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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대한민국 한반도의 근현대사 역사는? 전문가,학자 들의 의견이 다 따로 노니...!
Korea, Republic of 돌통 0 393 2019-02-20 20:09:02
 

그래도 지금까진 객관적으로 사실에 근접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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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로 만들기 위해 편의대로 쓰여진 김일성의 회고록)           
? 글 사이사이, 사진들은 제외했음..
 
 
1945년 8월 23일의 김일성(33세). 평양에 진주했던 소련군 제25군사령부 직속 특별정치선전공작대인 제7부 부책임자 레오니드 바신 소령이 사무실에서 김일성에게 양복을 입힌 후 찍은 사진이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에 평양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성주(金聖柱)이나 항일투쟁 과정에서 김일성(金一成·金日成)이라는 변성명을 쓴 것이 그 뒤 본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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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문은 선산(善山) 김씨라고 했다가 전주 김씨라고 말하는 등 김일성도 왔다갔다 했다. 선대(先代)에 살길을 찾아 전주(全州)에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만경대에 뿌리를 내린 것은 증조할아버지인 김응우(金膺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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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본디 농민이었는데 생활이 어려워 지주의 묘지를 관리하며 산당집을 얻어 살았다. 그는 미국의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사건 당시 마을 사람들과 항쟁에 참여했다고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1권 8쪽)에서 기록하고 있으나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참전’에 의미를 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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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소작살이를 했기 때문에 집안은 매우 어려웠다.        아버지 김형직(金亨稷·1895~1926)은 평양 숭실(崇實)학교를 중퇴하고 농사를 지으며 한약방을 경영했다. 그는 만경대의 순화학교와 강동의 명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강반석(姜盤石·?~1932)이었는데 이는 그가 기독교도였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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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반석’은 기독교에서 여호와 또는 그리스도를 뜻한다. 그의 외할아버지 강돈욱(康敦煜)은 칠골교회 장로로서 조만식(曺晩植)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북한 부주석으로 최고인민회의 중앙위원이며 기독교연맹위원장인 강량욱(康良煜) 목사의 육촌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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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어머니를 따라 예배당에 자주 다녔다.(1권 65쪽) 그 집안은 남한의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손원일(孫元一) 제독의 아버지 손정도(孫貞道) 목사와 가까웠으며, 김일성은 그의 딸 손인실(孫仁實)과 눈깔사탕을 한 번씩 나누어 빨아먹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설처럼 회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엄숙한 종교 의식과 목사의 단조로운 설교에 싫증을 느낀 다음부터 예배당에 잘 다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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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뒷날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조직을 이끌 때 기독교에서 암시받은 바를 많이 이용했다.        일곱 살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일성은 보통문 앞에 나아가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1권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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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민족 운동은 그토록 ‘조숙하게’ 시작되었다는 것이 북한의 공식 입장이다.         그의 가족은 3·1운동 직후 중국 요령성(遼寧省) 임강(臨江)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셋집을 얻어 병원을 차리고 ‘순천의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증도 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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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평양을 떠나기 전에 어느 친구에게 부탁하여 얻어온 졸업증이라고 생각된다.(1권 58~60쪽) 1923년에 김일성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외할아버지가 교감으로 봉직하는 창덕(彰德)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던 그는 아버지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을 떠나 만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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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화성의숙(華成義塾)에 다니며 공산주의 고전에 나오는 혁명의 원리들을 조선의 현실과 결부시켜 생각했다. 그는 열네 살을 전후로 하여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읽었다는데, 스칼라피노(R. A. Scalapino)는 이에 대하여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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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산주의(Communism in Korea)’ 1권 206쪽)        
김일성은 열네 살이 되던 1926년 10월 17일에 타도제국주의동맹이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다고 한다.(1권 247쪽)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도쿄대학 교수)는 열네 살의 소년이 항일단체를 조직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아마도 학생들의 공부 모임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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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만주항일전쟁(金日成の滿洲抗日戰爭)’ 53쪽)      
