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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아웅산 테러 보복작전 "벌초계획"
Korea, Republic of 사필귀정 0 511 2015-07-26 15:04:27

1. 아웅산테러 보복작전 세웠다

       - 주간조선 2100호에 게재된 기사 -


 

버마 ‘아웅산테러’ 직후였던 지난 1983년 10월, 정부가 북한 테러에 대한 응징을 위해 세웠던 이른바 ‘벌초계획’의 구체적 내용이 30년 만에 처음으로 드러났다. 작전계획에 참여했던 당시 특수부대의 한 관계자는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해 특수부대를 평양으로 파견, 주석궁을 폭파하고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을 사살한 뒤,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해 돌아오는 계획을 세웠다”며 “하지만 구체적 귀환방법은 현장에서 선택하기로 했었다”고 말했다.


 

이 계획은 1979년 ‘12·12 사태’를 일으켰던 육사 12기 출신 군 지휘관들이 주도한 것으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지만 전 전 대통령이 “북한과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 며 부정적 입장을 표명, 폐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관계자는 “계획과 관련된 모든 문서는 손으로 일일이 작성됐으며, 복사도 허용되지 않았다”면서 “타자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며,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도 손으로 직접 쓴 문서를 들고 가 보고한 뒤 문건을 소각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아웅산테러 직후 우리 군부가 이에 대응하는 응징계획을 마련했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이와 관련된 구체적 증언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 “30명 투입… 4시간이면 상황 종료”

이 관계자는 “소련 상공에서 대한항공 여객기가 격추된 지 8일 뒤인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에서 한국 국가원수와 각료들을 시해하려는 북한의 테러가 발생, 군 내부에 ‘좌시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며 “당시 1군단과 6군단에서는 북으로 밀고 올라가자는 주장까지 대두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1군단과 6군단에선 소속 장병들에게 실탄을 지급해 전투 준비를 갖췄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포천에 주둔하고 있던 6군단은 “출동 준비를 갖추겠다”고 대통령에게 청원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1군단에 근무했던 한 예비역 육군 대령은 “당시 군은 초긴장 상태였고, 완전히 전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작전계획엔 아무런 공식적인 이름이나 작전번호가 붙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작전계획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벌초계획’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전해졌다.


 

나. 1ㆍ6군단 병사들엔 실탄 지급


 

존재 자체가 극비였던 이 작전 계획은 약 두 달 뒤인 그해 12월 3일, 부산 다대포로 침투했던 무장간첩을 생포하면서 없던 일로 돌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특수부대 관계자는 “다대포로 무장 간첩선이 들어온다는 유력한 정보를 입수 , 평양으로 보내려 했던 병력을 부산으로 투입했다”며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고 간첩 침투에 대비하고 있었기에 무장간첩 두 명을 생포하고 북한 반잠수정(半潛水艇)을 침몰시켜, 정전협정을 위반한 북한의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평양을 치자’며 격앙돼 있던 군 지휘관들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오히려 말리는 입장이었고, 미국 정보기관도 작전에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데다, 버마가 북한과 외교관계를 끊는 등 우리 정부가 얻은 외교적 수확이 적지 않았고, 다대포로 침투한 무장간첩을 생포해 군부의 사기를 올릴 수 있었기에 작전을 백지화시켰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인 존스홉킨스대학의 오버도퍼 교수는 지난 2005년 8월 25일 한국 언론에 “워커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만나 ‘북한에 대한 보복 공격은 동북아 전쟁을 불러올 수 있다’고 만류했으며, 이 말을 들은 전 대통령이 ‘보복공격을 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답했다”고 말한 바 있다.


