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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보다 먼저 일어난 신의주 반공의거 ....
United States 북자 1 388 2011-02-23 12:56:42

요즘 리비아의 반정부 시위를 보면서, 이전에 북한에 있을 때는 "신의주학생사건"으로 알려진 반공의거에 대해서 남한에 와서 알게 되어....글 하나를 퍼왔습니다.

출처는 다음의 링크입니다.

http://www.hanbal.com/review/review105/younje.htm

 

東歐보다 먼저 일어난 新義州 學生 反共義擧

- 北韓에서 타오른 反共투쟁의 炬火 -  
 

趙  東  瀯 <신의주학생의거 기념회 고문>

演士 略歷

신의주 東中校 졸업/ 日本 와세다大 政經科 졸업/ 美軍政廳 京畿- 서울 管財處 審議官
(現)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 고문/ 신의주시민회 명예회장/
(社)북한연구소 이사/ 民主平統 상임위원/ (社)일천만 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사무총장/ 신의주시 장학회 이사장/
평북중앙도민회 고문/ 신의주 東中同窓會 회장

 
 序  言

기억도 새로운 1945년 11월 23일, 이 날은 鴨綠江 푸른 물을 正義에 불타는 젊은 학도들의 피로 붉게 물들인 신의주학생 반공의거의 역사적인 날이다.
8·15 해방의 기쁨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북한에는 소위 해방군이라는 소련 붉은 군대가 진주했다. 처음 북한 백성들은 이 붉은 군대가 그래도 우리를 일제로부터 해방시켜 준 군대라 하여 감사의 환대와 존대의 염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이 붉은 군대는 북한 백성들의 기대와 의사에 반하여 살인, 방화, 강도, 강간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게 되어 조국광복의 기쁨과 흥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온 북한 천지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초조의 생지옥으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 붉은 군대는 “세계 노동자의 조국인 소련이 하루속히 부흥하는 것이 세계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위해 크게 도움이 되고 이득이 된다”는 미명하에 ‘水豊댐’의 발전시설은 물론, 여러 공장의 공업시설을 비롯해서 농민의 피땀으로 수확한 식량과 가축들을 송두리째 실어갔다.
설상가상으로 붉은 군대의 走狗인 북한 공산도당들은 공산정권 수립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계급투쟁이라는 미명하에 지식인, 지주, 기업인, 소시민, 기독교 신자 등을 反動分子라 하여 닥치는 대로 숙청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비로소 소련 진주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日帝 이상의 침략군이며 그들과 야합한 북한 공산도당들은 동족을 괴롭히는 반역행위를 자행하는 매국노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더욱이 신의주는 압록강을 사이에 둔 국경지대로 소련군 출입의 관문인 동시에 평북 주둔군 사령부와 평북공산당본부가 있는 만큼 그들의 행패와 피해가 어느 곳보다도 심했다.
이런 와중에서 그들의 탄압은 점차 신성한 학원에까지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즉, 학생들의 배움의 터전인 校舍를 마음대로 징발하여 그들의 병사숙소 및 사무실 등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일부 학교는 완전히 폐쇄하여 공산당 정치훈련소로 개체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일제에서 해방된 우리 나라 학생들에게 한국고유의 역사 대신 공산주의 유물사관 등 노예교육 주입에 여념이 없었다.
평북의 도청 소재지이며 9개의 중등학교가 집중되어 있는 교육도시이고 日帝에 항거하여 反日운동이 매우 치열했던 사상도시 신의주, 그리고 근세 한국기독교 발상지로써 불의와 타협을 거부하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높은 교육수준을 자랑하고 있는 신의주의 학생들이 소련 진주군과 북한 공산도당들의 만행과 행패를 그대로 좌시방관만은 할 수 없었고 기회만 오면 총궐기할,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제 신의주학생반공의거의 진상을 요약해서 소개코자 한다.

