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께 드리는 즉흥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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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종오
조회 : 237 추천 : 25
즉흥시(時調 4首) LA 교민 초류향 선생이 시스템클럽 홈페이지에 올린
휘호도 스케치도 눈에익은 것이언만 다시보는 새로움에 그리움이 간절하네 한많은 보릿고개를 울고넘던 각하여! 일하세 또일하세 싸우면서 일하세 자주경제 자주국방 자조하고 자강하세 반만년 가난을씻고 부자나라 만들세! 새마을 정신으로 중단없이 전진하라 저축은 국력이다 근검절약 생활하라 기어이 조국근대화 이뤄내고 말리라! 안되면 되게하라 없으면 만들어라 무한한 그가능성 심어주고 떠난이여 그은덕 어이잊으리 그큰이름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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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공의 요화 정인숙 사건
본명 정금지(鄭金枝), 자유당 시절 대구부시장을 지낸 공직자의 딸. 대구 신명여고 졸업 후 문리사대(명지대) 중퇴.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정인숙은 오빠 정종욱의 총에 맞아 한강변에서 숨졌다. 당시 정인숙의 수첩에 기록된 전현직 고관 및 재계인사는 20여명이 넘었고 정인숙이 남긴 3살박이 사내애가 대통령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이 사건은 결국 김계원 중앙정보부 부장이 직접 나서기 까지 하여 사건을 무마하였지만 당시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유행가의 가사가 바뀌어 '박의 소생'이라는 노래로 퍼질 만큼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 육영수 여사는 어디서인지 변조된 가사 전문을 입수, 박대통령에게 들이대며 따졌다고 한다.(김정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
2. 궁정동 안가
이렇게 사건화 된 여인관계 말고도 박정희 대통령의 여자관계는 매우 복잡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대통령의 사생활을 관리한 박선호(예비역대령, 중정 의전과장)는 10?26으로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린 80년 1월 25일 육군고등군법회의 증언에서 " 궁정동 안가에 박대통령은 한달이면 열 번이나 그곳에 왔다" 말했다.
박선호의 진술에 의하면 이 집은 암살사건으로부터 10년전인 60년대말 이후락(6대 중정부장)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부터 대통령의 특별한 안가로 사용되었다.
"박대통령은 궁정동 안가를 만들기 전에는 위장번호를 단 승용차로 밤나들이를 하곤 하였다. 당시에는 박종규만이 야행시간과 장소를 아는 '천기'에 속했다. 육여사는 별도의 정보망으로 야행을 감시, 꼬투리가 잡히면 박경호 실장에게 따지고 심한 부부싸움을 하곤 했다. 그러나 모두가 못 본 체 모른 체 하고 넘어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박대통령은 스태미나가 절륜했고 상대는 두세 차례 만난 뒤 꼭 바꾸었다. 그래서 교유 여배우 숫자가 많아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10?26 당시 박선호(중정 의전과장)의 법정 최후 진술)
100여명에 가까운 연예인이 이곳을 다녀갔다. 세검정에도 비슷한 안가가 있었으나 청와대와의 거리가 멀어 궁정동이 주로 쓰였다. 잡지나 TV에서 대상이 선정되면 궁정동에서 가까운 내자호텔로 불렀다. 부르는 과정에 회유도 압력도 있었다. 예컨대 79년 10?26 당일 오후 5시 20분 가수 심수봉은 내자호텔 커피솝에서 대학생 모델 신양은 프라자호텔에서 각각 궁정동으로 인도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문란한 여성편력은 육영수여사의 사후 한층 더 심해졌다. 궁정도 안가에서는 사흘에 한번 꼴로 '대행사', '소행사'로 불리는 미녀파티가 열렸고 측근들 사이에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한 경쟁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은 여성관은 당시 고위층들의 입에서 흔히 오르내리던 '배꼽 아래 인격 없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어떤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더 잔인한 달은 10월인 것 같다. 우리 현대사를 보면 4월이나 10월은 대학가에 민주화 학생운동이 불붙는 시점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여 동안 토론과 함께 준비의 시간을 갖다가 마침내 폭발하는 것이다. 어두웠던 독재정권 시절을 살면서 우리가 숱하게 겪어 온 계절적 악순환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1972년, 그 반독재 학생운동의 계절 한복판에 노골적인 독재정권을 세우는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그 1년 전인 1971년 10월15일 전국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학생 간부 177명을 체포해 중앙정보부, 군 보안사, 경찰에서 고문 조사한 뒤 전원을 군대로 강제 입영시켰다. 대학에서 모두 제적 처분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학생운동 세력을 '소탕'한 뒤 박정희는 민주화운동의 계절 한복판에 거리낌 없이 유신 쿠데타를 감행했다. 5·16과 함께 두 번째 쿠데타였다.
