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복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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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복 귀 <펜문학지와 동리목월문학지에 발표된 저의 단편소설 복귀를 올려 드립니다.> <1>
서장우가 끌려 온 곳은 본인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이외의 곳이었다. 예심이 끝나고 억울하지만 죄가 확정되어 가족과 함께 평양을 떠날 때만 해도 그는 추방되어 어느 시골 농장 쯤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트럭에 실려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들어 온 곳은 사방 전기철조망을 둘러치고 입구에 세운 높다란 망루에 무장 보초가 서 있는 살벌한 곳이다. 대뜸 여기가 말로만 듣던 정치범관리소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 치듯 떠올랐다. 털털거리며 정지한 트럭에서 내리는 그의 두 다리가 힘을 잃고 휘청거렸다. 애써 몸을 추스른 서장우는 아내와 딸이 내리는 것을 거들었다. 그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도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밤새 비포장 길을 달린 트럭위에서 일곱 살 잡이 딸은 너무 지쳐 도무지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 총을 멘 두 병졸이 실개울이 흐르는 골 안 양 옆으로 쭉 늘어선 반토굴식 주택에 그들을 안내했다. 이게 너희들 살 집이라며 구석진 곳에 있는 토굴집을 가리키며 어서 짐 옮기라고 떡떡대고는 다시 망루 쪽으로 내려간다. 막 생긴 돌을 쌓아 지은 움막 같은 집안으로 서장우는 아귀도 맞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거적을 깐 방바닥에 애를 앉히고 나서 그때까지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아내의 어깨를 한 번 쥐어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사방을 휘 둘러보니 협곡을 낀 반대편에 덩실하게 지은 콘크리트 건물이 보였다. 삐죽한 지붕에는 붉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마당 끝에 세운 보초막에는 총 든 병졸이 부동으로 서 있다. 관리건물인 것 같다. 그 뒤에 병영으로 뵈는 누런 집도 보인다. 윗 쪽을 올려다보니 남루한 옷을 걸친 초췌한 사람들이 사래긴 밭에 한창 파종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서장우는 다시 망루 쪽에 내려와 아무렇게나 부려놓은 짐을 들었다. 큰 짐들은 가져올 수 없었는지 올망졸망한 보따리들뿐이다. 그가 한차례 짐을 갖고 올라가자 아내도 기운을 차렸는지 말없이 그를 따라나선다. 무척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깊은 수심이 어렸다. 아내의 신상을 살피는 서장우의 입에서 또 한 번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망루 쪽에 내려와 가벼운 짐을 골라 아내에게 쥐어주는데 경비군 병영에서 경비병 여럿이 나오다가 그들을 보고 목석처럼 굳어진다. 모두 입을 하 벌리고 여자만 쳐다본다. 봄 파리가 이빨 안 닦은 녀석이 있는지 입 주변을 뱅뱅 돌다 내려앉아도 헤, 벌어진 입은 다물려지지 않는다. “와, 곱구나야, 저게 사람 맞아?” 침방울을 떨어뜨리며 얼결에 던지는 병졸의 말이다. “그러게, 오늘 평양서 간부급 입소자가 온다더니 그건가 봐. 일급 도시에서 좋은 것만 먹고 멋진 것만 보고 살아 그런가? 되게 멋지구나야. 저 허리 봐. 버들개지 같다.” “나긋나긋한 버들잎 같지 않고?” “어 씨. 저런 여자 한 번 안아봤음 원이 없겠다.” “뭘 그래. 그래봐야 입소잔데, 기회를 봐 한 번 자빠뜨리면 되지. 까짓 거 저런 것들은 말이야.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맛 좀 보여야 돼. 지금까지 되게 잘살았을 거 안야” “야, 야, 무슨 개수작이야.” 마당 귀퉁이에서 담배를 빨던 자가 빽 소리치며 다가온다. 졸병은 아닌 것 같고 반장 쯤 하는 급이 있는 놈 같다. “듣자니까 자식들. 저 여자 남편 되는 놈 너들 다섯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아마 못 당할 걸. 괜히 흔들려다가 부러지지나 마라 알겠어?” 두억시니 같은 졸병들이 그 말에 얼이 빠진 듯 꺼덕꺼덕 고개만 주억거린다. “왜 겁나냐?” “아니요, 그래봐야 입소잔데, 한 번 맞짱 떠 보디요 뭐” “진짜야?” “내무반장 동진 구경이나 하시라요. 우리가 알아서 해볼 테니 신고식이야 치러야디, 안 그래요?” “좋아. 기카면 가자우” 우르르 망루 쪽에 몰려온 무리는 방금 짐을 들고 올라가려던 서장우 부부를 빙 둘러싼다. “이름이 뭐야?” 깡마르게 생긴 자가 나서며 씨벌이자 서장우는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시답잖게 대답한다. “서장우라고 하오.” “뭐, 뭐? 하오? 이 자식이 대체 어느 앞이라고 감히 오자를 붙여?” “??” 반장을 내놓고 다섯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발길질을 한다. 서장우는 아무 반항도 하지 않고 무지한 매를 말없이 받아들인다. “야, 너 아직도 평양 살던 간분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여긴 정치범관리소야. 