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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밀(비밀)문서등으로 밝혀지는 6.25의 진정한 진실.13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28 2020-02-03 01:44:11

**.전쟁과 휴전협상의 장기화 유도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 북한의 패색이 짙어지자 스탈린은 9월30일 소련공산당 정치국회의를 소집, 협의를 한 후 외무성으로 하여금 유엔에 제출할 소련측 정전결의안을 草案하도록 지시하고 10월1일 즉각 정전, 외국군 철수 및 국제 감시하 총선 등 요지의 초안을 모택동과 협의 후 유엔주재 소련대표부로 타전하였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미·영이 주도하는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10월4일 상기 소련측 결의안을 부결시켰으며 이어 유엔총회는 찬성 47, 반대 5, 기권 7표로 북한 패배 후 유엔주관으로 한반도에서의 통일?자주?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 등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동 결의안 표결이 있는 날 워커(Walton Walker)장군의 제1기병부대의 선두는 38선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10월19일 밤 중국군이 압록강을 도강하여 공격에 나서자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후퇴, 전황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12월 유엔주재 인도, 영국, 스웨덴 대표와 리(Trygve Lie) 사무총장은 중국대표에게 중국이 수락할 정전조건 제시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은래는 12월7일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 철수, 대만 및 대만 해협으로부터의 미군철수, 한국문제는 한국인 스스로 해결, 중국정부대표의 유엔 참여 및 대만정부대표 축출, 일본과의 평화조약준비를 위한 4강국 외상회의 개최 등의 정전 조건을 스탈린에게 제시하면서 그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같은 날 스탈린은 주은래에게 보낸 회답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유엔주재 비신스키대사앞 훈령에서 미국이 패퇴를 거듭함에 따라 완패를 모면하고 시간을 벌기 위하여 한반도에서의 군사활동 중지에 관한 제의를 빈번히 하고 있는 현상황에서 주은래가 제시한 정전조건들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하였다.

 

스탈린은 이어 10월9일 주은래에게 보낸 전문에서 서울이 아직 해방되지 않은 시점이므로 중국측이 모든 카드를 제시할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주은래가 미국과 유엔이 먼저 정전조건을 제시토록 하는 전략을 택할 것을 제시하였다.

 

유엔측이 다시 1951년1월11일 정전 제안을 해왔을 때 주은래는 스탈린에게 문의, 그의 권고에 따라 유엔측 제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6월 5일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한반도에서의 長期戰은 중국군이 戰場에서 現代戰을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될 뿐만 아니라 트루먼정부를 흔들고 미·영국군의 국제적 위신을 실추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속도를 빠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당시 모택동은 국제관계에서의 중국의 위치를 높이고 중국내 혁명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하여 미국으로부터 수락할 만한 조건을 확보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의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 종료 시까지 입을 수 많은 사상자 때문에 상기 스탈린의 장기전 요구에 대하여 적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상상된다.

 

그러나 1951년 4월과 5월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공세 실패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유엔군 사령부와의 휴전협상을 개시토록 압박하였다. 1951년6월5일 말리크(Jacob Malik) 주유엔 소련대사는 평화를 원하며 가급적 빠른 시일 내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원한다고 하면서 미국정부가 이 문제에 관하여 북한과 중국측과 접촉해 줄 것을 케난(George F. Kennan)에게 통보하였다.

 

몇일 후 김일성과 高崗(만주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의 친소인사로서 1955년 숙청됨.)은 동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스탈린을 방문하였다. 모택동이 6,7월 2개월간은 중공군과 북한군이 수세적 위치에 있으므로 유엔군사령부와 협상을 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해옴에 따라 스탈린은 협상개시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말리크대사에게 지시하였다.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 계속된 휴전협상의 초기단계에 모택동은 중국측이 만족할 조건들을 확보할 경우 휴전협정을 체결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 휴전협정을 체결해야 할 더 급박한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중국과 북한측은 서두르거나 협상의 조기 종결의사를 보이지 않고 계속 강경입장을 견지토록 종용하였다.

 

 

교착상태에 있었던 휴전협상은 1953년3월 스탈린 사망 후 급진전을 보게 된다. 스탈린 사후 2주후 3월19일 소련 각료회의는 6.25전쟁을 조기 종결토록 결정을 하였는바, 동 결정은 스탈린이 한국전쟁 계속의 주요인이었으며 그가 죽은 뒤 곧 소련, 중국, 북한이 휴정협정체결을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      이어서 1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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