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동포 최초의 의열 투쟁: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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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의열투쟁, '스티븐스 사살 사건' 장인환 선생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역사 속 호국보훈 2015/05/22 14:37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저항의 총성이 맑은 하늘에 울렸습니다. 총알을 맞고 쓰러진 50대 미국인은 바로 대한제국 고문이었던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56)입니다. 그리고 그 총을 쏜 사람은 장인환 의사였습니다.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담당했던 미국인 스티븐스를 향했던 총알과 장인환 선생의 긴박했던 의거 현장을 함께 살펴볼까요?
장인환 선생
조선이 전쟁터가 됨음 국세의 약함 때문이다
1876년 평양에서 태어난 장인환 선생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업을 포기하고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전국을 전전하며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했는데요. 잡화상을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평양에서 벌어지는 청일전쟁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고향이 나의 전쟁터로 쓰이다니... 이는 우리의 국세가 약하기 때문이 분명하다. 나부터라도 국가의 운명을 바로 잡아야겠다”
1904년 28세 청년 장인환 선생은 기울어져가는 국가의 국세를 바로잡기 위해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습니다. 2년 후인 190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선생은 철도역, 농장, 잡부 등의 일을 하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가던 중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알게 되어 울분을 참지 못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선생은 대동보국회(*대동보국회 - 19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에 가입하여 무장투쟁을 펼칠 적당한 때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특별한 학식이 없어 나라를 별달리 보국할 방책이 없으나 언제든지 우리나라가 일본을 대하여 독립전쟁을 개시하는 날에는 나는 반드시 칼을 차고 총을 메어 떨어지는 날 가을 풀에 말머리 행오 앞에서 나의 한 창자 더욱 피를 쏟을 뿐이다.”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을 가른 세 발의 총성 한국 정부의 ‘외교 고문’ 이 직함을 가진 미국인 스티븐스는 사실상 일제 한국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했는데요.
1908년 3월 20일 일본 외무성과 한국통감부의 중대 밀령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배안에서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에게 유익하다”는 내용의 친일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자들에게 일본의 한국 지배가 ‘보호’를 위한 것이라며 왜곡 선전하였습니다.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선생을 비롯한 한인들은 이에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스티븐스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게 유익하다.” 1.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음으로 근래 한일 양국인간에 교제가 점점 친밀하다. 2.일본이 한국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비율빈 백성을 다스림과 같다. 3.한국 신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계에 참여치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하향에 농민들과 사사 백성은 전일 정부의 학대를 받지 아니함으로 농민들은 일본사람을 환영한다.
스티븐스의 이러한 언급에 대해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총 4명의 한인공동회 대표가 스티븐스에게 항의를 하기위해 스티븐스를 찾아갔지만 발언에 대한 정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런 망언을 남겼죠.
“한국에는 이완용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는 큰 행복이요 동양에 대행이다. 내가 한국 형편을 보니 광무황제께서 실덕이 태심하고 완고당들이 백성의 재산을 강도질하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서 빼앗지 아니하면 벌써 아라사(러시아)에 빼앗겼을 터이라고 일본 정책을 도와 말하며 신문에 낸 것이 사실이니 다시 정할 것이 없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정재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스티븐스의 멱살을 잡고 뒤로 자빠트렸고, 나머지 대표들도 스티븐스를 때려눕혔습니다. 4인의 대표는 스티븐스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한 뒤 물러났습니다. 이후 공동회는 회의를 통해‘ 스티븐스를 살려 보낼 수 없다’는 결론을 지었고, 이 작전에 전명운 선생을 투입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의 다음 날인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스티븐스는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오크랜드 부두 페리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전명운 선생이 그 앞으로 다가가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하지만 총은 전명운 선생의 뜻과 달리 불발하고 말았습니다. 총을 내려놓고 스티븐스를 향해 돌진하여 그에게 주먹을 날리고 한바탕 몸싸움이 벌어지고, 서양인의 덩치 스티븐스가 전명운 의사를 제압해서 깔아 뭉개려던 그 순간.
탕! 탕! 탕! 어딘가에서 총성이 들렸고 스티븐스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 총을 쏜 사람이 바로 장인환 선생인데요! 장인환 선생이 쏜 총알은 스티븐스의 페를 관통했고, 다른 한발은 허벅지에 박혔다. 그 총알을 빼내는 수술을 받던 중 스티븐스는 사망하였습니다. 두 선생의 의거가 성공한 것이죠. 장인환 선생은 스티븐스를 처단한 후 “스티븐스는 일본의 보호정치를 도와주었다. 이런 매국노를 죽이지 아니하면 우리나라의 운명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를 죽이고 나도 죽는다면 조국대한의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페리부두
장인환과 전명운은 모르는 사이였을까요? 한 편의 영화처럼 극적으로 펼쳐진 스티븐스 저격 사건 속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깁니다. 그건 바로 두 선생이 서로 알던 사이였는가 하는 것인데요. 놀랍게도 한 날 한 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실행에 옮긴 장인환 선생과 전명운 선생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전명운 선생이 스티븐스를 기다리고 있던 그 때 장인환 선생 또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스티븐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이 영화 같은 상황은 당시 전명운 선생의 증언에서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전명운 선생
“나는 애국심으로 그 놈을 포살하려고 탐지한 즉 오늘 상항을 떠난다고 하기에 육혈포와 그놈의 사진을 가지고 선창에서 기다렸다. 마침 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총을 쏘았는데 총알이 나가지 않음으로 턱 밑을 냅다 때리고 상황이 급박하여 도망을 가려고 한 것이다. 그 때 뒤에서 총소리가 났으며 나는 전에는 장인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의거 직후 장인환 선생은 체포되어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변호인들이 애국행위로서의 장인환 의사의 거사를 무죄로 주장했습니다.