선생님들 앞에서 그런 불손한 대답을 하면 안 되지. 다시 말해 봐” 내무반장이란 자가 제법 훈계조로 뇌까렸다. “서장우라고 합니다.” 입술에 밴 피를 문지르며 대답하는 서장우의 얼굴에 얼핏 사나운 빛이 스친다. “그래 그렇게 예보를 써야지. 나인 어려도 우린 다 네 선생님이니까 앞으론 최대의 존칭을 쓰라? 알았어?” “알겠습니다.” “뭘 해먹다 온 놈이야?” “네, 평양서 무역 일을 했습니다.” “무역일? 그럼 비행기 타고 왔다리갔다리하며 돈 벌었단 거야?” 말하는 꼬락서니가 조금 우스웠는지 아님 어처구니없어 그랬는지 옆에 섰던 부인이 새물 웃는다. 대뜸 난리가 났다. “오라, 야 그거 웃으니끼니 사람 같지 않게 곱구나야. 데거” “좋은 것만 골라 처먹으며 살아긴지 거 여자 몸이 야들야들한 게 참 뼈가 있는지 모르갔다야.” “반장동지. 웃는 것도 거 동화책에 나오는 요정 같습니다. 거 있잖습니까? 기래. 아침이슬요정. 아이구야 이자 생각나네.” 뭘 대단한 것을 생각해 낸 듯 우줄거리던 병졸이 갑자기 아랫다리에 쥐가 일었는지 스르륵 주저앉기까지 한다. “자, 개소리들 말고 이 짐 하나씩 들어” 내무반장이 꽥 소리쳤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병졸들이 모를 리 없다. 보다 구석진 곳에 가기 위한 구실이다. 머리위엔 망루에 버티고 선 병졸도 보이니까, 아무튼 서장우로서는 쉽게 짐을 가져갈 수 있었다. 모두 짐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공지를 벗어나 토굴집에 도착했다. 골 안은 한적했다. 지금 이 시간에 집집에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군복을 입은 두억시니들이 우르르 밀려들자 일곱 살 쯤 돼 보이는 여자애가 문밖에 나와 그들을 쳐다본다. “얘 넌 들어가라.” 병졸 하나가 애를 토굴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왜들 이럽니까?” “하, 자식 짐을 들어줬으니 값을 내야지. 설마 공짜라고 생각하진 않았갔지?” “그렇긴 합니다만 잡혀온 신세라 가진 게 없군요.” “가진 게 왜 없어.” “희한한 걸 갖고 있으면서, 안 그래? 흐흐” “그것도 백만 냥짜린데, 히히” 두서없이 지껄이는 자들의 입에는 모두 침이 게 발렸다. 내무반장이라는 자가 나선다. “정 없음 말이야. 네 여자 가슴 한 번만 보여 주라. 그럼 되갔어.” “뭐요?” 서장우의 눈이 대뜸 치솟는다. “야, 뭘 그래. 지금껏 너 같은 반역자새끼들 이삿짐 들어 준 선생님들은 없었어. 글고 그깟 것 한 번 보자는데 왜 눈 치뜨면서 기래야. 혹 너들 우리와 같은 급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갔지 말해 봐?” 암팡져 보이는 자가 서장우의 가슴을 툭툭 치며 뇌까린다. 한 놈이 슬슬 여자 뒤로 다가서며 엉덩이에 손을 댄다. 기겁한 소리가 터질 줄 알았는데 여자는 침착하게 그 손을 쳐버리며 서장우의 뒤에 붙어 선다. 내무반장이 다시 지껄였다. “야, 네가 이해하라. 모두 총각들이고 춘궁기가 돼서리 말이야 거 있잖아. 갈증 같은 거 말이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니끼니 이거이 치솟는 거 있잖아. 땅에서도 새싹이 돌멩이를 들어 일구는 봄철 아니가. 눈 질끈 감고 살짝 한 번만 보여주라 기럼 앞으로 여기서 사는데 우리가 네 색시만은 특별히 살펴 주갔어.” 우르르 떼거지들이 여자의 팔을 잡아 저희 쪽으로 와락 당겨 간다. 가는 비명이 터졌지마는 그게 달아오른 개떼들의 열기를 식혀주진 못한다. 대뜸 한 놈이 여자의 가슴에 손부터 쑥 밀어 넣는다. “이 개새x들 당장 놓지 못해? 물러서라.” 서장우의 입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터졌다. 여자를 당기며 시시덕거리던 자들의 입이 거의 동시에 떡 벌어진다. 사람이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아서인지 서로를 마주본다. 내무반장이란 자의 눈은 불거지다 못해 당장 빠져버릴 것 같다. 그 눈에 이내 독기가 서린다. “이 새끼레 이자 우릴 보고 개새x라 했나? 야 뭣들 해 저 자식 버릇 가르쳐. 좋게 말하니까니, 니미” 다섯 명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우지끈 툭 탁, 찍, 빡, 여러 잡음이 한데 어울린 난잡한 싸움이 벌어졌다. 서장우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적당한 힘을 넣어 한 놈씩 급소를 쳤다. 조금은 버거웠다. 아예 죽여 버리라면 그까짓 어려울 것도 없지마는 죽이는 건 좀 그렇고 그렇다고 설 익혀 놓으면 다시 달려들겠고 아무튼 진땀을 흘리며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대는 놈들을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며 손에 힘을 가해 급소를 친다. 잠간 사이 다섯 놈이 모두 땅바닥에 구겨 박혔다. 그래도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모두 급소를 맞고 너부러져 헐떡거리자 서장우는 천천히 반장 앞으로 걸어왔다. 반장이란 자는 오금이 저렸다. 오전에 사무실에서 새로 온다는 자의 신원을 소장으로부터 들을 때 매우 센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지만 관리소에 들어 온 죄수가 감히 선생님들을 패다니, 예외 없이 주리를 틀어야겠지만 그건 묶어 놨을 때의 일이고 당장은 그 주먹에 자기가 죽게 생겼다. “왜? 왜 이래. 어, 어 내 잘못했어. 이해해. 아까 말했듯이 춘궁기가 돼 참을 수 없어 그랬어. 여자가 고와 가슴 한 번만 보려 한 것뿐이야. 당신도 남자니까 아 거, 알면서, 이해하라니까 다신 안 그럴게 제발,” 우선은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음인지 비는 꼴이 눈 시려 못 보겠다. 