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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에 ‘5.18역사에 대한 12년간의 연구결과’를 보고합니다.
Korea, Republic of 권정름 0 352 2014-09-09 18:13:31

대한민국 국민에 ‘5.18역사에 대한 12년간의 연구결과’를 보고합니다.

저는 5.18역사를 12년 동안 연구했습니다. 5.18역사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능가하는 역사왜곡 사례임을 보고 드립니다. 아니 그보다 100배는 더 부끄럽고 악랄한 역사왜곡의 사례입니다. 5.18은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해 북한이 병력을 보내 일으킨 폭동의 역사였음을 보고 드립니다. 북한이 10.26이후 꾸준히 소단위로 내려 보낸 600명의 특수군으로 하여금 광주에서 천대받는 양아치 구두닦이 목공 석공 철공 등 사회불만세력을 소모품으로 사용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연구결과를 보고 드립니다.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살해하여 놓고 그것을 계엄군의 소행으로 모략하여 남남전쟁을 유발하려 했던, 세계 전사 상 그 유례가 없는 북한의 적진침투 게릴라 작전이었음을 보고 드립니다.

광주가 주도한 민주화시위는 전혀 없었음을 보고드립니다. 1980년 5월 18일 이후 광주의 지식인, 교수, 학생 모두가 스스로도 비겁하다 토로했을만큼 꼭꼭 숨어 있었는데 무슨 목숨을 건 민주화시위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이제까지 35년간 우리는 북한에 능욕당했고, 좌익들에 놀아났습니다. 북한군이 광주에 와서 분탕질을 친 천하의 수치스러운 치욕의 역사를 놓고 대한민국이 나서서 한국 민주주의를 드높인 민주화운동이라고 해마다 기념하고 있는 이 기막힌 수치를 언제까지 더 덮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자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전국에는 살벌하고 삼엄한 계엄령이 집행되고 있었습니다. 김대중이 국가를 상대로 최후통첩을 발표하였습니다. “5월 19일까지 계엄을 철폐하고 최규하-신현확 내각을 해체하고 전국혁명내각을 구성하겠다”   이런 내용으로 확답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해 전국 봉기를 단행할 것이라 협박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김일성이 간첩들에 내린 '전민봉기' 교시와 정확히 일치하였습니다. 당시 무엇을 믿고 그런 선전포고를 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김대중은 북악파크 호텔에서 4-5월에 걸쳐 4차례씩이나 회동하여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 명부까지 작성해놓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5월 17일 밤중을 기해 전국의 경찰들로 하여금 각 지역에 문제가 될만한 야권과 운동권 인물들을 일거에 체포하여 이른바 고문을 시작하도록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숨도 크게 쉬지 못 할 만큼 얼어붙었습니다. 체포되지 않은 운동권과 학생들은 모두 깊이 숨어 문밖출입조차 삼갔습니다. 5월 18일은 가장 무서웠던 급냉의 날이었습니다. 이럴 때 감히 어느 광주인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민주화운동이라는 걸 할 수 있겠습니까?

2001년은 광주공화국이 대한민국 위에 군림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때 5.18 영웅이라는 사람들이 5.18기념재단이 마련한 증언록에 그들이 겪은 모든 것들을 진솔하게 털어놨습니다. 저는 그 책들을 입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유네스코에도 제출돼 있습니다. 여기에 수록된 내용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광주의 모든 운동권들은 경찰에 잡혀가 고문받기 시작했다. 잡히지 않은 운동권 지도자들은 모두 도망가 깊이 잠적했다. 정동년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잡혀가 고문을 받았지만, 전남대 운동권 최고 지도자라는 윤한봉과 박관현은 ”항쟁“ 기간 내내 도망가 있었다. 평시 운동권에 얼씬거렸던 광주의 지식인들, 교수들, 학생들도 항쟁기간 내내 도망가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5월 18일에는 물론 항쟁기간 내내 광주시내에는 학생들이 나오지 않았다. 지각 있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은 다 시내에 나오지 않았다. 시내에 나온 사람들은 개념 없는 10대 소년들과 양아치 등 사회불만세력들이었다. 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은 계엄군이 광주를 포기하고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호기심 등의 이유로 이리 저리 살피면서 도청에 들어왔다가 5월 26일 낮과 밤에 극히 소수의 강경파 건달들에 줄을 잘못 섰던 대가를 치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개념 없는 남남들로 구성되었으며 거의가 다 구두공 화물차운전수 등 20대의 사회불만 계층들이었다. 꼬마 운동권 청년들은 시위 기간에 어쩌다 아지트에서 만나 의논을 하다가도 조금만 위험한 징조만 나타나면 각자도생 하자며 뿔뿔이 흩어져 도망다녔다. 예비군 출신은 거의 없었고, 거의가 다 총기를 잘 다루지 못했다.”