장인환 선생의 재판은 당시 한인사회에 큰 파장을 가지고 왔는데요. 당시 한인 사회는 스티븐스 의거를 전후로 힘을 모아 한인공동회를 개최하고, 장인환 선생의 공판 투쟁을 펼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장인환 선생은 25년 금고형을 선고받았고 복역 10년 만인 1919년 1월 가석방되었습니다.
장인환 선생의 의거는 일본의 약탈적 행위를 전 세계에 노출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윤봉길 의거, 안중근 의거로 이어졌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5월 22일 오늘 장인환 지사 제95주기 추모식이 부산 금정구에 있는 의사 동상 앞에서 진행되었는데요. 한인 최초로 의거를 펼쳐 일본침략을 규탄한 장인환 의사와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현재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선생의 추모식을 맞아 오늘 하루만큼은 장인환 선생의 의로운 행동에 감사하며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한 뼘 더 키워보는 것은 어떠세요? 출처 : http://mpva.tistory.com/3218 장인환 화보
장인환 의사 전명운 의사 스티븐스(Durham. W. Stevens) 公賊의 사망진단서 『양의사합전』(이상설 저, 상항한인 임시공동회, 1909. 3) 북미상항 한인공동회 正日記 第一(1908.3~1911) 북미상항 한인공동회 帳? 第一(1908. 3) 『공립신보』의 의거 보도기사(1908년 3월 25일자) 『신한민보』에 게재된 장인환 의사의 학력(1911년 7월 19일자) 『신한민보』에 게재된 장인환 의사의 영문친필(1911년 7월 19일자) 『해조신문』의 의거 보도기사(1908년 4월 21일자) 『대동공보』의 의거 관련 기사(1908년 4월 9일자) 스티븐스가 투숙했던 페어몬트 호텔(위), 의거장면 삽화(『San Francisco Chronicle』 1908년 3월 24일자)(좌), 정재관 인물삽화(『神戶新報』1908년 4월 14일자)(우)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 장인환이 Stevens를 저격한 지점 약도 의거 보도기사(『The San Francisco Call』1908년 3월 24일자)(좌), 장인환 의사의 친필과 사진(『The San Francisco Call』1908년 3월 25일자)(우) 장인환 의사의 친필 진술서(『The San Francisco Call』 1908년 3월 24일자)(위), 독립전쟁을 촉구한 이인영 의병장의 격문 (‘檄告在外國同胞文’, 『The San Francisco Call』1908년 3월 24일자)(아래) 장인환 의사의 영문 친필편지(위), 캘리포니아주 상급법원의 장인환 의사 수감영장(아래) 미국무성 캘리포니아주 문서국(The California State Archives Office of Secrectary of State, 10200 Street, Sacramento) : 장인환 의사가 1909년 1월 2일 2급 살인죄로 25년의 형을 언도받았다는 내용이다.) 장인환 의사의 수감기록 : 23295는 수감 번호이다. 장인환 의사의 석방 축하 기념사진(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서. 『신한민보』1924년 6월 24일자) : 앞줄 좌7 전명운 의사, 좌8 장인환 의사, 가운데 줄 좌7 이대위 목사, 맨 뒷줄 좌1 최진하, 좌2 백일규, 좌7 양주은, 좌11 하상옥 전명운 의사(1907년 경)(좌), 장인환 의사(1906년 경)(우) 장인환 의사(위) 장인환(우)·전명운(좌) 양의사: 장인환 의사 석방 후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앞에서, , 1927년 3월 장인환 의사 귀국 시 상항(샌프란시스코)부두에서(우) : 오른쪽부터 장인환 의사, 백일규, 장수영 전명운 의사의 친필 서한(위), 전명운 의사와 세 자녀(아래) : 경숙(장녀, 우), 경령(차녀, 좌)과 아들 알프레드(중) 전명운 의사(위) : 재미 한인동포로 구성된 한인경위대(맹호군) 군복을 입고 있다, 1942년 로스앤젤레스 시청 앞 대로를 행진하는 맹호군(아래) : 점선 원내가 전명운 의사 ‘大韓義士 張仁煥(장인환)公之墓’(샌프란시스코 사이프러스 공동묘지)(위), 장인환 의사의 사망진단서(캘리포니아 건강진료소 소장)(아래 좌), 국립서울현충원의 장인환 의사 묘(1975년 이장)(아래 우) 전명운(MACK FIELDS) 의사 묘비(로스앤젤레스 캔버리 천주교 묘지)(좌), 전명운 의사의 부고(『신한민보』1947년 11월)(우), 국립서울현충원의 전명운 의사 묘(1994년 4월 이장)(아래) 장인환 의사 유품 : 돋보기와 시계, 인장과 필함(위), 전명운 의사가 일생동안 지녔던 것으로 전하는 독립선언서(아래) 전명운 의사가 상항(샌프란시스코) 의거 후 직접 작사한 애국가. 1996년 11월 작곡가 방기남이 곡을 붙였다. ▒ 2권 ▒ 장인환 의사 전명운 의사 스티븐스(Durham W. Stevens) 한국 통감부 문서 일본 외무성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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