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은 한국가톨릭교회에게 상처인가 자극인가? (임광규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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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광야의 소리의 홈페이지 http://www.aware.co.kr 에 있는 글임. ------------------------------------------ 해방신학은 한국가톨릭교회에게 상처인가 자극인가? 임광규 베네딕도 (신관동본당) 한국컨트롤데이타주식회사, 원풍모방주식회사등 회사의 노사분규에 도시산업선교회의 목사들이 노동자들을 지도하고 있고, 동일방직주식회사등 회사의 노사분규에 가톨릭노동청년회 (지오세)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75년 무렵이었습니다. 이때에 한국의 젊은 가톨릭 사제들 중에 해방신학의 영성을 열심히 논의하는 분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1976년경 어느 신학교의 교수인 사제는 해방신학의 영성을 발표하면서, 자기주장이 아니지만 체 게바라의 죽은 모습이 예수님과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1976년 어느 날 법조 울뜨레야(변호사 등 법률인들의 모임)의 강의부탁을 받은 필자가 G. 구티에레즈 신부의 해방신학 책을 읽은 소감과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의 문제점을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학자가 아니고,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의 입장에서 해방신학의 이상한 논리를 지적 하고 저 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법관을 지낸 선배 변호사가 그 자리에서 신학연구경력이 없는 평신도의 처지에서 해방신학을 비평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지도신부도 해방신학문제는 논의를 보류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무렵 상당수의 젊은 사제들 중 해방신학을 좋게 보는 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1976년경에 어느 주교님이 G.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 번역책을 교구신부님에게 보라고 자필서명을 하여 보내 주신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이 책을 그때 번역한 사람이 현재 한국의 노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교황청대사로 로마에 가 있습니다. 금년(2006년)에 부산의 송 신부님은 노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과거의 폭동이나 진압 등의 조사를 하는 과거사정리위원회라는 국가권한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지위에 취임하였습니다. 송 신부님의 이런 지위의 취임은 교회법(1983.1.25제정) 제285조 제3항의 금지규정에 위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데도 이를 개의치 않는 것 같다거나, 관할 주교님이 이를 사전 승인하지 않으셨으면 통제하지 않는 것인데, 이런 현상은 해방신학의 영향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송 신부님은 2005년 4월 22일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서거한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하여 “교황님도 사람들의 각도에 따라 공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중심에 남미의 독재국 등 핍박에 항거하는 민주화인사들과 민중들의 고통에 구체적으로 응답하기보다 ‘평화’라는 구호만을 되뇌었다는 비판이라든지, 가톨릭을 현실에 맞게 바꾸기 위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퇴색시켜 가톨릭을 보수화했다는 비판이 그것입니다.”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이 말은 반평화(反平和) 즉 폭력도 사회정의를 위해서 때로는 필요한데 요한 바오로 2세가 오로지 평화 즉 사랑의 사도여서 불만이라는 뜻이 될 수가 있습니다. 송 신부님은 같은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에서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기득권자들이 계속 일반사람들을 묶어 놓고 자기들은 기득권을 누리려는 자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결국 상류층은 영구히 대대손손 기득권을 이어 갑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자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묶어 놓고 있다 (압박하고 있다)는 계급논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이 바로 해방신학의 영향으로 보이는 점입니다. 2005년 12월 서울주보에 발표된 어느 주교님의 담화문 중에 “계층 간의 경제적 정서적인 격차를 점점 악화시키는 자본주의의 냉엄한 현실에서 각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모습” 이라든가, “우리 안에 선사받은 선한 모습을 가리는 개인적, 구조적인 악 앞에서” 라든가 하는 문구들이 있습니다. 아마 주교님이 어느 보좌하는 이에게 맡겨서 그 초안을 대충 훌터 보시느라고 이런 문구가 무슨 뜻인가에 관하여 주의를 두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계층 간의 격차를 점점 악화시키는 자본주의의 냉엄한 현실에 비추어, 자본주의가 더 나은 체제에 비하여 마땅한 체재가 아니라는 견해처럼 보인다면 적절한 표현인지 의문입니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극단적인 반응이 무엇을 염두에 둔 표현인지 보통의 신자들에게는 명백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또 구조적인 악이란 해방신학들이 아주 자주 쓰는 용어입니다. 