서장우는 꼴불견인 그자의 몰골을 내려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들어갑시다.” 서장우는 아내를 껴안고 토굴집 안으로 들어섰다. 밖의 소란에 무서워 울먹이던 어린 딸은 눈물에 얼룩진 얼굴을 들고 들어서는 아빠와 엄마를 빤히 쳐다본다. 중국식 캉으로 된 온돌 위는 천정까지 40센티 정도밖에 안되는데 어린 애가 앉았어도 머리가 천정에 닿는다. 허리를 굽히고 들어서자마자 장우는 딸을 안고 그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볐다. 앞길이 순탄치 않음을 예고라도 하듯 방금 닥친 일이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더구나 하늘처럼 모셔야 할 ‘선생님’이란 자들을 죽 탕치 듯 뭉개놨으니 그 후환이 어떠하리라는 것도 짐작할 만 했다. 아내는 놀란 가슴을 진정할 수 없는지 아무 말 없이 온돌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쉰다. 뜻하지 않은 일로 여기에 끌려올 때 서장우가 가장 걱정했던 것이 바로 아내와 어린 딸의 신상이었다. 당해 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이제 이놈들이 음으로 양으로 자기뿐이 아닌 아내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 자기가 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두 눈 멀쩡히 뜨고 아내가 당하는 모욕은 참아낼 수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예서 그쳤지만 다음번에도 두 주먹이 이성을 잃지 않으리라는 담보가 없다. 그 다음엔?! 물론 자기는 죽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내와 딸만은 죽어서는 아니 되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가족을 죽음에 몰아넣는다는 것은 사내로서 가장 큰 수치라는 사실이 사무치도록 안겨들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 남은 카드를 아무래도 지금 사용해야 할 것 같다. 여기 관리소에 들어 올 때까지만 해도 그에겐 억울한 죄를 뒤집어 쓴 것에 대한 반항이 남아 있었다. 어디 데려 갈 테면 가라는 식이 배짱으로 대했다. 그러나 정작 들어온 여기는 사람이란 명분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곳이 못된다. 서장우는 움쭉 일어났다. 아내의 손을 감싸 쥐고 가랑가랑 눈물이 고인 고운 눈을 이윽히 들여다보는 서장우의 볼이 실룩거렸다. 쳐다보는 아내의 그윽한 호수 같은 눈은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는 눈이 아니었다. 자기라는 존재가 미치도록 혐오스러웠다. “내 나갔다 올께 조금만 기다려. 당신을 어떻게든 구해 주겠어. 날 믿어” 장우는 와락 아내를 그러안았다. 그 다음 피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2>
관리 사무소 소장실 소파에 퍼더버리고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백천덕은 들어서는 서장우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책상위에는 금방 소제해 올려놓은 권총이 번들거리며 놓여있다. 들어 선 서장우가 공손히 앞에 와 머리를 수그리자 그는 총을 쥐며 거만하게 말을 뱉었다. “무슨 일이야?” “우리 거래를 합시다.” “거래? 무슨 거래?” “내게 숨겨 놓은 달러가 있습니다.” “숨겨 놓은 달러? 얼마나 되게” “30만 달러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눈을 껌벅거리는 백천덕의 얼굴이 착잡해졌다. 30만 달러라니, 이게 무슨 귀신이 호두열매 까먹는 소린가? 무슨 애 이름도 아니고, 그런 거금을 숨겨 두고 예까지 잡혀 왔단 말인가? 자식 거짓말이겠지, 이 자식이 지금 지은 죄가 있어 날 떠보는 거야. 백천덕은 그렇게 생각하며 히죽 웃었다. “그러니까 그걸 바치고 대신 여길 빠져 나가겠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야,” 갑자기 백천덕은 천둥 같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너 지금 누굴 놀리는 거야?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어?” “진정하시오 사실이니까. 그걸 국가안전보위부기금으로 내 놓겠으니 어서 제보하시오.” “정말이야?” “거짓말 할 이유가 없소.” 백천덕은 권총을 들어 서장우의 이마를 겨냥했다.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주며 씹어 뱉듯 뇌까렸다. “이 자식 관리소장을 뭐로 보고 그따위 개수작을? 네까짓 놈 예서 쏴 죽인들 아무 문제도 없어. 다시 묻겠다. 이제라도 거짓말이라고 말하면 방아쇠는 당기지 않겠다. 어서 말해 봐?” 서장우는 눈을 감았다. 괜히 허세를 부리는 꼴이 메스꺼워 속이 울렁거린다. 그는 와락 달려들어 백천덕의 목을 거쿨진 손으로 움켜잡았다. “제보하라면 해, 미화 30만 달러야. 정신 있는 놈이라면 그걸 그냥 썩힐 순 없잖아” “이거 놔 안 놔?” 백천덕이 꺽꺽거렸다. 손에 들었던 총이 어느새 장우의 손에 들렸다. 서장우는 멱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기세등등하던 백천덕의 얼굴이 꺼멓게 죽었다. 장우는 총을 들고 왼손으로 전화기를 가리켰다. “어서 제보하라니까” 백천덕은 수화기를 들었다. 직통 전화여서 이내 연결된다. 