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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하다 체포후 북한감옥 체험(3)
리중건 2 517 2006-04-05 22:32:01
북한정치보위부감옥 생활시작

호송 나온 북한정치보위부원과의 간단한 인계인수 처리가 끝나자 나의 손목에서 중국제 수갑보다 더 많이 사용한 듯한 도금 벗겨진 북한 제 수갑을 채우고 호송하였다. 기름사정으로 인해서인지 북한 쪽은 호송차 없이 권총으로 무장한 보위원과 함께 걸어서 감옥으로 갔다. 혜산 시 세관과 정치보위부감옥(집결소라고 함)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는 기차 길 옆에 있었다. 희망찬 탈북이 하루천하로 죽음의 감옥행으로 이어졌으니. 그 때의 나의 심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마치 현실은 꿈속에서 벌어지는 듯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북한은 무단월경자를 일단 정치범성격으로 본다. 따라서 경찰(안전부)이 아니라 정치보위부(현 국가안전보위부)가 맡아 예심 처리한다. 월경자를 일차적으로 가두는 감옥은 < 집결소>이다. 내가 갇혔던 곳은 양강도 도소재지인 혜산보위부집결소였다. 집결소는 곧 예심소로서 월경자 중 정치범과 경제범(밀수꾼)을 확인 분류한다. 정치범이라고 판단되면 관리소(정치범수용소)로, 경제범은 교화소(경제범수용소)로 보낸다. 이 기간이 보통 3내지6개월 걸리는데 감옥생활 중 가장 힘들다. 그러기에 예심 한달이 감옥생활 10년 맞잡이라고 한다.

자살을 못하게 하는 수색

북한정치보위부감옥(집결소)에 처음 들어서면 렌트겐으로 투시하듯 온몸을 샅샅이 수색한다. 여성 경우에는 음부나 유방 밑까지 검사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들이다. 소지한 옷과 소지품, 외화 등 외국에서 가져온 것이면 무조건 회수한다. 이에 반항하면 무자비하게 구타 한다. 중국감옥에서는 몸수색은 하지만 발가벗기지는 않았다. 북한 정치보위부 감옥에 들어가면 자살도구로 쓰일 모든 물건 즉 혁대, 지퍼, 단추, 심지어 팬티의 고무줄까지 뽑아 낸 다. 그러므로 일어설 때에는 바지춤을 손으로 잡고 있어야 한다. 이 약점을 알고 두 손을 들고 서라면 아래 도리는 자동적으로 가 돼버린다. 여성들도 필요하면(보고 싶으면) 발가벗긴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사형선언

이런 수치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안기는 것이다. 감옥 첫 날부터 고 사형 선거하듯 말한다. 여기서부터 사람의 기를 죽인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살아나올 수 없다는 정치보위부 감옥 안에 들어와 제 정신 없는 데, 이런 를 들으면 더욱 싸늘하게 심장까지 얼어든다. 하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속에 감방의 첫날밤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몽사몽에 빠져든다. 대낮보다 밝은 광야를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니는 자신을 본다. 정말 자유로운 창창한 광야이다. 이 눈부신 광야는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깨진다.

아직 날이 어두운 초겨울의 새벽 5시기상, 전기부족으로 수수떡처럼 벌건 전등 빛의 감방은 말 그대로 지옥처럼 느껴졌다. 로 돌아가고 싶지만 어림도 없는 현실이다. 밤잠을 설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밤새 광야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자유로운 바깥세상이 너무 그리워, 그 염원이 신기루와 같이 반영된 것 같다.

너는 사람이 아니다

감옥 첫날 라는 말부터 듣는다. 이 선언과 함께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따라서 , , ,, , 등 짐승에게도 흔히 쓰지 않는 온갖 쌍말을 듣게 됐다. 대신 간수에게는 깍듯이으로 불러야 한다. 또 같은 인간이지만 그들을 마주볼 수 없다. 마주보면 어느새 주먹과 발길이 날아든다.

