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편에 이어서~~
내가 망명을 위한 직접적인 행동에 들어간 것은 1997년 2월 12일 오전 9시경이었다. 그 시각 나와 김덕홍은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 근처에 있는 호텔백화점으로 물건을 사러 갔다. 하지만 물건 구입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은 우리의 망명을 도와온 인사를 만나 망명절차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김덕홍은 이번에 나와 함께 북에서 망명해 온 사람이다.
내가 아내와 자식들에게까지 지켜온 비밀을 그에게 털어놓으며 생사를 같이해온 만큼, 간단하나마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나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시절 그에게 교무부를 맡겨 대학실무를 총괄하도록 했다. 또 내가 중앙당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를 중앙당 지도원으로 불러 실무를 맡겼는데, 언제나 뛰어난 능력 발휘로 내 믿음을 샀다. 그는 또 내 사상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내 주체사상의 이론적 신봉자이자 열렬한 선전원이었던 것이다.
그는 주체사상의 요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악용한 김일성·김정일의 반인민성과 기만성을 지적하는 내 심중까지 잘 이해해주었다. 게다가 의를 존중하고 정의감이 투철하며 따뜻하고 넉넉한 인품까지 지녔으니, 우리 둘 사이는 자연히 형제보다 더 가까워졌고 마침내는 목숨을 건 망명길까지 같이하게 되었다. 망명을 위한 구체적인 조직사업은 모두 김덕홍이 맡았다. 우리는 망명안내자와 잠시 토의한 후 택시로 총영사관으로 들어갔다.
총영사관 앞에는 전갈을 받은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총영사에게 안내했다. “황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나는 총영사가 내미는 손을 꼭 잡았다. 잠시 후 총영사와 마주앉은 나는 망명의 이유를 밝혔다. 나는 50여 년간 조선노동당원으로서 성실히 일해왔다. 뿐만 아니라 조선노동당과 그 영도자의 깊은 사랑과 배려를 받아왔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는 조선노동당과 그 영도자들에 대하여 감사의 정은 품고 있지만 다른 생각은 조금도 없다.
또 지금 공화국이 경제적으로 심한 난관에 처해 있지만 정치적으로 잘 단결되어 있기 때문에 당장에 붕괴될 위험성은 없다고 본다. 이러한 조건에서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게 된 것을 알게 될 나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도 내가 미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나만 미쳤으며, 왜 나를 미치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민족이 분열되어 반세기가 지났지만 조국을 통일한다고 떠들면서도 서로 적대시하고 있으며, 북은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떠벌이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또 노동자·농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노동자·농민을 위한 이상사회를 건설해 놓았다고 선전하는 사람들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민족의 적지 않은 인구가 굶주리고 있는데,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데모만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결국 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좀 더 넓은 범위에서 협의할 생각으로 북을 떠나 남쪽 동포들과 협의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상..0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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