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자치구역’, 한국 속 작은 異國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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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외국인 자치구역’, 한국 속 작은 異國들 국내 외국인 거주자가 80만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이문화에 유달리 배타적인 한국에서 편견과 싸우며 공동체를 일궈왔다. 1970년대에 일찌감치 자리잡은 일본인 공동체가 원조 외국인 마을이라면 이슬람사원 중심의 방글라데시 공동체, 음식점 중심의 네팔 거리는 요즘 새롭게 뜬 ‘외국인 자치구역’. 곳곳에 살아 숨쉬는 작은 이역(異域)들을 둘러봤다. 라마단 금식을 마치고 음식을 먹는 이슬람교 안양성원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 글로벌소사이어티(Global Society). ‘단일민족국가’라는 말은 더 이상 한국을 나타내는 적당한 수식어가 되지 못할 것 같다. 2004년 5월 현재 국내 체류 외국인은 약 80만명(불법체류자 13만8000명 포함). 전체 인구의 2%에 육박하는 숫자다. 외국인은 1993년 산업연수생 제도 실시 이후 급격하게 유입돼 낯선 한국땅에 이문화의 싹을 틔웠다. 중국, 방글라데시, 필리핀, 네팔, 중앙아시아 등 다양한 국가에서 온 외국인들은 고유의 문화를 토대로 한국 내에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민족, 이문화에 유난히 배타적인 한국 사회는 이들로 인해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강원대 한건수 교수(문화인류학)는 “외국인들이 서로 돕고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집단거주지를 형성하는 것은 자연발생적 현상이며, 이처럼 다양한 외국인 마을이 만들어진 것은 한국도 다문화사회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들 공동체는 주로 외국인 근로자가 일하는 공업단지 주변의 거주지나 음식점, 시장 등 상권 주변에 형성되었다. 모스크나 성당 등 종교시설을 중심으로 생겨난 문화공동체도 적지 않다.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의 경우 거주민의 70%가 중국 국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다문화사회를 경험해보지 못한 한국에선 외국인 공동체의 성장이 더러 파열음을 내기도 한다. 상대방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갈등이 빚어지는가 하면 급증하는 외국인 범죄로 골머리를 앓는다. 국내 거주 이슬람교도들을 반한단체로 모는 해프닝이 벌어진 적도 있다. 2004년 10월31일 일요일 오후, 경기도 안양시 안양5동 이슬람교 안양성원. 라마단 17일째인 이날, 신도 수백 명의 경건한 기도 소리가 경내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라마단은 이슬람교도의 금식월(禁食月). 신도들은 이슬람력으로 9월 한 달간 일출에서 일몰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욕심과 집착을 털어내는 수행기간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교 안양성원은 서울, 경기 군포•안산 등지의 방글라데시인 노동자들이 일요일마다 모이는 종교 공동체. 이곳에서 만난 에마라트 후세인 바부(43)씨는 2004년 10월13일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한 야당 국회의원이 “잇따른 테러 경고 속에 국내에서 이슬람 반한(反韓)단체가 처음으로 적발돼 조직원이 추방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폭로했다. 반한단체인 ‘다와툴이슬람코리아’의 본거지로 지목된 이슬람교 안양성원은 난데없는 날벼락을 맞았다. “우리더러 반한단체라니요. 한국의 발전상을 동경하다 이곳에 온 우리가 왜 한국 사람을 해치려 하겠어요. 더구나 열심히 일하고 아껴 써서 가족에게 한푼이라도 더 보내고 싶어하는 우리가 테러단체에 송금을 할 리가 없죠. 반한단체 이야기가 나온 후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어요.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물어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하면 잔뜩 경계합니다. 나는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는데…. 마음이 아파요.” 