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것을 희다고 해야 살 수있는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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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써 보았던 저의 부족한 글 한편을 올려봅니다. 그무슨 자랑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나라를 남한분들에게 알리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 흘러간 세월의 강기슭을 거슬러 올라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어느 가을날이었다. 잘 익은 벼이삭들이 푹푹 고개 숙인 황금색 들판을 헤가르며 기운차게 달려가는 평양-베이징 행 국제열차에는 그해 봄에 평양 국제관계대학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중앙기관의 무역회사 지도원으로 배치를 받은 내가 타고 있었다. 내가 타고 있는 열차의 침대칸에는 이번 수출 계약 대표단의 단장인 우리 수출과의 과장과 통역원으로 따라가는 대외사업과 지도원 까지 하여 3명이 타고 있었다. 우리수출과의 과장은 나보다 국제관계대학 무역과를 5년 먼저 졸업한 선배였고 이번대표단의 통역인 대외사업과 지도원은 중학교 졸업 후에 직통생으로 평양외국어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회사에 배치 받은 27살의 젊은 청년이었다. 과장과 통역원은 그전에도 여러 번 외국 출장을 다닌 사람들이여서인지 열차가 평양 역을 떠나자마자 아무런 미련도 없이 2층 침대로 올라가 누워 버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출장을 떠나는 나는 꿈을 꾸는 것만 같은 마음으로 달리는 열차의 창문에서 물러날 줄을 몰랐다. 어느덧 열차는 국경역인 신의주역에 도착을 했고 뒤따라서 세관원들과 보위부 통행검사원들이 올랐다. 그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가는 손짐들과 지어는 입고 있는 옷의 주머니까지도 모두 검사를 했다. 국가적인 일로 출장을 가는 우리들이 마치도 죄인취급을 받는 것만 같아서 매우 불쾌한 심정이었으나 말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열차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단둥 역에 도착하였다. 중국 측에서도 정복을 입은 군인 비슷한 사람들이 올랐으나 그들은 우리가 가져가는 짐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여권만 확인하고 내린다. 그들을 따라 우리들도 열차에서 내려 바람도 쏘일 겸 역전 쪽으로 나가보았다. 밤이어서 멀리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시커멓고 한적하기까지 하던 북한의 신의주 국경철도역과는 대비도 안 되게 밝고, 화려하고, 소란스럽다고 할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 확연하게 안겨왔다. 우리를 태운 열차는 밤새껏 달려 새벽녘에야 베이징에 도착했다. 우리는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관에 숙소를 정하고 그날 오후부터 대방과의 면담에 들어갔다. 우리무역회사와 오래전부터 무역거래를 해오며 친분관계를 두터이 하고 있던 중국의 대방은 우리 대표단을 위하여 각별한 배려를 돌려주었다. 특별한 의견 차이가 없이 수출입 계약도 빠른 시간 안에 원만하게 끝이 나도록 협조를 해주었으며 매일 저녁 성대한 만찬도 마련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면담의 중간 중간에 베이징 시내와 만리장성을 비롯한 중국의 유명한 문화 유적들을 참관시켜 주었다. 나는 경제전문 일꾼으로서 지금도 첫 외국 출장지인 중국에서 받았던 색다른 감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의 경공업 생산공장들과 유통업체들을 참관하고는 중국경제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 사실 나는 어릴 적에 중국과 압록강을 사이에 둔 만포라는 곳에서 살다보니 중국의 실상을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그때에는 지금처럼 국경의 경비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름에는 중국에 사는 조선족 애들과 함께 압록강에서 수영도 하고 고기잡이도 하며 놀았고 겨울에는 압록강 얼음위에서 썰매도 타면서 같이 살다시피 하였다. 그 당시 북한은 경제도 발전하고 먹을 걱정도 없이 잘살았지만 중국 애들은 옥수수죽도 먹기 힘들 정도로 어렵게 살았으며 옷도 헌옷을 기워서 입군했다. 사실상 그 당시 중국과 북한의 생활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다가 흉년이 되면 밤마다 많은 중국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북한으로 도망쳐 오군 하였다. 중학교에 다닐 때 까지도 중국의 어려운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실상 이번 출장길에서 중국이 개혁개방 후에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꼭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특히는 중국공산당이 내놓은 “특색있는 사회주의” 이론이 얼마나 올바른 것인지를 꼭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상 북한의 경제는 1970년대 말을 종점으로 하여 발전을 멈추었고 1980년대 중엽부터는 눈에 띄게 하강선을 긋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의 간부들 속에서는 우리도 중국식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불평 비슷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중국 체류기간에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중국의 현실을 눈으로 직접 관찰하고 중국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들어보려고 애를 썼다. 