현존하는 사회체제를 인간이 그 속에서 살기에 불의한 것이라고 보는 뜻입니다. 해방신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경제적, 사회적, 법적측면에서 부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해방이란 인간의 정신을 해방시킨다거나 빈곤에서 자유롭게 한다거나 하는 좋은 선의의 문구이므로 그런 각도에서 신학을 연구할 수도 있으며 또 그렇게 자기입장을 해명하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광범한 신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1972년에 G. 구티에레스 신부가 쓴 해방신학에서 주장하고 있고 해석하는 논리, C. 토레스 신부가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혁명전쟁에 참여하여 게릴라로 싸우다가 1966년에 컬럼비아 정부군에게 사살되기까지 한 것을 훌륭하다고 보는 그런 해방신학으로 좁혀서 논의하려고 합니다. 해방신학은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을 상당히 긍정하는 논리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가톨릭 교리인데도, 해방신학은 그리스도교와 성서를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분석방법으로 해석하는 논리입니다. 해방신학자들은 사회과학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학을 내세워 방패를 삼다가도, 정통신학자들과의 논쟁에서는 자기들이 과학적 현실인식에 터 잡아서 논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중적인 논리구조는 계속 버티어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해방신학의 논리는, 현존 사회들을 해석함에 있어, 우선 이 사회를 가진 사람들, 기득권층, 지배층을 한 쪽으로 하고, 가난한 사람들, 기득권 없는 사람들, 피지배층을 다른 한 쪽으로 대립시켜 놓고,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과 비참은 가진 사람들, 기득권층, 지배층의 착취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가진 사람들의 경제행동은 구조적인 사회악의 틀 속에서 돌아가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계층이라는 논리전개를 합니다. 그렇다면 힘으로 이 사회들을 뒤 집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수렁의 논리일 뿐입니다. 해방신학자들에게는, 고역을 치루고 열심히 일하며 패가망신의 위험을 무릅쓰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제조행위와 서비스행위로 소비자를 만족시켜 주는 대가로 재산과 금전을 축적하는 과정도 좋게 보지 않는 것이 논리적이 됩니다. 잘 하는 사람에게 박수를 치고 보상을 해 주는, 잘하기 경쟁의 사회라야 풍요로운 사회로 되어 온 경제역사의 반복되는 교훈에 무지(無知)합니다. 소비자를 만족시켜 주는 사람, 잘 하는 사람을 구조악에 편승하는 자들로 간주하여 혁명의 대상으로 삼고, 게으르고 저축하지 아니하여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자기책임이 아니라 구조악 때문이며 오히려 미래의 사회혁명의 주체라고 칭찬합니다. 해방신학은 용어 사용은 때로는 좀 다른 점이 있어도 주로 마르크스주의의 분석방법을 빌려 쓰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대로 살아 보고서도, 그 사회가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기적일 것입니다. 1989년에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이 붕괴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새삼 빈곤의 논리를 깨닫게 될 필요가 사실은 없었습니다. 경제의 돌아가는 이치를 들여다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간파할 수 있는 인생의 초보적 지혜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해방신학이나 마르크시즘 같은 좌익논리에 매료되는가요? 해방신학의 인기가 꽤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이유를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으르거나, 저축하지 않고 낭비하거나, 생산 활동에 다른 이와 협력하기를 좋아 하지 않거나 하는 사람에게, 당신 탓이요 라면서, 빈곤의 결과 책임을 냉정하게 돌아가게 하는 자본주의를 구조적인 악이라고 몰아 부치는 논리만큼, 게으른 분들, 낭비하는 분들, 협력 안 좋아하는 분들에게 더 구원의 소식이 될 만한 논리가 어데 있겠습니까? 게다가 인간이란 질투의 철학에는 눈이 어두워지는 카인의 후예가 아닙니까? 가난한 이들과 생활능력이 약한 분들을 사랑하거나 돌보는 것은 부유한 사람들과 유능한 사람들을 증오하거나 파괴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성서를 보거나, 심리학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느 쪽에서 보아도 다릅니다. 체재로서의 사회주의 내지 혁명적 해결책은 철저한 실패였습니다. 자유경제 내지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와 대비해 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지주들이나 고용자들의 불의에 대항하는 보호가 자유경제체재안의 법치주의아래에서 점차적으로 그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역사적인 추세는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 탓으로 나이 들어서 고생하는 사람이든, 부모 때문에 장차가 걱정되는 아기이든, 현재 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먹고 입고 거처할 곳을 마련 못하는 불우한 이웃을 돌보아야 하는 사랑의 행위는 계급투쟁과는 차원을 전혀 달리하는 행위입니다. 