 

다. 평양 거리·주석궁 모형 만들어 침투 훈련


 

‘벌초계획’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극비 작전의 개요는 ‘특수부대원 30명을 투입해 공중으로 침투, 평양 주석궁을 폭파한 뒤 육로 또는 해로를 이용해 귀환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군 특수부대 관계자는 “비행기가 고공으로 올라가 상공에서 대원 30명을 떨어뜨린 뒤 돌아오고, 대원들은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해 평양으로 들어가기로 했었다”며 “기류를 타고 수평 방향으로 패러글라이딩을 하면, 고도로 훈련된 사람의 경우 수십킬로를 날아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평양 주석궁에 잠입해 폭탄을 설치, 폭파시키고 김일성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예상 시간은 약 4시간. 이 관계자는 “4시간이면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이를 위해 평양시내와 주석궁 모형을 만들어놓고 대원들을 훈련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평양에) 들어가는 것보다 (평양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더 문제였다”며 “육로를 이용해 산을 타고 돌아올 경우엔 15일, 배를 타고 올 경우엔 2일이 필요한 것으로 (계획을) 잡았지만, 실제 어떤 귀환 방식을 택할지는 현장에서 결정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분위기가 몹시 격앙돼 있었기에 장교들 중에선 작전에 참여하겠다고 자원한 사람들이 많았다”며 “주석궁에 침투해 모조리 폭파시킨 뒤, 김일성을 자루에 집어넣어 납치해 오겠다고 호기를 부린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 작전 계획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특수부대원들은 매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특수부대 관계자는 “침투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군견 등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라며 “그런데 사람이 남길 수 있는 흔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배설물로, 대원들은 (배설을 최소화하기 위해) 굶는 훈련을 필수적으로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특수부대원들은 특수하게 제작된 영양식을 보름치 식량으로 갖고 갈 예정이었다”며 “이 영양식은 배설을 최소화하기 위해 특별히 제조된 것으로, 열량은 최대로 높이되 부피는 최소화시켰기 때문에 보름치 식량이라고 해봐야 한 움큼 분량밖에 안됐다”고 했다.


 

현지화 훈련도 필수적이었다. 특수부대원들은 북한군과 똑같이 아침에 눈을 뜨면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쳐야 했고, 북한 담배를 피우고 북한 말씨를 써야 했으며, 북한 군복을 입고 북한 소총으로 사격을 해야 했다. 평양에 진입했다가 검문을 받거나 붙잡혔을 경우를 대비해 시내 지리를 외워야 했고, 오랜 기간 동안 혼자 숨어 지내게 될 경우에 대비해 야생동물을 잡아먹으며 버티는 생존훈련도 거쳐야 했다.


 

암살과 저격에 대한 훈련도 필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수부대원들은 철사줄 하나로 사람의 목을 자르고, 맨손으로 급소를 쳐서 ‘한 방’에 상대를 제압하며, 독침과 단도를 쓰는 훈련을 거쳤다고 한다.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가고, 금고를 열어 물건을 훔쳐내는 훈련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혼자 성인 남자 10여명과 맞대결을 할 수 있으며, 험준한 고산능선 10㎞를 50분 이내에 무리없이 주파할 수 있는 강철 체력을 갖게 된다고 한다.


 

라. 요원들, 다대포 간첩 생포 작전에 투입


 

기세등등했던 이 작전은 그해 12월 3일 부산 다대포에서 무장간첩이 생포되는 바람에 없던 일로 됐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경계를 서던 육군 초병들이 간첩을 발견, 격전 끝에 생포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특수부대 관계자는 “북한 간첩선이 다대포로 침투한다는 구체적 정보를 입수했다”며 “평양으로 들어가 주석궁을 폭파시키려 했던 병력을 부산으로 돌려 (간첩의) 상륙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대원들이 모래 속에 몸을 숨긴 채, 간첩이 뭍으로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생포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작전에 투입됐다는 정덕근(49)씨는 지난 2003년 국회 정무위국감에 출두해 “강원도 해변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뒤 1983년 12월2일 다대포 해안으로 이동해 공비를 생포했다”고 증언했다.