그 결과 나는 중국이 개혁개방을 한지 10년도 안되었지만 해마다 세계 사람들을 놀래울 만큼의 경제발전속도를 이루어 내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북한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점점 힘들어지는 인민생활을 추겨 세우려면 우리나라도 중국과 같이 경제의 개혁개방을 진행해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드디어 대표단 활동기간이 다 되여 다음날 아침에는 베이징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나도 대사관 숙소에서 가지고 갈 쌤풀들과 카다로그 등 짐들을 다 꾸려 놓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옆방에 숙소를 정하고 있던 우리 과장이 나를 찾아왔다. 과장은 “짐들은 다 꾸렸는가?” 하고 묻는다. 내가 “예! 뭐 대충 꾸렸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자 과장은 “그러면 밖에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지.” 하며 나를 쳐다본다. 사실 나는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과장이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것만 같아서 “예!” 하고 셔쯔 바람에 과장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과장이 가는대로 따라서 대사관 청사와 1호 숙소 사이에 있는 공원엘 가보니 시간이 좀 늦어서인지 의외로 사람들이 없고 조용하였다. 제일 마지막 벤치로 가 앉은 과장은 담배갑을 꺼내어 담배 한 대를 붙여 물더니 나에게도 담배를 내민다. 나는 안 피운다고 말을 할 가 하다가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서있기가 서먹서먹 할 것만 같아서 담배 한가치를 꺼내 물고 과장이 내미는 라이타로 불을 붙여 물었다. 내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던 과장이 내가 내미는 라이타를 받아 쥐며 “ 이 담배가 중국에서도 좋은 담배로 알려진 곤명 산이라는데 담배 맛이 어떤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저는 담배 맛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과장동지도 이젠 담배를 좀 끊으십시오.” 하고 농담 삼아 답을 했다. 그러자 과장이 “동무는 담배는 안 피워도 그 대신에 술은 많이 마시잖어. 술을 좀 적당히 마시라구. 그러다가 실수하면 큰일이야.” 라고 말하면서 웃더니 “동무두 이번이 첫 외국 출장이지?” 하고 묻는다. 내가 그렇다고 답을 하자 과장은 “이번에 중국에 나와 보니까 어떤가? 물론 우리나라와 대비를 해보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동무 눈으로 직접 보고 들으니까 무슨 생각이 있을 것 아닌가?” 하고 묻는다. 나는 “솔직히 저는 중국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발전 한 줄은 몰랐습니다.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정부의 개혁개방을 다 찬성하고 좋아 한다는 겁니다. 인민들이 마음대로 다닐 수 있고 모두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 그것이야 말로 성공한 정책 아닙니까?” 하고 조금 흥분하여 손세까지 써가며 답을 하였다. 오늘 아침에도 품을 들여서 면도를 했건만 벌써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돋아 오른 자신의 턱을 한손으로 쓸어 만지면서 나의 말을 듣기만 하던 과장이 “그래? 그러면 동무가 보기에는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경제의 개혁개방을 하면 어떨 것 같은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 아니 중국 사람들이 하는 것을 우리라고 못할 거야 없지 않습니까. 저는 솔직히 이제라도 우리가 개혁개방만 한다면 얼마든지 중국보다 훨씬 더 빨리 발전해서 아마도 세계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로 그것도 10년 안에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을 왜 안하는지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체로 생산하고 자체로 팔아서 자체로 살아가도록 생산과 판매활동의 자유만 주면 쌀 배급 문제와 각 분야의 원료자재 공급 문제 등을 국가가 책임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해결이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하고 생각되는 바를 주저 없이 말했다. 과장은 허리를 펴고 주위를 한번 죽 둘러보더니 지금까지 서서 열변을 토하던 나를 옆에 앉으라고 한다. 내가 의자에 앉자 과장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더니 다시 한 대를 붙여 물며 말을 시작한다. “정호동무! 이래서 내가 오늘저녁에 동무를 좀 보자고 불러 낸 거야. 물론 지금까지 동무가 한 말이 다 맞을 수도 있어. 그러나 동무나 나나 꼭 알아야 할 것과 무조건 지켜야 할 것이 있어. 