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과 '입국'의 이유 (Nk조선)-천기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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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가 발표한 ‘탈북자 수용정책 개선방향‘을 보면 백보 양보하고 정부의 애로사항을 이해 하려 해도 오직 탈북자들의 국내입국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탈북자 수용정책 개선방향‘ 뿐이지 정작 본질적인 문제인 ’탈북자 수용정책 개선방향‘에 대하여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국내 입국 탈북자들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한 보호차원에서 일부 과도한 대가성 수수료에 의하여 부작용을 일으키는 ‘브로커’의 처벌과 ‘범죄행위자 등에 대한 보호결정거부(법9조) 엄격 시행’에 대하여는 필요한 조처이지만 ‘브로커’의 활동 원인과 순수한 NGO 활동가들을 지원하거나 보호하려는 대안은 제시하지 않고 ‘출국금지나 처벌 및 통제 강화‘라는 정책 발표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근시안적이라고 밖에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학정과 기아에 견디다 못해 국경을 넘는 북한주민들이 계속 늘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중국당국과 막후 교섭해 한국 외교시설에 진입하는 탈북자만 선별 입국시키는 ‘조용한 외교’에 매달리려는가. 그동안 정부의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태도가 남북관계 개선이란 정치적 목적에만 집착한 나머지 탈북자 인권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을 자초해온 것이다. 정부도 이제 중국과 북한을 상대로 탈북자 문제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문제 차원에서 선진 국가답게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인도주의에 의한 특별한 보호’를 천명한 탈북주민정착보호법의 근본원칙을 구체적 정책으로 반영하기 바란다. 아래는 조선일보 [탈북자 동행취재]에 소개된 '부흥'이가 중국을 떠나기 전 주고 받던 편지 중 일부분이다. 두번째 여성의 편지는 출발 이틀 전 체포되어 북송되었고, 세번째 편지는 아직도 숨어서 불안에 떨고 있는 여성이며, 이 편지들이 '탈북' 이유와 '입국' 이유다. ..... "미치겠어요.." "내년 1월부터 연변에서 신분증 다 바꾼대요." 전도사님 안녕하세요. 방금 편지 받았습니다. 400명 소식은 어젯밤 다음뉴스에서 봤습니다. 어떻게 나가든지 이번에 그분들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전도사님 예견한 것처럼 이곳 많이 복잡합니다. 저희 집 부근에도 그전에 경찰차 밤 순찰 없더니 2~3일 전부터 밤 순찰과 잠복근무를 시작하더군요. 더군다나 오늘 저녁에 공안국에서 통지가 내려 왔더군요. 내년 1월부터 연변에서 신분증 다 바꾼대요. 매 집 문에다 붙여 난거 저두 봤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썼더군요. 중국에서 2차 신분증 교체를 한다고. 각 구역의 경찰들은 임무에 충실해 모든 주민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서 자기구역의 주민 호구와 신분증을 대조하고 이상이 있으면 즉시 파출소에 문의하며 신분을 파악하고 올바르게 인도하라고 했더군요.. 오늘 저녁에 통지를 받았습니다. 미치겠어요.. 조금 살만하고 안정하고 공부도 하려니까 또 와서 쑤셔놔요.. 저는 전번주일부터 학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년에 되면 어떻게 되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신앙을 하나 너무 힘듭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제 자신을 숨기고 또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넘 힘들어요.. 전 울교회 다니면서 제 개인정보 하나도 이야기 안하거든요. 내 신분이 탄로 나봤자 저한테만 손해거든요.. 이런 상황은 전도사님도 잘 알잖아요. 중국 애들과 같이 중국인 흉내를 내면서 따라 산다는 것이... 그리고 이렇게 힘든 마음 들어줘 상담해 줄 사람도 없구.. 한국 애들은 모르겠지만 중국 애들은 자기주의에요.. 오늘 저녁도 그 통지 보구 너무 생각이 복잡하구 힘들고.. 교회에 갈까 말까 하다가 찬양 부르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늦었지만 교회에 갔어요. 가서 많은 은혜 받았지만 지금 내 삶과 형편을 놓구 볼 때는 꿈에 가깝죠..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북한 쌀값이 한 키로에 650원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사람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오신 분이 말하더군요.. 