 

특수부대 관계자는 “북한군은 공해상에 모선(母船)을 띄워놓은 뒤, 어선으로 위장한 자선(子船)을 이 모선에서 내보내 공작원을 침투시켰다”며 “자선을 타고 들어온 간첩은 이 자선에 달려있는 반잠수정으로 갈아타고 해안 1~2㎞까지 접근한 뒤, 개인용 해양 스쿠터로 다시 바꿔 타고 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개인용 스쿠터는 배터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마치 물새가 물을 가르는 것처럼 빠른데다 소음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마. 도망치는 북 잠수정 침몰시켜


 

이 관계자는 “상륙한 무장간첩은 겨드랑이에 기관총을 끼우고 두 손으로 수류탄을 움켜쥔 뒤, 손가락을 수류탄 고리에 걸고 있었다”며 “손가락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바로 수류탄이 터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군인명 피해가 날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무장간첩을 생포한다는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총을 갖고 가지 않은 채 가죽 몽둥이와 대검, 그리고 맨손만을 이용해 제압해야 했다”며 “무장간첩 중 한 명은 머리를 가죽 몽둥이로 얻어맞고 바로 기절했지만, 다른 한 명은 격렬히 저항하다가 격투 끝에 제압됐다”고 말했다. 그는 “가죽을 물에 적셔 불렸다 말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 쇳덩이처럼 단단해진다”며 “이렇게 만든 가죽 몽둥이로 뒤통수를 치면 제아무리 장사라도 ‘한 방’에 의식을 잃게 된다”고 설명했다.


 

격투 모습을 목격한 북한 반잠수정은 RPG-7(대전차화기)을 발사한 뒤 빠른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수부대 관계자는 “부산 다대포에서 출발한 반잠수정이 영도 앞바다까지 도망을 쳐서, 해군 고속정이 추격하며 함포를 쐈지만 격침되지 않았다”며 “해군은 결국 고속정 선체를 간첩선과 충돌시키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해 반잠수정을 침몰시켰다”고 말했다. 당시 생포된 간첩 2명은 이후 귀순, 현재 공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대포 작전 참가자들은 이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특수부대 관계자는 긴박했던 1983년의 상황에 대해 “30년 전 일이긴 하지만 당시엔 ‘평양을 치자’는 계획을 수립했을 만큼 우리 군의 기세가 등등했었다”고 말했다.


 

바. 아웅산 묘소 테러

주) : <아웅산 테러> 전두화 대통령이 버마를 방문했을 때, 버마 아웅산 묘역에 북한이 폭탄테러로서 부총리 등 17명이‘참사’한 역사에 유례없는 국제 테러다.


 

아웅산 테러는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의 아웅산묘역에 북한 정찰국 특공대 소속 특수부대원들이 폭탄을 터뜨려 21명을 숨지게 한 국제 테러사건이다. 이로 인해 당시 이 묘역을 찾았던 서석준 부총리,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 심상우 의원(개그맨 심현섭씨의 부친) 등 정부 수뇌부 17명과 버마인 4명이 숨지는 정부 수립 이후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중경상자도 14명에 달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일정이 당초 계획보다 지연돼 폭탄이 터진 직후에 아웅산 묘역에 도착,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이튿날인 10월 10일 새벽 곧바로 귀국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범죄의 원흉으로 북한 공산집단을 지목하는 것은 우리 국민만은 아닐 것”이라며 “살인 폭력 집단의 궁극적인 종말은 멸망밖에 없다는 것을 엄숙히 경고한다”고 발표했다.


 

초유의 테러가 발생하자 당시 중앙정보부는 현지로 날아가 버마 경찰과 공조, 폭파범을 체포해 북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이로 인해 버마 정부는 북한과 단교했으며, 남북한 모두와 수교를 맺고 있던 코스타리카ㆍ코모로ㆍ서사모아 등 제3세계 국가들이 잇달아 북한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2. 김일성이 "수재물자 지원하겠다" 하니 전두환 "보내라!"