고생과 위험부담 끝에 자수성가한 기업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재산이 주는 안락을 단념하고 재산을 불우한 사람들과 장애인들을 위하여 내 놓고 있습니까? 하늘에 보화를 쌓으려는 착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해방신학 등 좌파의 논리에 의하면 국가의 차원에서도 가난한 나라는 항상 주변부에 머물러 있어서, 미국과 같은 중심부의 선진국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종속이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무역과 미국 제도에 대한 반대논리가 나오는데, 한 마디로 미국 때문에 주변부 나라들이 가난해 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자가 옆에 있는 이웃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논리입니다. 대한민국이 고도성장을 하고 있을 무렵인 1970년대에, 해방신학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는 젊은 사제들이 자칭 경제전문가들을 앞세워 수도원을 찾아가 설득하여 수녀들에게 우리나라 경제가 망하고 있다고 해설하던게 그 논리였습니다. 2002년 가을, 미군 장갑차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두 소녀를 애도한다는 명분으로 서울 한 복판에서 벌어진 적의를 품은 촛불시위에 어느 수도회의 수녀들이 참가하기까지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해방신학은 이런 해설까지만 가고 그만 두는 이론이 아닙니다. 가진 사람들, 기득권층, 지배층이 가난한 사람들을 묶어 놓고 계속 착취하니까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회를 혁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황께서 사랑과 평화만을 역설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보는 사제들이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의하면, 인류역사의 미래에는 지배계급의 착취가 소멸되고 모든 가난한 사람들 즉 프롤레타리아가 필요에 따라서, 먹고 입고 거처할 곳을 부족함 없이 갖게 되는 종말론적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간판을 내세우는 유물사관이지만 과학적이라고는 도저히 부르기 어려울뿐더러 거꾸로 세속주의의 사이비종교인데도, 과학을 내세우는데 그 선동 선전의 묘미가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예언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혁명가들 즉 프롤레타리아의 전위가 이러한 미래를 앞 당겨야 할 사명을 담당하고 있다고, 그 투쟁을 강요하고 있고 선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혁명은 기존 사회체제를 폭력으로 뒤 집어 엎는 것을 뜻합니다. 혁명은 또 폭력으로 그 사회를 노예로 붙들어 두는 것을 뜻합니다. 혁명은 레닌, 스탈린, 모택동, 카스트로를 뜻합니다. 혁명해 보면 그런 지도자 밑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혁명을 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가진 사람들이나 부자들에게서 법치원칙에 의하지 않은 채 강제로 재산을 빼앗기 시작하는 것이며, 이 혁명의 강도행위를 반대하거나 불응하는 사람을 반혁명분자로 규정하여 그 자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혁명을 한다는 것은, 이에서 더 진보하여, 최고혁명지도자의 구상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는 종교, 언론, 교육, 직업, 이사 가거나 여행가는 것, 모여서 수군거리는 것을 금하는 것을 말합니다. 혁명을 한다는 것은 비밀경찰이나 이웃의 밀정을 깔아 놓아 가난한 사람을 포함한 모두를 감시 하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혁명을 한다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 입는 것을 거의 전부 배급소만을 통하여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 금지들 중 하나라도 제때에 큰 목소리로 찬성하지 못하면, 역시 반혁명분자로 분류되어 자기 몸에 무리한 작업에 배치되거나 영양실조로 제 명에 살지 못합니다. 이렇게 안하고서야, 어떻게, 각자 그 사연 많고 그 사정 많고 그 환경 많이 다르고 그 생각 많은 그 수많은 인민들로 하여금 혁명에 따라 오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해방신학을 좋아하는 사제나 신자들 치고 북한의 혁명가들을 공개적으로 비평하는 경우가 별로 없고, 한국을 북한과 같은 사회로 만들자고 일을 꾸미려는 사람을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을, 그들 나름의 자유와 인권의 명분을 내세워, 폐지하자는데 지지하지 않는 사제나 신자가 별로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해방신학자들이 신학자체에서는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가를 보십시다. 학문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향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견지에서 과연 어떤 논리이며, 과연 가톨릭신앙에 배치 안 되는 것인지, 따져 보는 것이 오히려 때 늦은 감이 있습니다. 해방신학의 간략한 역사를 보겠습입니다. 해방신학은 제2바티칸공의회 이후에 주로 가톨릭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끔 그리스도교사회주의의 하나라고 불려 졌는데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널리 영향을 미쳤습니다.