위와 같은 광주 분위기는 대한민국 전체지역의 평균 분위기였으며, 지금 우리가 생각해 보아도 충분히 납득되는 그런 분위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살어름판 분위기 속에서 광주에서는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아래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의 광주상황

1) 5월 18일(일) 전남대에는 전라도 출신이 대부분인 금마주둔의 7공수여단 제33대대가 파견돼 있었고, 공수대원 20명이 전남대 정문 앞에 일렬로 서서 휴교령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오전 9:30분경 대학생으로 보이는 250여명의 시위대가 나타나 공수대원들에 도서관에 가겠다며 시비를 걸었고, “안 된다 귀가하라”하자 책가방에 숨겨온 각이 진 돌멩이를 던져 여러 명의 공수대원들에 피를 흘리게 한 후, 공수대원들이 추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금남로 번화가로 도망을 갔습니다. 거침없이 수십 개의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70%를 몰살시키려 왔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트렸습니다. 사람들은 불이나면 조건반사적으로 몰려듭니다. 이것이 5.18의 첫 장면이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광주의 모든 학생들,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이 쥐죽은 듯 숨어 있었던 그 무서운 순간, 혹시라도 경찰이 오해하여 자기를 잡아갈까 꼭꼭 숨어 있었던 그 시각에 어떻게 광주학생들이 250명씩이나 집단을 만들어 계엄군을 찾아가 감히 돌을 던지고 파출소들에 불을 질러 군중을 모을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한국군의 한계를 정확하게 꿰뚫고 그에 대해 오랜 기간 훈련해온 배포 큰 특수집단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2) 이후 이들이 사용한 다양한 공격기법들이 선을 보였습니다. 부나비들에 환각제를 먹이거나, 술을 먹인 후 대형차를 몰고 계엄군 집합대열을 향해 고속의 지그재그 궤적을 그리게 하면서 돌진시키는 방법, 악세레다를 고정시켜놓고 계엄군을 향해 달리게 하다가 뛰어내리게 하는 방법, 대형 변압기를 폭파시켜 MBC 건물을 불태운 방법,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계엄군을 향해 굴리게 하는 방법, 광주의 어수룩한 10대와 20대를 차에 태워 이곳 저곳에 내려놓고, 서로가 서로를 계엄군으로 오해케 하여 사격하게 하는 방법 등 매우 대양한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계엄군은 5월 19일 아침부터 수세에 몰려 그야말로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공포감에 떨며 매타작을 당하면서, 실탄을 달라, 철수를 시켜달라 지휘관에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 드디어 5월 21일이 되었습니다. 이날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계엄군이 시위대에 집단발포를 해서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다쳤다고 묘사했던 바로 그날입니다. “이날 그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느냐, 전두환이 내렸을 것이다” 하면서 한껏 의혹을 부풀렸던 바로 그날입니다. 이날 아침 08:00시 정각에 300명으로 구성된 학생집단이 광주 톨게이트에 20사단 차량부대가 통과할 것이라는 극비 중 극비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해 있다가 08시에 기습공격을 가했습니다. 부대는 혼비백산 흩어졌습니다. 감히 어느 나라 학생들이 300여명의 세력을 형성하여 감히 부대이동정보를 알아가지고 매복까지 하면서 기습 공격을 감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 300여명의 학생단은 사단장 지프차 1호를 포함해 무전기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해가지고 곧장 군용차량을 생산하는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아시아자동자 직원들은 그 어마어마한 지휘용 지프차들과 사단장용 1호차를 보자마자 대세를 짐작하고는 순순히 그들의 요구대로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의 열쇠를 내주었습니다.

이때 또 다른 300여명의 학생단이 5대의 대형 버스를 몰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합세했습니다. 이들 600명은 전남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있는 44개의 무기고를 향해 예행연습을 한 듯한 매너로 곧장 달려가서 무기고를 솜씨 있는 방법으로 털었습니다. 2개 연대 분이었습니다. 갈때는 쏜살같이 무기고를 향해 운전하더니 무기를 싣고 광주로 돌아올 때는 여러 차례 길을 물었습니다. 유동3거리에 와 놓고도 사람들에 유동3거리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나머지 트럭과 장갑차 4대는 도청 근방에 집결하여 계엄군과 대치하였습니다. 가장 빨리 털린 무기고는 낮 12시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털린 나주경찰서 무기고였습니다. 가장 늦게 털린 무기고들은 광주에서 멀리 있는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털렸는데 그 시각이 오후 4시였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북한이 발간한 대남공작 책자들에도 있고, 1995년 7월 18일에 발간된 검찰최종보고서와 안기부 자료에도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당시 정보당국은 정보분석을 세밀하게 하지 않고, 원자료 상태로만 남겨놓았습니다.