이 무렵에 그는 “키가 자그마하고 이마가 벗겨진 중년의 인상 좋은 숙장(塾長)”을 만났는데 그가 곧 최동오(崔東旿)이다. 그는 뒷날 남한의 외무장관을 지냈고 1986년 천도교 교령으로서 월북한 최덕신(崔德新)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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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신은 김일성의 두 살 아래로서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다. 최덕신이 북한으로 넘어간 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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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1929년에 길림중학교 학생으로서 처음으로 중국 공안(公安)에 체포되었는데 죄명은 조선혁명군 사건이었다. 그는 1930년 5월 초에 출옥했다. 당시 그는 조선혁명군 이종락(李鍾洛)의 부하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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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학계는 김일성이 이종락의 부하였던 사실을 부인하며 그가 독자적으로 활약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기와 더불어’(2권)의 화보에 수록된 동아일보(1931년 3월 26일자)의 기사에는 이종락의 이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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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나 북한의 공식 기록은 이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 왜냐하면 중국공산당과 그의 초기 관계를 부인함으로써 자주성과 독자성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순수한 조선의 영웅’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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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활동 -김일성의 보천보 사건은 '맹목적 모험주의'일뿐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동아일보 1931년 3월 26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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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조선혁명군 이종락의 부하였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이종락의 이름이 들어간 상단 4번째 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다           항일운동 시기에 김일성의 활동에서 중요한 것이 곧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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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직의 개황을 보면, 제1군(1934년 성립)의 군장 겸 정치위원은 양정우(楊靖宇)였고, 제2군(1935년 성립)의 정치위원은 위증민(魏拯民)이었고, 제5군(1936년 성립)의 군장은 주보중(周保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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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당시에 김일성은 제1군의 제1사 사장이었다.       제3군 제1사 제1단 단장은 최현(崔鉉)이었는데 이가 지금 북한의 2인자인 최룡해(崔龍海)의 아버지이다. 김일성은 제3사 사장(1936), 제2사 제5단 단장(1936~1938), 제1방면군 지휘관(1938~1941)으로 옮겨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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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유격부대 분견계획표에 따르면, 김일성의 활동 지구는 돈화·연길이었고 임무는 그곳 철로를 감시하고 운행을 방해하는 일이었다. 그는 동북항일연군의 활동 지역인 장백현·임강현·안도현 등에서 유격대를 조직하는 한편 모병 공작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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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으로서의 명성을 얻은 것은 그 유명한 보천보(普天堡) 사건이었다. 김일성의 일행은 1937년 5월 하순에 장백현 19도구 덕부동(德富洞) 산중에 모여 갑산군(甲山郡) 보전(保田) 부락을 습격하기로 결정하고 산중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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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6월 3일 밤 12시경에 압록강을 건너 4일 심야에 경기관총 4대로 무장한 빨치산 약 100명을 이끌고 혜산진 경찰서 관내 보천주재소를 습격하고 우편소와 소방대 등을 불태워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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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大川) 경부가 인솔하는 36명의 경관과 혜산진 수비대가 출동하여 반격했지만 이 습격으로 일본군 측은 다구치(田口)와 일본인 4명, 한국인 1명, 도합 7명이 사살되었고 중상자도 7명에 이르렀다.(동아일보 1937년 6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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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정치위원장 위증민과 6사 정치 주임인 전광(全光)에 대한 현상금이 3000엔(圓)이었던 데 견주어, 보천보 사건이 일어난 뒤 김일성과 최현의 현상금이 각기 1만엔으로 뛰어올랐다.(‘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30권 4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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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항일운동을 하던 많은 빨치산 지도자가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의적(義賊) 효과(Robin Hood effect)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보천보 사건이 ‘맹목적 모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스칼라피노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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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戰果)로 본다면 보천보 사건보다 훨씬 더 전과가 혁혁했던 마에다(前田) 부대 섬멸 작전이 북한 역사가들에 의해 더 많은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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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1940년 3월 25일 화룡현 홍기하(紅旗河)에 있는 일본군 마에다 부대를 습격하여 일본군 100여명을 사살하고 30여명을 생포했으며 기관총 6정, 보총 100여정, 기타 탄약과 양곡을 노획한 사건을 의미하는데 그 주모자가 김일성이었다.