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에서 1955년에 구성된 CELAM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진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좀 더 진보적으로 나가자고 주장하였습니다. 4년동안 준비한 끝에 CELAM 은 1968년의 컬럼비아 메델린회의를 계기로 교회기초공동체를 지지하고, G. 구티에레즈의 1972의 논문으로 시작된 해방신학을 공식으로 지지하게 됩니다. 바티칸에서는 CELAM 의 해방신학 지지를 못 마땅하게 여기고 교황 바오로 6세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의 공의회가 끝나자 이를 늦추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975년 8월 멕시코에서 ‘해방신학과 억압’을 주제로 한 신학대회에 700명이상이나 모였고, 1979년에 CELAM 의 푸에불라 회의에서 일부 진보적인 사제들이 “무산자의 우선권” 개념을 내 놓았습니다. 1977년에 인도의 신학자 S. 카펜이 출간한 “예수와 자유”에 대하여, 1980년에 바티칸 교리성성은 그 소속인 예수회총장에게 검열을 요청하였습니다. 해방신학이 교황청에 의하여 거부된 이유는 유물론으로 가게 되어 있는 그 마르크스주의적 개념 때문입니다. 정통 가톨릭의 논자들에게는 해방신학의 이 측면이 “증오와 폭력의 선동, 그리고 계급투쟁의 고취” 로 간주되어 가장 배척해야 될 측면인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1월의 멕시코 방문 때에 “예수님을 정치가, 혁명가, 나자렛의 전복운동자로 보는 이 해방신학의 개념은 교회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고 발표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 가톨릭교계내의 해방신학에 대한 공식지지에 끝장을 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전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트 16세)에게 해방신학을 체계적으로 논박하는 책임을 맡겼습니다. 라칭거 추기경이 책임을 맡은 교리성성을 통하여 교황청은 1984년 및 1986년 두차례에 걸처 해방신학의 맑스주의 경향을 지적하면서 오류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예로서, 레오나르도 보프신부는 성무집행이 정지되고 다른 해방신학의 주장자들은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1983년 3월 라칭거 추기경은 구티에레즈가 성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현세적 메시아니즘을 지지한다고 논박하는 등의 “10가지 논점”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해방신학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교회내의 유사한 계급투쟁을 찬동하게 되며, 논리적으로 교계제도의 배척으로 이어 진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1990년대에 걸쳐, 라칭거 추기경은 해방신학의 단죄를 계속하여, 일부 사제들의 강의를 금지하고, 스리랑카의 티사 발라수리야의 경우는 파문까지 받도록 하였습니다. 라칭거 추기경의 영향으로 신학교에서는 해방신학 강의가 금지되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니카라과 마나과를 방문하는 자리에서 CELAM 이 지지한 교회기초공동체(CEBs)를 인민교회라 별명으로 부르면서 단호하게 단죄하였습니다. 또 이 방문의 자리에서 산디니스타정권에 대한 니카라과 사제들의 지지 경향도 아울러 반대하면서, 교회에 대하여 교황이 하나이며 유일한 권위임을 분명히 하였던 것입니다.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서 인용) 해방신학의 지지자들이 잘 인용하는 성경구절을 보면 그들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루가 4 : 18)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 ... 주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루가 1 : 51-53) 너희 동족 가운데 누가 옹색하게 되어, 너희에게 의탁해야 할 신세가 되거든, 너희는 그를 몸 붙여 사는 식객처럼 붙들어 두고 함께 데리고 살아라. 너희는 그에게서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한다. 너희는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런 동족을 함께 데리고 살아야 한다. 너희는 그에게 이자 돈도 놓지 못하고, 그에게 양식을 장리로 꾸어 주지도 못한다. 나 야훼가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느님이다. 나는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 너희의 하느님에 되리라. (레위기 25 : 35-38)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4 : 32-35) 주 야훼의 영을 내려 주시며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같인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야훼께서 우리를 반겨 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 (이사야 61 : 1-2) 이번에는 부자들에게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당신들에게 닥쳐 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통곡하십시오. 당신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 많은 옷가지들은 좀먹어 버렸습니다. 당신들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고 그 녹은 장차 당신들을 고발할 증거가 되며 불과 같이 당신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와 같은 말세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잘 들으시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밭에서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가로 챘습니다. 