              필자 : 전 중앙정보부 요원. 2012/12/27 12:53


 

이번 여름에 한반도를 덮친 태풍을 보면서 1984년도 서울 물난리 때, 북한이 대한민국에 수재물자를 보내겠다며 벌인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이 글이 당시 남한 수재민들을 도우려던 북한 주민들의 따스한 정을 변질시키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수재물자를 보내준 북녘 동포들에게 다시 한 번 진정으로 감사드린다.

1984년 9월 초까지 한반도에는 연일 쏟아진 엄청난 폭우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상당했다. 서울의 하루 강우량은 300밀리 정도였다. 그 해 8, 9월에는 남북간에 서로 물자를 지원하겠다는 공방전이 치열했다.


 

8월20일 전두환 대통령이 북측에 생필품을 보내겠다고 제의했으나 북측은 이를 거부했다. 9월 8일, 북측으로부터 우리에게 수재물자를 지원하겠다는 제의가 왔다. 당시 안기부는 북측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 우리측은 9월 14일, 적십자총재 명의로 ‘수재물자를 가능하면 9월 말까지 보내 달라’고 했다.


 

가. 김정일, 동포애 빙자한 정치쇼했다가 막대한 자산 거덜 내


 

그런데 북측에서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그들이 8월 20일 남측의 제의를 거부했으므로, 남측도 자기들의 제의를 당연히 거부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남한에 물자를 보내겠다고 김정일이 제의한 것이다. 당시 북측이 우리에게 보내겠다는 물자는 쌀 5만 석, 시멘트 10만 톤, 직물 50만 미터, 의약품 등으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수재를 입은 그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 수재물자 지원은 북한 후계자인 김정일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동포애를 과시하려고 과도한 정치적 쇼를 벌이다 예기치 않는 남측의 수용으로 된통 물려버린 것이다.


 

나. 김정일,“북한 보위부와 안기부간의 전쟁”이라며 난리


 

당황한 김정일은 전 행정기관과 지방관서에 “수재물자 인도, 인수는 북한 보위부와 남조선 안기부와의 전쟁이다. 이유 여하를 불문코 최단시간 내에 물품을 징발하라”고 전통을 내리고 공문을 보내는 등 난리를 쳤다. 실제 북측은 수재물자를 전시동원에 준하여 징발함으로써 남북한 간의 동원ㆍ수송ㆍ인도ㆍ인수 능력을 비교, 평가하는 기회로 활용코자 했다. 당시 우리측은 남산 적십자사 회의실에 20여 관계기관 국과장들로 테스크포스팀을 구성하고 수재물자 인수와 관련한 전반적인 업무를 관장했다.


 

다. 수재물자 지원을 전시 군사작전처럼 전개


 

저들은 물자를 보내겠다고 통보만 해 놓고 인도 일시ㆍ장소ㆍ인도 방법 등 어느 것 하나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매 과정을 전시 작전처럼 전개하는 등 우리를 골탕 먹이는 데에 몰두했다. 동시에 물자의 인도 시기를 늦추려는 저의도 깔려 있었다. 예를 들어, 폭풍우가 심하던 날 밤중에 판문점 연락사무실에 서울과 평양을 연결하는 팩스를 익일 아침까지 설치하라고 해 폭우 속에서 밤새도록 라인을 깔고 팩스를 설치한 적이 있다.


 

라. 물자 수송할‘자유의 다리’붕괴 위험으로 고민


 

그런데 우리측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저들이 물자를 판문점을 통해 모두 보낸다면 판문점에 인수할 수 있는 공간이 몇 백 평에 불과해 인계ㆍ인수작업에 차질이 예상되는데다 이동 루트가 자유의 다리 한 곳 뿐이라 노후된 다리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붕괴될 위험성이 크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저들에게 알려주고 협조를 요청하면 김정일의 지시로 남북한간 속도전에서 기필코 승리를 해야 하는 저들에게 우리 취약점만 노출시킬 것이 뻔했다. 만약 '자유의 다리'가 무너진다면 수습 불능의 사태가 일어나지만 저들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어도 대안이 나오질 않았다. 우리는 저들의 계획을 떠보려고 수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인도 시점과 방법 등에 대해 전혀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안기부에서 입수하는 정보와 판단에 의존하여 대응 방법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마. 김정일의 뜻대로 남북 정보기관간 정보전 치열해져