가장 괄목할만한 상황은 이들 600명의 학생부대가 8톤 분량의 TNT를 전남도청 지하실에 옮겨놓고 순식간에 포탄으로 조립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조립 및 해체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당시 전라도 계엄분소 전체에 오직 한 사람 5급문관인 배승일 뿐이었습니다. 현역 군인들은 장교든 병사든 이런 능력 없습니다.

광주사태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5월 21일,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이날 오후 1시경, 계엄군이 집단 발포를 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구전되어 국민 모두가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당시 광주에는 장갑차를 몰만한 예비군도 없었고, 총기를 만질 줄 아는 예비군도 시위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비군들은 5.18 증언자들의 말 그대로 대학생들보다 더 사리분별력이 많은 사람들이기에 나올 리도 없었습니다. 오후 1시 경, 한 대의 장갑차가, 도청 앞에 집결해 있는 공수부대원 수백 명을 향해 지그재그로 돌진하여 1명의 병사를 현장에서 깔아죽이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그렇게 질주하기를 네 차례나 반복 했습니다. 공수부대 병사들은 31사단 소위가 헬기로 철수하면서 공수대원들이 실탄 없이 고생한다며 넘겨준 수백발의 실탄을 가지고, 질주해오는 장갑차를 향해 발사였습니다.

저는 이날 광주 일원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분포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날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민간 사망자는 모두 61명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28명은 도청과는 거리가 먼 다른 곳들에서 사망했고, 33명만이 도청 앞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러면 그 28명은 누가 죽였겠습니까? 도청 앞 사망자 33명에 대해 더 살펴보았습니다. 33명 중 20명은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도청 앞에서는 계엄군과 시민이 수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대치해 있었습니다. 맞아 죽고 찔려죽은 사람은 공수대원과 상관없이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들 20명은 또 누가 죽인 것입니까? 한발 더 나아가 살펴보았습니다. 매우 놀랍게도 도청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13명 모두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들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한마디로 5월 21일에 칼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고 총에 의해 사망한 61명 모두가 계엄군과는 무관한 사망이었던 것입니다.

광주사태 10일 동안 사망한 민간인은 166명입니다. 차량사고로 죽은 사람, 찔려 죽은 사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으깨진 사람, 목이 잘린 사람, 불에 그을린 사람, 총에 맞은 사람 등입니다. 5월 21일에 사망한 사람들에서 보았듯이 이들 주검들의 대부분은 공수부대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66명의 사망자 중 총상 사망자가 116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제가 모두 여러 차례 세어보니 그 중 69%에 해당하는 80명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들에 의해 사망했고, 36명이 계엄군이 소지한 M16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1982년 육군본부가 발행한 “계엄사” 141쪽 상단에는 총상사망자 수가 117명, 이중 75%인 88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들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앞서 저는 5월 21일 통계를 제시해 드렸습니다. 도청과는 거리가 먼 곳들에서 사망한 28명은 누가 죽인 것이며, 도청 앞에서 칼과 몽둥이에 의해 사망한 20명은 누가 죽인 것이며, 도청 앞에서 무기고 총에 의해 사살된 13명은 누가 죽인 것이겠습니까? 과연 광주시민이 80명이라는 광주시민을 쏘았겠습니까? 광주시민이 쏘았다면 5.18은 자작극이 되는 것이며 광주는 시민이 시민을 등 뒤에서 쏜 패륜의 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칼에 찔리고 으깨지고 머리를 잘라놓은 시체는 계엄군의 소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이 잔인함의 모두가 광주시민들의 소행이라는 말입니까? 

도청 앞에서의 특수작전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으면, 그 막강하다는 계엄군이 도시를 포기하고 오후 5시부터 시 외곽으로 도망을 쳤겠습니까? 도망가는 길에도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전남대에 주둔했던 3공수 여단 4개 대대는 20일 밤부터 전멸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약 20시간 동안 밀리고 밀리는 공방전을 거듭하다가 21일 오후 4시부터 시 외곽으로 도주하였습니다. 10:1 이상의 중과부적 상태에서 큰 피해 없이 도망친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전개된 위와 같은 고도의 게릴라전을 광주의 대학생이, 광주의 껌팔이 구두닦이 계급들이 나서서 주도했다고 믿을 국민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작전이 광주인들에 의해 전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21일 계엄군이 철수하고, 동시에 북한군 600명이 잠수해 있었던, 5월 22일에 더욱 확연하게 재확인 됩니다.