모스크에 닥친 불행은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반한단체’ 발언이 있던 날, 실의에 빠진 한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작업도중 오른팔이 프레스에 눌려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테러리스트로 낙인 찍혀 해고당한 노동자도 여럿 생겼다. 불법체류자 신분의 노동자들은 마음놓고 사원에 올 수도 없게 됐다. 불법체류자 단속이 강화되면 모스크가 집중 타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스크에 모인 방글라데시인들의 슬픔을 다독이던 한국인 박창모(45)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모스크를 찾는 한국인 이슬람교도들은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든든한 지원자이자 친구다. “명색이 국회의원이란 사람이 자금 모집책이나 회원 명부 같은 근거도 없이 ‘반한단체가 있다’고 무책임하게 말하고, 언론은 그것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받아 썼어요. 엎질러진 물이라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이들이 받은 상처는 누가 책임집니까.” 반한단체 이야기는 사나흘 후 언론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실체조차 없는 조직이기 때문이었다. 불법 정당에 송금됐다는 1억여원은 외환은행 안양지점에 고스란히 남아 있고, 국가정보원이 검거했다는 ‘반한단체 핵심조직원’ N씨 등 3명은 평범한 미등록 체류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반한단체 소동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이슬람 문화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지불식간에 테러조직과 이슬람교도를 동일시해온 편견이 이번 사태를 낳은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금식 시간이 지나자 바부씨는 기자에게 이슬람식 요리를 권하며 다와툴이슬람코리아의 의미와 역사에 대해 들려줬다. 단체의 이름엔 우호 증진을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다와툴이슬람코리아는 1990년대 초 재한(在韓) 방글라데시인들의 친목 도모를 위해 만든 단체예요. ‘다와’는 아라비아어로 ‘초대’를 뜻합니다. 말 그대로 많은 사람을 이슬람교로 초대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이슬람교도들의 식사 광경은 사뭇 엄숙해 보였다. 음식은 이슬람 향료를 넣어 튀긴 닭고기와 볶은 콩, 바나나 등 각종 과일이 주요 메뉴. 먹는 것 하나에도 경건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은 닭을 잡을 때도 이슬람의 가르침에 따른다고 했다. 한 방글라데시인이 건넨 이슬람교 안내책자엔 “피와 죽은 고기,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잡지 않은 것, 목 졸라 죽인 것, 때려잡은 것 등을 먹지 말라”고 쓰여 있다. 한낱 동물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나타나 있다. 서툰 한국말로 “잘 부탁드린다”고 하는 이들의 맑은 표정에 ‘금욕’ ‘평화’가 ‘테러’보다는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가리봉시장의 ‘옌볜거리.’ 10월31일 점심 무렵, 서울 가산동 D반점엔 적막이 흘렀다. 빨리 음식을 달라며 보채는 손님도, 음식 나르기에 바쁜 종업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사장인 조선족 여성 김모(36)씨는 연신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쉰다. 일요일인데도 통 손님이 없어서다. 2004년 여름 불법체류자가 된 그는 이 동네 터줏대감인 조선족 여성의 명의를 빌려 가게를 열었다. 이곳에 가게를 차린 사람 상당수는 위장 결혼 등으로 한국국적을 취득한 중국 동포다. 세련된 옷차림에 완벽한 서울말을 구사하는 김씨는 한참 만에 기자가 주문한 중국식 냉면을 내오더니 연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옌볜에 일곱 살짜리 딸과 남편이 있어요.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나서 한국행을 결심했죠. 고생고생해 돈을 모아 가게를 열었는데 벌이가 영 신통치 않네요. 하루 매출이 20만원은 넘어야 현상유지가 되는데, 손님이 많은 축인 주말 수입이 고작 8만원이니…. 얼른 계약기간이 끝나서 장사 접는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즘은 (불법체류자) 단속이 심해져 조선족 손님들 발걸음이 뜸해졌어요. 한 핏줄인 조선족 동포를 그렇게 홀대하다니…. 따지고 보면 조선족은 한국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3D업종의 일을 도맡아 하며 나름대로 경제발전에 기여했는데 말예요.” D반점이 위치한 금천구 가산동과 구로구 가리봉동, 영등포구 대림동 일대는 조선족과 중국인들이 모여 살아 일명 ‘옌볜거리’로 통한다. 