백천덕은 장우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입소한 서장우 말입니다. 미화 30만 달러를 내놓겠다는데 어쩌면 좋습니까?” 잠시 후, 수화기를 내려놓은 백천덕이 이젠 총 내려. 하며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는다. 서장우는 그 옆에 총을 던졌다. 그랬지만 백천덕은 그 총을 손에 쥘 생각도 못한다. “본부에서 곧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어, 근데 말이야 왜 그걸 관리소에 들어와서야 내놓는 거야? 무슨 꿍꿍인데?” “사실은 여기에 수용될 줄 몰랐소. 그냥 어느 오지에 추방 가는 줄 알았지.” 서장우는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뭐야 시골쯤 가면 그 돈으로 흥청망청 살아보려고? 하기야 지금 같은 세월치곤 나쁜 생각은 아니지. 근데 말이야” 백천덕은 뚜벅뚜벅 제자리로 돌아가 총을 서랍에 넣으며 조금 여유를 부렸다. “네가 그리 생각했다는 게 문제야. 보위부에 걸리면 관대해야 관리소에 수용된다는 것쯤은 알아야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지. 사상이 나쁜 놈을 살려두어선 뭘 해. 안 그래?” “그렇긴 하지만. 원래는 오늘저녁까지 내가 전화하지 않으면 내일 평양에서 내 친구가 본부에 전화하기로 했소. 오지에 추방가면 내가 먼저 전화하기로 했으니까, 여기 들어오면 외부와 일절 연락이 안 되지 않소.” “그러니까 오, 무슨 소린지 알겠어. 그런데 하룻밤만 기다리면 될 것을 왜 이리 서두르지?” “알면서, 방금 전 겪어보니 더러워 못 있겠소. 잔 개미들이 날친다는 건 참, 죽이지도 못하고, 한시가 급하오 이런 곳에 내 아내를 잠시도 방치해 둘 수 없어 그러오.” “보기 드문 애처가로군 그러잖아도 어떻게 처벌할까 생각 중이었어. 경비병들도 잘한 건 없지만 그렇다고 맞불질한 당신을 관리소 기강을 위해서도 가만두어서는 안 되겠지. 날 찾아오길 잘했어. 아니, 돈이 좋다고 해야 하나?! 당신 장사꾼이라서 그런지 앞 뒤 계산을 잘해 선견지명이 있어. 그건 그렇고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그건 어데서 배웠지?” “미안합니다. 젊은 놈이 성질부려서. 군대 때 배운 것입니다. 연락소에 있었으니까요.” “알만해 집에 가서 기다려. 곧 사람이 오던 전화가 오던 할 테니까 그때 알려 주겠어.”
<3>
그 시각 본부에선 몇 사람이 바삐 움직였다. 부장은 백천덕의 전화를 받자마자 이내 수화기를 바꿔 들고 담당자를 찾았다. 조금 후 들어선 수사관 박일천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을 새 없이 부장에게 도착 보고를 한다. “어떻게 된 거야?” 그의 보고를 듣는지 마는지 관리소에서 온 전화내용을 말하고 난 부장이 물었다. 차분한 성격에 죄수예심에서도 늘 냉정을 잃지 않고 빈틈없이 일처리를 하는 박일천으로서는 이외의 말이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서장우에게서는 이미 짜낼 대로 다 짜 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그런 큰돈이 있을 수 있죠?” “그걸 지금 내게 묻는 거야?” “너무 황당해서 그럽니다. 서장우가 책임자로 일한 대성무역상사는 주로 러시아 원동지방에 나가 현지 토산물을 수거해 그걸 중국에 들여다 파는 일이었습니다. 곰의 열이라든가 산삼, 산청 야생동물 가죽 같은 비싼 물건들에 손 대다보니 수익도,,,” “아, 아, 긴 설명은 필요 없고, 그렇다고 자넬 죽이자는 건 아니야. 근데 어찌 30만 달러나 되는 돈을 놓치는가 말이야?” “글쎄요 거짓말이 아닐까요?” “그거야 자네가 더 잘 알 거 아닌가? 취급자가 그걸 내게 물어?” “그렇게 앞뒤를 모르고 덜렁대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만,” “근데 그자의 기본 죄목이 무엇이었나?” “아시면서, 심양에 들어가 남조선 놈들과 어울린 제보가 들어와서 그리된 것 아닙니까?” “그건 나도 알지만, 가만 제보자가 같이 동행한 사람이라지?” “그렇습니다. 심양주재 우리영사관에서도 서탑을 드나드는 남조선 업자들이 있어 그곳 거래는 그만두라고 여러 번 권유했지만 서장우는 그걸 무시하고 계속 진행했다고 했습니다.” “그자에게서 거두어들인 돈이 10만 달러 쯤 된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사실 조사 결과 그 이상의 돈은 없는 걸로 보였습니다. 무려 요원 20명이 달라붙어 장부 검사를 하고 관계정황을 알아봤으니까요.” “물론 그 10만 달러는 국고에 들어갔겠지?” 부장은 돈에만 관심이 있는 듯 보였다. “공개 체포였던 만큼 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내 이야기 하나 들려줄까?” “예?” “안 듣겠음 말고,” “아, 아닙니다. 듣겠습니다.” “자네 경우와 비슷하니까 귀맛이 당길 거야. 내 수사관 때 말이야 골동품 장사꾼 한 놈이 걸려들었는데 되게 큰 놈이었어. 그 자가 진술이 끝난 후에 더 큰 돈을 숨겨 놓고 나를 골탕 먹였지. 자네경우와 비슷해.” “그래서요?” “원래 면밀한 놈들은 항상 미제를 남겨 놓거든.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을 때 그 돈으로 목숨거래를 하자고 말이야 더욱이 외화를 주무르는 놈들에겐 그게 필수이기도 하지” “그래서 풀어주었습니까?” “그때는 돈이 통하지 않는 때었으니까 용서 받을 수 없었지. 대신 목숨은 살렸지. 노동당 자금으로 내놓았으니까, 후에 수용소에서 매 맞아 죽었지만 그런 방법을 쓴 덕에 5년 쯤 더 살았을 거야.” “그러니까 서장우도 살기 위해 그만한 돈을 끝까지 숨겼단 말씀입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지. 30만 달러면 지금 세월엔 본직은 아니더라도 유사한 직업에 다시 복귀할 수도 있을 테니까, 지금은 내 젊은 시절과 달라. 