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대한제국의 일본육사 출신 김경천 (김현충=김광서=경천 김장군)/백마탄 김일성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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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편)
대한제국의 일본육사 출신 김경천 (김현충=김광서=경천김장군)/백만탄 김일성 장군이 결코 아니다.
조선인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생들의 친목회인 전의회(全誼?) 회보에 의하면 일본군 현역장교로 근무하는 그들 가운데 지청천의 동기생인 홍사익[종전 후 필리핀에서 포로학대죄목으로 전범 처형됨]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김경천과 지청천의 서울에 남겨진 두 부인을 원조했다고 한다. 김경천의 아내 유정은 1923년 겨울, 많은 빚 때문에 소유하는 가옥을 처분하고 3명의 아이를 데리고 곤궁한 생활을 했지만 더 생활이 어려운 지청천의 부인에게 상당한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1925년 김경천은 처자식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불러들였다. 전의회 회보에는 이 처자의 출발까지 기록되어 있어, 전의회 회원들은 김경천이 시베리아에 남았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마지막으로 김경천의 소식은 실리지 않았다.
1930년대 중반부터 스탈린은 대숙청의 일환으로 소련공산당과 공적 기관의 요직에 있던 조선인 지도자와 지식인에 탄압의 손이 뻗쳤다. 1936년 김경천도 간첩 혐의로 구속되어 3년형을 받았다. 이어, 1937년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조선인) 20만 명은 모두 강제 이주의 대상이 되어 중앙아시아로 이송됐다.
김경천의 처자도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져적군인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인도 ‘인민의 적’으로 불리는 고통을 당했다. 김경천은 1939년에 석방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겨우 한 달 후에 다시 체포되어 8년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가, 1941년 독일과의 전쟁 발발과 함께 멀리 소련 서북쪽으로 이감되어 1942년 심장질환으로 옥사했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일시, 장소, 사망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스탈린이 죽은 후인 1959년 2월 16일 김경천은 소련에서 명예 회복됐으며 유족도 복권됐다.
사후(死後)의 평가 김경천의 활동 무대가 주로 시베리아였기 때문에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다. 이승만 정권의 극단적인 반공주의 때문에 한국의 언론은 시베리아에 남았다는 것이 공산주의자가 됐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해서 이를 의도적으로 진실이라고 믿게 했기 때문이다.
1998년 한국정부는 김경천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 식전에는 그 때까지 생존했던 김경천의 막내딸(1928년생), 막내 아들(1932년생)이 한국을 방문해 그의 자세한 행적이 알려지게 됐 다.
그의 23기 일본인 동기생 중에 가장 높은 계급에 올라간 오바타 히데요시[小畑英良. 1890년~1944년.8.11. 55세에 죽음. 육군대장 추서]는 김경천과 같은 기병병과로 도쿄의 기병 제1연대에도 약 10여년 군 생활을 같이 했다.
그는 일제 제31군사령관으로서 7월 21일 섬에 상륙한 미군과 결전을 벌이며 괌도를 사수하다가 도쿄에서 옥쇄병령을 받고 '태평양의 방파제가 되겠다'는 답전을 보내고 사령부가 위치한 참호 내에서 60명의 부하들과 함께 자결했다. 명령에 따라 살고 죽어야 하는 군인으로서 김경천은 오바타와 같은 나이에 죽었지만 국적이야 어떻든 떳떳한 한국인으로 살다 죽었다. 그의 한 평생은 어느 나라에 살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살던 한국인으로서 진정한 애국자의 삶이었다.
정보 부재, 오보, 고의성과 공작이 혼합된 김일성 논쟁에 김경천 장군은 전혀 무관.
(제 5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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