그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또 추수한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누리며 지냈고 도살당할 날을 눈앞에 두고도 마음은 욕심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당신들은 죄 없는 사람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들을 대항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5 : 1-6) 이 성경구절들을 혼합한 오류는 오히려 더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전 라칭거 추기경 (현 교황 베네딕트 16세)은 “1984년의 준비기록”에서 이렇게 주의를 촉구하였습니다. “진리의 알맹이 하나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어떤 오류도 계속할 수가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진리의 알맹이가 크면 클수록 그 오류는 그만큼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 유혹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의 오류를 거부하고 그 위험을 지적하려면, 우리는 그 오류 속에 어떤 진리가 들어 있는지, 그 진리는 어떻게 제자리를 찾게 해야 하는지, 그 진리를 어떻게 오류의 선점(先占)으로부터 풀려 나오게 할 것인지를 질문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강조할 것은 교회는 진실로 불의와 투쟁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1984년 8월 6일에 교리성성이 발표한 ‘해방신학의 문제점에 대한 지침’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교회는 학대, 불의, 자유침해에 관하여 어데서 일어나든, 누가 저지르든 단죄하려 한다. 교회는 인간의 권리 특히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지키고 향상시키는데 교회자신의 방법으로 투쟁하려 한다.” 고 뚜렷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트 16세)이 “준비기록”에서 한 분석들은 해방신학을 알아내는데 간명하고 핵심을 지적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제일 나을 것입니다 “해방신학이란 무엇인가? 해방신학은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해방을 위한 실천논리로 설명하고, 이 실천논리의 지침이 해방신학이라는 것이다. 해방신학의 견지에서는, 모든 현실은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해방 역시 정치적 개념이고, 해방의 지침은 정치적 행동의 지침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실천적이지 않은 신학 즉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지 않은 신학은 이상주의적일 뿐으로 실천성을 결하는 것이며, 달리 말하면 압제자의 권력유지를 위한 도구로 규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해방신학자들은 교회의 고전적이며 절제된 그리고 교의(敎義)의 많은 용어를 그대로 계속하여 사용하면서 그 뜻을 바꾸어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활동하면서 해방신학을 읽거나 듣는 사람들은 몇 가지 약간 불쾌한 표현을 제외하고는 모든 내용이 전의 것과 같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또 그 불쾌한 표현도 많은 영성이 있어서 그렇게 위험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해방신학의 바로 이 급진성은 그 어떤 이단(異端)의 일반적인 범주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신학적인 전통은 대부분 더 이상 타당치 않으며, 따라서 전혀 새로운 신학과 영성의 방향을 성서와 시대의 징조에서 직접 발견하여야 한다는 견해가 등장하는 것이다. 현실 세상에 가서 구하는 아이디어, 현실 세계를 위하여 책임을 지겠다는 아이디어는 번번이 과학을 순전히 믿는 상태로 타락한다. 과학의 한계와 병폐를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면서 인간의 과학을 새로운 복음으로 받아 드리는 상태로 타락하는 것이다. 심리학, 사회학, 마르크스사관(史觀)은 과학적으로 확립된 것이어서, 그리스도교사상을 판단하는 틀림없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많은 해방신학자들은 그들의 과학적 판단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불트만과 그 학파의 성서해석은 예수님에 대한 과학의 심판으로 읽혀지게 되었다. 그 심판은 오로지 타당하다고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성경 원문은 좀 더 융통성 있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역사적 비판을 통하여 현재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전통적 성경해석을 떠나 성경원문을 융통성 있게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전 자체가 불트만의 노선에 따라 최대한의 과학적 엄격성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내려오는 성경의 내용이 구속력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성경해석의 표준이 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게 아니고, 공동체나 정치집단에서 경험한 역사의 성서해석학이라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의 분석방법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해방신학은 역사와 사회의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유일하게 과학적인 것으로 대폭 받아 드리고 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이 세계는 계급투쟁의 구조로 해석하여야 하고, 자본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의 택일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일체의 현실은 정치적인 것이며, 정치적으로 현실이 정당하냐 여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성서적 뜻이 성경의 역사관과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융합시키는 출발점이 되며,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르크스주의를 성경을 이해하는데 정당성을 갖춘 성서해석학으로 합리화시켜 주게 된다. 