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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거부권 행사는 없을 것이다
박석균번역문독자 0 380 2005-02-12 02:14:00
이 번역문은 日本의 “SAPIO 2005년 1월 5일 자”에 게재한 글을 韓國市民思想敎育硏究所 (所長 韓 昇 助 高大 名譽敎授)가 韓國自由總聯盟
박 석 균 理事에게 번역을 의뢰하였고 그 번역문을 현명한 소수의 홈페이지 http://www.wisemid.org 의 전문가 명사 칼럼 편에 올린 것임.


중국의 거부권 행사는 없을 것이다

1994년의 한반도 위기로 인하여 중국과 북한의 「혈맹」관계는 붕괴했다.
UN 안보리의 제재결의= 미국의 북한공격에 대하여 중국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다.

오찌아이 노부히꼬(落合信彦)
번역 요약- 朴 錫 均


중국이 북한에 대하여 가지는 커다란 영향력-을 ‘중국카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북한을 위기에서 구해 냈다. 중국의 힘으로 인하여 현재도 북한이라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 설득 당하면 북한이 얌전해 진단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중국 정치가, 외교관들을 취재해 왔던 국제 저널리스트 오찌아이 노부히꼬씨는 “이미 중국과 북한은 「혈맹」이 아니며 「중국카드」는 과거의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했다.


“북한은 東(동)아시아의 癌(암)이에요.”이런 발언을 한 사람이 일본이나 미국의 정치가라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 이 발언은 중국 외교부에서 中樞的(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던 인물이 90년대 말에 나와의 (off the record) 솔직한 대담취재에서 비공식적으로나마 한 말이었다. 그 발언 직전까지도 “북한은 피로 맺은 동맹국”이라고 공식발언을 하던 인물이 녹음기의 스위치를 끄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 발언이 중국의 대 北韓觀(관)을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반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양국관계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였다.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지원하는 UN군(사실상은 미군)에 대항하여 중국은 북한을 지원하였다. 「義勇軍(의용군)」이라는 형식은 취했지만 실제로는 正規軍(정규군) 20만을 파병하여 당초의 열세를 만회, 한반도 전역을 제압하고 있던 UN군을 거꾸로 38선 부근까지 밀어냈다. 그 후 1953년 休戰(휴전)이 성립할 때까지 중국은 미국과 全面戰(전면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두 나라 사이의 “血盟(혈맹)”관계가 없었다면 북한이라는 나라는 1950년 연말에 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중국이 북한을 지원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북한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동서 냉전이 격화하여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격돌하는 한 복판에서 「목구멍」에 위치하는 북한을 미국이 조이고 있다는 것은 중국에게는 死刑(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마오쩌퉁(毛澤東)은 북경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것을 각오하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것이다. 덧붙인다면 마오쩌퉁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참전한 결단은 血盟關係(혈맹관계)가 틀림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혈맹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는가?
중국이 대북한 정책을 전환하는 계기는 역시 1994년 클린턴 정권이 북한을 공격하기 직전까지 갔던 시기였다.
이때 김일성은 중국의 최고실력자 뎡샤오핑(鄧小平)과 전화로 상담하기을 원했지만 뎡샤오핑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수상인 李鵬(리붕)과 의논해 달라”고 차겁게 대응하였다. 당시 건강이 나빴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웃나라가 전쟁에 말려들는지도 모르는 판에 전화로라도 수뇌회담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런 실권도 없는 이붕과 상담하라고 했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며 뎡샤오핑이 “나는 모른다”고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뎡샤오핑의 머리 속에는 북한을 원조한다는 생각은 물론 아예 없었던 것이다. 1992년의 남순강화(南巡講話)로 새롭게 시장 개방에 박차를 가하고 ‘89년의 천안문 사태로 악화한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가려는 마당에 미국과 부딪쳐서 얻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김일성과 전화통화를 했다면 그 내용이 어떠하든 이튿날 평양방송에서는 “피로서 맺은 중국이 북한을 원조하기로 약속했다”고 보도하여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뎡샤오핑은 차갑게 김일성을 떨쳐버렸던 것이다. 그런 순간에 “혈맹”관계는 완전히 붕괴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당초에 중·조 “혈맹”관계라는 것은 양쪽이 다 갓 태어난 신생 독립국가이며 가난한 공산주의국가라는 동류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쪽은 발전도상국의 「최우등생」인 중국이다. 다른 한 쪽은 스탈린 국가에다, 중세 봉건국가 그대로의 북한이다. 입장이 1950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미국을 필두로 하는 서방제국과 관계강화를 위해 매진하고 있는 중국에게는 미국으로부터 「불량깡패국가」로 지목되고 있는 북한이라는 존재는 “이미 피를 나눈 부모 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국주도의 남북통일을 중국은 내심 환영하고 있다.