시민군 장갑차

아시아자동자공장에서 장갑차와 트럭을 몰고 나가는 모습
이마의 수건은 자기들끼리 통하는 피아식별 비밀표시



폭도들이 탈취한 20사 지프차

몽둥이로 이동 중인 20사단 사령부를 기습공격하여 지프차들을 몰고 가는 모습




공수부대원 복장의 시민군

20사단에서 빼앗은 지프차 행렬


시민군 총과 실탄

군용트럭 도어 부분에 있는 4명이 몽둥이와 카빈총 소지




시민군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장갑, 복장, 눈매, 능숙해 보이는 자세에 주목



전경 복장으로 위장한 시민군

전경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전경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전경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지프차에서 지시를 하는 듯,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모습


                              

                    5월 22일부터 5월 25일까지의 광주상황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이 광주시를 떠나자 광주시가는 갑자기 조용해 졌습니다. 수백-수천 명씩 모여가지고 수많은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했던 건물소각, 차량소각, 국가자산 소각 행위가 사라지니 부나비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파괴된 광주를 보면서, 일부 광주 유지들이 5월 22일 도청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안 된다. 이 무서운 무기들을 반납하고 계엄군과 관련자 처벌에 대한 협상을 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됐습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무기를 털어온 학생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학생들은 광주에 없었습니다. 광주시민이 민주화를 위해 무기를 털었다면 이렇게 쉽게 무기를 반납하자는 말이 나올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학생들을 애타게 찾자 겨우 나타난 학생이 22세의 전남대학 학생 김창길이었습니다. 교수들이 도청에 나왔지만, 그 교수들은 어떤 학생들이 그런 엄청난 작전을 수행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극히 소수의 광주의 유지들, 교수들이 수습대책위라는 것을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22세의 김창길이 YWCA 소속의 일부 사람들을 이끌고 무기회수에 나섰습니다. 전교사에 다니면서 체포된 자들과 무기를 맞바꾸는 일도 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참으로 큰일을 했습니다. 도청에 무기 상태로 조립돼 있는 다이너마이트 더미를 해체해야 광주시가 온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전교사에가서 이 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계엄분소장 소준열 장군은 유일한 기술자 배승일 문관을 25일과 26일에 걸쳐 파견하였고, 김창길은 온건파들과 함께 배문관의 생명을 보호해주었습니다.

무기를 손에 쥐어주면 광주시민들이 원수 같은 공수부대와 잘 싸울 것으로 알았던 600명, 무기를 수거하고 반납하는 모습을 보자 몸이 달았습니다. 복면을 하고, 무기를 들고, 차를 몰며, 날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들을 믿고 끝까지 항쟁하라고 독려하고 다닌 것입니다.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다시 솟구치게 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계엄군으로 오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도 광주시민들은 그들에 놀아나지 않았습니다. 무기회수가 지속되었습니다. 600명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은 교도소를 점령하여 그 속에 수용돼 있는 2,700여명과 180여명의 좌익수를 풀어 폭동의 맥을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총 6회에 걸쳐 교도소를 공격했습니다.

육군본부 정보보고에 의하면 당시 북한은 교도소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계속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교도소쟁탈전은 남북한 특전부대끼리 벌이는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호를 깊이 파고 있었던 공수부대와 장갑차 및 군용트럭을 타고 앞으로 전진하던 600명과의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아마 여기에서 600명중 상당수가 죽었을 것입니다. 북한군은 죽기 전에 각가지 방법으로 증거를 없앱니다. 그리고 남은 특수군은 5월 26일 밤과 27일 새벽에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1982년 3월 20일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95쪽에는 “5월 26일 600여명의 광주학생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600명”은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들에 공동으로 나타나는 암어입니다. 2013년 5월 15일 채널A에는 전 북한특수군 신분으로 광주에 투입되었던 가명 김명국이라는 탈북자가 그의 침투사실을 증언하였습니다.

여기까지가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빠져나가 있던 5월 22일부터 25일까 전개됐던 광주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기간 중 광주인들에 의한 민주화시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광주시민들에게는 오직 '역겨워 보이는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때에도 광주 학생들은 은신 칩거 중이었습니다. 온건한 생각을 가진 22세의 김창길이 주도하는 대로 무기반납 운동이 이루어졌다면 광주사태는 여기에서 평화적인 피날레를 장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25일 밤중에 돌연히 사태가 악화되었습니다.

부산항에 미국 항공모함이 왔는지에 대한 정보는 광주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해한 정보판단 역시 광주의 20대 젊은이들에는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런데 26세의 조선대생 김종배가 이 사실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듣고 열흘만 견디면 미국이 광주를 도와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 정보를 믿은 그는 결사항쟁을 생각해냈습니다. 당시 항공모함이 극비리에 부산에 오는 것은 맞는 정보였지만, 그 항공모함을 타고 오는 미군이 광주폭도를 도와주리라 생각한 것은 넌센스였습니다. 아마도 구군가로부터 잘못된 판단을 제공받았던 것 같습니다.


