 분대장 원광남은 대원들 통제를 절대로 주먹을 동반한 힘으로 하지 않고 잔소리로 하군 하였다. 그래서 그의 앞에서 사병들은 듣는 듯이 대답을 하여도 같은 결함이 계속 반복 되곤 했다. 정말 말로 다스릴 수 없는 악순환이었다. 분대장과 달리 나는 크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원들이 하는 행동이나 흐름을 보다가 참을 수가 없는 정도이면 주먹부터 나가군 하였는데 그래서인지 대원들은 장교들과 분대장의 말보다 나의 말을 더 무서워하였던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내가 무서우니 대원들은 나 라는 인간이 체육 조에 몇 달을 나가있으면 속이 다 편안해 하였고 장교들은 또, 장교들대로 가득이나 무법천지인 그곳에서 내가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다른 길로 갈 것이 두려워 보내기를 꺼려하였다. 나는 그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의견을 노골적으로 내 놓고 심술을 부려 체육 조에 나오고 말았다. (다음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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