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군사전략과 북한의 도발가능성(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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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북한의 군사전략과 북한의 도발가능성(3) 신희섭 정치학 박사 /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지난 시간에 이어 북한의 군사전략 특히 한국전쟁이후의 안보전략과 군사전략에 집중해서 살펴본다. 한국전쟁이후에도 북한의 안보정책의 목표는 생존이 아니라 남한의 공산통일이라는 공세적 입장이 지속되었다. 한국전쟁이후에 기습을 통한 공산화실행이 실패하자 이후에는 전략적인 정점(culminating point)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북한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면 그 정점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주한미군의 완전철수와 한미동맹체제의 와해. 한국전쟁이후 한미동맹으로 인해 남한의 힘의 중심부는 수도 서울이 아니라 미국이 되었다. 따라서 미국이 남한에서 출수하지 않는 한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해야 남한을 공산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의 힘의 중심인 여론을 이용해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나가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서 미군에 대한 군사적 도발과 미국과의 평화협정제의와 남한 정부에 대한 비난이라는 전략을 사용했다. 두 번째, 북한 동맹체제의 강화. 한국전쟁기에 소련과 중국은 지원자 역할이었다. 1961년 남한에서 군사쿠테타에 의한 정부수립이 있자 북한은 소련과 중국과 함께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를 약속하는 동맹을 체결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북한도 권력의 중심부를 확대하였다. 세 번째, 예비병력의 강화. 한국전쟁에서 예비 병력이 부족해서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측면 공격을 허용하게 되었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대로 전략적 불확실성의 상황에서는 예비 병력을 유지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게다가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예상하지 못한 위협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예비 병력이 있어야 장기적으로 감소하는 공격력을 보충할 수 있게 된다. 2012년 기준으로 북한이 보유한 정규군이 119만이고 예비군 병력이 770만이라는 것은 북한 전체 인구 2,445만 명을 기준으로 볼 때 북한이 공세적 전략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네 번째, 전술적 기습작전의 활용. 북한은 한국전쟁에서도 기습작전을 중심으로 전쟁을 결정하고 수행했다. 북한은 베트남전의 교훈으로 구정공세와 같은 기습 전략으로 남한과 미국의 전쟁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기습 전략을 위한 대규모의 특수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20만에 달하는 북한 특수부대는 정규군에 의한 공격과 더불어 일종의 양동작전을 구사하려는 것이다. 또한 기습을 위한 기동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AN-2 비행기나 수륙양용 호버크래프트 등을 이용한 기습과 땅굴을 이용한 기습작전과 기동화를 강조하는 기계화 부대를 중심으로 정규군과 특수부대를 육성하게 된다. 한국전쟁이후 북한의 군사전략의 운용과 실제역사 한국전쟁이후 북한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남한의 혁명전쟁전략이고 둘째는 한미분열전략이다. 북한은 베트남 전쟁이 발생하자 한반도에서 베트남전쟁과 같은 모반을 꾀했다. 북한은 3대 혁명역량강화라고 하여 남한과 북한과 국제적 차원에서 혁명역량강화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남한 내의 혁명조장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북한은 1966년 조선인민군에 8만 명의 특수부대를 창설하였고 10월 당대표회의에서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하였다. 4대 군사노선은 첫째, 전인민의 무장화와 둘째, 온나라의 무장화와 셋째, 인민군대의 간부화, 넷째, 무장의 현대화였다. 이를 통해서 전인민의 병사화와 예비 병력확보를 달성했다. 또한 북한 전 지역을 방공군사방위시설로 구축하였고 북한 인민부대나 유격대의 간부들을 육성했고 현대식 무기와 전투기술로 군대를 무장했다. 이렇게 4대 군사노선을 통해서 전술적인 준비를 꾀한 것이다. 북한의 대남정책의 변화가 한 가지 있었다. 이것은 비정규전을 강조하면서 남한 내의 혁명조장세력을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전략은 현재까지도 남한 내의 북한과 연계된 조직과 단체들을 중심으로 정부정책이나 국가정책을 거부하고 국내 여론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 남한 내에 결집력을 약화시키는 간접적인 전략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3년 통합진보당의 RO 조직 사건은 북한의 사상전과 심리전의 효과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한국전쟁이후 남한의 힘의 중심이 미국에 있다고 생각하고 남한 내에서 미군의 철수와 한미동맹 분열을 위한 노력을 해오고 있다. 데탕트초기 북한은 남한과의 대화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이나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1974년부터 북한은 제 2차 박대통령암살시도사건에서 보이는 것처럼 대남 공세적 전략을 재개했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은 미국에 대해 남한을 배제한 채 관계개선을 시도하였다. 1974년 북한은 미국의회에 공개서한을 보내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한반도의 휴전협정을 양국 간의 평화조약으로 대체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즉각적으로 남북한 문제는 당사자가 해결할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을 배제한 북한제안을 거절했고 주한미군 감축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못을 박았다.1) 1977년 카터정부에서 한미 간의 관계가 나빠지자 북한은 다시 대미공세를 강화했다. 김일성은 프랑스 『르몽드』지에 주한미군의 철수를 촉구하고 가을에는 북한의 허담외상이 미국 측 관리들과의 회의를 위해 뉴욕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카터정부가 남한의 참여 없이는 북한과의 어떠한 토의도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밝히자 북한은 미국을 비난하면서 북한의 노력은 소득 없이 끝났다. 이러한 북한의 대미 접근은 탈냉전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함으로서 동맹상실에 따른 불안에 대해 대한민국과 미국에 평화적인 입장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1993년 NPT 탈퇴를 통해서 제 1차 핵 위기를 야기하고 1994년 북미제네바 합의를 통해서 통미봉남(通美封南)정책을 택하였다. 남한은 미국과의 지속적인 대화 속에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KEDO를 구성하고 한국형원자로를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1995년 이후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을 통해서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내어 미사일 유예를 받아내려고 하고 있다. 또한 미사일을 수출하여 국제적인 대량살상무기확산 금지를 위반하면서 대한민국 외에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서 안보를 달성하고자 한다. 또한 2002년 이후 2차 핵위기를 조성하였고 2013년 2월까지 3 차례의 핵실험을 통해서 핵을 통한 억지와 대미협상을 강화하고자 한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은 남한을 격리하고 미국과의 양자적 접촉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 핵문제를 6자회담을 통해서 해결하는 다자화방안을 선택했고 2013년 현재까지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강조하고 있다. 한편으로 한미동맹 역시 2009년 포괄적 동맹에 대해 합의하였고 2013년 6월에는 한미동맹 60주년 선언을 통해서 북한위협과 한반도 안보문제에 대한 합의를 다시 한 번 다짐했다.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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