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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人種(식인종)경제를 이기게하는 대한민국의 父母(부모)세대.
구국기도 0 433 2016-03-11 12:42:10
[잠언 13:24.楚撻(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懲戒(징계)하느니라]
 
 楚撻(초달)은 撻楚(달초)하다라는 의미와 같다. 「어버이나 스승이 자식이나 제자의 잘못을 징계하기 위하여 회초리로 볼기나 종아리를 때리다. 楚撻(초달)하다. 선생님께서 못된 짓을 한 학생을 달초하셨다. 닦달하거나 문초하다. 관아에서 범인을 달초하여 자백을 받았다」사랑의 매로 변역하면 되는데, 사실 이 사랑의 매가 학교폭력이나 가정폭력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애매한 면이 있지만, 사랑의 기준이 다르면 그것이 폭력이고 또는 초달이 된다. 그 때문에 부모들의 사랑의 기준이 다르면 선생들의 사랑이 민망한 송사에 휘말린다.
 
 인간은 인간을 가르치고 훈계 책망으로 바르게 하여 키우려고 한다. 지금은 수능에 목표를 둔 부모들이 대세인 것 같다. 다른 자들보다 보다 더 나은 점수를 획득하고 좋은 대학으로 가는 것이 부모의 일차목표인 셈이다. 아마도 그것을 기본목표로 세운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집착이 대단하다. 보다 나은 점수를 획득해도 인간의 바탕이 질이 나쁘면 그 스펙이 이웃을 죽이는 흉기가 되는 것을 애써 무시하는 세상이니 섬뜩하다. 만일 우리 국민이 성령의 각성으로 인해 진리를 깨달았다면 이구동성으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구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세상은 자식들이 화려한 스펙으로 단장하도록 세상 일류대학을 나와 행세할 수 있는 것에 목표를 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녀를 키우거나 자신의 경건을 위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인간을 경건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나 그 만고불변의 진리를 인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마태복음 11: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경건에 관한 비밀과 그리스도의 비밀은 성령의 각성을 받는 자들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근본이유가 계시주권이 하나님과 그 아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주권은 인간의 노력에 있지 않다. 주권행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행사하심이다. 그 계시주권자의 뜻을 따라 계시 곧 성령의 각성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해 받은 자들은 경건에 관한 비밀과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반드시 주어야 하는 것인데도 부모의 임의대로 줄 수 없는 것이 곧 성령의 각성이다. 그 때문에 부모세대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고 또 간구하여 강청하여 씨름하여 STRIVE하여 응답을 받아내야 한다. 성령의 각성을 받아내는 부모만이 성령의 각성을 자녀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는데, 그 은총이 곧 자녀를 바로 잡는 초달이요 근실한 징계이다.
 
 사람의 기준의 楚撻(초달)은 하나님의 기준의 초달과 영원한 差異(차이)와 간격을 가진다. 인간이 경건의 가치를 알아 아무리 노력해도 자녀를 하나님기준의 의인으로 만들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행사 할례, 人本主義(인본주의) 割禮(할례)의 한계이다. 인간의 본질을 초달로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을 하는 인간세계는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영원히 노력해도 결코 그 짐을 질 수 없는 한계를 깨닫는 것 밖에는 없게 된다. 기독교는 도를 닦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일 뿐이다.
 
 그 짐에 魅了(매료)되는 인간들은 인간의 힘으로 그 수고와 짐을 自請(자청)해서 지는데 사실은 질수 없는데 질 수 있다고 속이는 마귀에게 유혹을 당함이다. 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기준의 의에 전혀 도달을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기준의 의에 도달하려면 하나님의 방법을 길을 진리를 생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곧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길이다. 부모가 자녀를 초달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게 함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자녀들 속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준의 의의 사랑의 매이시다.
 