 

당시 나도 안기부 측 요원으로 정부 테스크포스에 나가 있었는데 모든 기관들이 안기부 정보에 의존하여 대책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이 막중했다. 우리 측 테스크포스는 물자 인수 문제 외에도 인수 후 배분 방법, 남북 근로자들에 대한 편의지원, 쌍방 인력의 분계선 월선(越線)에 따른 안전 보장, UN사와의 협조 등 산적한 문제를 빈틈없이 처리해야 했다. 북측 정보기관들의 밤낮없이 물자를 징발하는 활발한 움직임도 포착되었다. 다행히 안기부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북측의 움직임에 대해 정확하고 적시성 있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김정일의 말처럼 남북 정보기관간 바야흐로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바. 해외 출항중인 무역선들을 긴급 회항시킨 북 의도 간파


 

그러던 중 휴민트(Humint)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갑자기 북한 당국에서 해외 출항중인 3~4개의 중형 무역선들에게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신속히 회항(回航)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우리는 북측이 시멘트를 판문점을 통해 보낼 경우, 9월30일 내로 엄청난 수량의 포대를 만들어 포장할 수 있는 능력과 수송차량에 여유가 있겠는가에 관심을 보였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역선을 회항하라는 것은 복도 포대 제작 및 포장 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해당 선박들을 분석한 결과, 시멘트를 벌크로 이동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대형 벌크선이었다. 그렇다면 뻔한 것이다. 가장 걱정했던 시멘트가 육로가 아닌 선박을 통해 온다면 인수에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사. 정보전·속도전 등 모든 면에서 대한민국의 우위 드러나


 

우리 예측대로 북측에서 시멘트는 선박으로 인도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판문점으로 쌀과 직물(織物)을 일시에 내려 보내 인수에 차질을 빚게 하려던 저들의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북의 수송차량이 노후되어 이동 속도가 느린데다 우리가 컨베이어 벨트로 실시간대로 물자를 인수함으로써 오히려 우리 근로자들은 일손을 놓고 저들 수송차량을 기다리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저들은 처음 본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에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우여곡절 끝에 9월29일, 판문점을 시작으로 9월30일, 각각 인천항과 북평항으로 수재물자가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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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짖는개는 ip1 2015-07-27 04:36:55
    물지 못하는 법.

    실행에도 옮기지 못한 계획을 왜 이제 와서 까밝히는지 의문스럽다.

    실제로 무는 개는 목표물이 다가와도 짖지않고 가만히 있다가 목표물이 타격권내에 들어오면 목표물을 물어제낀다.

    무슨 실미도인지, 벌초인지 개소리 줴치지말고 가장 가까운 연평도사건을 보자.

    일일히 말하지는 않겠는데 이것이 현실이며 너네 현주소다.


    너네는 독자적으로 군사활동을 펼수 없단다. 왜 그런지 아냐?

    그렇게 미국이 밀어줬는데도 너네는 1950년 6.25전쟁때 개처럼 저~어기 낙동강계선까지 도망쳐갔으며 채병덕이는 마산-진주계선에서 두부관통으로 즉사!

    리승만은 조선인민군의 진군속도에 겁을 먹고 대전으로 도망쳤다가 또 부산으로, 급기야는 일본에 망명정부를 요청했단다.

    미국이 보건대 너희들은 정말로 약이 없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해 다시는 불장난을 못하게 군사지휘권을 너희들한테서 빼앗았단다.


    사람이 제 개주제를 알고 날뛰여야지.

