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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선동에 가리워진 한일협정의 진실
United States Tovarish 0 289 2019-10-18 23:30:53

반일선동에 가리워진 한일협정의 진실

¶글쓴이 : Zach?us S?k

 

-승전국도 아니며, 일본에서 단순히 분리된 조선은 전쟁배상금 받을 자격 자체도 결여

-청구권협정 타결 후 “일본 외무대신 맞나” 질책 받은 오히라. ‘매국노’ 오명 쓴 김종필  

-일본, 개인 직접보상 주장. 일본 정부 행정력 직접 작용할 것 우려한 한국 정부가 거부

 

 

1962년 10월 일본 외무성 별실에서 김종필은 일본국 외무대신 오히라 마사요시를 처음 방문 면담하였습니다. 김종필을 처음 본 오히라 외무상은 잠깐 당황하였습니다.

 

‘이런 새파란 녀석이 나의 상대란 말인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52세의 외상은 신기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부장께서는 춘추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올해 서른여섯입니다.”

“그러시군요! 마치 메이지 지사를 보는 것 같습니다!”

 

노련한 외상은 젊은 김종필을 ‘메이지 유신’ 당시 막부와 맞서 싸운 젊은 지사를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1962년 당시 오히라 외상이 52세, 김종필 중정부장이 36세였다. “우리는 8억 불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저는 매국노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덕담이 오가며 첫 회의를 시작하였지만 본론으로 들어가자 서로 팽팽히 맞섰습니다. 쇼와시대 초기부터 재무관료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관록의 외무상은 전쟁터를 거쳐온 역전의 용사인 김종필이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상대였습니다. 1951년부터 지루하게 확인된 서로의 입장을 다시 확인하고 첫 만남은 끝났습니다.

 

다음 달 11월 12일, 김부장과 오히라 외상은 다시 같은 장소에서 재회하였습니다. 이미 김종필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추상같은 훈령을 받고 일본에 입국한 상태였습니다. 협상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고 첨예한 대치 상태였습니다. 김종필은 승부수를 뛰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금번 회담은 더 이상 진행이 어렵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오?”
“회담 시작한 지 2시간이나 지났는데 커피 한 잔 주지 않는 째째한 나라와 협상이 되겠습니까?”

 

일본 측 인사들도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외무성 직원들에게 커피를 준비시켰습니다. 차 한 잔을 같이 마시면서 김종필과 오히라는 일본 전국시대의 정이대장군 3인방의 이야기를 하며 마음을 열어갔습니다.

 

“두견새를 죽여버리는 오다 노부나가나 기다리는 토쿠가와보다는, 토요토미와 같이 울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입니다.”

 

단호한 오히라 앞에서 김종필은 실리적인 협상을 이끌었습니다. 오히라도 이때 조금씩 양보를 시작했습니다.

 

“정부 방침은 8000만 달러이나 제가 최대한 양보하여도 3억 달러가 최대입니다.”

“우리는 8억 달러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저는 매국노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각국의 의회와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각자 유연하게 설명합시다. 저는 청구권 자금으로 국민들에게 설명을 할 것입니다. 일본은 역시 국민들에게 유연하게 설명하면 될 것입니다. 어차피 청구권 협상으로 시작된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당시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승전국도 아니며, 조약상 일본에서 단순히 분리된 특별상태국이었던 조선은 전쟁배상금을 받을 자격도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식민통치를 하였던 서구국가들조차도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은 절대 하지 않던 시대였고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김종필과 오히라. 한일협정 조인 다음날 박정희가 한 말은 “원수라도 필요하면 손잡아야”였다.

 

최초 일본정부는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집행을 원하였고 한국정부는 사죄금으로 수령하기를 원하였으나, 당시 협상자들은 서로의 실리를 추구해가면서 수교를 이끌었습니다. 김종필은 매국노라고 지탄을 받더라도 당시 시점에서 하지않으면 안된다고 굳게 믿고 이 협상을 이끌었습니다.

 

협상 후 양측 대표 모두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해외순방 후 귀국하여 보고를 받은 이케다 총리는

 

“당신은 일본국 외무대신이 맞는가?”