5.18 복면무장괴한




광주시민군의 인민군식 제식걸음


복면 무장단체의 특수장갑



                          

                     5월 26일과 27일 새벽까지 전개된 광주상황

25일 밤늦은 시각, 김종배, 화물차 운전사 박남선(26), 30세 회사원 정상용, 5.18의 상징인 30세 윤상원, 27세의 조선대 출신 허규정이 주축이 되어 김창길 등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축출시킨 후 수습위원회를 ‘항쟁본부’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결사항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들의 진술에 의하면 이들은 거의 서로가 생면부지의 처지로 도청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김종배가 항쟁본부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항쟁본부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이 그룹은 불과 80명 정도로 구성된 콩가루 집합체였으며, 주로 고교생과 막노동자들로 구성됐습니다. 이들만 아니었다면 광주 재진입작전은 없었을 것이며, 27일 새벽에 발생한 17명의 민간 사망자도 발생하지 안았을 것입니다. 고교생들은 대부분 죽었고, 항쟁본부 간부들은 항복을 표시하여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신흥귀족으로 등극해 있는 것입니다. 5월 27일 05:23분, 일부 개념 없던 광주 젊은이들의 마지막 경거망동으로 인해 광주사태는 비극의 종말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계엄사는 바로 이 마지막 5월 26일에 참여했던 개념 없던 부나비들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보시면 광주폭동 마지막 날에 줄을 잘못 서서 중죄를 받은 사람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잘 드러날 것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5명이며 이들은 정동년(37, 건달에 가까운 복학생), 배용수(34,운전수), 박노정(28,인쇄업), 박남선(26, 화물차 운전수), 김종배(26,학생)입니다.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윤석루(20,구두공) 허규정(27,학생) 정상용(30,회사원) 하영열(31,공원) 윤재근(28,공원) 서만석(36,상업) 홍남순(67,변호사)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5월 23일에서 25일 사이에 도청으로 처음 들어간 사람들이며 5월 18일부터 5월 22일까지의 폭동에는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계엄사는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광주시를 파괴하고 광주 시민을 살해하고, 광주의 부나비들로 하여금 계엄군을 살해케 한 고도의 게릴라작전 수행자들에 대해서는 그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광주소요 10일간에 전개됐던 상황을 요약한 것입니다.


                               10일간 상황에 대한 결론

저는 2004년부터 김영삼 시대에 전두환 등을 재판한 수사기록 및 재판서류 18만쪽을 획득해서 연구했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5.18지식은 모두 가짜였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국민이 알고 있는 지식은 황석영 이름으로 1985년에 발간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 내용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책이 북한이 작성해 황석영 이름으로 발간한 책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지금 국민이 알고 계시는 지식은 모두 북한이 선전한 내용 그대로라는 사실을 국민께 보고합니다. 그리고 1997년 4월 17일의 대법원 판결이 매우 잘못된 판결일 뿐만 아니라 북한 인민공화국 판사의 입장에서 내린 판결이라는 것도 밝혀냈습니다. 이 내용들은 1,720 쪽에 달하는 4권의 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에 수록되어 2008년에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이 발간되자마자 5.18단체들이 또 다시 소송을 걸었습니다. 2002년에 이어 두 번째 소송이었습니다. 북한특수군이 민주화운동에 개입됐다고 표현한 것은 신성한 민주화운동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입니다. 두번째의 재판 도중 저는 김일성이 1989년부터 황석영과 윤이상을 불러 미국과 한국을 모략하기 위해 제작한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찾아냈습니다. 2010년 1월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 북한영화의 주제곡이었음도 처음 발견하였습니다. 대남-대미 모략영화의 주제곡을 어찌 한국정부가 5.18기념곡으로 지정할 수 있겠습니까?

북한이 제작한 대남공작 역사책, 통일부자료, 탈북자의 수기, 사진, 일본자료 등을 망라하여 저는 “5.18광주에 북한 특수군 600명이 왔다”는 결론을 도출하였고, 이 새로운 결론과 자료들이 법정에 제출되어 저는 소송 5년만인 2012년 12월 27일부로 1,2,3심을 모두 무죄로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5.18광주에는 두 개의 실체 즉 광주시위대와 북한특수군 600명이 따로 존재하고 북한특수군이 나름의 모략작전을 수행하고 갔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저는 5.18기념재단에서 모은 증언내용들과 광주가 유네스코에 제출한 자료들을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2014년 9월 1일, 전혀 새롭고 가공할 결론을 도출해 냈습니다. 5.18광주폭동의 주도세력은 북한특수군 600명이고, 광주가 형성한 시위대는 일체 존재하지 않았으며, 600명이 벌인 작전에 참가했던 광주인들은 분별없고 개념 없는 하층 뜨내기 노동자, 광주에서 천대받으면서 세상 한번 뒤집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안고 사는 부나비들이었다는 가공할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 따라서 광주에는 5월 18일 이후 민주화운동이 전혀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결과입니까?