해방신학의 견해는 성경의 지평선을, 마르크스주의 역사관 즉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진보하고 있으며 진정한 구원을 가져오는 자라고 하는 역사관과 융합시키기 쉽게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계속되는 해방의 과정이고, 역사가 진정한 계시이고 성경의 진정한 해석자라는 것이다. 해방신학에 의하면, 역사의 개념이 하느님의 개념, 묵시록의 개념을 삼켜 버렸다고 할 수 있으며, 성서가운데서 ‘역사성’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면서 유물론적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이행하는 것을 정당화 시켜 준다. 역사가 하느님의 역할을 인수한 것이다.” 해방신학에 의하면 계급투쟁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는데 반대한다는 것은 지배계급이 그 권력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결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명한 해방신학자의 말을 들어 보자 ‘계급투쟁은 현실이다. 이곳에서 중립이란 한마디로 불가능이다.’ 교회가 이런 해석에 간섭하고 반대한다면, 교회는 부자와 지배자의 편에 서고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 즉 예수 그 분에게 반대하는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입증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역사의 변증법에서 부정적인 편을 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게 된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에 의하면 성경해석의 결정요소는 민중이라는 것입니다. “해방신학의 주요 방법론적 창안은 사람의 공동체 가운데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피압박자들의 눈으로 보는 관점에 서서 신학을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특권적 통로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투쟁과 희망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해석하는 것이 해방신학이고, 가난한 사람들의 눈을 통하여 사회와 가톨릭신앙과 그리스도교를 평가하는 것이 해방신학이다. 판단자로 말하면, 결정적인 개념은 민중, 공동체, 경험론, 역사이다. 이전에는, 성서해석학적 기준이 되는 것은 교회, 즉 가톨릭교회 전체 - 시간과 공간에 걸치고, 평신도와 교계를 포괄하는 가톨릭교회 전체였다. 이제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경험이 성서의 이해와 해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공동체는 경험을 기초로 하여 사태를 해석하므로 써 실천논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공의회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강조하였드니, 이것을 신비스러운 마르크스주의로 뒤 바꾼 것이다. 민중의 경험이 성경해석을 한다. 여기서 민중이란 교계에 대한 반대이고, 모든 제도에 대한 반대인데, 이 교계와 제도들을 지배세력으로 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계급투쟁에 가담하는 사람은 누구나 민중의 한 사람이며, 민중의 교회는 교계로 된 교회의 적대자가 된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믿음, 희망, 사랑의 뜻을 아주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신앙에 관련하여 보건대, 예컨대 남미의 어느 신학자는 예수님이 하느님을 경험한 것은 극단적으로 역사성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앙은 성실성으로 변화된다.’ 그러므로 신앙은 근본적으로 역사에 대한 성실성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 희망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으로 해석되고, 미래를 위하여 작동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 역시 계급투쟁의 역사에 종속된다. 사랑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 이다. 즉 사랑은 계급투쟁을 선택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은 ‘거짓인 보편주의’를 배척하며, 그리스챤의 선택이 선호적(選好的)이고 파당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매우 강력하게 강조한다. 해방신학의 견지에서는 한 쪽에 가담하는 것은 성서적 증언을 바르게 해석 하기 위한 근본적인 전제라는 것이다. 산상설교에서 정말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변증법의 의미로 가난한 사람들을 해석하는 것과 계급투쟁의 의미에서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의 편을 들고 계신다는 것은 그 성경부분을 거꾸로 해석하는 난잡한 시도이다. 