민간법정이 아닌 군사법정에 선 김재규... 타당한가
그로부터 7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권총에 맞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10·26에 대해 김재규 자신은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계엄사 군사재판에서 '민주회복 혁명'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군사법정은 그에게 혁명을 일으킨 정치범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란 목적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정치범이나 단순 살인이라면 반드시 극형을 선고하지는 않는 게 상례다. 김재규는 "다수의 희생을 막기 위해 국민이 갈구하는 민주회복 혁명을 했다"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포로 된 장군 심정"이라고 군사법정을 비판했다.
10·26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다시 따져 보아야 할 문제가 김재규를 민간 법정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세운 것이 타당한지 여부다. 또 사형집행이 상례를 현저하게 벗어나 과도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점, 특히 정치범에게 흔히 적용되는 감형이나 사면의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는 점이다.
첫째,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쏜 10월 26일 당일 서울은 계엄령 상태가 아니었다. 부산 마산만 지역 계엄령이었으며 전국적으로 평상 상태였다. 계엄령은 10·26이 일어난 다음날 발동된다. 따라서 평상시에 발생한 10·26사건의 중심인물인 김재규는 헌법상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를 계엄사 군사법정에 세운 것은 소급 적용으로 위헌이었다. 10·26사건 관련자들 중 군사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로 현역 대령인 박흥주 한 사람뿐이었다.
둘째, 김재규에 대한 재판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은 1980년 5월 20일이며, 그로부터 불과 나흘만인 5월 24일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는 전두환의 하나회 세력이 중심인 신군부가 5·18광주항쟁을 살상 진압하고 있을 때였다. 신군부는 5월 27일 광주의 전남도청에 발포, 점령함으로써 진압작전을 마무리했다. 이 격동의 와중에 신군부는 김재규를 처형함으로써 그가 정치범으로서 감형될 기회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왜 김재규는 박정희를 냉혹하게 확인사살 했나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10·26과 관련해 중요한 의문 중의 하나는 김재규가 왜 그렇게 박정희를 단호하고 냉혹하게 확인사살 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후에 군사법정에서 중정요원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박정희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것을 알았으면 제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박정희가 사라져야 할 권력자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쏜 총알은 딱 두 발이다. 첫 발은 가슴을 관통했으나 치명타가 아니었다. 재차 발사하려 했을 때 김재규의 콜트사 제품 권총은 찰칵 소리만 낼 뿐 불발이었다. 김재규는 고장난 권총을 들고 밖에 나가 박선호가 서 있자 그의 권총과 바꾸어 갖고 다시 방에 들어간다.
박정희는 모 대학 재학 중인 패션모델 정혜선(가명)양의 무릎에 상반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다가가 머리 뒤통수에 권총을 겨눴다. 군사법정 진술과 현장검증에서 확인한 바로는 50cm 이내의 거리였다. 정혜선은 비명을 지르며 실내 화장실로 튀어 들어 피신했고 동석했던 가수 손금자(가명)양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김재규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최후의 일발을 가격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확인사살이었다.
김재규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박정희와 동향이고 육사 2기 동기생으로 군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핵심 자리를 맡길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사이에 확인사살이란 인간적 환멸과 증오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김재규의 그런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옛말에 "소인은 혁면(革面)하고 군자는 표변(豹變)한다"고 했다. 혁면이란 얼굴, 즉 안면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변덕 부리는 사람을 소인이라 하고 그 변덕의 한 단면을 혁면이라고 묘사했다. 그에 비하면 군자는 말이 없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번 마음 먹으면 얼굴 표정 바꾸는 변덕에 그치지 않고 몸 전체를 돌려버리는데 그것이 '표변'에 해당한다.
박정희는 김재규가 자신의 속마음까지 잘 헤아려 주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내치지는 않았다. 일종의 변덕으로 신임을 거두어들이는 혁면이지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는 표변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김재규는 유신 이후 박정희의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함께 "미국 놈들 갈테면 가라고 해" 등의 반미 발언으로 국가안보 위기를 절감했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와의 관계에서 혁면에 그치지 않고 표변하기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박정희가 권력자로서 변덕과 주색에 빠진 사생활 문란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환멸을 느꼈고 그것이 그의 '야수'와 같은 표변을 불러 일으켰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술자리 여자를 구해오던, 그 시절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유신독재의 문제와 한미관계의 파탄을 주로 비판하면서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비밀스런 마음 속 창고에는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에 대한 환멸감이 쌓여 있었다. 녹음테이프에 담긴 군사법정의 문답내용을 분석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것을 처음 감지한 사람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담당한 변호인이었다. 박선호 담당 변호인인 강신옥 변호사는 그의 사건 가담 동기와 그날의 행적 등을 정리하다가 처음부터 품었던 의문이 풀려감을 느꼈다. 유신체제의 핵심권력자들이 모인 술자리에 동석했다는 여인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바깥에서 술자리 여자를 구해 오는 '채홍사' 역할을 고정적으로 해야 할 만큼 박정희의 주색은 병들어 있었다.
▲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궁정동 현장.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정부장의 총탄에 숨을 거뒀지만, 유신정권은 1970년대 내내 각종 위기상황을 겪어야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 MBC 김재규
1979년 12월11일 오후 계엄사 보통군법회의 제4회 공판.