구로공단이 디지털단지로 탈바꿈하면서 공단 근로자들이 주로 거주하던 쪽방 밀집지역이 한국계 중국인들로 채워졌다. 중국인 거리가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 공항과 가깝고 월세가 저렴하며 일자리를 구하기 쉬운 이 지역은 한국에 입국한 조선족 노동자들이 필수적으로 거쳐가는 코스다. 가리봉시장을 비롯한 가산동 거리는 골목마다 중국 식료품점과 음식점, 중국노래방, 국제전화방, 환전소 등이 즐비하다. ‘仲秋佳節萬事如意 - 加里峰商人聯合會’ 같은 플래카드나 ‘三八餃子館’ ‘中國飯店’ 같은 한자 간판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조선족 노동자들이 유입되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갖거나 범죄율 급등에 두려움을 갖는 이들도 생겼다. 구로경찰서 가리봉지구대 안홍석 경사의 말이다. “이 동네 쪽방에 거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임금이 싼 조선족에게 일자리를 다 빼앗긴다’며 조선족 노동자들에게 시비를 걸어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대림동 조선족 여성 살인사건, 독산동 토막살인 사건 등 중국인과 관련된 범죄가 끊이지 않는 바람에 주민들이 몹시 불안해합니다.” 조선족은 조선족대로 자신을 범죄자나 불법체류자로 보는 부정적 시각이 못마땅하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중국의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이 목표일 뿐이라는 것. 가리봉1동 중국동포교회(목사•김해성)에서 만난 조용철(36) 집사는 “동포들에게 왕래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불법적 행위’는 결코 없을 것”이라 단언한다. “1996년 배를 타고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온 이래 지붕 잇기, 식당일 등 안 해본 일이 없어요.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을 식당 주인에게 사기당해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고요. 조선족 동포를 곤경에 빠뜨린 건 오히려 한국인이에요. 한국인이 조선족 동포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면 갈등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보따리상들이 일군 중앙아시아村 , 주말 오후의 을지로6가에서 중앙아시아계 상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0월30일 오후 서울 을지로6가 을지회관 빌딩 3층의 옷가게 ‘발렌티나.’ 청바지부터 무대의상처럼 번쩍거리는 상의까지 다양한 옷가지가 걸린 가게에 늘씬한 러시아 미녀 두 명이 들어섰다. 이 옷 저 옷 골라 입어보는 이 외국인 손님들에게 러시아어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은 가게 주인 신옥희(33)씨다. 그는 8년 전 한국에 온 사할린 출신의 고려인 3세다. 신씨가 취급하는 상품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디자인하고 한국에서 생산한 의류들. 러시아 의류 상인들이 한국의 뛰어난 방직•직조 기술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몰려들었다. 가게엔 서울의 여느 의류점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서양인 취향의 화려한 의상들이 주류를 이룬다. “손님 대부분이 러시아•중앙아시아 사람이에요. 동대문 의류상가를 주로 찾던 상인들이, 러시아말이 통하는 이 곳 점포를 찾아오게 된 거죠. 가게 운영자들은 거의 고려인 동포고요.” 을지회관 건물이 들어선 을지로6가와 광희동 일대는 일명 ‘중앙아시아촌’으로 통한다. 지하철 2호선 동대문운동장역 12번 출구를 나와 20여m 걸어가다 보면 남쪽으로 난 길 좌우에서 낯선 글자의 간판들과 마주치게 된다. 심지어 ‘소변금지’ 경고도 키릴 문자로 쓰여 있다. 공장지대도 아닌 이곳에 중앙아시아촌이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러시아와 인근 국가의 보따리상들이 동대문 일대 의류시장을 자주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을 위한 마을이 생겨났다는 게 정설이다. 소련에서 독립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 투르크메니스탄 등지에서 살던 고려인들도 한국에 들어와 외국인 투자자 자격으로 중앙아시아촌의 상권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곳엔 정통 중앙아시아 요리를 내놓는 이색 음식점도 더러 있다. 