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안창호의 시국대강연 (총3편짜리) 1927년 2월 길림의 교포 사회는 전례없는 환영일색으로 들끓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독립운동의 원로 안창호 선생이 베이징을 거쳐 길림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길림의 교포들은 안창호를 국가수반 못지않게 성대히 영접하였다. 우리도 《거국가》를 부르며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거국가》란 안창호가 외국으로 망명할 때 조국을 하직하면서 지은 노래이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라는 구절로 시작되어《나 간다고 설워말아 나의 사랑 한반도야》라는 구절로 끝나는 이 《거국가》는 《한일합병》후 청년학생들 속에서 특별히 애창되었다. 망명가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라고 하여 한 때는 《망명자의 노래》라고도 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거국가》를 사랑하듯이 《거국가》의 창작가인 안창호에 대해서도 굉장히 존경하고 숭배하였다. 안창호의 인품과 실력에 대해서는 한마디로《대통령감》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표현은 크게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임시정부를 시답지 않게 보는 독립군 단체의 지도자들까지도 안창호 개인에 대해서는《독립운동의 선배》라고 하면서 떠받들었다. 안창호의 금새를 잘 알고 있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한 때 그를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일본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조건부로 도산 (안창호의 호)내각을 세워주겠다는 흥정까지 했다는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평안남도 강서 땅이 지금은 천리마의 발원지로, 대안의 사업체계와 청산리 정신, 청산리 방법을 낳은 고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왜정시대에는 도산 안창호와 같은 독립운동자들을 배출한 고장으로 유명하였다.
안창호가 강서 태생이었기 때문에 서선 지방 사람들은 대체로 그를 자기네 동향인이라고 자랑하였다. 안창호는 우리 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먹히운 것은 민족의 자질이 낮은 데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립협회, 신민회, 청년학우회, 대한인국민총회, 흥사단과 같은 독립운동단체들도 조직하고 점진학교, 대성학교, 태극서관과 같은 교육문화기관들도 설립하였으며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족의 계몽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독립운동의 원로들 속에 남강 이승훈이라는 이름난 교육자가 있다. 이승훈이라고 하면 누구나 오산학교부터 먼저 생각하게 된다. 오산학교는 그가 설립한 학교이고, 그의 개인자금에 의해 운영된 이름난 사립학교였다.
이승훈은 후대교육에 바친 공적으로 하여 융희 황제의 접견까지 받은 인물이다. 400년 동안 서선 지방의 평민들 중에서 황제를 알현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이승훈이 그 전례를 깨뜨리고 처음으로 왕을 만나보았으니 그의 명망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것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고명하고 인망높은 사람으로 알려졌던 이승훈도 한 때는 돈벌이를 해볼 야심을 품고 장돌뱅이가 되어 유기장사를 하였는데 나중에는 50만원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한 거부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평양에 왔다가 교육을 통한 실력배양이 독립구국의 기초로 된다는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는 거기에 감탄하여 상투를 자르고 고향에 돌아와 교육운동을 시작하였다.
애국애족의 일념에 넘치는 안창호의 웅변술이 대 무역상의 인생관에 새로운 돛을 달아준 것이다. 이것은 민족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안창호의 영향력과 감화력을 증시해주는 하나의 실례로 된다.
《동아일보》,《조선일보》를 비롯한 조국의 신문들은 안창호의 길림 도착 소식을 대서특필하였다.
청년 학생들은 그가 머무르고 있는 삼풍여관에 찾아가서 길림의 교포 학생들을 위해 강연을 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독립운동자들도 그의 숙소에 연줄연줄 나타나 강연에 출연해 달라고 초청하였다. 안창호는 그 제의를 쾌히 받아들이었다.
2편에서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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