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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1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60 2019-09-29 16:06:11

소련 사회 연구에 대한 서구 역사학의 여정


 

              제 1편..


 

 

나는 어렸을때부터 국사 및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한...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3~4년 전인가?   미국에  간적이 있었는데 어느 잡지인가?

거기에서,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윌리엄 헨리 체임벌린이라는 사람이 스탈린에 대해서 쓴글을 읽은적이 있는데....    난 개인적으로 새롭거나 의심이 나는 역사와 관련된 것이면 수집 하듯이 저장하는 버릇이 있는데..  오늘 문득 기억이 나서 한번 글을 올리려 하려고 한다.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윌리엄 헨리 체임벌린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를 글로 썼고, 이렇게 묘사했다.
 

“소비에트 체제가 사반세기 동안 여러 변화를 경험하면서, 미국에서는 새로운 혁명적 시스템에 대한 여론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엔 대개 부정적이었고, 심지어 터무니없을 정도였다. 혁명과 내전에서 나타난 잔혹성과 궁핍은 분별력이 별로 없는 러시아 망명객이나 해외 특파원의 선정적인 전언을 통해 크게 과장됐다.
 
 
공산주의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약간의 열광적인 지지자를 얻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공포감을 느끼며 공산주의를 거부했다.
 
 
혁명의 유혈적·극적 국면이 끝난 후, 미국은 러시아에 무관심해졌다. 번영과 평온을 누리던 1920년대 미국에게 러시아는 보이지 않았다.”
 

나아가 “소련의 계획경제 도입은 미국 대공황과 시기상 일치했다. 이는 지식인 사회의 여론을 반전시켰다.
 
 
반전된 여론은 애초 혁명세력의 잔혹성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때만큼이나 터무니없고 불합리했다.
 
 
예를 들어, 소련이 후원한 극단적인 무자비함, 쿨락(부농)의 제거나 농민의 잉여식량을 인정사정 없이 거둬들인 후 발생한 1932~1933년 기근 등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1930년대 상당수의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가 완고하고 교조적인 방식으로 친소련적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많은 수의 선참 혁명가에 대한 처형(스탈린 대숙청)이 알려지며 흔들렸다.
 
 
스탈린-히틀러 조약(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과 소련의 핀란드 침공이라는 시험을 겪으면서, 오직 투철한 공산주의자와 충실한 지지자만이 살아남았다.
 
 
이 시기 소비에트 체제의 위신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헌데 상황은 다시 뒤바뀐다.
 

“소련과 독일의 전쟁이 발발한 후, 소련의 위신이 놀랄 만큼 되살아났다. 이런 경향은 극단적으로 나아갔다.
 
 
스탈린은 강아지가 따르고, 어린이가 무릎 위에 앉으려 하는 남자라고 감상적으로 묘사됐다. 1935~1938년에 벌어진 정치적 처형은 제5열(적과 내통하는 집단)을 처리한 것뿐이라는 생각이 더 큰 신뢰를 얻었다.
 
 
히틀러 침공에 저항하는 러시아의 힘은 소비에트 시스템의 강점에 기인한다고 여겨졌다.
 
 
1812년 당시에도 러시아는 전제군주정이었고, 인민 대부분은 농노였지만, 유럽 최고의 정복자(나폴레옹)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는 사실은 잊혔다.”
 

혁명 후 러시아의 개인적·공민적 자유가 과거 차르 치하보다는 악화됐으나, 사회민주주의는 크게 확장됐다
고 주장했다.
 
 
부·계급·인종적 장벽이 제거되면서 기회가 평등하게 분배됐다는 것이다. 더 큰 ‘기회의 평등’이 독일 침공에 대한 러시아의 저항을 설명하는 한 요인이었다.
 
 
따라서 소련과 정확히 동일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20세기가 집산주의 시스템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언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들의 예언은 부분적으로 실현됐다. 전후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이 주요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하며 민족적 경제발전 전략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좌파 이론가들은 이러한 제3세계 경제 노선을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반공주의적 소련 연구의 부상

 

 

미국 학자들은 미소 냉전이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러시아 연구에 뛰어들었다. 반공주의적 학자들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이론을 수용해 소련 사회에 투사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 권력은 테러라는 수단을 통해 개인을 전통적·사회적인 유대로부터 분리하고, 시민사회를 파괴함으로써 원자화된 개인을 창출한다.
 
 
그 결과 전체주의 권력은 모든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고, 국가에 대한 개인의 충성심으로 대체한다. 이로써 국가는 개인·공동체·사회를 완벽하게 영유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론을 소련에 적용한 대표적인 저서는 칼 프리드리히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쓴 《전체주의 독재와 전제정》(1956)이었다.
 
 
이에 따르면, 내전 시기 레닌이 적색테러 캠페인을 통해 시민사회를 파괴하기 시작했고, 스탈린은 농촌공동체와 국가관료를 포함한 도시주민 사이에서 ‘개인의 불가침성’이라는 의미의 모든 유산을 파괴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 지도자는 원자화된 대중을 창출하고 그들을 지배한 국가 거인이 됐다.
 
이처럼 전체주의 이론은 스탈린주의를 넘어 레닌을 포함한 볼셰비즘 전체에 적용됐고, 공산주의에 내재한 특성으로 규정됐다.
 