토요일 오후 광희빌딩 뒤편의 음식점 ‘크라이 노드노이.’ 따끈따끈하게 쪄낸 2000원짜리 ‘흘 례프’(빵)와 양고기를 넣은 만두 ‘삼사’의 고소한 냄새가 행인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청바지 차림의 두 외국인 노동자가 발길을 멈추고 봉투에 빵을 여러 개 집어넣었다. 오랜만에 고향 음식을 맛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크라이 노드노이’의 운영자는 고려인 김라리사(49•여)씨. 중고차 무역상인 남편을 따라 입국했다 외국인 투자자 자격으로 이 가게를 열었다. ‘크라이 노드노이’는 카자흐스탄어로 ‘고향집’이란 뜻이다. “주말이 대목이에요. 일주일 내내 막일을 하다가 휴식을 위해 찾은 중앙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이 주요 손님이죠. 옷을 사러 온 바이어도 꽤 있고요. 양고기 꼬치요리인 샤쉴릭이나 찐만두처럼 생긴 만트이가 손님들이 즐겨 찾는 메뉴지요.” 김씨는 중앙아시아촌에서 합법 투자자 1호로 꼽힌다. 한국에선 외국인이 점포 운영 허가를 받기가 어렵기 때문에 편법으로 장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김씨는 은행, 세무서, 구청 위생과, 출입국관리사무소, 영사관을 수십 차례 드나든 끝에 2003년 합법적인 식당 영업허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에는 부가가치세까지 신고, 납부했다. 한국 속의 외국인 마을이 ‘합법적 공간’으로 인정받길 원하는 그의 간절한 바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크라이 노드노이 외에 카페 ‘사마리칸트’와 음식점 ‘마이 프렌드’도 이 지역 명소로 손꼽힌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요리사가 만든 이국적인 음식맛을 볼 수 있다. ‘리틀 마닐라’ 일요일 오후 혜화동 로터리에 들어선 필리핀 장터. 젊음의 거리인 서울 혜화동 로터리는 일요일 오후면 ‘리틀 마닐라’로 변신한다. 동성 중•고등학교 담장을 따라 혜화성당까지 100여m에 걸쳐 필리핀 풍물장터가 펼쳐지는 것. 11월7일 찾은 일요장터는 수백 명의 필리핀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인도 양쪽으로 좌판과 트럭이 늘어서 있고 거기엔 이채로운 물건들이 가득했다. 망고•코코넛•롱빈(콩류) 등 열대 과일은 물론 통조림, 샴푸, 화장품, 향료, 조미료 등 필리핀인이 즐겨 쓰는 생활 필수품도 눈길을 끈다. 좌판에 늘어놓은 필리핀 유명 가수의 음반이나 TV드라마•영화 테이프는 이들의 향수를 달래주기에 충분하다. 한국인과 결혼한 필리핀인이나 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장사를 벌이는 필리핀 사업가들이 이곳의 상권을 이끈다. 한국인 주모(42)씨는 필리핀인 아내와 함께 이 장터에서 3년 넘게 필리핀산 역돔(tilapia)을 판매해왔다. 7마리에 1만원씩 하는 역돔은 필리핀인이 즐겨 먹는 생선. 그러나 2003년 고용허가제 실시 이후 장터를 찾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주씨의 고민이 늘어났다. “지난해보다 매출이 50%나 줄었어요. 1~2년 전만 해도 상인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새벽부터 진을 쳤는데…. 허가받고 하는 장사가 아니다보니 구청이며 경찰서에서 단속을 나올 때마다 불안해요. 답답하죠.” 혜화동 로터리에 필리핀 장터가 들어선 것은 1990년대 후반. 혜화성당에서 필리핀 노동자를 위한 미사가 열리면서 전국의 필리핀 노동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성당 근처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장터는 필리핀 사람들이 타향살이의 애환과 향수를 달래는 명소가 됐다. 그러나 장터는 관할 종로구청의 허가를 받지 않아 사실상 불법으로 운영되고 있다. 필리핀 상인들은 매출 감소와 단속이란 이중고로 불안에 떤다.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이곳을 찾는다는 알프레도(30)씨는 “일요장터는 한국에 필리핀 문화를 알리는 민간사절단”이라고 말한다. 그는 2년째 서울 구로동의 한 의약품 공장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일하고 있다. “미사에 참여하느라 성당에 오는데, 그때마다 장터에 들르죠. 타향에서 고국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한국에서 좀처럼 구하기 힘든 필리핀 음식을 먹으며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신기한 듯 멀리서 장터를 구경하던 한국인들도 요즘은 직접 와서 물건을 사가곤 합니다. 자연스럽게 한국에 필리핀 음식이며 상품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는 거죠.” 