(‘동북지구조선인혁명투쟁자료회편(東北地區朝鮮人革命鬪爭資料匯編)’ 910쪽)       김일성의 회고록(7권 399쪽)에 따르면, 무기를 바치고 투항한 30명쯤 되는 적 이외에는 모두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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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이후 김일성은 동변도(東邊道) 일대에서 신출귀몰한다는 평판을 일본군으로부터 들었다. 일본군이 그들을 섬멸하려고 했으나 그들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었다. 기광서(奇光緖) 교수(조선대학교)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의 공로로 김일성은 소련 정부로부터 적기(赤旗) 훈장을 받았다.        이때 김일성이 거느린 빨치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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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삼천리(三千里)’ 기자 양일천(梁一泉)이 김일성을 만난 면담 기록에 따르면, 기본 부대는 60명과 그밖에 몇백 명의 보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자 당원은 11명이었다. 비를 피할 만큼 작은 초막을 지어놓고 약 3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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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에는 비품과 식량 공급 등 내부 역할을 맡은 내무부와 군대의 감독·원정 등을 지휘하고 외정을 섭리하는 외무부를 두고 일을 처리했다. 마적 대장 김일성이라 하면 국경 일대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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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만주어에 능통했다. 김일성의 명성이 높아지자 일본은 국내 친일 단체들에 그를 회유하도록 압박했다.     그러한 압력에 동원된 사람은 당대 조선의 최고 문장이었던 최남선(崔南善)이 이끄는 동남지구특별후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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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김일성에게 보내는 회유문(懷柔文)에서 “황량한 산야를 정처 없이 배회하며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제군이 동포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했다.(‘삼천리’ 1941년 1월호 206~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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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김일성의 행적은 주간에는 매복·은닉하고 야간에 활동했으며 주거 공간은 토굴이었다. 정신과 전문의 백상창(白尙昌)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그는 야행성(夜行性)과 굴토성(堀土性), 그리고 태양기피증(photo-phobia syndrome)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연속선상에서 고소공포증과 비행기피증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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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앞서(제1회) 지적했듯이 스탈린(J. Stalin)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자신의 손에 죽은 이들에 대한 죄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후락(李厚洛)의 증언이 보여주듯이 그는 회담을 하자고 오밤중에 사람을 불러냈고, 방은 짙은 커튼으로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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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평생에 두 번 비행기를 탔는데 한 번은 고르바초프의 초청을 받아 그가 보내준 전용기로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그 다음은 수카르노의 초청을 받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까지 언급된 세 명의 독재자들에게는 기이한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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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잘생겼고, 미성을 타고나 어렸을 적에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성가대에 뽑혀 찬송가를 불렀고, 연설에 탁월했는데, 그 가운데 둘은 고소공포증과 태양기피증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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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에게 아들 김평일이 두 명이었다      1941년에 위증민의 사망과 함께 지휘부가 흔들리고 일본군의 추격이 가열해지자 김일성은 소련으로 넘어가 홍군 오케얀스카야(Okeyanskaya) 야전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때 김책(金策)과 최용건(崔庸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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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7월 극동전선사령관 아파나센코(I. R. Apanashenko)는 브야츠코에 아 아무르(Vyatskoe A Amur) 마을에 88중조여단의 결성을 명령했다.       88중조여단은 뒷날 88독립보병여단이라는 다국적 저격부대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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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김일성은 대위로 임관되었다. 이 당시에 김일성은 소련 안전위원회(비밀경찰 KGB의 전신)의 정보원이었다는 기록(여정(呂政)의 면담, 동아일보 1990년 4월 29일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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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88독립여단의 대위로 활약할 당시에 그의 대일 투쟁은 실전(實戰)으로서의 무공을 세우지 못하고 주로 암약에 그쳤는데 이는 소련과 일본의 외교관계 때문이었다. 일본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와 러시아 외상 몰로토프(V. M. Molotov) 사이에 일·소(日蘇)중립조약(1941년 4월 5일자)이 체결되어 있어 일본과 소련의 밀월관계로 말미암아 소련이 자국 영토 안에서 항일투쟁을 허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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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에 김일성 부대는 만주와 조선에서 후방을 교란하고 조선계 제5열 부대를 조직하여 일본 화폐를 수집했다. 이때(1944) 김일성은 두 차례에 걸쳐 모스크바에 다녀왔다.            여인들                           