전체주의론이 성립하려면, 소련 국가는 모든 사회적 생활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권력구조는 획일적이고 통합적이어야 한다.
 
 
또한 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정책이 의도한 바가 효과를 발휘해야 한다. 하지만 소련 사회가 정말 전체주의론이 제시한 이미지에 부합했을까?
 
 
실제 스탈린이 추진한 정책은 비효율적이거나 혼란스러웠다. 스탈린 정책의 추진과정은 관료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의 반응은 국가의 정책 실행에 영향을 줬고, 대중의 지지 없이는 정책을 순조롭게 집행할 수 없었다.

비판자들은 전체주의론이 스탈린 시대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고 지적한다. 소련 사회의 작동방식을 심도깊게 이해하지 못해 내부 변화를 포착하지 못했으므로 어떤 변화도 예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최근 10여 년간 영어사용권 나라에서 생산된 소련관계 문헌들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했고,
 
 
월터 라이커 역시 《혁명의 운명》(1967)에서 “1917년 혁명의 중요성에 대한 토론은 주로 도덕적이며 심지어 신학적이다”라고 주장했다.
 
 

1960년대 ‘현대화론’의 비판

 

 

1960년대에 들어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된 전체주의론을 비판하는 연구가 본격 등장했다. 이런 연구 흐름은 ‘현대화론’ 또는 ‘발전혁명’으로 불렸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1950년~1978년 연작)를 발표한 '카'는 서방학자 중 러시아 혁명과 소련 체제를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한 학자 중 하나다.
 
 
저술 초기 시점에 그는 위기에 처한 서구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원리를 러시아 혁명 후 소련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봤다. 물론 저술이 진행되면서 이런 시각은 점차 완화됐다.
 

현대화론자들은 스탈린 체제로 넘어가는 시기에 일어난 변화를 ‘현대화’와 ‘공업화’로 이해했다.
 
 
즉 후진적이고 낙후된 농민사회를 현대화하고 서구를 추격한다는 러시아의 과제에 대해 볼셰비키는 다른 대안이 없었고, 결국 소련의 산업화는 어떤 정권이 수립되든 피할 수 없었던 길이었다.
 
 
따라서 소련의 산업화는 세계적 산업화 물결의 변종 중 하나였던 셈이다(거셴크론).
 
 
게다가 만성적인 곡물 부족과 대외관계 위기는 급격한 농업집단화와 공업화 정책을 불가피하게 했다(카).
 

물론 현대화론자들도 스탈린 방식의 ‘사회적 강제’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주장하진 않았다. 그들은 소련이 엄청난 인간적·사회적 대가를 지불했지만, 매우 효율적으로 산업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노브)는 시각을 공유했다.
 
 
하지만 훗날에는 과연 소련의 산업화가 효율적이었냐는 문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한다.

산업화의 성공에 가린 그늘은 어떻게 볼 것이냐는 쟁점도 매우 중요하다.
 
 
농업집단화는 농민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소련 지도부에게 장기간에 걸쳐 제거할 수 없는 부담을 주었고, 5개년 계획을 통한 산업화는 심각한 관료제를 형성했으며, 테러와 선전선동은 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지적 자유를 박탈했으며, 지도자와 당의 신격화는 대중들의 냉소주의를 낳았다.
 
 
심지어 개인독재의 자의성은 관료제의 요구와 갈등을 낳기도 했다. 이는 결국 소련 사회의 불안정성을 배태했고, 결국 소련 체제의 붕괴를 낳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다.
 
 

신경제정책 주목한 수정주의 학파

 

 

베트남전쟁과 데탕트, ‘68혁명’을 경험한 새로운 세대는 서구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신좌파의 이념에 공감하면서 러시아 혁명과 소련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들은 소련사에 대한 전체주의적 해석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수정주의’ 학파로 불린다.
 
그들은 소련을 악마로 보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비판하며 소련의 좋은 점을 밝히고자 했고, 소련의 나쁜 측면에 대해선 엄격한 증거를 요구했다.
 
 
수정주의적 연구는 그 분야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 있었는데,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는 입장부터 중도적인 입장까지 다양해 하나로 묶기 어렵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견해 중 하나는 10월혁명이 볼셰비키의 음모로 발생한 쿠데타가 아니라, 민중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따른 것이라는 시각이다.
 

‘1세대 수정주의’는 1920년대의 신경제정책(네프)을 지속가능한 정책으로 보고, 스탈린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었으리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은 대체로 신경제정책을 지지한 레닌주의와 부하린주의를 스탈린주의로부터 복원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스탈린 이전 시기 신경제정책 시기를 전체주의 이론으로 설명하길 거부하지만, 스탈린 시기에 대한 평가에서는 전체주의 이론을 거부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훨씬 더 부정적으로 스탈린주의를 묘사할 정도다.
 

예를 들어 로버트 터커는 《스탈린주의》(1977)에서 스탈린 현상을 정치·문화적 접근법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 개인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고 본 터커는 스탈린주의를 볼셰비키 혁명관에 대한 스탈린 특유의 이해방식과 대러시아 쇼비니즘의 혼합물이라고 봤다.
 
 
이 때문에 스탈린이 취한 ‘위로부터의 혁명’은 짜리즘 정치문화에 토대를 둔 군사적·민족적 국가 건설을 목표하게 됐다는 거다. 그에 따르면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로부터의 단절인 셈이다.

 
      이어서 ~~ 제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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