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ㆍ화해ㆍ일치’에 대한 원고를 요청받고 벌써 마지막 회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마지막
글에서는 매 순간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서 탈북인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남한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처음 탈북인을 만나면 종종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남한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은 탈북인들에게는 식당에서 메뉴 하나를 고르는 것 하나도 쉽지 않은 결정이 됩니다.
그런 이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단 골라봐, 후회는 그 다음 일이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생애 첫 선택이
될지도 모르는 이들에게는 전혀 쉬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선택이 삶의 전부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남한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하고, 선택 자체가 불가능한 삶을 북한에서 살아온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한에서 탈북인들을
어리석은 사람들로 판단할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평생을 두고도 선택하지 못할 일을 탈북인들은 이미 경험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몇 개씩 넘어온 그 선택을 이미 탈북인들은 경험했고 그 결과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선택
하나하나에 모두 인과관계가 맞물려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돌이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이미 탈북인들은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택이 더 쉽게 할 수 없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런 탈북인들의 불안과 걱정을 덜어주어야 하는 일이 이제 남한 사회에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탈북인을 받아들이는 이 당연한 일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면 습관처럼
선택을 해온 남한 사회에서는 이것이 자기 삶에서 그다지 큰 영향력이 없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여기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는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순간, 스스로 주님께 대한 우리의 이해와 그 관계가 정의ㆍ사랑ㆍ평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탈북인을 ‘다른 사람이 아닌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될 수 있는
것, 내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또 내게 이익이 없음에도 ‘짝사랑을 하듯’ 그들을 여기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내 힘만으로 되지 않는 것을,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이 선택이 될 수 없다는 것, 이 신비를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신비 안에는 남한과 북한이라는 구분이 필요 없습니다. 이제는 선택이 아닌 삶으로 함께 살아가야할 때 입니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