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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2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86 2019-09-29 16:09:58

제  2편..


 

한편 코헨은 《부하린과 볼셰비키 혁명》(1973)에서 스탈린주의보다 더욱 절제된 부하린주의적 길이 존재했고, 따라서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의 계승이 아니라 이탈이며, 그 결과 소련사회는 거대 관료제·명령경제, 국가의 전반적인 사회통제로 전환했다고 봤다.

 

레윈 역시 스탈린이 신경제정책을 폐기함으로써 농업집단화가 농민을 농노로 되돌려 놓았고, 도시로의 대규모 농민유입이 도시문화를 더욱 야만적·후진적으로 변형시켰다고 주장했다.

 


코헨이나 코언은 스탈린이 혁명을 배반했다고 간주하므로, 10월 혁명 그 자체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는 10월 혁명을 노동자혁명으로 해석하는 이후 연구자들의 연구와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2세대 수정주의’의 선봉장 쉴라 피츠패트릭은 자신이 편집한 《러시아의 문화혁명》(1978)을 시발로 스탈린주의에 대한 대단히 새로운 관점을 내놨고, 첨예한 논쟁을 야기했다.
 
 
이 때문에 좁은 의미의 수정주의는 피츠패트릭과 그의 관점을 따르는 학자들만을 지칭한다.
 
 

피츠패트릭의 ‘새로운 관점’

 

 

피츠패트릭은 스탈린 체제 성립에 적극적 대리인이었던 거대 인구집단에 주목했다. 그녀에 따르면, 스탈린 시기 등용정책을 통해 노동자·농민 출신의 많은 청년들이 교육과 사회적 승진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스탈린 정권은 ‘노동자에게 권력을’이라는 슬로건이 의미하는 바대로 계급으로서의 노동자집단에게 권력을 부여한 것은 아니지만, 개별 노동자가 행정적·전문적 엘리트로 상향 이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위로부터 강압통치가 존재했으나, 스탈린 정권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특히 청년세대는 스탈린의 세계관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고, 개인적 헌신을 다할 소명을 발견하고 낙관주의가 넘쳤다.
 

스탈린 시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그보다 전인 네프 시대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코헨은 네프와 부하린주의가 스탈린주의에 대한 대안이자,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영구적 모델이라고 주장했다.
 
 
1980년대 고르바초프 시대에 소규모 기업의 사유화를 비롯해 네프를 연상시키는 조치들이 취해지면서 부하린이 복권되고 네프 시기는 더 각광을 받는다.
 

반면 새로운 관점은 네프 시기를 황금기로 볼 수 없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1920년대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문화적 다원주의를 수용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전문가들이나 관료의 특권에 분개했다.
 
 
그들은 네프맨들의 많은 이윤, 높은 실업률에 분개했다. 결국 네프 시기는 평화와 만족의 분위기가 아니었고, 불안하고 불만족스럽고 호전적인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특히 청년당원들은 차라리 내전 시기의 영웅적 나날을 갈망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분위기는 스탈린이 급속한 산업화와 농업집단화, 일국사회주의론을 내걸었을 때 네프의 역전이 이뤄지는 배경이 됐다.
 

즉 피츠패트릭은 스탈린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고, 스탈린 정책도 민중의 요구를 반영했다고 봤다.
 
 
또한 그녀는 《러시아 혁명 1917~1932》(1984)에서 러시아 혁명이 결국 서구를 모방·추격하는 산업화와 테러, 일부 청년과 노동자의 상향이동으로 귀결됐다고 분석했다.
 
 
산업화 지향, 숙청과 테러 등 스탈린 정책이 레닌과 질적·양적으로 다르더라도, 그 연속성을 부정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런 시각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반대론자들은 이 새로운 관점이 스탈린 시대에 대한 ‘면죄부’ 발행이라고 비판했다.
 
 
스탈린 정책은 다른 국가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취한 정책과 유사한 것처럼 취급함으로써 왜 이해집단이나 분파 간 갈등이 유혈로 끝났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코헨은 스탈린 시대 연구에서 테러가 중심 주제일 수밖에 없으며, 역사연구도 불가피하게 도덕적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스몰렌스크의 문서고에 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흐마토바는 “염세적이며 퇴폐적인 정신과 부르주아 귀족주의적 미학 취향에 깊이 빠졌다”는 비판을 받고 1946년 작가동맹에서 축출됐다.)
 
 
또한 피터 케네즈는 수정주의자들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스탈린과 그의 정치국을 탈악마화한다”고 말했다. 알프레드 메이어는 “전체주의론자나 수정주의자 누구도 스탈린 통치 기간에 끔찍한 무언가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지만, 문제는 “누가 비난을 받아야 하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정주의가 스탈린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이다.
 

반면 수정주의 연구자들은 스탈린 시대 연구가 ‘악마 연구’(demonology)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반박했다.
 