돈이면 뭐든 해결할 수 있는 때지” “??” “서장우 그 자는 분명 그렇게 거래조건을 내걸 거야. 틀림없어. 30만 달러도 분명 있을 거고, 곧 요원들을 데리고 가서 그 자를 면담해 봐” “부장동지 예견처럼 진짜 복귀시켜 달라면 어쩌랍니까?” “해 주라고, 내가 뒤를 봐 줄 테니. 솔직히 30만 달러가 어디야, 지금 국가보위부외화벌이명의로 전국에 수십 개의 부업단위가 있지만 한해 수익이 얼만지 알아?” “??” “이 구실 저 구실 붙여 다 잘라먹고 개자식들이 본부에 수금하는 돈이 서장우가 내 놓겠다는 30만 달러에 못 미쳐” “그러니까 서장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해 외화벌이부업과 맞먹는 액수군요.” “그렇지. 정부에서 자금 지원이 없으니 그리만 되면 갠 일등 애국자야. 나라의 정치안전에 기여한 공로자니까. 30만 달러만 내 놓는다면 그를 본부외화벌이책임자로 만들 생각이야. 그러잖아도 대성무역이 너무 잘나가 언제든 손에 넣으려던 참이었어. 이건 내 생각만이 아닌 윗선 생각도 같을 거야. 나라안전도 돈이 있어야 지킬 거 아닌가? 서장우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러한 객관적 사정을 감안하고 자네의 가혹한 예심을 임기웅변으로 넘겼을 거란 말이지.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야 골수까지 장사꾼 기질로 꽉 들어찬 놈이야. 어때 이야기 재미있었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건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는 명 강의입니다.” “그렇게 잘 아니 이젠 나가 보게. 일 잘 성사시켜야 하네. 아니면 자네 두 번째는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알겠습니다.” 박일천은 기운차게 일어나 경례를 한 다음 방을 나섰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일을 진행시켜야 할 것인가 하는 그림이 채색무지개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너무 흥분되어 가슴이 터질 듯 팽팽해진다. 일이 성사되면 자기는 일확천금을 단 한순간에 해결하는 공로자가 되는 셈이다 승진도 문제없을 것이다. 먼 우레 소리가 들렸다. 요즘은 철모르는 소나기가 자주 내린다. 봄 소나기는 어느 모로 보나 유익한 것이 못된다지만 한껏 부푼 박일천에게는 그 우레 소리가 초대박을 알리는 천둥소리처럼 귀맛 좋게 들렸다.
<4>
무릇 세상살이란 언제나 피치 못할 변수를 안고 있다. 서장우도 그걸 잘 안다. 그건 그가 가슴을 옥죄이며 타국의 국경을 넘나들며 당의 과제인 외화를 벌어들이는 과정이 잘 실증해 주었다. 실지 시베리아 토산물을 중국인들은 한 다리 거쳐서 구입하려 하지 않는다. 원동 지방엔 토산물 수거를 위해 중국인들이 한 벌 깔렸다. 직접 거래를 위해서다. 한국에서 석청이라 부르는 토산품인 산청은 사실 한국인들이 손에 넣지 못해 안달 나 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왜냐면 한국엔 국내어디를 가도 석청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돈이 되어도 아주 많이 되는 물건이다. 곰의 열이나 산삼 그리고 시베리아 토종산짐승들의 가죽도 많은 이윤을 남겼다. 그런 자금줄인 한국을 단지 적대국이라는 명목으로 거래자체를 정치적인 문제로 둔갑시켜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처음부터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계속 사업을 추진시켰다. 그러지 않으면 당적 외화과제를 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그에게 포승줄을 선물했다. 박일천을 만난 서장우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가족을 안전한 곳에 살게 하되 그 결과를 직접 확인한 기초에서 30만 달러를 내놓겠다는 제의였다. 박일천은 쾌히 승낙했다. 본부장의 의도를 충분히 알고 또 지시받은 만큼 못할 것도 없었다. 가족을 어디로 보내면 되겠는가고 여유를 부리기까지 했다. 잠시 생각하던 서장우는 처가가 신의주에 있으니 시내 어디든 집을 주고 살림살이를 갖춰 달라고 청을 했다. 평양에서만 살던 아내가 낯 선 곳에서 정착을 잘하자면 처가가 있는 그곳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박일천은 일고의 주저도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대신 30만 달러가 없으면 가족은 물론 처가까지 몰살당할 거라고 오금을 박았다. 그건 걱정 말라며 서장우는 향후 자기 자신은 어떻게 되냐고 심중한 얼굴로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박일천은 본인만 좋다면 국경인 신의주에 사업체를 꾸리고 세계 어디든 국가안전보위부소속명의로 외화벌이를 할 수 있게 모든 것을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건 내 개인의 말이 아닌 본부의 의도라고 일렀다. 딱, 손가락을 튕길 정도의 희소식이었지만 왠지 사장우의 얼굴엔 가는 비웃음이 스친다. 잠시 후 박일천의 타고 온 지프차가 서장우의 가족을 싣고 출발했다. 눈물이 그렁한 채로 차 문을 열고 바라보는 아내의 수척해진 모습을 서장우는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간단히 손을 들어 이별의 아픈 가슴을 달랬다. 그 날 저녁부터 서장우는 더는 정치범 관리소에 수감된 죄인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특별 우대손님이다. 