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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메이커]노병은 철거되지 않는다 다만 재평가만 있을 뿐
인천연대 9 255 2005-09-30 12:15:09
[사회]노병은 철거되지 않는다 다만 재평가만 있을 뿐

맥아더 동상 논란 일단 수면 밑으로… 한국전 공과 역사적 재조명 주력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동상’을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동상 철거(이전)를 주장하는 진보단체와 동상 사수를 주장하는 보수단체의 주장은 하늘과 땅 차이다. 철거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맥아더가 ‘점령자’로 이 땅에 왔고, 확전을 주장해 한반도를 초토화하려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철거 반대 세력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에 밀리고 있던 한국전의 전세를 역전시킨, 존경해야 할 인물이라고 강조한다.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관점의 차이는 9월 11일 물리적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이후에는 ‘분노한’ 미국 하원의원 5명이 편지를 보내 “동상을 훼손하거나 허물어뜨리느니 차라리 미국인에게 양도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이들의 우려와 실망을 이해한다”며 “동상 철거나 어떤 훼손행위도 이뤄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하는 등 맥아더 동상을 둘러싼 논란은 미국으로까지 번졌다.

맥아더 동상을 둘러싼 논란은 점차 줄어들 전망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철거불가’ 방침을 밝힌데 이어 철거와 이전을 주장했던 측에서도 동상 철거(이전)와 관련된 집회 등 직접적인 실력행사에는 나서지 않을 방침이라는 점을 밝혔기 때문이다.

국민적 관심 끌 상징적 인물로 선택

당시 동상철거를 주장하며 집회에 참가했던 통일연대의 김성란 대외협력위원장은 “진보단체 차원에서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집회를 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동상철거가 집회의 직접적인 목표는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 위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날 집회의 원래 목적은 분단 60주년이자 광복 60주년,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선 지 60주년이 되는 올해, 정전체제 청산에 대한 ‘사회적 환기’를 끌어내고자 한 것이었다. 올해 초 진보단체측은 주한미군 이전 문제라든가, 유엔사 문제 등 국민적 합의를 이뤄내야 할 문제가 많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놓고 구호를 외칠 경우 국민들이 외면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무언가 상징적인 존재가 필요했다.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맥아더 장군’이었다. 전 국민이 알고 있는 맥아더를 상징적인 코드로 내놓아 국민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은 일단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이끌어내긴 했지만, 이들이 노린 ‘이슈’보다는 보혁 갈등이 더 부각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맥아더가 긍정적인 면 일색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은 사실인만큼 그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며 “동상은 재평가가 이뤄진 뒤 인천 시민, 국민들의 합의를 통해 철거 여부를 결정해야 할 것이며 철거를 주장하는 집회는 더이상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 말부터 동상 이전을 주장하고 있는 ‘평화와 참여를 위한 인천연대’측에서도 맥아더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입장과 근거가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와는 약간 다르다. 이들은 맥아더가 일본의 전범인 히로히토 일왕을 재판에 세우지 않았다는 점, 맥아더가 핵무기까지 사용해서 전쟁에서 승리하려 했던 호전주의자였다는 점, 근대화 과정에서 생긴 첫번째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이 가진 가슴아픈 역사를 감안해야 한다는 점 등을 들어 동상을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천연대의 박길상 사무처장은 “원래 계획은 하루라도 빨리 인천상륙작전기념관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면서 “이번 논란으로 인해 맥아더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할 기회를 잃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는 집회 등 실력행사를 하지 않을 것이며 역사학자와 전문가의 재평가 작업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미국 내에서도 50%는 싫어해”

이들의 생각은 보혁갈등으로 비치는 ‘대결’ 대신 맥아더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문제는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대신, 맥아더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가 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까지 맥아더라는 인물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전쟁에 관한 거의 모든 책에 ‘맥아더’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도 정작 그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맥아더에 대한 우리나라의 평가는 주로 미국의 평가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미국 내에서도 맥아더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맥아더의 한국 인식 문제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이상호씨는 최근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시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제임스 조벨 사료실장은 그에게 “미국인의 50%는 맥아더를 좋아하고 50%는 싫어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미국 내에서도 논쟁적인 인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맥아더는 어떤 사람일까. 인천상륙작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핵무기로 한반도를 쓸어버리려고 했던 호전주의자였을까. 아니면 대한민국을 구원해준 존경할 만한 존재였을까.