초기에는 소음 때문에 이웃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이제는 혜화동의 이색 볼거리로 알려지면서 관광삼아 이곳을 찾는 사람도 많다. 결속 강한 네팔인의 거리 타파씨가 운영하는 가게에 네팔 노동자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다. 요즘 인도•네팔요리 동호회가 빼놓지 않고 모니터링하는 장소가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4번 출구 주변인 숭인동과 창신동 일대다. 빼곡한 한국어 간판 속에 위풍당당하게 걸린 낯선 글자의 간판들이 눈길을 끄는데, 다름아닌 네팔어•인도어 간판이다. 에베레스트의 정기와 부처의 평화를 간직한 네팔 사람들은 이곳에 뿌리내렸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네팔인은 2300여명. 네팔 노동자 상당수가 공장이나 소규모 작업장이 있는 서울 구로나 경기 안산, 부천, 의정부, 인천 일대에 머무르고 있지만, 정작 ‘네팔 거리’가 형성된 곳은 서울의 창신동과 숭인동이다. 이곳에 네팔 음식점과 가게가 밀집해 있는 것. 2000년을 전후해 네팔촌이 들어섰는데, 현재 무역업체나 음식점을 경영하는 네팔인 200여명이 이곳에 모여 산다. 창신동에서 무역업체를 운영하는 몽골족 출신 타파(37)씨는 언뜻 보면 한국인과 다름없는 외모를 지녔다. 네팔이 다민족 국가라서 네팔인들은 골격이나 생김새가 서로 다르다. 타파씨는 2000년, 상가 2층에 10평 남짓한 가게를 열고 네팔에서 들여온 약초와 전통 의상, 식료품을 팔고 있다. 네팔의 TV드라마나 영화 테이프도 빌려준다. 그의 가게는 때로 재한(在韓) 네팔인들의 사랑방으로 변한다. 커리 음식점 요리사, 기계에 손가락을 다쳐 잠시 일을 쉬고 있는 노동자, 한 달 전에 아기를 낳은 산모…. 이 가게를 찾는 반가운 고국 손님들이다. 타파씨의 가게 근처에는 저렴한 가격에 네팔 정통 커리를 맛볼 수 있는 음식점들이 있다. 네팔 음식점은 서울에만 8곳이 있는데, 그중 5개(‘뿌자’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가 이 지역에 몰려 있다.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은 ‘나마스테.’ 네팔 남성과 한국 여성 부부가 4년째 운영하고 있는데, 3000~ 4000원 하는 10여종의 커리를 내놓는다. 커리에 찍어먹는 난(빵의 일종), 네팔식 요구르트인 라씨와 우유를 진하게 가미한 차이 등도 별미. 네팔인들이 소리소문 없이 한국땅에 자국의 문화를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결속력이 강한 민족성 때문이다. 네팔관광청 한국사무소장 케이피 시토울라(39)씨의 이야기다. “1993년 산업연수생 비자가 발급되면서 네팔인들이 한국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사업가들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경제발전을 이룬 한국의 가능성을 높게 봤습니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들어와 보니 영사관조차 없었어요.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재한 네팔인 공동체를 만들었고, 부족별•종교별로 그룹을 이뤄 서로 돕고 있습니다.” 고용허가제의 그늘, 아프리카인 합법적인 취업기회를 제공하는 산업연수생 제도와 고용허가제도 아프리카인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한국인 고용주들이 한국과 문화가 비슷하고 대체로 순종적인 아시아인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인들은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려 외국인보호소로 붙잡혀와도 비행기 삯이 비싸 귀국하기도 쉽지 않은 처지.국내 아프리카 노동자는 2003년 기준으로 2500여명에 이른다. 이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건 ‘미개한 나라’ ‘AIDS 보균자’ ‘마약사범’ 등과 같은 부정적인 편견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현실이다. 11월7일 오후 서울 이태원.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인들이 모여드는 이곳에서도 유독 아프리카 노동자들이 눈에 띈다. 경기 마석 가구단지, 안산 시화공단, 고양 폐차장 등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일요일을 맞아 영어가 통하는 이태원으로 모여든 것이다. 빨간 티셔츠를 입고 햄버거가게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던 흑인 남성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자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낸다. 