지금 북한에는 승냥이하구 여우만 남았는데 이번에는 승냥이가 죽을 차례라고 하더군요. 그 말 듣고……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너무 허무하더군요.. 인생이... 왜 사는지..... 그럼 좋은 소식 기대 하겠습니다.. 늘 샬롬 하시길..~~~~ 2004.07.26 (월) 00:08 ..... "저는 더는 이렇게 물건처럼 팔려오고 팔려 가는 것이 너무나도 슬펐어요." "팔려가고 팔려오는 게 내 인생이라면 나는 왜 태여 났을까?" 안녕하세요. 전도사님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여태껏 컴퓨터를 통해 많은 곳에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전도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주신데 대하여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의 이야기를 하지요. 저의 이름은 박OO 나이 25(1980.O.O.) 고향은 OO북도 OO시 OO구역 OO리 OO반 할머니네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어요.(할머니 그때 년세 80세 좌우. 지금은 살아 계시는지 아니면 어떻게 되였는지 모름) 우로 오빠 한명 있고 아래로 녀동생 한명 있어요. 제가 5살 나던(1984.O.O.) 해에 아버지(박OO)가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니(OOO)는 아빠가 돌아가신 2년 후에 우리자매를 데리고 고생하던 끝에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어요. 저의 동생은 아버지 얼굴조차 모르고 지냈답니다. 저 역시 부모님들의 나이를 모릅니다. 그땐 너무 어려서 또 할머니에게 어머니 나이를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죠. 부모들에 대한 정이 하나도 없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도 많이 후회 되요. 그 후로부터 저의 삼형제는 할머니 슬하에 살게 되었어요. 할머니네 집에서 겨우 끼니를 때우며 살아갔어요. 제가 15살 나던(1994.O.OO)해에 외삼촌 한데로부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 왔어요. 그 후부터 저희에게는 고생과 시련이 닥쳐왔어요. 식량이 없어 바닷물을 소금 삼아 시라지 국을 먹지 않으면 안 되다 그것도 없어 산에 가 아무 풀이나 다 뜯어다 바닷물을 넣고 국 삼아 먹으며 하루하루 보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오빤 집을 나가고 할머니는 큰집에 저와 저 동생은 외지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라남 여관이란 데서 생활하게 되었어요. 거기서 나는 경성 도로 건설대에 가고 동생은 남아 있었어요. 내가 떠나던 날 내 팔목을 잡고 같이 가자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을 동동 굴리며 눈물 흘리던 동생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내가 앉을 때면 같이 울고 내가 죽으면 자기는 어찌 하냐며 내 곁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던 동생을 남겨놓고 떠나야만 했던 그 날... ... . 돌아와 동생을 찾아가 보니 동생은 떠나가고 나의 마음은 그리움과 괴로움으로 쓰리고 아팠답니다 제가 떠나가고 얼마 안 지나 동생과 몇몇 부모 없는 아이들이 강원도에 있는 학원으로 데려갔다고 했어요. 그때가 1997년 8월 말이었어요. 그 길로 저는 친척집을 찾아갔어요. 하지만 그들은 저에게 할머니를 다른 친척들이 모신다면 저를 데리고 있겠다고 하더군요. 다른 친척들도 생활이 곤란해서 할머니를 모셔 갈 형편이 못 되었어요. 하여 저는 그 날 밤으로 2시간의 길을 걸어 라남 역전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날을 샌 다음 청진 역전에 와서 사탕장사를 하면서 하루하루 먹고 살았어요. 어떤 때는 사탕으로 끼니를 에운 적도 많았지요. 그렇게 며칠을 보내는데 한 여인이 중국에 가면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면서 중국으로 가자고 하였어요. 예전부터 중국에 가면 피도 뽑아내고 사람도 죽인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저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중국에 가서 죽으면 죽고 살면 좋고 하는 생각에 선득 대답하였어요. 우리는 무산으로 통해 중국으로 건너갔어요. 그 여자는 나를 데려다 준 값으로 돈을 가지였어요. 화룡을 거쳐 룡정에서 6일 있다가 또 연길에 가서 어떤 한 사나이한테다 저를 팔아 넘기였어요. 그 사나이는 저를 또 다른 사람에게 팔 생각을 하였어요. 하여 나를 데리고 자기의 어머니 집에 데리고 갔어요 그때 저 나이 19살(1998. 1. 20. 중국에 온지 7일 되던 날)하지만 그 당시 저는 먹지 못해 성숙하지 못한 상태라 나이가 12살밖에 안 돼 보였어요 그러니 누가 저를 보겠어요. 오는 사람마다 나를 보고 19살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냥 돌아간 것이 5명이나 되였어요. 