    1군단이든, 6군단이든, 특공대든 미8군사령관의 명령없이는 너네는 한발짜국도 움직이지 못한단다.

    오늘이 마침7.27인데 정전협정조인식에 남조선국군대표가 없단다.

    놀라지 마라. 그리고 서러워 하지 마라.

    이것이 너네 주소다.

    미국은 솔직히 너네 때문에 몹시 귀찮아 한단다. 그러니 김무성이 또 미국가서 두손 싹싹 빌다못해 이제는 무릅을 끓고 머리를 조아리는것이다.

    "원님! 당신의 똘마니가 대령하였소이다." 하고 말이야. 하하하하하하하하

    여보~ 사필귀정동무.

    네 개주제나 알고 지지벌거려라.

    그리고 네 말마따나 그 당시 너의 주장대로 일이 벌어졌다면 조국은 이미 통일되였을게다.

    너희들이 제일 싫어하는 북괴에 의한 째빨간 통일말이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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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두동무보거라 ip2 2015-07-27 06:41:02
    ㅋㅋㅋ 멍청한 동무야~~

    사자가 병들면 하이에나에게두 먹히는거 아냐? 모르냐?

    영광스런 조선인민의 혁명적 무장력, 영웅적 조선인민군, 키가 145cm난장이부대

    거기다가 영양실조걸려서 밑구멍 들여다보이는 아덜가지구 또 뭘 어쩌겠다는기가?

    동무래 여기서 진수작 털지말고 불상한 인민군 병사덜 밥이나 좀 배불리 먹여주라우.

    아들덜 군대보낸 엄마동무들이 아들덜 생각에 가숨이 찢어져서 아음에 피가 흐른다 아이가.

    정은이래 나라살림 깽판치고 분대장 동무래 분한있게 떼여먹고 소대장동무래 소소하게 흠쳐가고

    중대장동무래 중대하게 흠쳐가고대대장동무래 대대적으로 흠쳐가고 연대장 동무가 연대적으로

    이런 식으로 후방물자 빼돌리고 불상한 공산군 병사아덜 매일밤 농장량곡창고 습격이나 하고

    그렇게 흠친 강냉이마저 소대장집에 식량보충하러 가져가고 분대장 제대준비를위해 장마당에 팔고

    병사아덜은 이래도 배고푸고 도둑질 잘해도 배고푸고 결국에는 탈영하고 영양실조걸려서

    영양보충시키러 집에보내고...........

    얼 빠진 동무야~~그런 아덜데리고 전쟁이 되굿냐?

    여기서 수작질 부리지말구 145cm짜리 불상한 전사넘덜 밥이나 배불리 먹일 궁리나 해봐라.

    너 또 돌두 머리안좋은아새키래 전사들 식량해결한다고 밤에 불상한 인민덜사는 민가를

    습격소탕하지말고 너 우에 부정비리 왕초들 습격소탕하고 나라 개혁개방을 하거라

    나라 개혁개방만하문 그 착한 인민들이 돈 마이 벌고 쌀 마니 생산해서 너그덜 배블르게 해줄거란다.

    돌 석두 바보동무야~~진정으로 인민을 위하는 복무자가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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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격 ip3 2015-07-27 11:40:10
    군에 입대할 최소 신장이 145cm이지 젊은 북한군의 평균 신장은 162-165cm로 파악됨.
    식량사정이 나아지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평균 신장이 더 클것임.
    원래 이북사람들이 이남사람보다 조금 더 컸음.
    김영남 김기남 최태복 김양건 등 일제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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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초축출 ip4 2015-07-27 15:23:12
    주제 착각하고 지랄떨며 탈북자 망신 사고 다니는 싸가지들 벌초 하는 계획은 없소 자화자찬.지랄 떠는 팔싹이 찌그렁탱은 요즘은 풍선타고 하늘 오를 개꿈 꾸는 것이 그 개코 너무 주접스러워 망신살이 뻗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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