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1937년 6월 6일자 기사          
이 무렵(1941)에 김일성은 김정숙(金貞淑)이라는 한 여인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심양(瀋陽)의 문서고(?案)에 소장된 이력서에 따르면, 김정숙은 1917년에 함경북도 회령(會寧)에서 빈농의 딸로 태어났는데 국문을 이해하는 정도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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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32년에 만주로 이주한 아버지를 찾아 연길현 팔도구(延吉縣 八道溝)로 갔다가 1935년 동북항일연군 제1지대에 입대했다. 그는 아동단과 청년단에서 활약했으며 체포된 사실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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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38년 3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부대 안에서 취사 업무를 맡았다. 그는 1940년 10월에 부대를 따라 소련으로 이동했다.        김일성과 김정숙은 빨치산 시절인 1942년 2월에 결혼하여 그 해에 맏아들 정일(正日·유라)을 낳고 1944년에 둘째 아들 평일(平日·슈라)을 낳았는데 이 둘째 아들은 1948년에 주석궁 연못에서 익사했다. 죽음의 이유는 김정일의 실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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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은 1949년 출산 중에 사망했다. 김일성은 아내를 살리고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김일성은 1951년에 비서 김성애(金聖愛)와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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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이들 사이에 아들이 출생하자 김일성은 비운에 죽은 둘째 아들의 이름을 따서 다시 평일(平日)로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이다.(이 사람이 폴란드 대사를 거쳐 지금 체코 대사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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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애증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며, 김정일로 하여금 평일을 볼 때마다 형제 살인의 죄의식(fratricide anxiety)이라는 정신적 외상(trauma)에 시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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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 되자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에 소련 제25군 88여단의 부하 40명을 대동하고 원산(元山)을 거쳐 귀국했다. 소련이 처음부터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여긴 것은 아니며 단지 주목받는 한 인물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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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초순 극동군사령관 바실레브스키(A. M. Vasilevskii) 원수는 김일성과 박헌영(朴憲永)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스탈린의 긴급 지시를 받고 특별 수송기 편으로 그들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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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점의 자리에서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 후보로 추천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그가 3년 넘게 소련 군대에서 정치·군사 훈련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그의 리더십과 계략이 뛰어나다고 평가를 받았으며, 1930년대 중국과 만주 국경지대에서 중국공산당원으로 항일 활동을 했을 뿐 종파 투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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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박헌영은 인민 전선의 논리를 펴다가 스탈린으로부터 면박을 받으면서 탈락했다고 소련 부영사 샤브신(I. Shabsin)의 아내 샤브시나(P. I. Shabshina)는 증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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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낙점된 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1945년 12월)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1946년 2월)을 거쳐 북로당 제1부의장에 피선되었고, 북한 정권 수립(1948년 9월 9일)과 함께 초대 수상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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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그를 항일 민족 영웅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다.         평양방송은 하루의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마칠 때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반드시 틀도록 했다. 곡을 지은 사람은 북한의 국가를 작곡한 김원균이었고 작사자는 이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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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으로 시작하는 그의 찬가는 애국가에 우선했고 그 장면은 한국전쟁 당시 공산 점령 지역에서도 그대로 연출되었다. 김일성이 지방 순방에 나설 때 사진 기술자를 딸려 보낸다거나 중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슈티코프(T. Shtykov) 상장이 기자회견에 직접 나섬으로써 언론의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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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관련하여 끝으로 논의해야 하는 부분은 남한 사회에서 거론되고 있는 ‘가짜설’의 진상을 살펴보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생애로 볼 때 김일성은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이 공산주의에 입문했으면서도 장수했다는 사실이 일차적으로 그의 우상화의 기반이 되었으며, 더구나 일본군에 체포되었을 때도 신분이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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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30만~40만명이 모였다. 