 
스탈린 정책이 부적절했지만 왜 이것이 채택되거나 재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개개인을 도덕적으로 단죄하기보다는 스탈린주의와 같은 참혹한 일이 어떤 맥락에서 발생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 해체 후 ‘포스트 수정주의’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수정주의는 주목할 만한 연구업적을 내면서 전통적 해석을 제압했다고 자평할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의 해체는 이 모든 흐름을 바꿔버렸다. 리차드 파이프스는 《75년간》(1992)에서 “수정주의의 전위대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 있는 게 안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마틴 말리아는 《소비에트의 비극》(1994)에서 사회주의의 도덕적 이상이 유토피아적이고 실현불가능하기 때문에 소련체제는 출발부터 비합법적이며 파멸될 운명을 안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전환기의 고통이 심화되면서 1991년을 환호하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수정주의자는 소련의 해체가 오히려 소련이 전체주의적이지 않았고, 내부에 변화 잠재력을 갖고 있었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전체주의적 해석을 수용한 신진 학자가 없어 전체주의는 점차 소멸의 길로 갔다.
 
 
피츠패트릭은 “과학적 논쟁은 ‘쟁취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이든 과학자들이 죽는 것으로 이뤄질 따름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옳다는 게 확인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포스트-수정주의’가 그 빈자리를 채운다. 미셸 푸코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권력관계란 필연적으로 다층적이고 탈중심적이기 때문에 ‘위로부터’든 ‘아래로부터’든 각각의 접근법은 한계가 있다면서, ‘문화사로의 전환’(또는 언어학적 전환), 즉 미시사와 문화사 연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대표적인 출발점은 스티븐 코트킨의 《자석 산: 문명으로서 스탈린주의》(1995)인데, 이 저작은 1930년대 우랄산맥의 철강도시 마그니토고르스크를 조명한다.
 
 
스탈린 체제의 공식 이데올로기와 행동양태는 작업장, 기술습득 프로그램, 문맹퇴치 강좌처럼 노동자가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현장에서 그들의 행동과 의식에 스며든다.
 
 
철강종합단지 건설현장에 이주하여 새로 들어온 노동자는 농민으로서 정체성을 버리고 전형적인 소비에트 노동자로 다시 태어난다.
 
 
그들은 이제 ‘볼셰비키처럼 말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문명에 능동적으로 통합된다. 그들이 볼셰비키의 말을 실제로 믿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소비에트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볼셰비키처럼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는 숙청과 테러를 체제의 적을 제거하는 일로 당연시하고, 그들을 비난하고 제거할 것을 요구받았다.
 
모든 주민은 고용·서비스·안전 등을 국가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므로 볼셰비키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공개적으로 표명해야 했다. 따라서 1930년대 노동자는 볼셰비키 체제의 ‘적극적 수용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체제에 대한 적극적 도전은 아니었지만, 미세하고 국지적인 저항은 항상 존재했다. 위에서 내리는 지시에 대한 불복과 회피가 너무 많아서 ‘소비에트 인간형’이라는 이상과 거리가 먼 행동이 비일비재했다. 코트킨에 따르면, 스탈린주의란 ‘일종의 가치, 사회적 정체성, 생활양식’이었다.
 
 

코트킨의 방법론에 큰 빚을 졌다고 스스로 말한 요한 헬벡은 《스탈린주의적 영혼의 형성》(1996)에서 부농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우크라이나에서 모스크바로 이주한 뽀드루브늬라는 노동자의 일기를 분석한다.
 
 
일기의 주인공은 작업장에서, 신문에서, 공식적인 모임에서, 학교의 수업과정에서 끊임없이 유포되는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적극 수용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형성한다.
 
그는 스탈린주의의 기본 과정이 ‘스스로 현대화된 자아 만들기’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포스트 수정주의는 스탈린 체제에서 소련 사람은 어떻게 살았나라는 문제에 대한 한 가지 분석을 제시한다.
 
 
포스트 수정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개인은 국가의 강요도 있었으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였다.
 
 
이른바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전형적 특징은 “배후조정자, 조작자, 기회주의자, 무임승차자, 크게 슬로건을 외치는 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도 생존자”였다.(피츠패트릭, 《일상의 스탈린주의》, 1999)
 
 

여전히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소비에트의 해체 이후 서구 역사학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러시아 혁명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7년 혁명 당시 공장위원회를 연구했던 스티븐 스미스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 혁명 역사서술》(1994)에서 앞으로 부각해야 할 중심 의제를 제시했다.
 
 
첫째, 러시아제국 후기와 소비에트 시대로 사회사 연구를 진전시켜야 한다. 둘째, 계급과 젠더, 민족주의와 종족성에 대한 연구를 심화해야 한다.
 
 
이는 사회적 정체성이라는 보다 큰 이슈에 대한 연구로 이어진다. 셋째, 정치사·언어와 상징·문화사 연구가 심화되고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비교연구도 진행되어야 한다.
 
그가 제시한 의제를 두고 실제로 현재까지도 새로운 연구결과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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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연, 「수정주의적 러시아 혁명 해석과 그에 대한 논의」, 『슬라브학보』 26(3), 2011.
한정숙, 「‘세계를 뒤흔든 혁명’에 대한 열광, 증오, 성찰: 러시아 혁명 90년: 해석의 역사」, 『서양사론』, 제98호, 2008.
황동하, 「소련 역사 속의 ‘스탈린 시대’: 이를 바라보는 몇 가지 시각들」, 『서양사학연구』 제7집, 2002년.
Hiroaki Kuromiya, Stalinism and Historical Research, The Russian Review, Vol. 46, No.4, October, 1997.
Steve Smith, Writing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after the Fall of Communism, Europe-Asia Studies, Vol. 46, No.4, 1994.
William Henry Chamberlin, The Russian Revolution 1917-1943, The Russian Review, Vol. 2, No.1, Autumn,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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