5.18측 사람들은 시위대의 중심에 윤상원이 있었다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바치는 행사까지 치렀습니다. 그러나 윤상원은 시위대를 구성한 적이 없습니다. 5월 21일 총이 쏟아져 나오는 그 순간까지 그는 녹두서점에 후배와 함께 숨어, 보초서는 계엄군의 무기를 빼앗을 상상을 하다가 현실성이 없자, 후배를 시켜 돌멩이 대신에 철근조각과 나사뭉치를 공격도구로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5.18에 대한 두 개의 판결은 다 파기돼야 할 대상입니다

                                  <1981년의 5.18재판>

1981년 4월 1일짜 대법원 판결의 핵심입니다. “정동년이 김대중에서 500만원 받아 300만원은 박관현에게, 200만원은 윤한봉에게 주어 학생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정동년은 5월 17일 밤에 잡혀 갔고, 박관현과 윤한봉은 도망가 있었습니다. 광주의 운동권, 대학생, 교수 등 거의 모두가 시위기간 내내 잠적해 있었습니다. 학생 시위대를 구성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1심 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당한 사람들은 모두 12명으로 이들은 거의 다 광주에서 천대받던 사회불만세력들이었고,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빠지면서 전남도청에 처음으로 들어와 5월 26일 새벽부터 25시간 동안 객기를 부리다 계엄군의 재진입작전을 초래한 부나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정동년 등 운동권과 아무런 관계가 없던 뜨내기 노동자들이었고, 그들은 거의 다 서로 일면식이 없는 콩가루들이었습니다.

1981년의 재판부는 이동 중인 20사단을 공격한 300명 조직의 실체,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턴 600명 조직의 실체, 경찰만 보아도 가슴이 뛰었던 바로 그 순간에 전남대 앞에 서 있는 계엄군에게 감히 돌멩이 공격을 감행하고, 곧바로 중심가로 달려가 파출소들을 소각하여 부나비들을 끌어들인 250명의 실체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1981년의 재판은 사리에 맞지도 않았습니다.

                                  <1997년의 판결>

1997년 5.18판결문의 핵심입니다. “광주시위대는 신군부로부터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준-헌법기관이다. 시위가 전국으로 속히 확산됐어야 했는데 신군부가 무력으로 조기에 진압한 행위는 분명한 내란행위다.”

그러나 광주에는 광주인들이 독자적으로 구성한 시위대가 없었습니다. 광주에서 유일했던 시위대는 북한특수군 600여 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이들이 동원했거나 이들에 부화뇌동한 철없는 10대와 하층계급의 노동자, 양아치, 무직의 청년들이었습니다. 1997년의 판결은 북한특수군 600명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준 세기의 코미디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숫자 600명이 어떤 자료에서 나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한국 정부 기록입니다.

                            <600명에 대한 한국정부측 자료>

1) 1995년 8월 17일짜, 대한민국 검찰이 작성한 ‘광주사건 관련 최종조사보고서‘ 92-93쪽에 있는 내용입니다.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시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지프차 등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 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1명이 실종되고,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시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300여 명이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3)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2) 1985.5.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의 제40-41쪽에 있는 내용입니다,

“5월 18일 14:25, 학생 유동3거리에 학생 300명, 광주공원의 학생 300명이 출현, 15:50, 학생 600여명 도청방향으로 이동하며 시위, 학생 300명은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민주인사 석방하라“는 구호 외치며 동산파출소에 투석 파괴, 또 다른 300명은 16:40에 지산파출소 파괴하며 시위”

                               <600명에 대한 북한당국측 자료>

1)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85.5.16.에 발간한 “광주의 분노” 35-36쪽에 있는 글입니다.

“폭동군중은 괴뢰들의 군용차량공장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중들은 로획한 이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 특히 600여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여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내였다”.

이리하여 무기탈취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4시 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빙총 2,240정, ≪엠-1≫보총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만 6,400여발이였고 장갑차가 4대, 군용차량이 400여대에 달하였으며 수백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개의 뢰관들도 획득하였다. 무기획득을 위한 봉기군중들의 투쟁은 이날 오후부터 광주의 주변지역에로 확대되였다.”

2)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1982년 3월 20일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95쪽에 있는 글입니다.

“5월 26일 600여명의 광주학생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

                             <600명에 대한 광주현장의 자료>

1) 광주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의 검찰 신문조서

문: 그전에도 연·고대생 300여 명이 광주시내에 도착했다고 했는데, 어떤가요.