주석단에는 소련 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I. Chistiakov) 대장, 정치위원 레베데프(N. Levedev) 소장, 민정사령관 로마넨코(A. Romanenko) 소장과 환영대회 준비위원장인 조만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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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연단 가운데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가짜 논쟁-"김일성은 가짜" vs "가짜가 아니다"          김일성과 그의 후견인이었던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왼쪽)        김일성 가짜설을 최초로 발설한 사람은 극작가 오영진(吳泳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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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출신으로서 김일성 환영대회를 직접 목격한 그는 회고록 ‘소군정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142~143쪽·1952)에서 그날 군중이 기대했던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대신에 3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청년이 원고를 들고 마이크 앞으로 다가서자 “가짜다”라고 군중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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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젊음은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 뒤로 이명영(李命英·전 성균관대학교 교수)이 가짜설을 끈질기게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성은 만주의 전설적인 무장투사인 김일성과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서 진짜 김일성은 1937년 11월에 만주 무송현(撫松縣)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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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명영의 이러한 주장은 ‘진짜 김일성’의 ‘전설적인’ 투쟁사를 사실(史實)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 당시에 김일선(金一善·30)이라는 항일 무장대원이 있었는데 아마도 김일성과 같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이명영은 그 두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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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후세 역사학자들이 둘을 혼동하면서 가짜 김일성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가짜설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반박하고 나선 인물은 3차 조선공산당 대표였던 김철수(金?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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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가짜였다면 남한에서 이승만(李承晩)이 주도한 독촉(獨促) 회의 당시에 내각 구성을 숙의하는 과정에, 그토록 나이 어린 그를 군사위원장으로 천거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가짜 김일성 논의는 결국 이승만의 조작극이었다고 반박했다.(‘지운 김철수(遲耘 金?洙)’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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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적으로 “김일성은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서대숙(徐大肅·하와이대학교 교수)이다. 그는 이념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굴곡된 현대사를 객관화하고 싶어 했으나 분단으로 남북한의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 현실에서 학문의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제3국에서 영어로 ‘김일성 평전’(1988)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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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진위 논쟁은 한국 사회가 처해 있던 냉전적 상황이 조성한 해프닝이었다. 물론 북한에는 김일성 신화가 존재하고 이를 탈(脫)신화화하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고(故) 서동만(徐東晩) 교수(상지대학교)의 주장처럼 김일성의 진위 문제는 남북한의 이념 대결이 낳은 ‘소극(笑劇)’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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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돌아보면 많은 신화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신화는 어이없고 비논리적이었지만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한 시대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러한 신화는 대부분 그가 아닌,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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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신화는 본래의 가치마저도 훼손하는 경우가 많다. 그 신화가 어느 때인가는 허상임이 드러나겠지만 그러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과 아픔이 따른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지배계급에는 그 신화를 생존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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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북한 정권이 존재하는 한 김일성 신화의 존재 가치는 결코 감소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 건립된 김일성의 동상 3만개는 아마도 세계적으로 부처님과 예수의 조상(彫像) 다음으로 많은 ‘성인’(?)의 모습일 것이다.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방영되는 평양TV에서 김일성 부자에 관한 방영은 남한의 기독교방송에서 등장하는 예수의 빈도보다 낮지 않았다. 내가 본 평양의 거리에는 김일성이 살아 있었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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