한 해방신학자에 따르면, 하느님의 나라는 영성주의자나 보편주의자의 식으로 이해해서는 않되고 추상적인 종말론의 사건의 의미로 해석해서도 않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파당적인 뜻과 실천논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명한 어느 해방신학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조악의 십자가형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저명한 해방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은 다시 한 번 ‘보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배척하면서, 부활은 제일 먼저,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들, 다수의 사람, 구조악에 의하여 서서히 십자가형을 받고 있는 수백만 명 모두를 위한, 희망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앙 역시, 왕국을 이룩하는, 다시 말하면, 정의와 온전한 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불의의 구조를 인간다운 구조로 변혁시키는 그러한 예수님의 역사에 대한 지배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한다. 역사에 대한 지배는, 하느님이 예수님을 일으켜 세운 그 제스처를 역사에서 반복하므로 써, 즉 역사에서 십자가의 형을 받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므로 써 관철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의 제스처를 인계 받는다는 것인데- 어떻게 하느님의 흉내를 내려고 한 것이 실천되어 왔는지 또 그렇게 계속 실천될 것인지를 생각할 때, 이는 성서의 가르침을 아주 비극적인 형태로 명백하게 전부 뒤 바꾸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예수님을 구세주로서 보다는 해방자로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해방신학은 예수님을 해방자로서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사업이 해방의 표현으로 적히고, 정의의 구현자로 적힌 성경의 구절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누구인가 정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무장하고 나서라는 호소로 해석된다. 상당수의 해방신학자들은 영구계급혁명의 이론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의 개념을 추가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성경의 개념들을 이렇게 재해석하고 있다: 즉 출애굽이 구원의 역사의 중심모습이 된다는 것이다. 유월절의 신비는 혁명의 상징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정치메시아의 희망과 실천논리의 뜻에서 해방의 축제라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해방으로 대치되며, 역사와 계급투쟁의 상황에서, 점차적인 해방의 과정으로 본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에 의하면, 결국 실천논리의 강조가 절대적으로 근본적이다: 즉 진리는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이상주의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리는 역사와 실천논리에서 현실화한다는 것이다. 행동이 진리라는 것이다.” 성숙한 신자들은 유혹적인 해방신학의 도전 앞에서 교회를 지지해야 할 것입니다. “전반적인 평가에 도달하려고 함에 있어, 꼭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즉 한번 해방신학의 바탕이 되는 근본적인 주장들을 받아들이면, 전체의 논리구조를 거의 저항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해방신학이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교를 이 시대의 모든 ‘진보세력’과 연합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교의 이 새로운 해석이, 특히 제3세계의 문제들을 배경으로, 신학자들, 사제들, 종교인들을 매혹시켰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들로서는, 해방신학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흡사 이성과 도덕을 부인하고 또 현실을 도피하는 것으로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으로, 이 그리스도교의 재해석이 얼마나 과격한가를 생각해 볼 때, 해방신학의 도전에 올바른 대답을 찾는 것은 더욱 긴박하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그에 못지않게 압도적인 형태로 신앙의 논리를 뚜렷이 제시할 수 있어야, 그리고 현실의 논리 즉 생활의 경험에서 입증된 더 나은 대답의 구체적인 힘을 밝힐 수 있어야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사고(思考)와 경험, 해석과 깨달음이 함께 요구되어서, 이는 전체 교회의 임무다. 신학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교회의 장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중간 제목을 제외한 인용문들은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준비기록”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www.aware.co.kr 편집위원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한국필라화학주식회사 사장을 지냈음 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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