 자녀들은 스스로를 질적인 변화를 할 수 없는 인간이고 아직 경험이 없는 인간이다. 그 인간이 변화를 할 수 없는데 부모가 楚撻(초달)을 한다고 그 질이 바뀌는 것은 전혀 아니다. 또한 인간이 그 기준으로 근실히 징계를 한다고 징계를 받는 자녀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전혀 아니다. 자녀학대와 초달은 종잇장 한 장 차이라고 한다면, 바뀔 수 없는 본질을 바꾸라고 강제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녀학대에 해당되는 가정폭력일 뿐이다. 교육을 위한 도제식의 의미들은 받아들이는 자의 자세에 따라 학대도 되고 교육의 징계도 되는 것이니 애매하다.
 
 근실히 징계해서 기술은 늘어도 그 바탕은 그 질적인 내용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면 그 나무에서 그 열매를 내는 자일뿐이다. 그 어떤 기술을 학문을 이수하여 능한 자가 되어도 그 본성은 여전히 그 본성일 뿐, 아니 더욱 타락되는 성질일 뿐이다. 본성이라는 의미들은 타고난 질적인 성품에 후천적인 성질이 가미된 것이나 나날이 타락해가는 성질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7:16.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그런 것을 초달한다고 징계한다고 고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만!
 
 인간이 고칠 수 없는 것이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이다. 그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처형을 받아 그 피를 흘리셨다. 그 피로 용서를 받는 자들을 성령으로 인도하사 하나님의 본질의 성품을 공급하신다. 이를 예수님이 이리 말씀하신다. (요한복음6: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예수님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예수님을 먹는 그 사람도 예수님으로 인해 살리라고 하신다. 아버지의 본질로 행하심과 같이 그도 하나님의 본질로 행하심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강조한다. 하나님의 기준의 초달과 징계는 '그리스도 안=그리스도의 통치)'라고 우리는 강조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오늘의 말씀의 의미는 이러하다. “잠언13:24.楚撻(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懲戒(징계)하느니라” 그리스도의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성령의 각성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해 받아서 자녀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자는 차마 초달을 못하는 자요, 그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자녀의 속에서 하나님의 기준의 초달과 하나님의 기준의 의이시기 때문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기준의 아가페로 사랑 주안에서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랑으로 행하는 은총을 입은 자들은 인간에게 징계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자녀에게 전달하게 하시는 성령의 각성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해 받는다. 그들이 곧 초달과 징계를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근실함의 본질로 행하는 자들이다. 이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그 사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성질로 행하는데 완전하도록 길들이시는 통치하심이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녀를 사랑함이다. 인간의 기준으로 자녀를 사랑함은 각기 다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통치 전이함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러 가는 것과 자기 힘으로 의에 이르는 것을 비교할 때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러 가는 짐이 가볍고 그 멍에는 쉽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받는 그 속에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때문이다. 쉽다는 것은 형통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본질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공급하시고 하나님의 지혜의 선으로 선의 지혜로 그를 인도하시니 당연히 하나님의 기준의 의인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얻어질 수 없는 영겁의 차이다. 영원한 간격이다.
 
 ‘짐이 가볍고 멍에는 쉽다.’ 하나님의 기준의 의로 형통하는 것이니 멍에가 쉽고 짐이 가볍다는 의미이다. 형통의 의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본질이다. 함께 하심으로부터 오는 전이 곧 배움이다. 100%의 짐을 하나님이 지시고 그 힘의 통치를 받는 것이 곧 함께 하심이다. 그 100%란, 짐의 100%이고 그 공급하시는 힘은 무한하시다. 그 힘의 공급 앞에 인간은 다만 무익할 뿐이다. 그 힘의 은총을 입는 것이니 곧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다. 그 힘이 아니면 인간은 결코 갈 수 없는 길이다. 그 때문에 반드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안으로, 곧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그 통치를 받아야 그 짐의 100%가 하나님께로 가고 그 안에서 무한하신 힘이 와서 아무 힘이 없고 무익한 인간을 강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도록 만드시는 전능자의 힘이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힘은 인간에게 쉼 곧 안식이다. 무한하신 힘을 공유하게 하시니 인간은 그 공간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통치의 가치를 대한민국이여 성령의 각성을 오직 예수 이름으로 구해 받아 이를 깨닫자.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인본주의 할례는 무겁고 수고하는 짐이다. 그 짐을 내려놓고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초달과 근실한 징계를 받도록 인도하자.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길이다. 이 절대의 영원한 가치를 거부하면 인간은 스스로 의를 행하려고 노력하다가 그렇게 쇠잔해진다. 인간의 시간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서 하나님을 누리는 시간이지 자기 의를 구현하는 시간이 아니다.
 