답: 위와 같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500여 명이 광주시내에 나타나던 날 10시45분에 저는 도청 앞에서 취재하고 있었는데, 항쟁본부에서 스피커를 통하여 연·고대생이 광주에 도착했다고 하며 위와 같은 방법으로 환영행사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 그 다음날인 5월23일 오후경 복면부대가 나타나 시위를 더욱 과격화시키고 확산시켰다고 했는데,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위하던가요.

답: 저는 당시에 도청 앞 및 금남로 일대에서 복면부대들이 하는 시위광경을 지켜보았는데, 그들은 수십 대의 버스와 트럭 등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몽둥이를 각자 하나씩 들고 차량을 치면서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계엄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를 통하여 주위에 있는 기존의 시위대들로 하여금 시위를 과격하게 하도록 유도했으며, 그때부터 시위는 더욱 가열되고 확산되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시위대학생 등이 총기를 반납하고 대화로써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며 총기를 반납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우리는 끝까지 투쟁을 하여야 한다』고 외치면서 시위를 과열시켰습니다.

문: 복면부대들이 언제까지 시위를 주도했나요.

답: 그들은 5월 26일, 재진입작전이 임박하자 어디론지 전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2) 모랑봉의 꽃으로 불리던 전옥주(본명 전춘심)의 증언

'5.18 연고대생의 실체' 민원에 대한 광주시 답변

민원신청민원제목- 5.18민주화운동 당시 연고대생 600명의 실체와 활동

민원내용: 1980년도 당시 광주에서 발생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은 당시 5.18단체측이 널리 홍보한 연고대생 600명의 시위 가담에 관한 사실입니다. 이들의 실체여부와 이들의 당시 활동상황에 대하여 정부측의 자세한 해명과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처리기관- 광주광역시 인권담당관

담당자(연락처)

고경미 (613-2081)

처리결과(답변내용)

“2. 귀하께서 문의하신 사항에 대하여 알아본 결과 80년 항쟁일지에 ‘스피커를 통해 연?고대생이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발표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직접 가두방송을 한 전옥주씨는 그 당시 전달받은 쪽지를 읽었을 뿐 사실여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증언하고 있고, 3. 5?18민주화운동에 연?고대생 참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였으나 현재까지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끝.”

3) 5.18기념재단의 공식 기록

5.18기념재단의 홈페이지에 “광주사태 타임라인”이 게시돼 있습니다, 광주사태 시간표인 것입니다. 여기에 기재된 일지 중 5월 22일, 15:08분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울서 대학생 5백여명이 광주도착, 환영식 거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가 북한특수군 600명이인터넷공간에서 뜨거운 관심을 끌자 2013년 7월 14일경, 5.18기념재단이 기록을 슬그머니 바꾸어 놓았습니다. “시위도중 연행된 시민 학생 등 800여명 석방되어 도청 도착”이라고 변조시켜 놓았습니다. 5월 21일 도청을 접수한 세력이 바로 이 연고대생 600명이었으며, 광주는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 5월 22일, 이들 북한특수군을 서울서 온 대학생 또는 연고대생으로 부르며 환영식을 거행해 주었습니다. 당시의 계엄 하에 연고대생 600명이 구성되어 광주로 온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며, 그후 이들 연고대생은 그 엄청난 보상금을 지급했는데도 불구하고 단 1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 론

이 600명의 북한특수군이 기획-연출-기록을 담당한 역사가 바로 5.18역사입니다. 지난 해 5월, 그동안 보관만 해오던 황장엽과 김덕홍의 증언이 전 월간조선 편집장에 의해 방송되고 출판되었습니다. “5.18은 북한이 일으킨 후 남한에 뒤집어씌운 것이고, 광주 봉기가 끝난 후 북한의 대남사업부 간부들이 무더기로 훈장을 받고 술파티를 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북한의 최고인 것들에 “5.18”이라는 호칭을 명예로 수여한다는 사실을 수많은 탈북자들이 증언록에서 증언하였습니다. 5.18 글자가 붙어 있는 1만 톤짜리 프레스에 “5.18청년호”라는 글이 새겨진 사진도 입수돼 있고,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이라는 글씨가 있는 철도역 사진도 입수하였습니다. “5.18영화연구소”라는 호칭이 있다는 시실을 우리나라 신문이 보도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탈북자들에 의하면 전차에도 ‘5.18전진호’ '5.18소년호 땅크’, 우수한 생산직장에도 '영예의 5.18청년직장’ '5.18식품가공공장’ ‘5.18고치청년작업반’ ‘5.18청년제철소 등이 있으며 이런 5.18호칭은 북한사회에 즐비하다고 합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북한에서는 전 지역에 걸쳐 여러 날 동안 5.18을 기념하고 추념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린다는 사실을 탈북자들의 증언과 통일부 주간정세보고서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5.18이 순전히 한국인들에 의한 민주화운동이었다면 어째서 북한이 매년 당-정 최고위급 간부들의 참석 하에 기념대회를 전 지역에 걸쳐 여러 날 동안 거행하겠습니까? 이를 증명이나 하려는 듯, 북한이 발행한 대남공작 역사책들에는 5.18이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상 최고수준의 작품이라고 자랑되어 있습니다.