 

라며 오히라를 직접 질책하였고 일본 정가에서도 “관료로 경력 꽤나 쌓은 오히라가 젊은 애송이에게 당했다”라는 비난을 들었습니다. 김종필 역시 귀국하여 수많은 철없고 무책임한 대학생이나 정치인들로부터 ‘매국노’ 소리까지 들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일본인으로는 드물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은 훗날 일본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김종필 역시 국무총리와 여당 최고위원을 역임하며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당시 협상으로 받은 6억 달러는 일본 외환보유고의 절반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고 한국정부 2년치 예산에 달하는 거액이었습니다. 다른 피해국들과 비교해도 적지 않은 금액으로 2차 대전 당시 미군과 혈맹이었고 전승국인 필리핀과도 비슷한 금액이었습니다.

 

이 6억 달러는 상업차관이 2억 달러 더 늘어나면서 8억 달러 가까운 돈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이 자금과 서독정부가 파독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을 담보로 제공한 차관을 종자돈으로 함과 동시에 일본의 기술지원을 통하여 경제기적을 이끌어낸 것은 너무도 유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성공적인 협상은 안타깝게도 김일성이 일찍이 주창한 갓끈전술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좌익들과, 자극적인 기사로 개인의 영달을 도모한 언론인들에 의해 여러가지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페친님들과 확인하고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1. 개인 보상이 없었다고?

 

이 협상을 비난하는 이들은 이 협상에서 피해를 입은 개인에 대하여 전혀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을 확인하자면, 제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1971년 1월 19일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을 제정,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용·징병된 사람 중 사망자와 재산권 소지자에 대하여 1971년 5월 21일에서 1972년 3월 20일까지 10개월간 보상신청 신고를 받았습니다.

 

1974년 12월 21일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 1975년 7월 1일부터 1977년 6월 30일까지 2년간 인명·재산을 포함해 총 신고 건수 10만9540건 중 8만3519건에 대해 모두 91억8769만3천 원을 보상하였으며 인명보상의 경우 8552명에게 25억6560만 원, 재산보상은 7만4967명에게 66억2209만3천 원을 각각 지급하였습니다.

 

이 보상이 집행된 지 30년이 지나서 노무현 정부 당시 다시 약 7만 건에 대하여 재보상을 실시하였습니다.

 

1950년대 청구권 협상 초기에 오히려 일본이 피해자 개인에 대한 직접 보상을 주장했으나 이 방안의 경우 피해자의 피해 사정 청취 및 진위 확인을 위해 일본정부의 행정력이 직접 한반도에서 발생하게 되므로 한국정부가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기도 합니다.

 

2. 위안부 협상이 전혀 없었던 이유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위안부에 대한 협상이 왜 전혀 없었는가?

 

제가 국민학교 다니던 1980년대에 저는 ‘위안부’란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니던 1990년대에서야 정신대와 위안부가 마구 혼용되어서 언론에 자극적인 기사가 도배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어느 여배우는 ‘위안부 누드 사진집’까지 내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 위안부였던 사람들이나 중개인들이 아직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고 기억조차 생생하였을 1960년대 당시 대규모 집회나 시위가 있었던 기록을 찾을 수도 없었던 만큼, 당시 협상에 포함되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990년대 일본 아시히신문의 기획기사 이후 여론이 생기면서 노태우 정부가 실태조사를 하여 확인한 200여명이 위안부 issue의 시작이었던 것을 모르시는 분이 의외로 많으십니다.

 

3. 징용공 협상의 문제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징용공에 대한 협상이 전혀 없었는가?

 

일본의 징병과 징용은 1944년 중순부터 실시되었습니다. 저희 외할아버지도 1944년 징집영장 받으시고 징병검사 가셨다가 일본 군의관이 귀가조치하여 돌아오신 적이 있습니다. 집안 친적어르신 가운데도 일본에서 징용 다녀오신 분이 있으십니다. 이러한 일본의 동원령에 따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정부에서 2015년까지 보상조치를 한 것입니다.

