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광장

자유게시판

상세
내가 알아 낸 625전쟁
탈북인 3 496 2006-03-06 23:26:19
우리는 왜 6.25전쟁을 미국이 일으켰다고 믿어왔는가?!

남조선 삐라를 오랜만에 철원군에 갔을 때보았다(1990년 8월 말)
폐쇄사회에서 외부소식이 갈급한지라
엄한통제에도 이렇게 저렇게 다 보게 된다.
보면서도 첫 선입견은 “우리를 속이려는 거겠지”
나 역시 그랬다.

많은 삐라내용 중에서 참 한심한 것은
6.25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은 북조선이라는 것이다.
대학공부도하고 연구원까지 하면서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는 처음이었다.
선입견대로 삐라에서 근거로 잡는 전쟁원인도 한심하였다.

첫째근거, 소련 공산당 총서기였던 후르쇼브가 회고록에 밝혔다는 것이다.
북한사람이 알고 있는 후르쇼브가 누구인가?!
수정주의 두목으로서 스탈린을 화장하고 공산진영을 분열시킨 놈이다.
미국에 먼저 찾아가서는 여자하고 놀아났다는 등 아주 추잡한 놈으로서
북한사회에서는 흔히 라고 미워하였다.
그런 놈이 별소리 안하겠나!

둘째근거, 이학구라는 인민군대좌(대령)가 귀순하여 불었다는 것이다.
이학구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반역한 놈이 별소리 안하겠나!

셋째근거. 어떻게 전쟁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먹히겠는 가이다.
그거야 떨떨하니까 먹힌 것이지!

이와 반대로 북한에서 교육받은 전쟁근거는 너무나 믿음직스러웠다.

그 첫째로, 전쟁전야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3.8선을 시찰하는 사진.
불난 곳에 성냥가지고 있지 말라 했는데 전쟁 직전에 시찰했다.
또 미국의 괴뢰인 남조선 놈들이 상전의 지시에 따랐을 것이다.
소련군 철수에 1년 늦어 미군 철수(1949년)는 다 연막작전인 것이다.
그 위력한 근거는 전쟁 전에 미군가족들을 빼돌리는 기록영화가 있다.
*아마도 전쟁 직후의 것을 전쟁전이라고 선전하는 것 같음

둘째로, 남조선괴뢰군 신성모 국방장관이란 자는 고 항상 떠들다가 북침한 것이다.
군대의 우두머리가 한 소리이니 더 의심할 나위가 없지 않는가.

그러나 이모든 전쟁책동을 꿰뚫어보시던 백전백승의 김일성 장군님의
현명한 대처로 3.8선 1-2 키로까지 쳐들어온 적들을 일거에 반격하여
3일 만에 서울을 해방한 것이다.

이렇게 세뇌되어 남조선삐라 소리는 믿어질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삐라가 준 의미는 있었다.
전쟁도발자를 상론시킨 것이며 또한 의구심도 주었다.
그것은 남침근거 세 번째로 지적된 이었다.

전쟁사를 다 뒤져보아도 전쟁을 일으킨 쪽이 처음부터 수도를 내줄 만큼
밀린 적은 없다는 점이다. 또한 전 전선이 1-2키로 들어왔다가 자로 대듯
일시에 밀려나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증오가 북한을 유지하는 정신적기주인데 기본근거는 전쟁에 두고있다.
평화스러운 공화국을 침략하여 너무 많이 죽이고 파괴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먼저 때리고 맞았다면 그렇게 격렬하게 증오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을 가?!
남과 북의 정치선전이 아니라 진실을 말해줄 사람은 누구일 가?!
그렇다! 전쟁 초기 참가자나 3.8선 주민을 만나보면 될 것이다.
마침 기회가 왔다.
출장 중에 전쟁초기 참가자를 만난 것이다.
바로 김정숙군 농장 경비 아바이었다.
직설적으로 물으면 진실을 말할 수없는 북한환경을 잘 아는 나는
전쟁영웅이라며 전투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였다.
말동무가 없던 차에, 그리고 영웅이라고까지 추어주니 신바람이 났다.

아바이는 본래 팔로군으로서 해남도 전투까지 참가한 백전노장이었다.
6.25전쟁 일어나기 몇 달 전, 조선사람 만 뽑아 기차를 태운다.
기차가 압록강을 넘어 신의주에 들어서서야 조선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인민군 복을 내주어 갈아입고 중국군 복은 차창 밖으로
던져주니 옷이 귀하던 시절이라 백성들이 그렇게 좋아하였다고 한다.

도착한 것은 원산, 그런데 기분들이 나빴다.
팔로군과 달리 인민군은 상하견장이 있어 너는 별 달고 나는 뭐야?!
차별이 심하게 느껴져 원산시내에 나가 진탕치 듯 놀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고문관이 나와 군기를 잡더니
강원도 양양, 속초 부근 3.8선에 배치하는 것이다.
앞에는 남조선군의 최고악질부대 백골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대포를 들이쏘고 돌격하여 들어가니
백골이 되도록 싸운다는 군대가 팬티바람에 들고 뛰더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속으로 .
6.25전쟁도발자가 누구인가를 똑바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전쟁하려는 군대가 군복도 입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왜 북한은 이 엄연한 역사를 필사적으로 속이려 하였을 가?!
또 누구를 대상해서 속이려 하였는가?!
그것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주민을 상대로 속이려한 것이다.
그것은 일단 성공한 것 같다.
비교적 공부한 축에 속한 내가 지금껏 속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그러나 더 늦기 전에 진실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 미친 듯이 격렬한 증오와 우상 심을 잠재울 수 있다.
이러한 의식작업은 통일 전이나 후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진실을 알려야 할 가?
사상유래 없는 폐쇄국가 북한을 상대해야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전파매체는 물론 통행의 자유마저 없는 거대한 감옥이다.