소장 사무실에서 조촐한 만찬이 있었고 서장우가 귀빈 대접을 받았다. 만찬이 끝난 후 안쪽에 있는 침실에서 하룻밤 잠을 자게 되었다. 물론 사무실 복도와 바깥엔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졌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종소리가 괴괴한 정적을 깨뜨린다. 잠들지 않고 뒤치락거리던 서장우는 소리 없이 일어났다. 침실 문을 열고 잠시 동정을 엿보다가 맨 발 걸음으로 책상에 놓인 전화기로 다가갔다. 수화기를 살며시 들고 번호를 누른 다음 어딘가에 연결시켰다. 전화는 이내 연결된다. 미리 약속이 돼 있는 것 같았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이내 전화를 끊었다. 대화 내용은 모두 숫자였다.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대화다. 침대에 돌아 온 서장우는 이내 잠들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전화 걸기 이전과 달리 매우 평온해 보였다. 다음 날 오전 서장우는 아내와 통화할 수 있었다. 박일천이 넘겨주는 수화기를 넘겨받자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는 무사히 신의주에 도착하여 집까지 배정 받았다는 것이었다. 방이 두개인 아파트고 냉동고며 가스통까지 들여 놓은 편리한 집이라며 이제 당신만 오면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거라 울먹이며 말한다. 서장우는 후,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바위 같이 억센 그의 턱이 안도감으로 실룩거렸다.
<5>
점심시간 쯤 되어 장우가족을 싣고 갔던 지프차가 돌아오자 일행은 식사 후 이내 승차했다. 다섯 명이다. 박일천이 조수석에 않고 뒷좌석 가운데에 서장우가 앉았다. 양옆에 앉은 젊고 팔팔한 요원들은 가슴에 손을 넣고 묵묵히 앉아 있다. 여차하면 총을 꺼내 발사할 준비가 완료된 자들이라는 것을 장우도 잘 안다. 그랬지만 서장우는 짐짓 모른 척 아무내색 없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차가 수도인 평양시내에 들어선 것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시내를 가로질러 달리던 차가 멎은 곳은 교외의 수풀 속이었다. 평양시 상하수도관리 사업소란 간판이 붙은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미 연락이 된 듯 사업소 간부로 보이는 자가 나와 박일천을 맞는다. 일행은 곧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배인 실에 들어서서 한 숨 돌리는데 아까 마중 나왔던 사람이 젊은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여자가 컴퓨터를 켜는 사이 그들의 앉은 맞은 켠 벽에 스크린이 드리워졌다. 불이 꺼지고 스크린엔 동영상으로 묶은 평양의 지하 하수도 전경이 펼쳐졌다. “잘 살펴봐. 혹 기억이 없을 수도 있으니,” 박일천이 곁에 앉은 서장우에게 이른다. 서장우도 긴장한 표정으로 스크린에 비치는 지하 설비들과 각이한 형태의 구조물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 곳은 사업소가 위치한 대성구역지하입니다.” 여자가 설명한다. “모란봉구역으로 돌려주시오,” 서장우가 말했다. “알겠어요.” 여자는 이내 화면을 돌린다. “모란봉구역입니다.” “천천히 이동시켜 주시요” 여자의 조종에 의해 지하도 정경이 천천히 흘러간다. 잠간,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멎은 서장우가 소리쳤다. 정지된 화면을 직시하는 그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어린다. 입으로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흘렀다. “저 곳이요?” “네, 그렇습니다. 다행이 누가 손대지 않았군요.” 장우의 목소리엔 힘이 없다. 손대지 않았다면서 왜 저러지? 머리를 기웃하면서도 박일천은 일어나며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 출발” 일어서는 서장우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 끝내 찾아내지 못했구나. 용삼이가 그리도 둔한 사람인가?) 일행과 함께 지하로 내려오는 서장우의 얼굴이 다시 고통으로 이지러진다. 30만 달러는 정지된 화면 속 위치에 언젠가 서장우가 매몰했었다. 누구도 주의를 돌리지 않는 가장 안전한 위치이기도 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용삼은 모란봉구역 하수사업소 직원이다. 서장우의 오랜 지기였다. 무슨 일이 터지면 이 돈으로 살 구멍을 찾으려는 주도 세밀한 장우의 작전에 따라 둘은 사전에 면밀한 계획을 세웠었다. 바로 어젯밤 숫자로 된 통화도 용삼이와의 대화였다. 약속대로라면 매몰된 돈을 용삼은 새벽에 꺼내 갖고 오늘 밤 아내와 처가식솔을 데리고 강을 건너야 했다. 그리 했을 줄 믿었다. 모든 줄은 돈만 있으면 재빠르게 가동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화면에 비쳐진 매몰 장소가 아무런 흔적도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거푸 생각해도 보위부에서 저런 외지고 추한 지하하수시설까지 통제했을 리는 없는데, 벌써 계단을 내려 물이 질척거리는 바닥에 내려선다. 매몰 위치가 가까워질수록 서장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따라 선 요원 셋은 손에 총을 들고 긴장하게 장우만 주시하며 걷는다. 