강한 악센트의 영어 발음이 그가 아프리카에서 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기자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아프리카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싶다”고 하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2년 전 아이버리코스트에서 왔어요. 지금 안산 시화공단에서 자동차(타이어)를 만들고 있고요. 한국에서 사는 거 아주 아주 어려워요!(It’s very very hard!) 말도 안 통하는 데다, 나와 대면하는 것조차 꺼리는 사람이 많아요.” 이름은 아싼(28)이라고 했다. 폐차장에서 근무하는 성실한 노동자다. 아이버리코스트에서 한국의 ‘기아자동차’가 대단한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한국행을 결심했고, 지금껏 한국에서 일해 번 돈으로 차를 사서 본국의 가족에게 보냈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통장을 만들고 외국으로 송금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싼이 차를 보낸 것처럼 컨테이너에 한국 제품을 넣어 본국에 보내는 것이 아프리카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송금’ 방식이다. 1990년대 중반에 아프리카에서 이주 노동자가 대거 한국으로 몰려온 것은 이들이 귀국할 때 한국 중고차를 사가면서부터다. 한국의 폐차장에서 구입한 중고차는 아프리카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이를 계기로 나이지리아와 가나 등지에서 한국행 이주노동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됐다. 이태원 거리에서 만난 가나 출신의 사업가 찰스(35)씨는 한국의 중고차를 수입해 가나에 판다. 서너 달에 한 번씩 한국을 방문, 인천이나 수원에 한 달 정도 머무르며 괜찮은 중고차를 찾아다닌다. 가나인 친구가 운영하는 이태원의 작은 사무실에 들르는 것도 그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 친구의 사무실엔 고무 슬리퍼부터 자동차 부품까지 최근 출시된 한국의 신상품들이 골고루 갖춰져 있다. 이태원 거리 뒤편에는 환전상이나 소규모 무역업체를 운영하는 아프리카인이 밀집해 있다. 원조(元祖) 외국인 마을 100% 일본 제품만 판매하는 이촌1동의 ‘모노마트.’ 최근 부각된 외국인 밀집지역은 대개 1990년대 후반 이후 생겨났지만, 1970년대부터 일찌감치 뿌리내린 외국인 마을도 있다. 인근에 용산 미8군기지가 있는 이태원동과 외국대사관이 몰려 있는 한남동, 일본인 마을이 들어선 이촌1동 등이다. 특히 ‘리틀 도쿄’로 불리는 이촌1동 아파트 단지는 일본인 1200여명이 모여 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외국인촌이다. 일본의 상사 주재원이나 외교관, 사업가와 그 가족들이 보통 3~5년간 이 마을에 머문다. 얼른 보면 여느 한국 아파트 단지와 다름없는 분위기지만 띄엄띄엄 내걸린 일본 음식점 간판, 일본어가 병기된 부동산 컨설팅 안내문 등이 일본 마을임을 말해준다. ‘리틀 도쿄’가 일본다운 풍경으로 변하는 시각은 오후 3시 무렵. 개포동 일본인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스쿨버스를 타고 돌아올 시간에 맞춰 마중나온 일본인 주부들이 정담을 나눈다. 이 거리에서 자전거에 짐을 싣고 거리를 달리는 주부는 십중팔구 일본인이다. 11월25일, 새 집을 임대하기 위해 부동산에 들른 40대의 하라 가쓰시(原克志•야마하뮤직코리아 이사)씨는 “한국에 머물 일본인은 누구라도 이촌1동에 거주하고 싶어한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고, 무엇보다 일본인에 대해 덜 배타적인 문화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을의 역사가 깊은 만큼 이촌1동에는 일본인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곳곳에 엿보인다. 미투리공인중개사무소를 운영하는 권태순씨는 한국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들을 겨냥, 일본 도메인의 홈페이지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조흥은행은 일본어가 병기된 전용 창구를 개설했고, 각 유치원은 주민의 요청에 따라 일본인 교사를 고용했다. 또한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의사가 병원에 배치돼 일본 주민들을 돌본다. 이촌1동 거리 한복판에 위치한 ‘모노마트’는 100% 일본 제품만 판매한다. 한국 손님과 일본 손님의 비율은 6대4 정도. 한국인 주부들은 가끔씩 들러 한꺼번에 장을 보고, 일본인 주부는 매일 들러 하루 먹을거리를 구입한다. 일본 청국장인 낫토를 비롯해 어묵, 곤약 등이 가장 잘 팔리는 메뉴. 상사 주재원으로 왔다가 16년째 한국에 머물고 있는 미타니 마사키(56)씨가 운영하는 우동집 ‘미타니’, 일본 유학생이 한국으로 돌아와 만든 꼬치구이 전문점 ‘와세다야’, 일본식 라면과 돈가스를 파는 ‘아지겐’ 등은 정통 일본요리 전문점으로 이름난 곳이다. 