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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역사를 지켜보면서..07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24 2020-01-22 18:30:11

06편에 이어~~



하루가 지난 2월 13일, 북한외교부에서 남조선당국이 나를 납치했을 경우에는 응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란 성명을 발표했다고 대사관 직원들이 알려주었다. 중국외교부에서는 관련당사자들이 대국적 견지에서 냉정하게 대처할 것을 촉구하는 공식입장을 최초로 발표했다고 한다. 또 김하중 외무장관 특보가 중국을 방문해서 중국외교부측에 협조를 요청했다고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를 위로했다.

 

나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그저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북에서 가지고 온 원고를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작업을 하면서 김덕홍의 사람 됨됨이에 다시 탄복했다. 그는 우리가 하는 일이 정당하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서 나를 위로하고 돕기 위해 세심한 신경을 쓰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덕홍은 밤이면 잘 들리지 않는 라디오로 남한방송과 북한방송을 청취하고는 내게 알려주었으며, 내 건강을 위해 내가 민망할 정도로 이것저것을 대사관측에 주문했다.

 

나는 그와 수십 년 동안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냈다. 또 양쪽 가족들도 우리의 결의형제를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그가 그저 동생이라고만 부르기에는 너무도 귀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대사관의 모든 직원들이 우리를 극진히 보살펴주었고, 한국정부에서는 의사까지 파견하여 건강을 살펴주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평양상업학교 동창생과 제자들, 남한의 친지들 그리고 하와이대학의 글렌 페이지교수를 비롯한 세계 도처의 벗들로부터 격려의 전보가 날아왔다.

 

그러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데 돌연 앞이 캄캄해지는 충격적인 일이 생겼다. 서울의 주요 신문사들이 내가 망명을 준비하면서 덕홍에게 은밀히 써주었던 쪽지 편지들과 일련의 논문들을 공개했던 것이다. 나는 너무도 놀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를 정말로 들었다. 중국과 북한은 서로 간첩죄를 지은 범인을 돌려보내기로 협약을 맺은 상태이다.

 

그러나 서울의 언론에 발표된 그 논문들은 내가 주체사상 국제토론회 때 외국인들에게 선전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 만큼, 비준을 받지 않은 것이라 하여 비판을 받을 수 있어도 나를 간첩죄로 몰지는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망명을 준비하면서 덕홍에게 써준 편지글에는 북한의 비밀이 적지 않게 담겨 있어, 이것을 가지고 김정일이 간첩행위라고 강하게 주장할 경우에는 중국정부로서도 곤란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불안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것이다.

 

1996년 11월 10일자로 내가 덕홍이 편에 우리의 망명을 주선한 사람에게 보낸 편지는 수첩용지에 급하게 휘갈겨 쓴 것이었다. 그런데 그 편지가 조금도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신문에 발표되고 말았다. 물론 97년 2월 12일부터 신문에서는 나와 덕홍의 망명사실이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그 편지들은 감시가 너무도 엄중한 북한의 현실에서, 마음대로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덕홍과 함께 산보를 하면서 수첩에 몇 자 적어준 것들이다.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몰라 불안함과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오직 신념 하나만으로 견뎌 나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내 생일날인 2월 17일에 아내 박승옥에게 남기는 유서를 썼다.



사랑하는 방승옥 동무에게



내가 당신까지 속인 채 당신을 버리고 이곳에 와보니,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였고 나와 당신의 생명이 얼마나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느꼈소. 당신이 걱정하며 머리 숙이고 있는 모습이 떠오를 때면 나처럼 인정 없는 사람도 막 미칠 것 같소.



할아버지에게 욕을 먹고 자기의 자주성을 지켜 항의해보려고 복도 구석에 누워 있던 지현이, 호의를 표시하며 환심을 사려고 장난감을 가지고 막 달려오던 어린 지성이를 생각할 때마다 막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소.



나 때문에 당신과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 죽어 가리라고 생각하니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오. 나는 가장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반하였소. 나는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가장 가혹하게 저주해주기 바라오. 나는 나를 믿고 따르며 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어온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배반하였소. 그들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욕하는 것은 응당하다고 생각하오.



가슴만 아플 뿐 사죄할 길이 없소.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저 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저 세상에서라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소. 만일 조선노동당이 지금의 비정상적인 체제를 버리고 개혁·개방을 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한다면, 비록 그것이 나를 속이기 위한 술책이라 하더라도 나는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들의 품속에서 숨을 거두고 싶소.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을 한 이 아픈 가슴을 이겨내며 내가 얼마나 더 목숨을 부지할지는 알 수 없으나, 여생은 오직 민족을 위하여 바칠 생각이오. 나 개인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며 한 민족의 생명보다는 전 인류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내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만 알아주기 바라오.



사랑하는 박승옥 동무!



당신이 이 편지를 받아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언제 목숨을 끊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유서 삼아 적어두는 것이오.

 

1997년 2월 17일

 
베이징 한국총영사관에서


황장엽


 

유서를 쓰고 나니 무거운 마음이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이제 살아서는 아내와 자식들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슬픔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잊으려고, 북에서 가져온 원고를 좀 더 빨리 정리하느라고 애를 썼다. 원고를 읽어보니 남몰래 써둔 것이라 문맥이 통하지 않은 것이 많고 고쳐 써야 할 데가 적지 않았다. 나는 일단 아주 잘못된 것만 우선적으로 고치고, 또 그 중에서 하나만이라고 제대로 고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주체철학의 기본문제」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상    08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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