예사롭지 않은 장우의 거동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맨 앞엔 상하수도 지배인이 선정해 준 인부 두 사람이 콘크리트 벽을 뚫을 지렛대며 망치 같은 도구들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매몰위치로 가는 길 안내자이기도 했다. 드문드문 매달아 놓은 전구의 희뿌연 빛이 비치는 갱도 벽에 일행의 그림자가 비쳐 어룽어룽 춤을 춘다. 발목까지 차는 구정물엔 악취가 진동했다. 모두 얼굴을 찡그리며 한 시간 반 만에 매몰 장소 근처에 도착하자 서장우는 힘없이 물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래? 다 온 것 같은데?” 박일천이 날선 눈을 굴렸다. 서장우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아 혹 거짓이 아닌가 하는 위구심이 가슴을 조였다. 만약 거짓이라면 공로를 세울 천재일우의 기회를 잃게 된다. 거짓이 아니더라도 서장우의 다른 속심이 드러나면 그에게도 치명적인 후과가 차례질 것이었다. 왠지 불안한 감정이 지하도에 들어설 때부터 그를 휘어잡고 놓지를 않았다. 갈등의 정점을 헤매는 것 같은 장우의 표정 때문이었다. 왜 막바지에서 서장우가 갈등하는지, 순순히 내놓기만 하면 직성에 맞는 본직에도 복귀하고 그처럼 중시하는 가족과 함께 편히 살 수 있는데, 기쁨이 스멀거려야 할 대신 저승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안색이 죽어 있다. 침중한 모습은 돈을 매몰했다는 장소를 본 순간부터다. 누가 벌써 파 헤쳐 돈을 가져갔다면 그리될 수 있어도 멀쩡히 보존되어 있음에도 이런 갈등에 휩싸인다면? 박일천은 그 순간 30만 달러의 거취가 거짓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자가 이리도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은 이르지만 거짓으로 드러날 경우 감히 보위기관을 능멸한 죗값을 만 탄창 된 권총의 탄알을 모두 그 거짓몸뚱이에 쏘아 박는 것으로 치르리라. 구정물이 흐르는 바닥에 주저앉아 깊은 한 숨을 내쉰 서장우가 천천히 일어난다. “왜? 정작 큰돈을 내 놓으려니 아까워서 그러는 건가?” 박일천이 야릇한 미소를 짓고 뇌까렸다. 그를 돌아보는 서장우의 눈에 경멸의 빛이 번쩍 했지만 입에서는 온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돈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난 10여 년 동안 내화가 아닌 외화를 주무르면서도 돈에 대한 애착을 별로 가져본 적이 없소.” “그런데 왜 이렇게 허둥거리는 거요?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거요?” “있소. 내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것이, 그런데 그 소중한 것이 왜 나를 떠나려 하는지 모르겠소.” “그게 무슨 소리야?” 서장우는 침통한 표정을 끝내 풀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발 두발 매몰 장소로 걷는 걸음마저 비칠거렸다. 순간. 침침하던 서장우의 얼굴에 밝은 빛이 확 어린다. 무얼 숨기거나 감추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하게 파 헤쳐진 매몰 장소가 두 눈에 확 들어온 순간부터다. 장우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시멘트로 부착된 벽돌 층을 허문 큼직한 공간이 그렇게 반가운 듯 그는 거기에 손을 넣고 마구 헤집었다. 헤쳐진 이상 그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는 환희에 넘쳐 부르짖었다. “용삼아 고맙다. 네가 끝내 해냈구나.” 물 바닥에 주저앉는 그의 볼로 하염없는 눈물이 곬을 타고 거침없이 흐른다. 짧은 그 한 순간에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박일천의 눈이 커진다. 지금 아무 것도 없는 그 공간이 어찌하여 서장우에게 그렇듯 당장 미쳐버려도 무방할 커다란 기쁨을 주었는지 그의 머리로서는 익히 분별할 수 없었다. 저 사람은 이제 자기에게 어떤 처벌이 가해지리라는 걸 정녕 모르는 것인가? 무엇인가 어렴풋하게나마 그의 뇌리를 휘감는 것이 있었으나 실체를 짚어 내기에는 내재된 사고가 모자랐다. 박일천은 인부들에게 얼굴을 돌렸다. “아까 사무실에서 화면으로 본 지점이 예가 맞소?” “네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보았을 땐 여기가 파 헤쳐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이요?” “위치 확인을 위해 보았을 뿐입니다. 바로 엊저녁 쯤 아니면 새벽 쯤 누가 여길 헤친 것 같습니다. 구조물에 대한 영상은 썩 전에 찍어둔 것입니다.” 인부 하나가 떨어져 나온 벽돌장이며 시멘트 부스러기를 살피며 말한다. 박일천은 다시 장우를 돌아보았다. 지배인 실에서 아무 이상이 없는 장소를 보며 몹시 실망하던 장우, 정작 헤쳐진 장소를 보고는 그 실망이 환희로 바뀌며 누군가에게 고맙다고 소리친다. 그렇다면? 그래서였구나, 이자는 애초부터 30만 달러를 넘겨 줄 생각이 없었다. 철저히 이용만 당했다는 생각이 번개 불처럼 번쩍한다. 그런데 어인일인지, 심경과 달리 측은한 마음이 분노를 누르며 머리를 다독인다. 달러가 없으니 이제 어떤 기적이 일어나도 서장우는 죽는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자는 애초부터 삶에 대한 의욕이 없었다. 죽는 걸 알면서도 세상을 통짜로 가진 듯 기쁨에 설레는 모습, 왜? 박일천은 그것이 궁금했다. 그는 부드러운 자세로 서장우를 일으켜 세웠다. 