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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자유의 투사 박찬웅 선생님, 편히 가십시오
남신우 1 358 2006-05-25 11:18:29
인권과 자유의 투사 박찬웅 선생님, 편히 가십시오


카나다 토론토에 사시던 박찬웅 선생님께서 비명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어제 받고 많이 울었습니다. 박찬웅 선생님께서는 저의 집 제일 큰형님과 법대를 같이 다니신 동기동창이셨고, 경기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실 때에는 야구반 코치도 하시면서 저의 작은 형을 야구반에서 가르치신 것 등 저희 집안과는 인연이 많으신 선생님, 형님, 어른이시었습니다.

저는 박찬웅 선생님을 아주 뒤늦게 2001년경 처음 만나 뵈었습니다. 북한인권 일?만나뵙게 되었습니다. 박찬웅 선생님과 아우분되시는 박찬도 선생님께서는 카나다 토론토에 계시면서도 워싱턴이 옆 동네처럼 북한인권 행사 때마다 여러번 내려 오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특별히 북한 인권운동 일을 한다고 내세우시지도 않고, 항상 ‘사람은 옳은 일을 해야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가르침을 받아왔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허망하고 비통합니다. 그러나, 제 이 비탄은 유족되시는 사모님, 아드님, 따님, 동생분들의 비탄에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동생분되시는 인권투사 박찬도 선생님께서 보내오신 조사를 여러분들께 전합니다. 박찬웅 선생님은 진정한 의미의 민주화 투사, 인권투사이셨습니다.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6년 5월 25일
남신우 올림


박찬웅 ‘가족 추도회’에서 박찬도 06.05.20

큰형님(박찬웅)이 2006년 5월 20일(토요일) 오전 10시 23분에 웨스턴 병원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습니다.

5월17일(수요일) 빅토리아 파크 애비뉴와 댄포스 로드에 있는 버거킹 햄버거 집에서 오후 8시쯤부터 글을 쓰시다가, 오후 10시쯤 집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불량소년 두 명의 습격을 받아 쓰러지시고, 정신을 잃은 사이에 주머니에 있던 돈과 열쇠를 털리고, 나중에 정신 차리시어, 집에까지 돌아오셨는데, 그 때의 시간이 약 10시 30분쯤 이었습니다.
두뇌 타박상으로 정신이 몽롱했고 형수님께서 병원에 가자해도 안 간다고 하시니까 나(박찬도)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상황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급히 달려가보니 형님은 머리를 소파에 약간만 걸친 체 땅바닥에 불편한 자세로 누어 계셨습니다. (그때 시간이 오후 11시쯤) 그래서 내가 껴안고 병원에 가시자니까 ‘안가!’라고 완강히 거부하시고, 누구에게 당했느냐니까 ‘젊은 애들 두명!’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무리 졸라도 ‘안가!’ ‘싫어’라고 하시고 ‘내 침대에 눕겠다’고 하셔서 일단 형님 방으로 형수님과 부축하여 모셔다 눕혔습니다. 방까지 가는 길에 여러번 토하셨습니다. 그리고 변소에 가시겠다고 하여 변소로 모시고 갔는데 거기서 변을 보셨습니다. 잠시 자리를 빈 사이에 형님이 혼자서 방으로 들어와 누어 계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원에 가셔야 할 것 같아서 또 병원으로 가자고 졸랐는데 끝내 ‘안가!’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동생(의사인 박찬형)에게 전화를 걸고 의논한 결과 ‘환자의 경우는 제 정신이 아닐 수 있으니까 911을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서 911구급차를 불러 ‘토론토 이스트 제네랄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그 때의 시간이 다음 날(18일, 목요일) 오전1시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집에 도착해서도 2시간 30분이 경과했고 다친 시간으로부터는 2시간 50분이 걸린 셈입니다.

토론토 이스트 제네랄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뇌전문 병원을 찾느라고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습니다. 토론토에 자리가 없어서 윈저로 비행기로 가려고 준비하던 중 ‘토론토 웨스턴 병원’에 자리가 낫다 해서 그리로 급히 운송한 것이 5월18일, 목요일 오후 12시경이었습니다. 수술준비를 하고 오후 3시경에 수술을 시작하여 오후 6시30분 경에 수술을 마쳤는데 여의사 Dr. Hodai가 소생가망이 희박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너무 상처가 크고, 금이 많이 가고, 출혈이 많아서, 수술 후에도 출혈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바라고 3일정도 관망하기로 했습니다.
누어게신 모습이 말쑥해 보였는데, 나중 늦게 집에 돌아올 무렵에는(오후 8시경) 눈 언저리가 핏자국이 많이 생기고 많이 부으신 것이 보였습니다.

