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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장엽을 모른다.(백두한라회수기중에서 퍼옴)
녹차향기 0 374 2006-05-27 11:48:30
자료출처: 자유북한방송국


[2002년 4월 도라산 전망대 앞 인민군 GP초소를 탈출, 휴전선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탈북자 주성일씨의 인민군병영생활 체험기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이름이 뭐냐?” “넷, 병사 주성일!" 나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기타는 언제 배웠어?” 훈련병들은 삽시에 조용해졌다. “집에 있을 때 배웠습니다.” “그래? 네가 학교 청년동맹비서를 했다던가?”“넷, 그렇습니다.” “오호라, 함흥얄개로군. 함흥얄개는 사막에서도 산다고 소문이 났지.”

여기까지 해서 대화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형제는 몇이야?”다시 물어보는 질문.

“누나 한 명, 여동생 한 명 해서 모두 세 형제입니다.”“그래? 누나 예뻐? 무슨 일 해?”나는 잠시 쭈뼛거렸다. 훈련병 동료들이 보는 것도 보는 것이지만 내 입으로 누나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군부대에서 자라온 나는 이번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기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누나는 공군사령부에서 군사복무를 하다가 임무 수행 중 전사하였습니다.”마지막 말끝이 잠시 흐려졌다. “안 됐군.”사관장 황덕빈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일어섰다. 훈련병들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몰라 하는 눈치였다. 오락회가 다시 시작 되었지만 그 날 나는 완전히 흥취를 잃어버렸다.

훈련이 시작되었고 훈련병들은 힘들어 지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는 총격술과 격술 3단까지 집에서 이미 배워둔 상태였고 철봉, 평행봉도 능숙히 수행할 수 있어서 중대의 모범생이 되었다. 모두다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훈련병들은 ‘샛별조’가 되어 밤을 새워야 했고 찌는 듯한 더위 속에 온몸을 깡그리 빼앗겼다.

사관장은 그 날 이후로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잔심부름과 이것저것 훈련에서 떼어내어 자기 일을 시켰으며 물자조달이나 명절 음식을 할 때에는 나를 꼭 불러 함께 가곤 했다. 그러다보니 장교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농담으로 ‘새끼 사관장’이라고 애칭하면서 이모저모 편의를 봐주기 시작했다. 훈련병들도 나에게 이것저것 부탁도 하고 내게 접근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는 모습이 확연했다.

1997년도. 이 해 북한은 최악의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보병부대에서는 10년 이상 군사복무를 한 군인들까지 영양실조로 감정제대를 하거나 몸 보양을 한다고 중대를 이탈했으며 인민군대의 모든 훈련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훈련을 중지했다. 사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농장원과 노동자들은 살기 위해 골동품을 캐러 다니기 시작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꽃제비들이 발생했다. 여자들은 단돈 50원에 몸을 팔았으며 중학생들까지 너도나도 매춘을 했다.

전선지구에 배치 받은 수십만 명의 군인들은 다른 지역의 군인들보다 도둑과 강도, 강탈 그리고 강간을 일삼았으며 물자를 쥐고 있는 장교, 창고장, 사관장들은 자기의 배를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평소에 별 어려움 없이 살았던 사람에게 갑작스레 위기가 닥치면 더 악랄하게 변하는 법이다. 다행히 민경은 북한군 후방총국에서 직접 물자를 수송, 공급하여 쌀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리 떼먹고 저리 떼먹은 바람에 실지 군인들에게 돌아오는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딜 가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일꾼은 당당하게 떼먹고, 안전원은 안전하게 섯蹈? 보위원들은 보이지 않게 떼먹는 것처럼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군인들 사이에는 ‘하다 못해 화장실 열쇠라도 차고 다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창고장들과 사관장들 앞에서는 부대장까지도 눈치를 보는 정도였다.