일단 가장 널리 알려진 인천상륙작전만을 놓고 본다면 대한민국 국민은 맥아더의 은혜를 입은 셈이다. 성공가능성이 5000분의 1이던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미 합동참모본부는 우려가 많았다. 조수간만의 큰 차이와 좁고 구불구불한 지형 등 상륙작전에 불리한 조건을 이유로 반대하는 해군 장군들에 대해 맥아더는 소신으로 밀어붙인다. 덕택에 8월 29일 합참으로부터 작전허가 명령이 떨어졌다. 나중에 알려진 북측의 자료에 따르면 이들은 상륙작전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결코 쉬운 작전은 아니었던 것이다. 작전 성공으로 배후를 찔린 북한군은 물러나기 시작했고, 낙동강 근처의 전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연합군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전황은 뒤집어졌다.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했고, 북한군은 북부 지방 너머로까지 후퇴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소련·중국과 전면전을 두려워하고 있던 미 행정부는 연합군을 이끌고 있던 맥아더에게 극히 제한적인 전투지침을 하달한다. 중국과 소련 국경을 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다.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는 연합군에게 다가갈 수 없는 ‘성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맥아더는 합참에 제한을 풀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1950년 11월 7일에 합참에 보낸 전문에서 맥아더는 “적대적 비행기가 압록강 서쪽으로부터 북한에 있는 아군을 공격하고 있다. 거리가 짧은 까닭에 그들이 사용하는 ‘치고 도망가는 전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같은 해 11월 30일의 전문에서 맥아더는 “(중공군의) 군대는 중립적인 국제경계선으로부터 이틀밤만 행군하면 전선에 도착할 수 있다. 적은 신속하고 계속적인 병력 증강을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즉각적인 병력 보충을 위하여 투입할 수 있는 몇십만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후방병력은 다시 중국 내 다른 지역의 군대로 보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까닭에 맥아더는 선전포고는 없었지만 사실상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같은해 12월 3일의 전문에서 그는 “26개 사단으로 추산되는 중국군 병력이 전선에 투입되어 있으며 줄잡아 20만은 되는 추가병력이 전선후방에서 전투에 투입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북한군의 잔여부대가 후방에서 재편성 되고 있으며 배후에는 중국이 가진 군사적 역량 전부가 있다”고 적었다. 맥아더는 군인이었다. 회고록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에게 승리 외의 대안은 없었다. 맥아더의 눈에 전쟁을 끝낼 방법은 배후기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제한전을 펼친다는 미국의 방침 때문에 불가능했다.

원래 그의 전쟁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회고록에 따르면 맥아더는 ‘한국 안의 중공군을 섬멸할 장기계획 작성에 착수했다. 서울을 탈환해 작전 기점으로 삼은 뒤 북한의 북부 지역에 대규모 공습을 가하고 적의 배후를 쓸어버린다. 압록강을 넘어오는 적의 증원부대를 공격한다.(하지만 이는 허가되지 않았다.) 압록강 다리의 파괴가 허가되지 않을 경우 적의 주요 보급선 전부에 방사성 폐기물, 즉 원자탄 제조시의 부산물을 투하하고 한국을 만주와 차단한다. 북한에 투입된 중공군의 병력은 거의 백만에 달한다. 보급선이 차단되면 중공군은 굶주림에 떨며 항복하고 말 것이다.’ 그는 이런 주장을 끝까지 펼쳤고, 이를 둘러싼 의견 충돌로 1951년 4월 유엔군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됐다.

“정치적 야망 위해 한국전 활용”

하지만 철거측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26개의 핵무기로 한반도를 쓸어버리려고 한 것은 아니다. 애초 핵무기 이야기를 처음 꺼낸 것은 트루먼이었다. 1950년 11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가능성을 비친 것이다. 그렇다면 핵무기 26개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1950년 12월 21일 미 육군 작전참모부장인 찰스 볼테는 맥아더에게 핵무기 선제 타격지역 20곳을 선정해달라는 전문을 보낸다. 중공군의 남하가 소련의 지시에 의한 것이며 소련의 남진 정책으로 봤기 때문이다. 3일 뒤 그는 26곳의 지점을 선정해서 보냈는데, 5곳이 중국 영토였고 나머지는 소련 영토였다. 한반도는 포함돼 있지 않았고, 육군의 요구로 26곳의 지점을 선정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방사성 폐기물을 뿌려 만주와 한반도를 격리하려 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승리를 원했던 것일까. 부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맥아더의 한국 인식에 관련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이상호씨는 “맥아더는 정치적인 야망을 위해 승리를 거두려고 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사능 오염물을 사용해 반영구적으로 황폐한 지역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이미 1943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러나 1944년 대통령 후보가 되지는 못했고, 이는 1948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 야망을 포기하고 있지 않던 그에게 6·25전쟁의 승리는 커다란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맥아더는 전쟁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반도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48년말~1949년초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쟁점이 되었을 때, 맥아더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절하하며 철수가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고 주장했다. 이는 1950년초 애치슨 선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있어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일본을 보호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맥아더는 우리나라의 공산주의화를 막은 ‘공’이 있긴 하지만 의도 측면에서 보면 결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맥아더의 공에 의미부여를 잘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상호씨는 “철거와 사수를 주장하는 쪽 모두 한쪽 면만 보고 있다”며 “맥아더에 대한 평가는 학계의 연구가 진행된 뒤로 유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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