義擧의 原因

당시 평북도 일대에서는 소련군의 만행과 북한공산당의 행패에 민심이 점차 악화되어 감에 따라 그들은 그들의 秕政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이른바 군중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런 군중대회는 그들의 의도대로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으며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민족진영대표가 연단에 등단하여 공산당의 비정을 규탄함으로써 군중들의 박수와 환영을 받는 사례가 없지 않았다. 45년 9월 초순 신의주 東中 교정에서 개최된 신의주 소재 각 사회단체 공동강연회가 바로 그 좋은 例였다.
때마침 11월 21일 신의주에서 도보로 약 80분 거리에 있는 龍岩浦市(당시는 邑)에서 시민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당시 용암포읍의 인민위원장과 공산당 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는 李龍洽이라는 자가 소련군의 권세를 등에 업고 갖은 만행을 자행했을 뿐 아니라 관서지방 유일의 龍岩浦水産學校를 접수하여 공산당 훈련소로 사용하고 있는 장본인으로 인민들의 많은 원성을 사고 있었는데 그가 자기의 불법행위와 비리를 호도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홍보 선전용으로 준비했던 것이다.
이 대회의 개최소식을 전해들은 水産學校 학생들과 일부 교원들은 당일 학생대표를 연사로 내세워 공산학정을 규탄키로 했다.
이날 救世學校(제1교회 병설) 운동장에서 열리는 대회장에서 李龍洽 일당의 비리와 공산당의 비정을 시민들 앞에서 폭로하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한 학생대표 崔秉學군(수산학교 4년)은 차례가 되어 등단, 소련군과 그 주구들의 비정을 낱낱이 폭로하고 공산당 훈련소로 사용하고 있는 수산학교를 내놓으라고 호통치면서 “소련군의 앞잡이 이용흡과 그의 주구들은 물러가자”고 외치자, 대회에 참가한 군중들은 이에 일제히 호응, 공명하여 그간 쌓였던 시민, 학생들의 울분은 드디어 폭발하게 되어 “공산당은 물러가라”, “학원의 자유를 침범치 말라”, “이용흡을 잡아라”고 소리소리 외쳤다.
이에 당황한 공산도배들은 무장한 보안대원들로 하여금 이를 저지, 해산시키려 했으나 흥분한 군중들이 이들에게 대항함으로써 상호 충돌하였고, 대회장은 난투장으로 변하면서 數에 밀린 보안대원들은 총기를 버리고 도주하는가 하면 이용흡은 소련군 사령부로 피신했다.
이날의 충돌로 학생과 주민들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 후 이용흡 일당은 소련군을 비롯 공산당원과 공장노동자들을 규합하고 보안대를 재정비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즉, 거리에서 발견하는 학생들은 무조건 구타하고 체포하는가 하면 학교기숙사 등을 습격하여 곤봉과 쇠줄 등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하면서 닥치는 대로 검거했다.
이때 이러한 공산당들의 무지막지한 행패를 목격한 당시 제1교회 洪錫璜 장로가 그들의 폭거를 만류하자 “너도 같은 반동분자”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몽둥이로 타살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운 義擧의 진상