“그렇지만 북한이 중국의 목구멍에 위치하는 지정학적 사실에는 변화가 없지 않으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북한의 김정일체제가 붕괴하고 한국과 통일하여 민주국가가 된다면 중국의 안전보장에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북한을 지원하지 않을 수없었다는 관점이다.
이런 지적은 매우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핵심부분을 오해하고 있다. 확실히 지리적으로는 북한이 중국의 목구멍에 해당한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보아서 북한은 이미 중국의 목구멍에 해당하지 않는다. 지리적인 분석은 지형이 변화하지 않는 한 불변이지만 지정학적 분석은 주변의 정치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한국전쟁 당시는 「지정학적=지리적」이라고 이해해도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양자가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사실은 현재의 중·한관계를 예로 들면 알기 쉽다.
중국과 한국은 한국전쟁 때 맞대고 총질을 한 사이다. 그러므로 냉전시대에는 양국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하나 지금은 양국관계가 매우 양호하다. 한국의 대 중국 수출은 과거 3년 동안에 2배로 늘어났고 드디어 중국은 한국 최대 수출 상대국이 되었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그 위에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중국과 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접근해오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가 중국의 코앞과 눈앞에 있다는 것이 이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에 투자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이웃에 있는 것이 좋다고 까지 생각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 체제 붕괴와 동시에 대량 難民(난민)이 발생 할 것인데 한국이 알아서 2000만 북한 국민을 먹여주는 것이 중국에게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다시 말하면 남북이 통일 되면 “북한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지킨다.”는 주한미군의 명분도 없어진다. 결국 한국전쟁 당시와는 상황이 180도 달라진 것이다. 극단적인 얘기지만 한국에 의한 남북통일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환영하여야 할 일인 것이다.
현재 중국의 장기적 국가전략을 생각해서라도 북한의 존재는 중국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중국의 장기 전략은 「2049년 건국 100주년까지 미국과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대치할 수 있는 대국이 되는 것」이다. 2049년이라는 목표연도는 타당한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대미 전략은 냉정한 현실 분석에 기초한 것이다.) 이 것을 역으로 말한다면 2049년까지는 중국이 미국과 주먹질하며 싸울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이다.
북한은 냉전구조 붕괴 이후 이 중국의 長期(장기) 戰略(전략)을 방해만 해 왔다.
아주 알기 쉬운 예로서 93년의 노동 미사일 발사와 98년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를 들 수 있다. 이 폭거가 눈앞에서 전개되는 것을 보고 그 유명한 「평화 멍청이」일본도 북한의 군사 위협을 감지하게 됐다. 그 결과 일·미 공동 전역미사일 방위(TMD) 공동연구에 스피드가 붙었고 2003년 12월에는 다층(多層)BMD(탄도 미사일 방위)시스템의 도입을 각의가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움직임에 가장 곤란을 겪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다. 마침내 BMD의 실전배치가 계획대로 전개된다 하드라도 수년 뒤의 얘기다. 그 무렵이 되면 북한의 위협이라는 것이 사실상 제거된 다음일 것이다. 비록 도입의 동기는 「북한 미사일 대책」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중국 미사일 대책」으로서 배치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간의 또는 일본과 중국간의 군사력 격차는 점점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중국은 일본의 BMD도입을 재삼 비판해온 것이지만 일본과 미국에게는 『북한 미사일에 대항하기 위하여』라는 제격의 구실이 생긴다. 중국으로서는 “북한이 쓸데없는 짓을 해서 골치 아프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이 출석을 거부하고 있는 6자회담에 “북한 참석을 종용하지 않고 있는 중국의 비협조”를 미국으로부터 비판 받고 있는 형편이다. 중국보고 말하라면 “중국이 출석하라고 말해도 북한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겠지만 그렇다면 호스트(초청) 국가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강화하고 싶은 중국으로서는 도중에서 호스트(주역) 국가로서의 지위를 포기할 수도 없는 딜레마가 있다.
오래전에 의절한 건달 자식의 행위 때문에 “너의 교육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비난 받던 어버이- 예가 적절하지 않을는지 몰라도 현재의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알기 쉽게 말한다면 이런 패턴이 될 것이다.