그럼에도 좋은 방법이 있다.
수백만 총칼로도 막지 못하는 것이 하늘과 바다이다.
하늘 따라 풍선으로, 바닷물 결 따라 부유물로 소식을 전해야 한다.
값싸고 안전한 풍선과 부유물에 라디오와 삐라를 달면 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하여야 한다.
좋아하는 회원 : 3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동의 2006-03-07 09:35:42
    북에서 오신 듯한데.. 중요한 역사에 대해 사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 멋지십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한국인들의 의식수준이 님의 반만 따라가더라도 이 땅의 이데올로기는 지금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땅에는 지금도 6.25전쟁을 자본주의 앞잡이 미국이 일으켰으며 분단 또한 한반도를 전략기지로 이용하고자 하는 미국의 작품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부류가 뒷골목 깡패나 부랑자들이 아니라 이른바 지도층이라 일컬어지는 국회의원, 정치인, 관료 등에 두루 포진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참 부끄럽고 한심한 일입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광야 2006-03-07 16:54:14
    북침설을 지지하는 한총련의 일부사람이나 무뇌충의 정치인들의 말을 들어본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진짜 힘은 침묵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더이상 간과할수없을 지경에 이르면 폭발하듯 쏟아지는것이 한국의 보통사람들이지요. 단언하건데 국민의 99.99%는 남한의 북침설같은 허무맹랑한 말에 속거나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냥 무시하지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초혼 2006-03-08 10:44:52
    약 2-3년전에 해제된 쏘련 기밀문서 내용을 보면 우리가 모르던 많은 내용을 알수 있게 됩니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조선반도 통일을 위해 쏘련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동의하지 않았고, 그 후에 유럽에서 미국의 군사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일성의 주장에 동의하게 됩니다.
    이런 내용은 모택동은 전혀 모르고 있다가, 1950년 4월 조선 부수상이 중국을 방문해 모택동에게 이런 상황을 알리고 중국의 협조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때, 모택동은 대만해방준비를 하고 있고 또 스탈린과 김일성이 중국에 통보도 없이 이런 결정을 한데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여 처음엔 협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스탈린이 이미 결정한 사항이고 또 김수상 3개월이면 전쟁이 끝날것이라고 설득하고 하여 결국 20여일만에 동의하게 됩니다.

    1949년부터 모택동은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인민해방군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인을 귀국조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때 저희 역사선생님이 바로 1949년에 귀국하여 인민군 군복을 입고 싸우다가 중상을 입고 만주에서 치료받다가 전쟁이 끝나 그냥 가족이 있는 연변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분은 1949년 호남성 장사를 공격하는 전투에 참가중인데, 갑자기 조선인은 전부 기차에 타라는 명령을 받고 기차를 탔는데, 3박3일 타서야 겨우 문을 열수있게 해주는데 거리가 신의주 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민군 군복을 바꾸어 입은 사람이 약 6만명이라고 합니다.

    1950년10월 조선이 전쟁에서 밀리자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을 명령했으나, 모택은 먼저 무기를 지원해달라, 스탈린 먼저 참전하라 이렇게 싸우다가 결국 20여일만에 모택동이 먼저참전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병력은 20만.

    결국 조선전쟁은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겨룸이였고, 그 피해자는 한반도이고 수익자는 바로 쏘련하고 중국입니다. 쏘련은 원동에서 조선군과 중국군을 이용해 미군을 견제함으로써 유럽에서 이득을 얻게 되었고, 중국은 쏘련의 무기지원으로 일략에 군사강국이 됩니다. 예를 들어 1949년 중국공산당 정권수립시 정찰기를 포함한 군용기가 17대였으나, 조선전쟁이 끝날무렵, 미그기가 무려 3000대나 되고, 120만 육군을 쏘련 현대화무기로 무장시켜주게 되고, 중국군 화력이 한국군을 훨씬 능가하게 됩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자유대한민국 2006-03-10 23:04:16
    고맙습니다. 오히려 북조선에서 살다가 오신 분들이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계신 것에 대하여 정말 고맙습니다(물론 님도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지만요). 지금 남조선은 '주체', '자주', '민족'(물론 '민족'이라는 것에 대하여 반항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이라는 이념을 가진 정권이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남조선으로 올 때 가지셨던 마음, 자세를 항상 긴장하면서 유지하신다면 이곳에서 얼마든지, 충분히 성공하실 수 있다고 봅니다. 멋진 인생 꾸려 나가시길 바랍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美-北 뉴욕접촉, '새 게임법칙' 출발점 되나? (데일리엔케이) (sankei의 기사도)
다음글
"美, 탈북난민에 南수준 혜택 못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