5월19일(금요일) 오전10시20분에 Dr.de.Mayo가 와서 소생 가망이 없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날 신체를 기증하는데 필요한 수속을 밟는데 몇 시간이 걸렸습니다. 큰딸 은경이와 큰아들 현우가 동의하고, 형수님이 서명하여 기증하는 수속을 완료했는데, 나중에, 이것은 살인사건이기 때문에 절차상 기증할 수 없다고 하여 기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찬형이와 전화로 여러가지를 상의하면서 진행하였고, 5월20일(토요일) 아침 7시19분 ‘아메리카 웨스트’ 항공기 #269편으로 찬형이 도착하여 의론 끝에 생명보조기구를 다 빼었습니다. 그 시간이 2006년5월20일(토요일) 오전 10시23분이었습니다.
큰형님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을 하지 않고, 가족만 모여 간단하게 추도회를 하고, 화장하여 유골은 ‘알공킨 파크’에 뿌리기로 했습니다. 물론 장지도 쓰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유언에 따른 장기기증은 기술한대로 이루지를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

나는 큰형님을 75년간 형제로서 모시고 지냈는데, 그것이 내게는 얼마나 즐거웠고 기쁜일인지 모릅니다. 형으로서이기보다 스승으로서, 반듯한 분으로서, 인간을 진정 마음으로 사랑하는 분으로서 모시게 된 것이 기쁩니다.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정의’에 불타는 열정을 안고 돌아가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정의로운 글보따리가 그 손에 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는 내 편과 남의 편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옳은 편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옳지 않으면 당장 내 편도 남의 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옳으면 남의 편도 당장 내 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네 편’ ‘내 편’이 없고, ‘옳은 편’이 있을 뿐인데, 옳음에 해당되면 그 명칭이 ‘내 편’일 뿐이었습니다.
어떠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도 큰형님께 물으면 반듯한 직답(直答)이 나오곤 했습니다.

큰형님의 가장 큰 관심은 북한의 지옥참상을 해결하는 일이었습니다. 동족을 수백만씩 굶겨 죽이고 때려 죽이는 김정일은 몰아내야 한다는 신념이시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묵인하고 지낸다면, ‘인간’으로서, ‘한 민족’으로서 살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시었습니다. 그래서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강력히 저항하여 김정일을 몰아내야 한다는 신념이시었습니다. 이런 ‘정의감’이 있으면 김정일은 당장 쫓겨 나겠는데 그렇지 못한 ‘친북 좌익세력’들이 ‘화해협력’이라며 북한에 금품을 퍼주어 김정일정권을 강화시켜, 북한동포를 계속 학살하게 하니 속이 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셨는데, ‘반박정희 독재’운동을 함께 하던 사람들이, 1987년 노태우의 6-29민주선언 이후, ‘박독재’보다 몇십배 더 악랄한 북한의 ‘김정일 독재’에는 저항않는 것에 대해 몹시 실망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민주운동’을 한다는사람들인데, ‘반 (우익)독재 친 민주운동’ 했다는사람들이, ‘반(우익)독재 친(좌익)독재운동’을 한다면, 우리에게 ‘반독재 민주운동자’는 없고 ‘반독재 독재운동자’만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실망을 하면서도 끝까지 민주운동의 예봉(銳鋒)을 간직한 채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분의 지론은 항상 ‘정의’가 없는 ‘평화’는 무용한 것이란 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의는 자유’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 존중의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1926년 10월 29일생으로 80세를 5개월 앞두고 돌아 가셨습니다.
일정때 경기중학을 나오시고 6-25사변을 만나 육군 통역장교로 입대하여 낙하산 유격대에서 활동하셨고, 제대후 서울법대와 뉴욕대학 행정대학원을 나오시고 귀국후 경기고등학교와 연세대 강사, 덕성여대, 인하대 부교수등을 역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반박정희 군사독재운동’과 ‘반김정일 공산독재운동’에 전념하셨습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1976년에 ‘토론토 한국민주사회 건설협의회’에 입회하여 1977년부터 1980년, 1982년부터 86년까지 9년간 회장직을 수행하셨고, 역시 반독재운동을 위해 1987,88년에는 토론토 한인회장을 역임하시기도 했습니다. 평생 저서생활을 하셨는데 한국민주발전사(승전고)16권과 강산려10권이 주력한 것이고, 그 외에도 ‘벌거숭이’ ‘꿈과 현실’등 수필집이 있고, 소설 ‘노들에 지는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한일관계의 서적이 나올 예정입니다.
유족으로는 처 정영선과 장녀 은경, 장남 현우가 있고, 사위 크리스와 며누리 은정, 외손자에 체스터, 벤자민, 액스턴, 친손자에 천명, 천애가 있습니다.
형님의 폭넓은 사회활동으로 인하여 우리 형수님은 어려움이 많으셨습니다.
큰형님은 세상을 위해서만 힘쓴 것이아니라, 가족을 위해서도, 친척을 위해서도, 가깝고 먼 모든이를 위해서도 안 미치는 곳 없이 온 정력을 쏟은 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항상 평온하고 편안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사망을 슬퍼하며 삼가 명복을빕니다.

2006년5월24일 박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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