강신옥 변호인 : "피고인이 관리하는 다섯 개의 연회장은 대통령이 혼자 사용하시거나 이번에 사건이 생겼을 때와 같이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정보부장, 이 네 사람이 연회를 가질 때 사용하는 장소라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 "네, 그렇습니다."
변호인 : "… 대통령이 혼자 오실 때는 '소행사'라고 말하고,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중정부장이 올 때는 '대행사'라고 한다는데…."
박선호 : "그렇습니다만, 그 행사 관계는 참고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박선호의 답변은 목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가 됐다. 무언가 꺼리는 말투가 역력했다. 강 변호사는 여기서 더 바싹 다그쳤다. 박정희의 부도덕성과 타락상이 부각될 수록 '10·26거사'는 그만한 명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인 : "아까 검찰관 신문 시 얘기하다 말았는데 당일 몇 시 몇 분에 플라자 호텔에 간 일이 있죠?"
박선호 : "… 네."
변호인 : 거기에 간 것은 그 날 연회를 도와 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군사법정을 울린 김재규의 한 마디..."야, 그 얘긴 하지마!"
군사법정에 긴장이 흐르는 사이 작은 외침이 울려 나왔다.
"야, 그 얘긴 하지마!"
피고인석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김재규가 박선호의 답변을 제지하기 위해 소리쳤다. 이에 박선호도 '양심선언'의 기회를 유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박선호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변호인 : "그날 플라자 호텔에서 내자 호텔로 간 것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박선호 :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변호인 : "피고인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여자 문제를 더 힘들게 하고, 피고인 자신이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괴로워서 김 정보부장에게 수차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고 하소연 하면서 그만두게 해 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김 부장이 '궁정동 일은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사의를 만류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 "제가 근무를 몇 번 꺼렸습니다. 그래서 하기 어렵다는 여러 가지 사유를 부장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신임하시고 자꾸 계속 근무를 원하셨습니다."
변호인 : "차 실장은 '돈을 얼마든지 줄 테니까 좋은 여자를 구해 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돈을 한 푼도 도와주지 않고 하도 말만 많아서 피고인이 경호처장인 정인형한테 '그러면 당신이 골라서 해라'고 했다면서요? 그랬더니 '청와대에서 고른다는 걸 국민이 알게 되면 큰일 난다'며 안된다고 하기에 피고인은 '골라놓은 사람들에게 좋든 싫든 말이나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항의까지 했더니, 그 이후에는 차 실장도 잔소리가 적어졌다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 "…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국가정보기관의 간부로서 대통령의 채홍사라는 오명까지 쓰게 된 박선호는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갔다. 이에 강신옥 변호사는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교도소 접견 때 이미 그에게서 확인한 대통령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를 공개해 나갔다. <계속>
출처 : 청와대가 좋은 여자를..."야 그 얘기 하지마!" 김재규는 왜 박정희 뒤통수 '확인사살' 했나 - 오마이뉴스
정인숙과 정치인들의 스캔들이 워낙많아 정세를 잘살피시라고 질타를 하셨는걸로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그아이는 전 정일권 국회의장의 아이다는건 육영수여사님도 알고계셨구요
너도 사내새끼냐?
아니 사내로 세상에 태어나서 남의 예쁜계집 한번두 품에 안아보지 못하는
그런 머저리를 어찌 사내라 하겠냐?
너 새끼는 그러구 사니까 제 와이프도 하나 제대루 건사 못하는거여.
이놈들은 그러니까 네편네 한데 져야 가정이 행복하다는 개소리나 하는거여.
남자 새끼가 겨우 한다는 짓이 죽은 사람의 여자편력이나 캐고 다녀???
종오김이라는 머저리야..//
네애비도 아마 남의 네편네 궁둥이 수십은 만졌을게다.
남한에서는 이런 쓰레기들도 사내 새끼라구 하는가?
부끄럽다 쓰레기야...
wkdbxhddlf아 저런 쓰레기도 너의 동포냐???
인간구실 못할것들;;;;
네가 저 원글을 퍼 올린 머저리냐?
지금 자기 글 옹호해서 댓글 달았냐?
친북좌파 새끼들은 신통히도 이놈 처럼 무식하고 비열한 인간들인가?
머저라 독재를 해서 여자를 취하든 ...돈을 주고 여자를 취하든,,,
그건 사내들이 자기 능력에 따라서 하는 한마디로 숫컷들의 자유 행동이야...
너 같은 머저리는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 혼자서 딸딸이나 치는 것일 뿐이고...
너도 그것이 부러우면 대통령 되려마...
하긴사 너같은 치졸하여 남의 치정사나 캐고 다니는 비굴한 인간이
어찌 대통령을 넘보랴??
너같은 무식하고, 비열하고, 부끄러운 인간은 개만도 못한 놈인 것 뿐이여.
머저라!!
사내들 망신 시키지 말고 꺼져라.
한마디만 해줄게...
뭇 계집들도 사내다운 사내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는거여.
너같은 머저리는 영원히 바깥의 계집 한번 못 안아보고 불쌍히 살다 뒤지는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