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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온 편지.
방앗간 6 480 2005-10-15 17:32:01
북한에서 보내온 편지


위의 사진은 북한을 넘나들며 보급품을 전달하고 복음을 전해온 나의 동역자가 전해준 편지입니다.
가급적이면 원문을 그대로 활자화 해서 북한 사정을 여러분에게 알리고자 이글을 공개합니다.
김영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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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함흥시쪽에 사는 김철입니다.
나이는 33살이고 동생하나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지냅니다.
나는 5년전 중국친척으로부터 신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맘에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믿음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중략)
그러던중 나는 3년전 친구의 도움으로 중국도강에 나섰습니다
처음 중국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아무생각도 없고 아무 말도 할수없었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나에게는
너무도 상상못했던 현실이니 말입니다.
나는 우선 먹고 싶은대로 먹기부터했습니다.
1년에 한번이나 먹어볼까말까 하는 닭알을 앉은자리에서 20알이나 먹어 치웠습니다.(중략)

중국조선족 집에서 구해주는 중고옷과 려비100원을 가지고 국경을 다시 넘어왔습니다. 한번 두 번 갔다오면
올수록 나는 미칠것만 같아서 더는 조선에 있을수가 없었고 또 중국 친척을 만나서 배우고 싶었던 것 마음껏
배우고 싶어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나는 한달도 되지 않아 또 중국도강을 시도했습니다.
도강중 나는 70세되는 로인이 도강하여 중국아들을 찾아가는 것을 보았고 함께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도강 중 나는 그 로인을 여러모로 보살펴 드렸고 도와드렸습니다. 덕분에 로인은 무사히 도강하여 아들을 만났고
아들 역시 기뻐하며 며칠 엄청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도와 중국친척을 찾아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조선에 있는 자기 친척들한테 돈을 3천원 전달해 달라고 주면서 나에게도500원을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쥐여준 어마어마한 돈에 나는 정신이 삥도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다시 조선으로 왔습니다.
돈도 전달 잘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전달해 주고 그 집에서 하루 밤 지내고 집으로 가려했는데 그날밤
나는 신고로 잡히게 될줄이야. 나는 순식간에 쇠사슬에 묶인 신세가 되었습니다.보이부에 압송되어간 나는
그날저녁부터 자지못하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왜갔냐? 누가 길 안내해주었느냐? 가서 누구를 만났냐? 아래동네사람 만나것없느냐? (한국사람)등등......
안기부 돈을 받아온 것이 아니냐? 누구 심부름 갔느냐? 교회에 갔댔는가?
무엇을 배웠는가? 등등......(중략)

몸은 숨만 붙어 있었습니다. 고문 방망이에 머리는 헬수없이 터졌고 온몸은 상처투성이고 잠을 안재우다 보니
정신도 흐리터분 아무생각도 없었습니다.
4달후 나는 진술서를 쓰고 손 도장을 찍었습니다.
나는 너무 가보고 싶어서 중국 도강했고 가서 아무도 만난것이 없고 친척찾아 갔는데 못 만났고 잘못했다고
반성한다고 진술했습니다. 6개월 고문 끝에 나는 보안 기관에 이간 받았습니다.(중략)

보안 기관에서 한달있다가 나는 재판판결 5년형을 받고 이간되었습니다. 감방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매일 총구 앞에서 일하고 주는 강냉이와 콩을 넣어만든 먹을 것을 먹으면서 3년이란 기관을 보냈습니다.
감방에서 나는 반장을 하다보니 좀 다른 사람보다 괜찮게 지냈습니다.
일하러 밖에 나갈때는 책임 동지와 말해서 사람 한두명 데리고 강냉이랑 손에 닥치는대로 도적질해다 함께 먹었습니다.
오직 살아남아서 중국 친척을 만나서 배우겠다는 일념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용서할것이고 죽는 친구들을 살리는 일이니 기뻐하리라 믿었습니다.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매사에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고 붙잡아주시고 어디가든지 다른 사람처럼 비참하지는
않았고 늘 책임 비서동지들에게 잘보이게 되여 잘 지냈습니다.
항상 우두머리 노릇할 정도였습니다 .
한번은 가을걷이 배추들을 실어날랐을 때입니다.
40대 녀인이 총을 든 동지가 돌아서는 숝간에 배추 한통을 순간에 먹어 치우는것이었습니다.
아차 총을 든 동지가 돌아서면 그 녀인은 개죽음을 당해야 되었습니다.
나는 인츰 달려가서 총든 사내에게 생명을 걸고 훔쳐온 담배라면서 피우라 권했습니다.
그 녀인은 그때를 놓칠쎄라 흙채로 배추2통을 더먹었습니다.
위험은 면했지만 나는 중국에 짐승만도 못한 감방 생활을 지금도 몸서리납니다.