 인간은 평생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인간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하다가 소멸하는 길로 간다. 영생의 길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과 그 사랑의 본질과 그 본질에서 나오는 지혜와 능력과 권세를 무한히 누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인간을 연약하게 만드신 이유이다.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으로 채우시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그 무엇인가를 채우는데, 인간이 채우고자 하는 것들은 마귀가 들어가기에 좋은 여건이다. 그 때문에 빛이 없으면 어둠에 잡히듯이 마귀에게 잡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녀들이 그리되면 좋은가?
 
 그리되면 좋겠는가? 지식과 기술을 갖는 문제도 그러하다. 인류를 식인종의 세상에서 구출하는 목표가 아니다. 다만 식인종의 하수인이 되는 것이 그 목표일뿐이니, 자식교육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먹는 것이 목표라면 이는 진정 아니다. [이사야 11: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면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 지식 모략 재능을 받아 누린다.
 
 물론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시는 신의 인도하심 곧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야 그것을 받아 누리게 된다. 이는 인간의 혼불을 켜서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성령의 등불로 하나님의 지혜 총명 명철 지식 모략 재능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누리게 되는 것이니, 이는 인간이 아무리 구축한 집단지성이라도 추월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통치 곧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본질을 누리면 그는 세상을 악마경제에서 구출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의의 병기다.
 
 [3.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따라 악마경제를 물리치고 약육강식의 식인종의 세상에서 인간을 세상을 구출하는 자가 된다. 그것이 부모의 진정한 초달이고 근실한 징계에서 나와야 하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의 통치다.
 
 [6.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마귀가 있는 곳은 식인종이 나온다. 그것들의 인간 종자들이다. 그것들이 마귀 안에서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킹을 한다. 그 것들은 사망의 그물망이다. 그것들이 지구와 인류를 잡아먹는다. 마귀를 이겨야 한다.
 
 마귀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만 넉넉히 이기신다. 오직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아이들이 자녀들이 미래의 국민들이 되어야 한다. 그 길로 가도록 하나님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성령의 힘으로 초달 근실히 징계하는 것이 곧 아이들을 사랑하는 길인데 부모들은 그저 공부만 매달리게 하여 결국 악마경제의 하수인이 되게 한다. 그것들을 싸워서 이기는 자유인이 아니라, 그것들의 노예가 되게 하는 교육을 위해 오늘도 초달하고 근실히 징계한다. 참으로 어이없는 짓이다. 이는 부모들이 이미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9.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누구든지 그 속에 하나님을 모시면 식인종경제 악마경제와 그 배후에 마귀를 이기는 영광에 도달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초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 악마경제를 이기는 길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멍에 그 짐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하나님 속으로 이끌어 들이는 일에 전심해야 하는데 어떤 부모들은 대대로 빨갱이 집안을 고집하고 북괴의 노예로 자처한다.
 
 
 <구국기도생각>
 http://onlyjesusnara.com
 http://korea318.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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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짤게쓰라우 ip1 2016-03-11 20:17:47
    이넘 구국기도 라는 놈두 처세술 이란것을 마셌나.? . 뭔 소리가 그리두 길고 많어?
    읽다가 도중에 허기진다. 너무 길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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