이러한 龍岩浦 사건이 신의주학생자치대본부에 보고되고 이 사실을 접수한 본부는 매우 경악하고 분노했으나 우선은 흥분을 억제하고 그 진상을 조사한 후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학생자치대 본부에서는 각 학교대표 2명씩을 선출하여 조사단을 구성, 현지에 파견했다. 이 조사단의 귀환보고에 의하면, 그들이 용암포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조사하여 공산당 일당의 만행을 당시 주둔군 소련사령부를 찾아가서 이를 항의하고 체포된 학생과 시민들의 석방을 건의코자 했으나 면담조차 거절당했고 더욱이 용암포사건을 계기로 학원에 대해 무력탄압을 가중시킬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水産學校가 폐쇄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당시 정세로 보아 처음부터 조사단에 큰 기대를 갖지 않고 기회가 닿는 대로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소련군의 만행과 공산당들의 행패를 응징할 것을 논의하고 있던 학생자치대 본부에서는 이제는 더 이상 참고 지체할 수도 없다고 판단, 당장 실천에 옮기는 방도를 강구했다.
결국 11월 23일 신의주에 있는  6개의 남자 중학교 3천5백 여명은 정오 싸이렌을 신호로 총궐기하기로 결의하고(그러나 12시는 사정에 의해 그날 오후 2시로 변경되었다) 공격목표를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첫째, 東中학교와 제1工業학교는 제1반으로 하여 道人民委員會(당시는 臨時政治委員會)의 道保安部를, 둘째, 師範學校와 제2工業학교는 제2반으로 하여 평북도 共産黨 본부를, 셋째, 商業학교와 平安中학교는 제3반으로 신의주시 保安署를 각각 담당하여 공격하기로 했다.
그런데 6개학교 3천5백 여명이 한 장소에 모여 같이 행동하기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곤란하여 각 학교대표들은 각자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소집하고 대오를 정돈하여 공격목표의 지점으로 진격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물론 일부학교에서는 교사들의 만류로 지장이 없지는 않았으나 反蘇反共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해방된 조국의 번영과 자유를 수호하려는 젊은 학생들의 정의감은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그리하여 제1반의 동중학교와 제1공업학교는 학생간부들의 인솔하에 제각기 학교를 출발하여 약속시간인 오후 2시 道人民委와 道保安部가 있는 구 平北道廳舍 앞에 도착, 합류하여 진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이때 이미 공산당들은 학생들의 거사 정보를 사전에 탐지하고 당시 道保安部長이고 평북공산당 위원장인 韓雄의 진두지휘로 청사의 출입문을 모두 굳게 닫고 따발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보안서원들을 요소 요소에 비치해 놓았고 청사 옥상 베란다에는 기관총까지  걸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러한 삼엄한 경계망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여기서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결국 동중 학생들은 西문 쪽을, 제1공업 학생들은 東문 쪽을 분담하여 담장을 넘어 들어갈 찰나에 놈들의 총부리에서는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학생 몇 명이 쓰러졌다. 학생들은 잠시 진격을 멈추었으나 놈들의 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동료들이 현장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진 광경을 눈앞에서 본 학생들은 눈이 뒤집히고 전신의 피가 거꾸로 흘렀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일제히 “진격하자!” “쳐부셔라!”하고 외치면서 문을 부수고 담을 허물면서 청사 내로 쳐들어갔다.
그리하여 일부 학생들은 쓰러진 학우들의 등을 밟으면서 청사 내까지의 진입에 성공했으나 계속해서 퍼붓는 놈들의 총탄 앞에는 맨주먹으로 더 이상 항거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학생들은 학우의 시체를 메고 혹은 부상당한 학우를 부축하면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동중학교의 이정식, 백광진, 고영수, 조도우, 제1공업학교의 박태근, 김창복 등 10여명이 순국했고 황종섭, 선우은명, 김기철, 유영태 등 1백 여명의 학우가 중상을 입었다.