 

금번에 개인이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은 대부분 1944년 이전에 일본에 건너가 공장에 취직을 한 경우입니다. 자발적 근로자와 비자발적 근로자의 경우 어떤 근거와 기준으로 정의하고 보상해야 하는 것일까요. 정부의 보상이 수십 년간 있어온 가운데 반세기가 지나서 소송을 제기한 경우는 특수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우리법연구회와 민변의 역할

 

이런 사단이 발생한 원인의 배후에는 우리법연구회와 민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승태 대법관은 사실 그동안 정권이 바뀐 후 여러 차례 수사를 받아왔습니다. 그동안 ‘혐의없음’으로 기소되지 않았으나 사법부의 완전한 장악을 획책한 좌익법조인 조직에 의해 가장 말초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반일감정을 활용하여 ‘사법농단’이라는 미명하에 구속까지 시킨 후 기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좌익에게 대법원까지 장악 당한 사법부가 1965년 확정된 국제협약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판결을 하고, 반일감정을 계속 유발하여 총선까지 가려는 카드로 쓰는 가운데 일본의 강력한 대응에 외교부와 기업들이 직격탄을 맞은 상황입니다. 일본의 대응이 전례 없이 전격적이고 강력하다 보니 속수무책으로 당황하다가 다시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반일선동을 총선에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영국의 처칠은 그토록 혐오하던 ‘백정’ 스탈린과도 손을 잡았습니다.

 

현대사를 살펴보면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일생을 일본과 투쟁하며 살아왔으며 실질적으로 반일을 가장 극명하게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 ‘Lee 라인(평화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여 독도를 접수하고 일본어민들을 구금하면서 영해를 넓혔습니다. 이승만은 300여 명에 불과한 광복군을 5만이라 우기면서까지 미국에게 조선의 완전한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한 사람입니다.

 

실상을 보면, 조선은 일본과 대적했던 나라 중 가장 쉽게 합병이 되었고 저항 역시 가장 미미하였습니다. 그나마 일부 있던 독립군 역시 만주에서 서로 내분을 거듭하다가 고려공산당의 술책으로 1921년 자유시에서 소련 적군에게 변변히 저항도 못하고 집단처형되었고 생존자들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축처럼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김구가 해방 후 조선에 돌아와 일제시대 36년 동안 동포들이 다들 일제에 순응하여 살았던 모습을 보고 놀랐을 정도였습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당시 승전국들이 냉전의 최선전에서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음에도 대한민국을 조약참여국에서 제외시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순신 동상은 박정희 대통령이 세웠으며 독립기념관은 전두환 대통령이 만들었습니다. 히로히토 천황의 사과를 전두환 대통령이 받았던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도 후진적이고 미개하였던 이씨조선시대와 식민지시대, 전쟁기를 거치며 상처받고 패배감에 쩔어 있는 국민들을 ‘cheer up’하기 위해 역사학계와 함께 이순신을 부각시키고 승리의 역사를 찾아서 알리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본과는 합리적이고 성숙하게 대면하였으며 이 시기에도 막대한 차관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고 수많은 기업들이 일본기업과 일본 엔지니어들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았습니다.

 

제가 종사하는 의류제조·수출 분야에서는 기본적인 현장용어는 아직도 대부분 일본어입니다. 아예 기업들이 내부적으로 일본어·영어·한국어 현장용어사전을 만들어 직원교육을 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나폴레옹전쟁 시대부터 보불(프러시아-프랑스)전쟁, 양차 세계대전 기간 중 수백만 명이 전쟁터에서 죽어간 프랑스와 독일은 냉전시대 이후 강력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영국의 처칠은 그토록 혐오하던 ‘백정’ 스탈린과도 손을 잡았습니다.

 

1차 대전 기간 동안 중국에서 피흘리며 싸운 독일과 일본은 1930년대 중반 역시 동맹을 맺었었습니다. 심지어 동맹을 맺기 몇달 전만 해도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장교단은 중국 국민당군을 지휘하여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일도 있었습니다. 패권전쟁의 승리를 위해 강한 국가와의 동맹은 필수였으며 항상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접근이 우선하였습니다.

 

21세기인 지금 1980년대 대학교 과방에서 왜곡된 사상과 철학을 배운 사람들이, 정작 본인들이 친일앞잡이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반일역사 선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저는 절망적인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반일선동 시장과 이에 쉽게 편승하는 사람들에 맞서서 수많은 비난과 모멸 속에서도 용기있게 진실을 말하고 합리적인 역사관을 보여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국제사회에 속한 대한민국에서 이런 자폐아적인 자해행위가 이제는 멈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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