좁은 감방 문을 나설 때는 머리부터가 아니라 뒤로 엉덩이부터 나가 바닥에 굽어 앉았다가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초보자들은 제 정신이 아닌데다 감옥 규정도 익숙지 않아 어쩔 바를 몰라 한다. 앉으라고 해도 서고, 서라면 앉을 때가 있다. 그러면 보위원 간수(계호원)들이 직접, 또는 감방 장으로 정한 수인을 시켜 「정신을 차리게」 해준다. 심심한 간수들은 수인끼리 싸우고 때리는 것을 흥미 거리로 하는 심리도 있었다.

나 역시 첫날부터 코피가 터지도록 얻어맞았다. 피를 보자 본능적으로 격분한 것은 간수보다 감방장 이었다. 같은 처지의 수인으로서 수인을 위안해야 할 자가 마구 치는 것이 도무지 이해 안가고 참을 수가 없었다. 피를 보자 나도 모르게 그 자를 거꾸로 메쳐놓고(학교 때 나는 씨름 선수였음) 죽여 버릴 듯 족치는 바람에 소동이 났다. 간수들이 뜯어 말렸으니 그렇지 정말 나도 사람을 죽일 것 같았다. 그러나 감옥환경은 이러한 살기 띤 행동이 완력자로 인정되어 즉시 감방장으로 임명을 한다. 죄수끼리 서로 위안해야 한다는 것은 아직 인간성이 남아있는 나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은 감옥생활과정 차츰, 차츰 깨닫기 시작하였다.


차디차고 모래알처럼 깔깔한 메 강냉이(사료용) 밥이지만 한 알 한 알 꼭꼭 씹으면 그것은 그야말로 깨처럼 고소하다. 밥 먹는 시간이 유일한 낙이므로 오래오래 씹어 먹으며 그 시간을 연장시킨다. 반면 식욕대로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수인도 있다. 먼저 먹고는 천천히 먹는 자들을 부럽게 바라보다 못해 하는 질투심을 가지기도 한다. 굶주림은 짠 소금도 사탕처럼 달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227번 수인은 양치용 소금을 몰래 건사했다가 계속 입에 녹여 먹었다. 그가 소금이 맛이 달다고 해서 먹어 보니 정말 그랬다. 이 충동에 못 견뎌 계속 먹는 그는 몸이 항상 부어 있었다. 이런 식욕을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 나는 먹으면 죽는다는 생물학적 식견과 의지로 겨우겨우 이겨나갔다. 소금이 달게 느껴지는 것은 생리적 느낌보다 굶주림 속에 사탕을 연상한 상념이 우세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평상시 시를 좋아할 줄 몰랐고, 시 지을 줄은 더욱 몰랐다. 그러나 는 누구의 말처럼 굶주림의 고통은 나도 모르게 시를 낳게 하였다. 그리고 무의식 중 계속 읊었다.

「차디찬 강낭 밥은 깨처럼 고소하고
짜디짠 소금은 사탕처럼 달도다.」

감옥에서의 설날

북한감옥에서 슬픈 날은 설날이다. 나는 감옥에 들어온 처음으로 슬피 울었다. 집에 대한 그리움과 꼼짝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워 밥그릇을 붙잡고 벅차오르는 눈물을 못 참았다. 다행이 설날만은 간수들도 울도록 내버려둔다. 간수들도 설날 첫날부터 큰소리치기 싫어서인지 술을 마시고 빈둥빈둥한다. 한 수인은 설날마다 방송에서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수령의 신년사를 수인모두 청취시켜달라고 제기하였다. 심심함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스톡홀름 증후군 비슷한 심리에서다.(스톡홀름 증후군이란 1973년 스톡홀름 은행 인질사건 당시 인질로 잡힌 여성이 인질범 편에 드는 일종의 이상 심리현상이다. 스톡홀름 증후군을 가진 인질들은 인질범에게 쉽게 양보하지 않는 경찰을 원망하고 증세가 심한 경우에는 아예 인질 범 측에 가담하기도 한다.) 수인들의 김일성신년사 청취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시처럼 쌍욕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인간인 것이다. 잘못된 사상과 제도가 악인배우로 그들을 연출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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