북한제재 결의때 중국은 결석할 것이다.


6자회담에 북한을 참가 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카드」의 효과는 현저하게 떨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그뿐 아니라 중국이 「적극적으로 중국 카드를 포기」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지금까지 3차 회담이 진행된 6자회담의 호스트(초청자) 역을 해 왔던 王毅(왕의) 외무차관도 7월에 駐日大使(대사)로 전임하고 후임 외무차관에 武大偉(우따이) 駐日大使를 임명한 교체인사도 이를 말해준다.
미국도 부시 제2기 정권 발족에 따라 지금까지 6자회담 미국 측 대표를 맡아온 케리 국무차관보(아시아 담당)를 퇴임 시켰다. 그는 국무성 안에서 비교적 중국카드의 존재를 믿고 6자회담에서는 王毅를 중개 역으로 참을성 있게 북한과 교섭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케리의 후임은 아직 미정이지만 볼턴 국무차관보와 가까운 대북강경파 인물이 취임될 것이 확실하다. 어찌했던 미국도 「중국 카드」를 단념했음이 틀림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을 들러싼 6자회담이 끝내 暗礁(암초)에 부딪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뿐 아니라 제4차 6자회담은 열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이 미국에서는 지배적으로 되어 간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원하는 시나리오다. 미국은 6자회담이 성공하리라고는 당초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이 바라는 것은 중국이나 러시아 등 북한과 가까운 나라들에게 북한과 대화를 해도 결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중국이 북한 때문에 왜 이런 고생을 하여야하는가”라는 목소리가 중국에서 높아져 가고 있음으로 그 목적은 거의 달성되고 있는 셈이다.
6자회담이 이대로 결렬되어 북한에 대한 제재결의가 안보리에 회부됐을 때(빠르면 2005년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기권」이라는 대응도 생각할 수 있지만 중국과 북한은 군사동맹(중·조우호협력조약)을 맺고 있기 때문에 안보리에 출석해 있으면서 기권 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아마도 결석이라는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것은 한국전쟁에 UN군 파견을 결의할 때, 소련이 취했던 조치와 같은 것이며 ‘94년에 뎡샤오핑이 모르는 척 했던 대응방법과도 상통하는 일일 것이다.
“중국은 북한 편”이라는 반세기 전의 상식을 믿고 있는 것은 당사국인 북한이외에는 일본 정도가 아닐까? 미국만이 아니다. 당사자인 중국이 북측과의“혈맹”을 부정하기 시작했으니 김정일의 命運(명운)은 좁혀져 들어가고 있음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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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중국의 거부권 행사는 없을 것이... 박석균번역문독자 2005-02-0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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