제2반인 사법학교와 제2공업학교는 평북도 공산당본부를 공격하여 당사를 지키던 보초병과 일부 당원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당사를 완전히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미쳐 도망가지 못한 당원들을 전부 체포하여 당사 문서창고 속에 감금시켰다.
이때 그들은 자기들은 아무 죄가 없고 상부에서 시키는 데로 했을 뿐이니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물론 의거학생들은 공산당의 卒徒까지 응징할 의사는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저항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절대로 가해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이들 당원들에게 학생의거의 애국적인 동기와 처사를 설명하고 앞으로 공산당원들의 행패와 만행이 계속되면 그때야말로 좌시하지 않겠다고 훈시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먼저 도망갔던 공산당 간부가 인접해 있는 소련군 막사에 가서 “일본인들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일부 반동분자들의 폭동”이라고 거짓 알리면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소련군의 출동을 호소했다.
급기야 출동한 소련군은 당사를 포위하고 당사 내에 있는 학생들에게 무차별로 따발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때 학생들은 당사 내에 있는 사무집기를 부수어 몽둥이를 만들고 미리 준비해 간 돌멩이 등으로 응전했으나 놈들의 총격이 가증되자 총에 맞아 쓰러지는 학생과 부상자가 속출했다.
할 수 없이 당사에서 퇴각코자 했으나 놈들은 포위망을 풀지 않고 총격을 가해 왔기 때문에 3층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등 일대 아수라장이 벌여졌다. 이 때 놈들은 퇴각하는 학생들을 집까지 따라와서 총을 난사했는가 하면 어떤 학생은 강변 쪽으로 도주하다가 추격하는 놈들을 피해 결국 수십 척 높이의 압록강 철교에서 뛰어내리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결국 이 제2반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장명하, 백진윤, 황용학, 정영훈, 송도을 학생 등이 순국했고 김영의 등 2백 여명의 중·경상자를 냈다.
제3반인 상업학교와 평안중학교는 신의주시 보안소를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들 학교는 신의주 도심지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南신의주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심지에 있는 목표물까지 진격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더욱이 이들 학교와 도심지 사이는 약 2km정도의 거리가 있었으며 그 중간에는 신의주 비행장까지 있었다.
또한 이 3반에서는 학생들의 궐기를 교사들이 가장 심하게 제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애국충정은 여기서도 막을 수는 없었다. 과감하게 교문을 막차고 나온 학생들의 진격대오에 이번에는 소련 전투기인 야크기의 기총소사가 있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들 학교와 도심지간에는 논과 밭 그리고 비행장이 있을 뿐 건물 등은 일체 없었기에 공중에서의 전투기 기총소사에는 숨을 곳도 없었다. 결국 이들 두 학교 학생들은 도심지로 진격도중 야만적인 소련 전투기의 공중공격으로 눈물을 머금고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신의주의 유일한 여자중학교인 ‘南高女’는 처음부터 이 의거에는 참가시키지 않았다. 여성이라고 차별해서가 아니라 만일의 희생을 고려해서 그들을 보호하고 아끼는 심정에서였다.
그러나 의거가 있은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된 이들 여학생들은 자기들을 의거에 참여시키지 않았다는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무자비한 소련군과 공산당들의 총칼 앞에 쓰러지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거리를 누비면서 응급조치의 손길을 뻗치는가 하면 병원에 입원한 부상 학생들의 간호에 눈물어린 정성을 다함으로써 그녀들도 역시 맹호기질의 여장부였음을 과시했다.
그야말로 땅도 울고 하늘도 운 신의주학생반공의거의 진상은 이러했다.