하여 저는 그 집에서 밥이랑 하면서 식모 질을 하였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팔려 간 것이 할머니 있는 집에 3000원에 팔려가서 2년 동안 살면서 중국말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웠으며 또 그 집 할머니가 교회를 다닐 때 함께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게 되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집에 찾아와 신랑을 얻어 준다며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갔어요. 전 또 장춘에 6000원에 팔려갔어요. 신랑은 벌써 8살짜리 아이가 있었어요. 저는 더는 이렇게 물건처럼 팔려오고 팔려 가는 것이 너무나도 슬펐어요. 하여 결심한 것이 도망 이였어요. 2번에 걸쳐 도주에 성공한 저는 연길행 기차에 몸을 실었어요. 팔려가고 팔려오는 게 내 인생이라면 나는 왜 태여 났을까? 하고 생각하니 나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하신 부모님이 너무나도 미웠어요. 연길에 도착한 저는 아는 할머니네 집에서 우연히 같은 북한에서 온 한 아지미를 알게 되여 지금까지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아지미는 OO시 OOO동 O반 리OO(39살 1966.O.OO)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남편 때문에 가정생활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여 리혼 한 후 4~5년을 딸을 데리고 고생하며 살다가 2000년11월말 중국에 들어오는 사람과 함께 왔다가 돌아간 후 다시 2001년 4. 23일 어린 딸(오OO1988.O.OO)을 농촌에 있는 외할머니에게 맡겨놓고 다시 들어와 이제는 4년이 되였어요. 그 기간 돈을 벌어보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고생도 많이 하였어요. 그러다가 작년(2003.5월)말 조선에서 중국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한테 돈을 주고 그 사람과 함께 나도 회령으로 들어갔어요. 나는 동생은 만나보지도 못하고 군대에 나갔다는 불확실한 소식만 가지고 10일 만에 그 아지미 딸을 데리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지금은 연길에서 셋집을 잡고 함께 생활하고 있어요. 하지만 신분증이 없는 저희는 일자리를 제대로 찾지도 못하고 더욱이 지금은 호구복사를 하느라고 검열은 심하고 언제 어느 시간에 경찰들이 집에 올지 몰라 밤에는 불도 켜지 못한 채 보내군 합니다. 라지오를 통해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 마다 저희는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답니다. 저들 행렬 속에 우리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니 어느새 눈물은 두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 베갯잇을 적시곤 한답니다. 하루빨리 이 무서운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벗어나 보려고 아무리 컴퓨터를 통해서 교회 목사님들과 신문사 기자님들께 이메일을 수십 번 보냈지만 그들한테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으려야 들을 수가 없었어요. 매일 매일 하나님께 저희를 도와달라고 한국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려도 저희에게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도 신심을 잃지 않고 저희는 컴퓨터를 매일매일 찾아보면서 매일 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조선일보를 통해 탈북자 동호회를 알게 되였고 거기서 두리하나 선교회 홈페이지를 알게 되였어. 거기에서 전도사님의 이메일과 전도사님의 쓰신 글도 읽게 되였어요. 그 순간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랐어요. 정말 이제는 살았다 희망이 보인다. 이런 생각에 저는 밤마다 밤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어요. 전도사님 도와주세요. 전도사님의 도움이 꼭 필요해요. 전도사님 밖에 저희는 다른데 알 수가 없어요. OO OO OOO에 있는 OO님에게 요청을 구해도 아직까지 연락이 없어요. 전도사님이 이미 많은 탈북자들을 도와 그들을 한국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신 이야기를 저희는 이미 라지오와 컴퓨터를 통해서 많이 들었어요. 전도사님 꼭 좀 도와주세요. 더는 이렇게 숨어서 살수가 없어 막 미칠 것만 같아 이렇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럼 전도사님의 건강과 하시는 사업이 순리롭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전도사님의 가시는 길에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고 하나님의 은총이 언제나 임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전도사님의 회답을 매일매일 기다리면서..