그것을 모르고 외국에 나가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다 말했다가는 다음번 외국출장은 고사하고 살아남을 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 동무도 동무네 2년 윗반 무역 2반에 다니던 철수라구 알지?” “예...압니다.” “그 친구가 대학 오기 전에는 평남도 증산군 사로청지도원을 하다가 대학 와서 공부를 잘해서 바로 2년 전에 우리 무역회사에 배치를 받았었지.” “아! 그래요? 그런데 왜 못 봤죠? 어디 다른 데로 갔습니까?” 내가 다그쳐 물었지만 과장은 애꿎은 담배만 몇 모금 연거푸 빨아대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면서 왜서인지 침통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그 친구가 우리 무역회사에 와서 열성도 많고 일을 참 잘했어. 그런데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가족과 함께 갔지. 그 친구의 딸이 그때에 네살인가 그랬는데 참 얼마나 귀엽게 생겼던지 아직도 눈에 선하구만,” 과장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하고 내쉰다.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 무슨 사고가 났습니까? 왜 그렇게 갑자기 온가족이 모두...?” “사고? 물론 그런 것도 사고라면 아주 대형사고지. 그런데 문제는 본인도 주의를 해야 하지만 술이 문제야. 술이....” 하면서 과장은 나를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외국 출장을 마치고 어제 귀국한 철수는 오늘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쳤다. 같이 출장을 나갔던 부서의 과장을 도와서 출장보고서도 쓰고 각 부서들마다 가져온 기념품들도 돌리고 출장지에서 가져온 쌤풀들도 정리를 하고... 그런 와중에도 다른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오늘 저녁 집으로 초청하는 전화도 잊지를 않았다. 일을 마치고 같은 회사의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퇴근을 한 철수는 아내가 혼자서 하루 종일 준비한 술상을 보고 만족했다. 사실 이번 출장길에 맛본 중국 요리들에는 비길 바가 못 되지만 나름대로 육류와 채소가 구색에 맞게 잘 차려졌다. 시간이 좀 지나자 초청한 친구들이 다 모여왔고 철수가 첫 외국출장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베푸는 성대한 술 파티가 벌어졌다. 술도 맥주도 여러 가지다. 처음에는 철수가 중국에서 기념으로 가져온 독한 술을 친구들에게 한 컵씩 부어 주며 “자! 한잔 마시자.” 하고 호기 있게 소리를 치자 잔을 찧는 소리와 함께 “캬-- 술 조오타.” 하는 소리들이 연방 뒤를 따랐다. 오랜만에 맛보는 독한 술이 그렇게 몇 순배를 돌자 이제는 모두들 기분들이 바람 먹은 풍선마냥 붕붕 떴다. 그런데 그때에 한 친구가 “여! 철수 이번에 중국에 가보니까 어때? 지금도 그렇게 한심하던가?” 하고 묻는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정말 중국이 요즘 어떻게 사는가?”하며 관심을 모은다. 철수는 “ 중국? 야! 말두 하지마라.” 하고 팔을 획 내젖는다. “아니 왜? 똥되넘들이 아직두 그렇게 한심해?” 하고 물으며 친구들은 더 큰 호기심을 보인다. “ 아니야. 그런게 아니라니까. 중국이 옛날의 중국이 아니야. 우리도 중국처럼 해야 되.” 하고 철수가 큰 소리로 말하자 옆에서 아이를 재우고 있던 아내가 “혜영이 아빠 왜 이래요?” 하며 철수의 팔을 휙 잡아당긴다. 그러자 철수는 “응? 왜 그래? 아... 괜찮아 여긴 다 알만한 친구들인데 왜 그래? 아니 그리구 내가 뭐 못할 말을 했어? 아니면 거짓말을 했는가? 그것이 아니잖어... 중국 가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한 것뿐이고 또 우리나라도 이제는 다른 나라들에서 좋은 점은 본받아야 경제도 인민생활도 발전을 시킬 것 아닌가? 안그래?“ 하고 묻자 친구들도 호응을 한다. 친구들의 호응에 힘을 얻은 철수는 자기가 중국에서 보고들은 사실들과 우리나라도 중국식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못을 박으며 이 상태로 계속 나간다면 절대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고 나라걱정을 했다. 이런 속에서 술 파티는 끝이 나고 철수는 친구들에게 중국에서 사온 선물들까지 챙겨 주어서 집으로들 돌려보냈다. 철수에게는 이 한밤이 배부르고 즐거운 밤인 듯 해보였으나 그것이 그 집에서 단란한 가족과 함께 자는 마지막 밤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철수는 그 다음 날도 출근 하여 산하 수출품 생산 공장들에 필요한 생산 지령과 출하지시도 모두 해주고 즐거운 기분으로 퇴근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버스정류소에서 정확히 내리기는 했지만 다시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던 그를 둘러싼 건장한 사나이 두 명이 “조철수 동무?” 하고 섬찍 할 정도로 조용히 불렀다 “예! 누구십니까?” “우리와 함께 좀 갑시다.” “???”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그들은 옆에 세워진 찦 차에 그를 소리 없이 밀어 넣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했다. ....... 밤새껏 뜬 눈으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철수의 아내는 날이 밝자마자 잠투정을 하는 아이를 들춰 업고 동평양에 사는 과장네 집으로 달려갔다. 