학생 의거와 나

나는 신의주학생 반공의거 때 학생은 아니다. 나는 그때 신의주 ‘우리靑年會’ 간부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의주학생 반공의거와 우리청년회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학생의거 직후 우리청년회의 간부는 물론 일반회원들까지도 닥치는대로 체포 구금했다. 공산도당들은 신의주학생의거를 배후에서 우리청년회가 사주했다고 뒤집어 씌웠기 때문이다.
신의주학생 반공의거는 어디까지나 학생들이 자주적으로 일으킨 것이며 우리청년회와의 직접 관련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처음 신의주학생 자치대 결성을 우리청년회에서 어느 정도 지도 후원했고 그 후 각 학교 학생간부들이 우리청년회에 자주 출입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학생의거를 계기로 우리청년회를 말살하려 했고 또한 실제로 말살해 버리고만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간단하게 요약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당시 우리청년회는 그만큼 우익 민족진영의 선봉에 서서 과감한 반공운동을 전개하여 시민들의 절대적 환영을 받고 있었으니 공산당은 이 학생의거를 좋은 계기로 삼아 우리청년회의 뿌리를 뽑기 위한 것이었고,
둘째, 순진한 학생들의 맨주먹 평화시위를 총칼로 학살하며 진압함으로써 시민들의 원성이 충천하자 나이 어린 학생들을 뒤에서 선동하고 사주한 우리청년회가 더욱 가증하다는 허위선전을 유포하여 그 책임을 전가하려는 속셈임은 두말할 것 없다.
따라서 학생의거 직후 평북공산당 당수이며 평북도 보안부장이던 韓雄의 진두 하에 그의 산하 별동대인 특별보안대와 市 보안서원 등을 총동원하여 우리청년회의 간부는 물론 일반회원들까지 색출검거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의거 당일 미쳐 정보를 몰라 도피하지 못했던 우리청년회 간부 白尙旭씨와 李萬華씨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반신불수의 빈사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다음날 道보안부 특무과장 崔學이라는 자는 우리청년회 사무실을 수색하면서 사무실 1층에서 식당을 겸한 다방을 경영하던 청년회 선전부 차장 張潤河씨(3대 독자)를 잡아 신문 끝에 다른 청년회 간부들의 행방을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사살하는 등 포악무도 한 만행을 자행했다.
그후 우리청년회 부위원장 金聖淳씨, 총무부장 黃雲部씨, 정치부장 白猶哲씨, 그리고 선전부장이던 필자 등 4명이 체포되어 신의주 교화소로부터 평양교화소 소련 특무대로 압송되어 결국 이중 3명은 시베리아에 유형되었고, 유독 필자만은 중환으로 재판도 못받고 빈사상태에 이르자 다행히 민간병원에 이송치료의 지시를 받아 가료 중 북한을 탈출, 구사일생으로 월남했다.
또한 당시 평북 人民委員會의 전신인 평북임시정치위원회에는 위원장에 한 때 上海臨時政府 요인 중의 한사람인 민족지도자 李裕弼씨가 취임하고 있었으나 의거 직후 북한을 탈출하려다가 38선 부근에서 심장마비로 운명했었고 이 위원회 교육부장이던 咸錫憲씨도 의거직후 피검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사실이 있다.
당시 정치위원회에는 민족진영 인사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권력의 핵심요직은 모두 공산당원들이 차지하여 그들 마음대로 운영했다.
우리청년회가 어떤 일을 어떻게 전개하면서 활동했는가 하는 것은 그간 여러 반공책자나 문헌 등에 소상히 등재되어 있으나 역시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한가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해방 직후 모든 문화시설이 파괴 내지 마비되어 신문발간이 불가능했는데 신의주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손수 손으로 써서 등사판으로 밀어내는 것이 유일한 인쇄물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청년회는 한 인쇄소의 협조를 얻어 石版으로 밀어내는 기관지 ‘우리靑年’을 발간하여 소련군의 만행과 공산당의 학정 등을 낱낱이 등재하여 고발하고 이를 일반시민들에게 배포했으니 그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이것이 당시 신의주 사회의 유일한 보도기관으로서 신문의 역할을 대신했다.
외부소식에 굶주려 있던 시민들이 날이 밝자마자 우리청년회관 앞 게시판에 붙어진 인쇄물을 보기 위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사실 한가지만 보아도 그때 우리청년회의 人氣가 어떠했는가를 가히 상상하고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인쇄물과 기타 홍보물 제작을 당시 선전부 책임자였던 필자가 담당했으며 오늘날 남한사회에서 저명인사로 활약하고 있는 인사 중 우리청년회 출신이 적지 않다.