이만.....안녕히! OO 올림 2004.08.30 (월) 11:15 ..... "전 돈도 필요 없어요 자유 찾아 주세요." "자유의 세상 자유만 찾는다면 죽어서도 눈감고 가겠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중국 OO에 있는 김OO입니다. 그 날 전도사님의 전화 받고 마음이 얼마나 설레이던지.... 나한테도 자유의 새봄이 오는구나하고 말입니다. 저는 1976년 O월 O일 OO북도 OO시에서 태여났어요. 김정숙의 고향이라 제 2 만경대라 불리우는 곳이였어요. 저의 아버지는 4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우리 4형제를 키우시다 제가 21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어머님 없이 일년 반을 형제들과 살다 1997년 6월 28일 저녁 10시 쪽지 한 장 써놓고 중국에 들어오게 되였어요. 말도 모르는 저에게 있어서 어떻게 팔린지도 모르게 흑룡강성 '가목사'라는 곳으로 팔려 가게 되였어요. 거기서는 33살 되는 로총각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이는 그렇다 치고 서로의 마음도 모른 체 그렇게 나의 쳐녀성은 가고 말았어요. 별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단지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것이였나봐요. 그 사람은 조금만 맛 같지 않으면 같은 것이 왔다고 했어요. 다른 건 참을 수 있는데 이런 말은 참을 수 없었어요. 자기네 조상들도 옛날 떠돌아다니다 여기에 정착한 다 같은 조선민족 아니던가요? 마음의 불을 겨우 참고 하루하루 지탱했어요. 돈 번 다음 보자고 말이에요. 그러던 2002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새벽 불시에 경찰이 들이닥쳤어요. 그렇게 화천현 공안국에 15일 동안 갇혀 있었어요. 다른 때는 벌금만 하면 돌려보내던 것이 지시가 내려 무조건 북송 한다는 것이었어요. 안 가려고 발버둥쳐도 부질없는 짓이었어요. 2003년 1월 10일 새벽 2시 기차역전으로 향하니 거기엔 11명의 탈북자들이 있었어요. 저와 같이 도문 감옥으로 호송될 사람들 이였어요. 두 사람에 하나씩 족쇄를 채웠는데 참 너무 억울했어요. 족쇄라는 건 죄수들이 차는 거잖아요. 도문으로 가는 기차에서는 누가 제발 날 구해졌으면 하는 바램 이였으나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가고싶지 않은 길을 그렇게 도문 감옥까지 가고 나니 그곳은 으리으리한 궁전 이였어요. 지구처럼 둥글게 지은 마당에 지붕 이였어요. 전문 탈북자만 수용하게 만든 지구 궁전 이였어요. 죄수 아닌 죄수들을 감금하는 곳 이였어요. 번호가 붙은 벽돌색 조끼를 입고 몸 검사 마친 다음 배치하는 곳으로 들어가니 배고파 허덕이는 1년 넘은 아짐들도 있었어요. 말도 못하고 줄 맞추어 앉아있어야 했는데 문을 지키는 군대 애들이 이쁘게 생긴 애들을 지껄였어요. 그들이 어쩌다 말 안 들으면 벌로 서있어야 했고 열쇠 열고 들어와 구둣발로 차고 행패 부렸어요. 15일에 한번씩 몸 검사하는데 구둣발 신은 체로 모든 물건 주어뿌리고 미처 감추지 못한 돈만 있으면 빼앗아 갔어요. 참 나라가 못사니 죄수 아닌 죄로 족쇄 차고 구둣발에 채이고 돈 빼앗기고 갖은 수모를 다 겪어야 했어요. 북한에서 태여 난 것이 후회 되였어요. 더욱 참지 못할 것은 민족이 이렇게 천대와 멸시 받으며 살겠다고 뻐둑거리는데 조그마한 민족도 살리지 못하는 김정일 정권이 한심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었어요. 결심했어요. 다시는 이런 봉변당하지 말고 진정한 자유 찾아가야 한다고 말이에요. 온성보위부 감옥에 도착하니 줄을 세워놓고 4명씩 한 칸으로 들어가 몸 검사 받아야 했어요. 홀딱 벗겨놓고 자궁 안까지 검사하는 치욕스러운 모욕당해야 했어요. 돈 때문에 돈 빼내려고 이런 짓 하는 것이었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치 떨려요 보위부 감옥에 있는 동안 두 번이나 이런 모욕을 당해야 했는데 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용납 안 되는 짓이었어요. 지구 세상에 대고 말하기조차 모욕스럽고 치욕스러운 행동 이였어요. 그렇게 고향까지 가게 되였는데 반겨줄 사람이 없었어요. 친척 형제들 모두 흩어졌어요. 그래도 친구 한 명 있었기에 몸조리도 대충 할 수 있어 다시 두만강을 건너 상해까지 오게 되었어요. 이리하여 둘째 언니와 동생은 중국에 들어왔다는 소식만 듣고 큰언니는 소식도 모른 체 다시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였어요. 다시는 절규하고 싶지 않아, 다시는 이런 길 걷고 싶지 않아, 자유를 찾아 떳떳한 자유인이 되고 싶어요. 전 돈 도 필요 없어요 자유 찾아 주세요. 자유만 찾는다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행복 할 것 같아요. 자유의 세상 자유만 찾는다면 죽어서도 눈감고 가겠어요. 바라는 자유를 향해 나의 몸과 맘 다 바쳐 이룩하리라/////// 그럼 오늘은 이만 쓰렵니다. 속이 떨려 바쁘게 쓰다 나니 틀린 글씨도 많네요. 양해해 주시고 마음만 읽어주세요. 2004.12.15 (수)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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