전날 저녁에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에 철수가 한 말이 아직도 가슴에 걸리는 그 여인은 제발 남편이 어느 친구네 집에서 밤새 술을 마시고 그 집에서 쓰러져 잠들어 있기를 고대하며 과장네 집 문을 두드렸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문을 연 과장 부인은 철수 아내의 말을 듣더니 자기 집에는 오지 않았다고 하며 달려 들어가더니 과장을 깨워가지고 나온다. 눈을 비비며 나온 과장도 그의 행처를 모르겠단다. 그 말을 들은 철수의 아내는 점점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아이를 업은 채로 통나무가 넘어지듯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나가 쓰러진다. 다행히도 아랫집에 구역병원 의사가 살기에 그를 불러다가 정신은 차리게 했으나 공포에 질린 그 여인은 갸날픈 몸을 바들바들 떨며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 낸다. ........... 철수는 그날도, 그 다음 날도, 직장에도,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철수의 아내는 안전부에도 찾아가고 보위부에도 찾아가고 당위원회에도 찾아 갔지만 그 누구도 아는 사람도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그의 집 앞에서는 밤낮으로 낯선 사람들이 자주 그 집 창문을 힐끔힐끔 바라본다. ....... 며칠 후... 국가보위부 예심실에는 그날 밤에 철수와 함께 술을 마신 친구 5명이 모두 불리워 갔다. 독방에 한명씩 들어간 그들은 2일간에 걸쳐서 그날 밤 술자리에서 있었던 사실들과 누구누구는 무슨 말들을 했다는 자백들을 하고 진술서를 쓰고 손지장들을 찍었다. 그리고는 보위부에 들어와서 취조 받은 사실을 밖에 나가서 누설 할 경우에는 법적책임을 지겠다는 확인서에 지장을 찍고야 풀려났다. 그들이 얼마나 혼이 빠졌던지 도무지 이틀 만에 머리가 하얗게 희어지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서 허둥거리며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알아보지 못하고 문을 닫아거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그 5명의 친구들 중 한명은 몇 달 후에 보위부에 불려가서 친한 친구를 고발한 죄를 큰 공로로 인정받아 공화국 국기훈장 3급을 수여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하늘 아래에 몇이 아니 된다.
그 후에도 철수의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은 지금까지도 없다 오직 그의 아내와 어린 딸은 어느 날 밤에 보위부 차량에 실려서 이름도 모를 수용소로 끌려갔다. 죄 없는 그의 늙은 부모와 친척들은 모두 산골로 뿔뿔이 추방되었다. ... 사실상 철수는 보위부에 잡혀가서도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개혁개방을 해야 발전된 나라를 건설 할 수 있다고 끝까지 주장하였다 한다. 그래서 더 모진 고문을 받은 그는 만신창이 된 몸으로 ”당의 주체적인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과 계급노선을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대중을 당의 경제노선 반대에로 선동한 반당 반혁명 분자“ 라는 죄명을 받고 살아서는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이 되었다한다. ... 과장은 말을 마치면서 “동무도 술을 좋아하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어서 내가 미리 충고를 해주는 것이니까 정말 주의하라구. 우리들은 흰 것을 검다고 하고, 검은 것은 희다고 말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되. 술좌석에서 아무리 친한 친구가 물어봐도 오직 ‘위대한 수령님이 이끄는 우리의 주체경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이다. 다른 나라의 것은 하나도 볼 것이 없다.’ 라고 말을 해야 동무도 그리고 동무네 가정도, 행복도 지킬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 하고 진심을 담아 부탁하였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과장동지 잘 알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답했다. “물론 그래야지, 그래야 며칠 후에 자네의 아내가 우는 아이를 업고 또 신 새벽에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일이 없을 것 아닌가.” 이 말을 남기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스적스적 숙소를 향하여 걸어가던 우리 과장의 뒷모습을 나는 지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그리운 모습으로 간직하고 있다. 베이징의 그날 밤은 풀벌레 우는 소리가 유난히도 처량하더라. 그때로부터 20년 동안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살던 나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진리를 찾아 대한민국으로 삶의 방향타를 돌렸다. ............................. 2017.03.21 서울에서 김태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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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보고 느꼈지만 잡혀가는 사람들이 잘못해서 흔적없이 사라진것으로 생각했었지요
참으로 이상한 나라에서 살았다는 생각이듭니다 .통일을대비하여 이런글 여러방면으로 써놓으면 좋은
결과 있으리라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