의거의 歷史的 意義

洋의 東西와 시대의 古今을 막론하고 한나라 역사의 건전한 生成은 그 나라 청년들의 과감한 실천과 행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함은 지나간 긴 역사가 엄연히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 국가나 사회가 처하고 있는 객관적 환경이 정치적 자주성과 경제적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한 불우한 후진적 환경과 현실에 놓여있다고 할 때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판국과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이른바 새역사 창건의 과제는 진실로 순결한 젊은이의 용감한 투쟁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어 오늘날 세계사상 그 찬란한 빛을 나타내고 있는 예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즉, 歐美선진국은 고사하고 중국 근대혁명의 효시인 5·4운동이 그러했고, 일본의 明治維新이 그러했고 가까이는 우리 조국의 주권이 일본제국주의에게 송두리째 빼앗긴 후 이 조국의 주권과 민족의 자유를 찾는 민족적 항쟁의 선봉이었던 3·1운동과 광주학생의거가 그러했고 또한 4·19학생혁명이 역시 그러했던 것이다.
일제 36년간의 질곡과 탄압에서 우리는 드디어 8·15 해방을 맞이했으나 조국광복의 희열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운명은 다시 우리 젊은 학생들로 하여금 일제 대신 신판 적색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반소·반공의 피어린 투쟁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해방 후 오늘날까지 우리 애국학생들에 의한 반공투쟁의 발자취는 우리 나라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며 또한 그 업적도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日帝 때의 광주학생의거가 항일투쟁의 대표적 학생의거라면 신의주학생의 반공의거는 반공투쟁의 대표적 학생의거로 우리 역사에 깊이 남을 학생의거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정부에서도 1956년 11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문교부령 제62호로 광주학생의거의 날인 11월 3일을 ‘학생의 날’, 그리고 신의주 학생의거의 날인 11월 23일은 ‘반공학생의 날’로 제정 공포했다.
돌이켜보건대 오랫동안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에 기인한 문화봉쇄정책 하에 있던 우리 한민족이 소련 제국주의의 정체와 본질을 잘 알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또 자유세계의 국민이나 정치가들도 ‘철의 장막’ 뒤의 크레물린의 음흉한 정책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10년 내지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전세계는 점차 그 체험과 관찰을 통해 비로소 크레물린의 야욕과 정체를 인식하며 각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의 청년학생 특히 신의주의 젊은 학생들은 불과  3개월 간의 경험으로 적색침략주의와 그 전제적 포악상을 정확히 간파하고 민족자주권과 자유수호의 제물로써 반공의 선구자가 되어 우리 나라 반공투쟁의 嚆矢를 이루었다는 데에 역사적 의의와 교훈이 있다.
2차대전 후 1953년 6월 東獨 노동자들의 반소시위사건, 1956년 10월 헝가리 국민의 반공의거, 1968년    8월 체코 국민의 반소의거 등에 모두 소련은 군대를 진격시켜 탱크로 이들 의거를 깔아버렸다.
그러나 이들 東歐 인민들의 의거보다 10년 내지 20년이 훨씬 앞선 1945년 11월 23일의 신의주학생반공의거 때 그들은 벌써 탱크는 물론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반공자유인민을 학살한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의거를 계기로 소련은 수많은 애국청년학생들을 체포하여 그중 약 2백 여명을 ‘시베리아’에 유형시켰다. 즉, 신의주 학생의거에 관련된 소위 정치범들이 우리 민족으로서는 ‘시베리아 유형’의 제1호가 되었으며 그후 북한 주요정치범들은 이 ‘시베리아 유형’이 상례화 되었다.
일찍이 우리는 한 주권국가의 국민이 비록 일시적 과오를 범한 죄인(실은 애국자)이라 해도 이들을 타국의 강제노동수용소에 끌고 가서 노예노동을 강요하며 혹사하는 역사적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또한 보지도 못했다.
이것만 보아도 공산주의에는 인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끝으로 이 의거 직후 소련으로부터 귀국하여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던 金日成이 신의주 현장에 직접 나타나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면서 의거의 사후처리와 민심수습에 광분했다는 사실을 보아도 이 의거의 시대적 중대성과 역사적 의의를 과히 추정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것이다.
“역사는 길이 말하리라! 반만년 전통의 민족긍지와 조국의 자주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주검으로 불의에 항거한 신의주학생 반공의거의 참된 뜻과 그 용감무쌍한 투쟁의 기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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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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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 ip1 2011-02-23 20:20:21
    글을 잘 읽었습니다.
    정말 북한사람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 잠재된 기질이 아직도 있으리라 믿고
    그 기질들을 깨우쳐 일어나게 풍선을 개발하여 보내고 있습니다.
    반드시 신의주 학생의거와 같은 역사가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대북풍선단장 드림.www.nkdw.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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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탈북자 66%, 정부 정착지원금 北에 송금&qu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