이러한 장소에서 그가 거짓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돈은 어디로 갔소?” “내 아내가 지금쯤 처가와 함께 국경을 넘고 있을 거요, 아니 이미 넘었을지도 모르겠소.” “??!!” 그제야 무엇인가 섬광처럼 번뜩 떠오른다. “그럼 애초부터 30만 달러는 우리에게 넘겨 줄 생각이 아니었던 거요?” “그렇소.” “왜 그랬는데, 그리되면 다시 복귀된다고 분명이 약속했잖소?” 서장우는 잠시 숨을 고른다. 바라보는 눈길엔 모든 것을 체념한 온화함만이 흐른다. “난 그런 복귀를 원하지 않소.” “뭐요?” “지나온 뒤를 돌아보면 참으로 허무하오. 타국을 메주 밟듯 다니며 난 당을 위해 모든 걸 바쳤소. 남보다 더 많은 외화를 벌어 늘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수금하군 했지. 잠도 못자며 아내와 딸에게 색다른 음식과 좋은 옷도 못 입히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당에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었소. 지난 10여 년 간 내가 바친 외화만 해도 실히 수백만 달러는 넘었을 거요. 그런데 어느 날 내게 차례진 것은 차디찬 수갑뿐이었소. 이국의 하늘 아래 휘 뿌려진 내 충성스런 땀이 결국 반역이라는 철퇴로 변해 나를 사정없이 쳐 갈겼단 말이요. 배신은 한 번이면 족하오.” “배신?? 배신은 당신이 한 것이오. 우리에겐 무슨 일을 하던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지. 그걸 당신도 승인했고, 그리고 어겼을 뿐 그렇게 역설하면 안 되지.” “그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사람이 살아 가다보면 뭔가 어길 수도 있는 거 아니요? 하지만 그것이 곧 치명적 올가미가 되어 나뿐이 아닌 가족까지 죽음으로 몰아간다면 그 규칙은 대체 무엇에 필요한 거겠소. 그건 인간사회가 수용해선 안 되는 일인 것 같아. 당신도 이제 한 번 오라를 지고 잡혀가 보시요. 당신 눈앞에서 아무 죄도 없는 가족이 남에게 능멸당하는 꼴을 직접 목격한다면 아마 나보다 더 큰 배신감을 느끼게 될 거요” “??” 박일천은 입을 쩝쩝 다셨다. 너무 많은 말을 하는 서장우다, 근 6개월에 걸쳐 그를 심문하며 전혀 느껴 보지 못하던 새로운 모습이었다. 장우는 과묵한 사람이다. 자기의 억울함이나 감정 같은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려 노력하는 형이 아니었다. 한마디만 증빙해도 자신에게 유리했지만 그는 부디 그것을 제 입으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때일수록 더 입을 닫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묻지도 않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 보위원 생활 20여 년, 많은 인간들을 직접 예심 해봤지만 서장우처럼 마음 속 기둥이 든든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자신이 진행한 일에 자그마한 부끄럼도 없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뱃심이었다. 그런 사람을 죄수로 몰아 매장해 버렸으니, 이제 다시 본직에 복귀시킨들 그걸 감지덕지 받아들일 인간이 절대 아니었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든다. 그걸 왜 이제야 느껴보는 것일까? “한 가지만 묻겠소. 그런 복귀는 원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럼 어떤 복귀를 원했던 거요?” “복귀라,,,” 서장우는 빙그레 웃었다. “내가 부디 복귀를 원했다면 그건 아마 인간 복귀였을 거요.” “인간 복귀? 언제는 인간이 아니었소?” “인간이라 자부했지만 내 가족을 정치범 관리소에 넣는 순간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소, 죄 없는 아내와 딸을 아무런 보호도 없는 죽음의 수용소에 넣고 어찌 나를 인간이라 말 할 수 있었겠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합시다.” “??” “손전화기 한 번만 쓸 수 없겠소?” 박일천은 무슨 정신에 전화기를 내주었는지 모른다. 마치 친구의 부탁을 받은 듯 아무 말 없이 전화기를 꺼내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서장우는 번호를 눌렀다. 그 다음 천천히 귀에 갖다 대자 이미 통화지역을 벗어났다는 통신사 안내원의 말이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전화기를 닫는 서장우의 얼굴에 한없이 행복한 미소가 피어난다. 마치 이른 새벽 산천을 감싸는 젖빛 안개처럼, 그 미소는 소리 없이 주위의 사람들을 감쌌다. 나오는 길은 마음이 가벼웠다. 거칠게 떨어지는 천정의 물방울도 질척거리는 구정물도 지하도를 꽉 채운 구린 냄새도 서장우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니 그 모든 것들이 또 다른 향기가 되어 그의 넓은 가슴에 스며들었다.** 2015, 1, 1 이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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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에 반기를 든 주인공의 너무 돋보이는군요 일전에 선생님을 뵈운 대학생 일식입니다.
우리대학에서 하신 북한문학강의도 너무 좋았구요 앞으로도 좋은 글 보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