당창건 60 돐을 맞이하여 김정일 장군님의 배려로 우리감방 680명이란 사람들이 형기 먹고 나왔습니다.
5년형 먹은 나도 3년형먹고 3년만에 2005년 9월2일 석방 되었습니다.
나는 오매에도 그리던 친척을 석방되는 순간에 만날줄이야 그리고 배우고 싶었던 것 알고싶었던것
물어보고싶었던 것 숨가쁘게 물어보고 날을 새우면서 듣고 배우고 했습니다.
감방에 나온 사람들 대부분은 나와서 집에 먹을것이없고 영양이 못따라가서 부종이 와서 죽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정말 3년 감방 생활을 기록하려면 몇날 몇밤을 눈물 흘리면서 적어도 다못 적습니다.
도강하다 잡혀들어온 사람 태반이고 중국에 들어가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배우고 성경책을 가지고 와서
집에서 보다 잡혀서 온사람만 해도 몇백명입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얼마 안가서 그곳에 한30대 녀인은 중국에서 전문 훈련을 받고 온여인입니다.
그여인은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180명까지 모였습니다. 그 여인 한테는 굶주린 사람 병든 사람 다 모였습니다.
기적이 엄청 많이 일어났습니다. 병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지하방에서
그러던중 신고로 예배중 180명 몽땅 잡혔고 그여인은 종신을 먹었습니다,
영영살아 못나오는곳에 갔습니다.우리는 일단 잡히기만 하며는 그순간부터 너는 이제부터 인간이 아니고
최하층 짐승이야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하게됩니다. 수많은 사람들 죽어 나갑니다. 일어나면 시체가 되여 개처럼 줄줄 끄기여 나가고......

중국 도강했다 잡힌 사람들은 대부분 인민페를 잘 개여서 비닐 싸서 삼킵니다.
그러면 감방에서 그것을 변소 (화장실)에서 그대로 받아 물로 씻어서 가만히 숨겨놨다가 책임비서동지들에게
조금씩주면 일도 쉬운 것 하고 나가 물건도 훔쳐오게 합니다.
그러지 못한 이외의 사람들은 총구멍앞에서 일을 하고 매맞고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합니다. 감방안에서는
태반이 굶어죽고 영양실조에 걸려죽고 탈수가 와 죽고 거의다 죽어 나갑니다. 지금은 사형을 총살하지 않습니다.
사형선고는 군중들 앞에서 하고 사형수들은 다른곳에 실고가서 비밀방에서 쇠몽둥이로 뒷골을 쳐서 죽입니다.
총살하는 장면이 록화 되여서 세계에 공포된이후 지금은 총살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생활은 말이아닙니다.
올해 가을은 더합니다. 내가 산을 뚜져서 심고 농사 잘해놓으니 인제 그것도 나라 땅이니 돈내고 가을걷이해
가랍니다.
이에 군중들은 치를 떱니다. 산을 뚜져서 심고 농사 잘해놓으니 인제 그것도 나라땅이니 돈내고 가을걷이라니
인제 죽으라는것이나 뭐가 다릅니까? 그리고 장사도 못하게 합니다. 일체 장사를 하지 말고 나라에서 주는
배급을 먹으라고 합니다 .배급은 안 주면서 ....

나는 이번에도 도강을 꿈꾸었지만 중국 친척을 통해 많이 배웠기에 도강을 포기하고 가족들에게 내가 믿는
하나님을 열심히 전하며 내조국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되여 주면서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더 상세히 많은 것을 이야기 해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더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 우리땅뿐아니라 이땅에서 복음 때문에
어려움 겪고 있는분들 복음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분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특히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 복음 때문에 심한 어려움을 겪는분들이 많으니 이들을 위해서도 진심으로 기
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와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 못하고 알수도 없지만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모든것을 다아시고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 하나님께모든 것 맡기고 기도하고 복음사역을 위하여
일하시길 바랍니다. 질의없는 글이지만 이글이 기도하는 분들에게 도움이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통일되는 그날을 손꼽아 고대하면서 조선에서 김철이가.......
주체(94) 2005년

지난 며칠전 즉9월27-29일에 군중 심판대회가 있었습니다.
5명이 사형선고 받았습니다.3명 녀 2명남 이들은 모두20-30대였습니다.
이중에서 3천원 때문에 사형받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인민페 3천원 딸라400딸라 좀안됩니다.
이들 모두 살길을 찾아 도강했던 사람들이고 또 아래동네를(남조선) 꿈꾸었던 사람들이였습니다.
내가 감방에서 나온 3일째되는날 아버지가 요행 구해왔다면서 회충약을 구해다 주었습니다.
거북한 말이지만 그약먹은후 나는회충 덩어리를2일이나 보았습니다.
나도 내 배속에 그런 회충이 많은줄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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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수대 2005-10-15 23:32:28
    예나 지금이나 현실인줄은 뻔히 알지만 그체제가 당장 뒤집어지거나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적다는게 더 답답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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