5.18은 광주사람들이 일으킨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한이 축차적으로 보낸 600명의 특수군으로 하여금 한국정부를 전복하고 남한에 친북정권을 세우기 위해 기획-연출-기록한 대규모 게릴라전이었습니다. 광주의 운동권이 모두 잡혀갔거나 멀리 도망가 있었고, 교수, 대학생들 모두가 벌벌 떨며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5.18핵심간부들이 진솔하게 증언하였는데, 어떻게 600여명이 선보인 신출귀몰하던 특수작전을,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특수작전을, 광주학생들이 주도했다는 말입니까?

국민 여러분, 우리는 북한에 철저히 놀아났고, 5.18단체들에 철저히 속아왔습니다. 5.18반역세력이 순국선열을 훨씬 능가하는 유공자 대우를 받으며 이 나라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북한과 광주 세력에 의한 대국민 사기였습니다. 이런 왜곡이 성공함에 따라 한국국민은 그야말로 바지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부로 하여금 이 나라에서 획책된 모든 반역의 역사를 애국의 역사, 민주화의 역사로 인정하는 도장을 찍게 했습니다. 반역세력이 애국세력으로 등극하고 기득권세력이 되어, 사회 좌경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민주화역사의 성지로 군림해온 5.18역사가 진정 민주화 역사인지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지난 12년 동안 광주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그리고 또 다른 재판을 5년간 받으면서 연구를 해왔습니다. 누구라도 12년 동안 하나의 역사를 끈질기게 연구했다면 그 결과는 일단 국민적 관심을 받아야만 정상적인 국가 사회일 것입니다.

저는 1966년 육사를 졸업하고 월남전에 참전하여 44개월 동안 공산게릴라와 전투를 하였기에 게릴라 특수전을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군의 대위-소령 시절에는 미국 응용수학의 발상지이자 지금도 세계 응용수학의 첨단에 서 있는 미해군대학원에서 응용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논문에는 2개의 수학공식과 6개의 수학정리를 담아 지금까지도 그 학교에서는 전설의 인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군에서는 정보 특기로 근무했고, 국정원에서는 북한연구를 하였으며, 국방연구원에서는 군의 작전과 군수 예산 분야를 8년 동안 연구했고, 대령으로 예편한 후 미해군대학원 교수를 3년 동안 하고 돌아온 사람입니다. 이런 자격과 능력으로 12년 동안 5.18을 분석한 결과 5.18을 재판한 2개의 판결문은 다 휴지화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연구한 이 결과가 공론의 장에서 토의되고 결판되어 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9.7.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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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정름 ip1 2014-09-09 18:15:18
    많이 퍼 날라주세요.
    저는 조갑제 닷컴에도 글을 올릴 수 없고 일베에도 글을 올릴 수 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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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정름 ip1 2014-09-09 18:22:48
    자유북한방송은 30KB 초과라면서 글을 실어줄 수 없다고 합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그런데 ip2 2014-09-09 19:31:09
    당시 기자 신분으로 광주에 있었던 조갑제씨는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이며 5.18은 반공 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조갑제씨는 보수진영에서 많은 신뢰를 받고있으며 팔로워도 많습니다.
    5.18에 대한 조갑제씨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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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답하네 ip3 2014-09-09 21:14:29
    아직도 북한군 타령입니까? 얼토당토 않은 것에 현혹되지 마세요..
    직접 들었다는 일부 몇명의 탈북자분들의 주장도 웃기고
    정말 북한군이 관여했다면 아마도 전두환이나 노태우 대통령 시절 가만 있었겠나요?

    탈북자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지만원이란 분은 알고보면 비상식적 또라이 같을때가 많은 사람입니다.

    당시 광주에서 현장을 직접 취재했던 조갑제 기자가 말하는게 거의 사실적 팩트라 보면 되요
    사실 발포 명령자도 없어요..이것도 팩트고..

    공수부대를 몰라보고 자존심 상하게 초기에 군인들을 강하게 자극한 시민 학생들도 문제였고,,초장에 잡을려고 강하게 진압했던 군인들도 문제였죠...며칠 지나자 강하게 진압했던 특전사 군인들은 오히려 후회했죠..그냥 굴복할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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