나는 군사복무기간 거의 4년 간 물자를 다루어 보면서 황덕빈 사관장처럼 자신의 잇속을 채우지 않는 하사관은 처음 보았다. 물론 그도 다른 군인들처럼 개성시에 처갓집을 가지고 있고, 단골로 다니는 술집도 있지만 한 번도 군인들 앞에 돌아가야 할 쌀이나 군복을 빼돌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언제나 청렴결백한 그 앞에서 군인들은 물론이고 장교들까지 존경해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때 나는 훈련에서 이탈되어 훈련소 식량과 피복을 관리하는 편제 없는 창고장이 되었다. 짬짬이 술을 먹을 수 있는 기회도 생겼고 남들처럼 주린 배를 움켜쥐고 훈련장으로 내몰리지 않아도 되었다. 가끔은 동료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나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기 위하여 짬이 생기는 대로 노력했다. 황덕빈 사관장은 나를 친동생처럼 따뜻하게 보살펴주었고 때로는 엄격한 형이 되고 상급이 되어 채찍질하기도 했다. 형이 없었던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에게서 ‘형’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황덕빈 사관장은 타고난 능력과 기질로 인해 26살 나이에 사람들의 놀라움과 부러움 속에 사관장이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원래는 사관장을 하려면 13년 군사복무 경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마저 누구나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같은 동기가 15명이라면 그 중 한 명만이 될 수 있는 자리라고 불리곤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인생을 개척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자유로운 선택의 불모지였던 북한에서도 인정받아 그 해 7월이면 최고대학인 김일성 종합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훈련에서 엄한 통제, 생활에서는 다정다감한 형으로 부하들의 존경 속에 살았던 그는 그 누구도 겨룰 수 없는 특급무술의 1인자였고 사격의 왕이었다. 스포츠면 스포츠, 음악이면 음악, 무엇이나 그 앞에서는 만사가 무용지물 이였다. 내게 혜택을 베풀어줬다 해서 이렇게 좋게 평가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정말로 그는 뛰어난 능력과 인품의 소유자로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황덕빈 사관장의 부모님은 평범한 농촌에 계셨다. 그러나 자신은 남들보다 토대가 좋고 미남이었으며 신체가 건장했던 탓에 특수부대에 올 수 있었다면서 가끔 농담 삼아 “너 같이 ‘빽’ 있는 자식들 때문에 내가 살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며 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도 알지 못했던 빽 아닌 빽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죽음의 길로 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다름 아닌 그는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 씨와 6촌지간이었던 것이다.

그 날은 5월 중순 휴식일이었다. 사관장은 고생하는 훈련병들을 위해 끼니 때마다 모아두었던 눌은밥으로 떡을 만들어 훈련병들을 먹였다. 그 날 훈련소 중대장은 황덕빈 사관장에게 오늘 저녁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며 집에 불렀다. 중대장네 집에서 명절 음식을 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서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었다.

들거니 먹거니 하면서 오래 시간이 흘렀을 때 갑자기 전투복장을 한 민경과 장교들이 총을 들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하는 황덕빈 사관장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황장엽을 모른다. 놔라, 놔-아-.”
나는 국군이 살포한 삐라를 보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남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황덕빈 사관장이 그의 친척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술자리는 황덕빈을 체포하기 위하여 군 보위부에서 계획한 자작극이었다. 그의 격술과 사격 실력을 알고 있는 보위부에서는 훈련소 중대장으로 하여금 그를 집으로 불러내 술을 먹인 다음 끌고 가려고 했던 것이다.

황장엽이 망명한 후 김정일이 지시한 ‘황장엽의 5대까지 멸망시키라’는 명령과 ‘8촌까지의 대대적인 체포’ 지시에 그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북한군 보위부에서는 황덕빈 사관장의 동향과 동태를 감시하기 위하여 1급 정보원을 붙여 줄곧 그를 감시하고 있었고 그가 무술과 사격의 특급자임을 미루어 이러한 작전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훗날 내가 알기론 황덕빈은 자기가 보위부의 철저한 감시대상이 되었음을 이미 알아차렸고 머지 않아 체포의 순간이 온다는 것도 그의 능력으로 능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북한 정권에 대한 반항심보다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황장엽 비서에 대한 증오심을 더 많이 표현했고, 탈출보다는 순순히 체포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술을 많이 마셔 움직이기도 힘들었던 황덕빈 사관장은 혼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자신을 결박하려는 군인들을 뿌리치고 대문 앞마당에까지 뛰어나와 쓰러졌다. 그때만 해도 그는 북한을 탓하지 않았다. 오직 황장엽을 모른다고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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