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탈북수기를 읽고 온 남한 방문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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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연히 주성하 기자님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탈북수기를 읽고 가슴이 너무 아파 이것저것 더 알아보기 위해서 이사이트에 온 남한 방문객입니다. 탈북 수기를 읽고 이곳 저곳 다른 카테고리를 읽어보는중 이곳 자유방에서 정치적인 글들이 너무 많아서 댓글을 남기고 글도 남겨봅니다 아픔을 간직하고 계신 탈북민들 여러분!! 먼저 심신을 잘챙기시고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신 다음 정치적인 것에 눈을 뜨셨으면 합니다. 제가 우려하는것은 다름이 아니고 아직도 김씨 일가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남한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보수 친일파 이승만 박정희를 욕하면서 조금이나마 호응이 오고 반응이 오고 선동이 먹혔다면 판단되면 6.25문제에 대해서 열강들의 싸움으로 몰아가면서 미국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고 분단또한 미국때문에 일어났다는 주장을 하며 김씨일가의 전쟁야욕을 정당화하면서 탈북민들에게 혼란을 주기위해 글을 남길것 같습니다. (하지만 친일파도 박정희도 이승만도 미국도 북한 주민을 억압하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파죽지세로 밀리던 남한이 그때 당시 북한을 제압하지못하고 적화통일이 되었다고 봅니다. 저는 ) 저보다 더 김씨일가에 대한 원한이 사무치는 탈북민들이지만 계속된 선동에는 역사에 대해서 혼란이 야기될수도 있다고 봅니다. 전 여기 이곳을 찾는 탈북민들이 보수 진보를 떠나서 항상 행복한 삶을 살기만을 바랄뿐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성공이 함께 하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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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산 감독 : 네. 저희 할아버지께서 워낙 투철한 공산주의자이셨고요. 그리고 저희 할아버지 쪽이 독립군들 있지 않습니까? 북한에서는 우리가 유공자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독립유공자..그런 계열이셨어요. 그래서 혜택을 많이 받았죠. 정말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평양에서 태어났고요.
박인규 : 할아버님이 교육부장관까지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성산 감독 : 네. 70년대 초까지였습니다.
박인규 : 아버님은 중앙당 간부이셨고요?
정성산 감독 : 네.
2.월간 통일한국 97년 5월호
북한군 선전선동대 탈북자 대담 정성산
우리 가족은 별로 보잘 것 없이 충성심만 가지고 살았다. 아버지는 46년에 노동당원이 되셨고, 내가 넘어 오기 전의 직책은 창고장이었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도둑놈이 들어와도 도둑질할 것이 없었다. 고장난 냉동기는 있었다. 내가 군대에서 집에 올 때, 쌀을 몇배낭 지고 와서 그렇게 먹고 살았다. 나는 군대에서 높은 친구들과 사귀었다. 사단장 운전수, 정치국 운전수, 군단에 올라가서는 총정치국장 운전수하고 사귀다 보니까 요령이 생겼다. 친구들이 모여앉으면 연료창 부장, 또 후방총국 본부 일꾼, 쌀창고장 등 다 있었다.
그때, 나는 쥐뿔도 없으면서 “내가 말이야 총정치국장이랑 이야기 했는데”라고 하면 “너 총정치국장 아냐?” 그러면 “아 친하지” 그랬다. 그렇게 해서 그 친구들과 친해진 다음 쌀좀 얼마 달라고 하면 줬다. 그리고 내가 차가 있는데 기름좀 달라고 하면 또 줬다
3.탈북자수기 코리랑고개를 넘어서 정성산
나는 1969.11.17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장현인민학교와 성북 고등중학교를 졸업한후 86년에 군에 입대, 복무중 남한방송을 들은 사실이 탄로나 처벌받을 것을 우려해 중국으로 도망쳐 조선족의 남한행 권유를 받고 귀순하기까지 한국으로 오는 길은 무척 멀고 험난했었다. 자살을 결심하고 왼쪽 손목의 동맥을 자르기도 했으며 타국의 국경을 넘나들 때 죽는다는 생각으로 사선을 달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