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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땅을 찾아서 - 김수명 씨 [정착성공 사례]
Korea, Republic of 김정원 0 536 2017-11-12 19:52:39

한 척 배에 가족의 운명을 싣고
2008 9 19일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속에 검푸른 파도만이 뱃전을 쉼 없이 두드렸다. 위험한 길이니 돌아서라고 만류하는 건지, 어서 떠나라고 등 떠미는 소리인지. 배에 앉은 세 남자의 비장한 얼굴이 가끔 지나가는 배의 전조등이 잠깐씩 비칠 때마다 언 듯 드러났다. 배가 육지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은 더 조급하고 심장은 밖으로 튀어 나올 듯 세차게 뛰었다. 이제는 너무 멀리 온지라 뭐라고 변명할 여지도 없다. 오직 무사히 그 땅에서 필사적으로 멀어져야했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김수명씨와 두 아들이었다.
손도끼 하나씩, 그리고 창 하나씩을 준비했지요
그래도 아버지는 여차하는 순간이면 자신이 배를 몰아 상대를 향해 돌진 할 테니 아들들에겐 스티로폼 세 개씩을 묶어 손수 만든 구명대를 차고 바다에 뛰어들라고 미리 당부했다. 그렇게 바다 위에서 9시간, 수평선에 동이 터 올 무렵 배는 대청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이젠 살았구나
안도의 숨이 저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이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 래 목숨을 걸고 한 밤을 달려, 그것도 망망대해를 뚫고 탈출을 시도한 것이었을까


불행은 항상 엎친 데 덮치는 격
탈북하기 전 김수명씨는 북한에서 중학교 음악교원이었다. 원래는 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다가 아내가 교통사고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대학보다는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중학교 음악교원이 되었던 것이다. 나날이 어려워가는 식량사정 때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식량 구하려 나갔던 아내가 자동차전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으로 간신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을 그 때 느꼈지요.”
온 가족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식물인간으로 3년 여 세월을 버티던 아내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심정을 김수명씨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런데 그것은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연이어 시름시름 아프시던 아버지도,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대학에서 공부하던 아들들에게서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보이지 않자 김수명씨는 마지막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탈북!
며칠 안에 아들이 잡혀 갈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그는 서둘러 북한을 떠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작은 배를 타고 남한으로 직접 내려가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맏아들이 공업대학에서 기계를 전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업할 때 쓰려고 개조해 놓은 배가 있었다. 낡은 나무배에 발동기를 설치해 장거리항행이 가능하도록 한 배를 탈북에 이용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세 식구는 사람들 몰래 있는 돈 모아 기름도 넉넉히 준비했다.
60년대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에서 귀국선을 타고 북한에 온 김수명씨 일가는 일본의 친척들을 통하여 경제적 지원도 받아 크게 어렵지 않게 살아 왔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의 음악교원으로서 두 아들은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누구보다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고난의 행군은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안겨 주었고 결국은 그 땅을 등지고 떠나는 막다른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던 취업
배운 것도 없고 컴퓨터도 모르고 경제지식도 모르고,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의 김수명씨의 심정이었다.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을 정도의 인테리었던 김수명씨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행히 두 아들은 모두 대학에 입학하여 한국에서 다시 학업을 계속했다. 아버지로서 해 줄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그를 힘들게 했지만 더욱 든든한 아빠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지 배워 취직을 하려고 했다.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 컴퓨터와 전기에 대한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러나 자격증이 있어도 육십이 넘은 탈북자를 받아주는 곳은 별로 없었다.
탈북자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늘 탈북자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 될 것처럼 하다가도 제가 탈북자라고 이야기하면 선생님은 집에 가서 기다리십시오, 우리가 연락할테니까요라고 했단다. 친절한 거절이었다.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트 지하에서 쏟아져 내리는 오물 처리하는 일도 했다.그러던 어느 날, 일하는 중 머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었는데 뜻밖에 뇌종양이 있다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받았다. 북한에서 크지 않은 병으로도 식구들을 잃었던 수명씨였기에 두 아들을 두고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의사를 믿었다. 뛰어난 대한민국의 의료 기술 덕분에 초기에 발견된 종양은 수술을 받고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다. 
대한민국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면서 항상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의 안녕을 지킨다는 긍지감을 안고
낙타가 바늘 구명에 들어가듯 취업에 성공한 그는 2012 1월부터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하여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매일 매일 전심전력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했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하나 휴지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그를 아파트 주민들은 항상 밝은 인사를 건네왔다. 
그런데 함께 근무하는 동료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주인다운 입장에서 일하는 수명씨와 생각이 달랐다. 처음에는 눈에 거슬려도 참다가 3개월이 지나서 지적을 했다. 좀 양심적으로 근무하면 안 되냐고 하면 지금 양심으로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오히려 코웃음을 쳤고 그것도 모자라 관리사무실에 가서는 수명씨에 대해 까다롭고 일도 제대로 안 해서 함께 일하기 힘들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느 날 관리사무소의 실장이 찾아와서 사이좋게 일하면 안 되는지 책망 비슷하게 지적하기에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나 진실은 절대로 가려지지 않았다. 며칠 후 동료경비원이 그 동안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한 번에 알게 하는 일이 터졌고 주민들도 이구동성으로 경비원의 불성실한 근무태도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 다시 찾아 온 실장이 
그 동안 수고 많으셨지요, 내가 사람을 잘 못 봤네요 라고 말했다. 1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주민들이 탈북자라는 걸 혹시 알고 있는가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제가 탈북자라는 건 주민들이 다 알아요, 그게 어때서요? 저는 언제나 성실함과 책임성을 제일 첫 자리에 놓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든 그게 무슨 대수겟어요?”
김수명씨는 오늘도 주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고 아파트 경비에 성실히 임하고 있다. 두 아들들도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능력 있는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어 늘 자랑스럽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는 식구들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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