학교 담을 타고 들려오는 프랑스 어린이들의 조잘대는 소리, 바게트빵과 장바구니를 옆에 들고 함께 산책에 나선 금발 주부들, 아장아장 걸음을 떼놓는 꼬맹이의 손을 잡고 빵집으로 향하는 벽안의 젊은 아빠…. 11월28일 오후 3시 서울 반포4동 서래마을의 풍경이다. 프랑스인 800여명이 모여 사는 서래마을은 ‘서울 안의 작은 프랑스’로 자리잡았다. 반포대교 남단의 사평로를 지나 팔레스호텔 옆으로 난 서래로에서 방배중학교에 이르는 길을 가리킨다. 서래로 초입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10분쯤 걸어 오르면 이국적인 풍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Cafe 몽마르트르’ ‘프띠 푸르(Petit four cafe)’ 같은 간판을 내건 가게에서 갓 구워낸 빵과 달콤한 커피향이 풍겨나온다. ‘Attention Ecole(학교앞 천천히)’ ‘Banbae Ecole Secondaire(방배중학교)’ 등 불어로 쓰인 안내판들은 이 마을의 주인이 프랑스인임을 말해준다. 프랑스 국기와 같은 색깔의 보도블록 위를 걸으며 길 양편에 들어선 유럽 스타일의 빌라들을 바라보면 마치 파리의 한 마을에 온 듯한 느낌이다. 반포4동에 프랑스 마을이 들어선 것은 1985년 서울 프랑스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부터. 자녀 교육을 중시하는 프랑스인들이 자연스럽게 학교 근처로 거주지를 옮기며 프랑스 마을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재한 프랑스인 모임(AFC• Association For French in Corea)’을 통해 한국 생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문화생활도 함께 즐긴다. 거리에서 만난 엘리자베스 페린(49)씨는 테제베(TGV) 기술 전문가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다고 했다. 한국 식료품 가게에서 즐겨 김치를 사 먹을 만큼 한국 문화와 가까워진 그는 서래마을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가끔씩 못 견디게 블루치즈(푸른 곰팡이가 박힌 치즈)가 먹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동네 델리카트슨으로 달려가면 쉽게 프랑스산 치즈를 살 수 있죠. 열아홉 살짜리 딸이 다니는 학교도 바로 근처에 있고…. 다만 운동을 즐길 만한 스포츠 시설이 없는 게 조금 아쉽죠.” 재한 프랑스인들이 주로 일하는 곳은 서울 강남이나 강북의 중심가. 서래마을은 가족을 위한 아늑한 거주지역으로 자리잡았다. 이곳의 상권을 주도하는 이는 대부분 프랑스 문화에 관심이 많은 한국인들. 외국인이나 교포가 상권을 주도하는 다른 공동체와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불법적이건 합법적이건 외국인 유입이 계속 늘면서 외국인 공동체의 성장은 거스를 수 없는 현상이 되었다. 전문가들은 다양한 형태로 뿌리내린 외국인 공동체가 한국 사회와 조화를 이루게 하려면 체계적인 준비와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명지대 박화서 교수(이민학)는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외국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구역을 특화시켜 국제 도시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서 “외국인을 위한 복지혜택에만 관심을 둘 게 아니라 문화적•경제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외국인 공동체를 단속대상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부가가치 창출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외국인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강원대 한건수 교수는 “지금까지 외국인에 대한 관심은 인권침해나 불법체류 차원에 머물러 있었지만,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국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로 다름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다문화사회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끝) 글: 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발행일: 2005 년 01 월 01 일 (통권 544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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