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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호의 시국대강연[김일성] 2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11 2020-03-10 17:12:04

1편에 이어서~~

 

독립운동자들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아무날 어디에서 안창호의 시국 대강연을 한다는 소문을 돌리고 상부가, 차루가, 통천가, 하남가, 북대가, 우마항가를 비롯한 시내 여러 거리들에 광고도 큼직큼직하게 써붙이었다.


그 광고를 본 길림의 교포들은 모두 들뜨고 흥분되어 서로 만나기만 하면 《도산 선생이 오셨다지요?》하는 말로 인사를 나누기까지 하였다.
강연 전날 밤에는 나도 오동진과 함께(여기서 나,라는 사람은 김일성을 말한다.당시에는 김성주라고 하였다.) 안창호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이역의 하늘밑에서 장장 17년 만에 대성학교 시절의 은사를 만난 송암 오동진의 감회는 참으로 유다르고 절절한 것이었다. 오동진은 대성학교 사범과에 입학할 때 안창호가 인물심사를 어떻게 하였고 입학 후에는 자기를 어떻게 사랑해 주었는가에 대하여 추억하였다.

 

나중에는 도산선생이 지은 청년학도가까지 부르며 그가 후대들의 독립정신을 계발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회고하였다. 그는 특히 안창호의 웅변술을 두고 실감있는 회억을 많이 하였다.


안창호의 웅변술에 대해서는 우리 아버지도 생전에 여러 번 말씀하였다. 나는 만경대에 있을 때 벌써 아버지의 말씀을 통하여 안창호의 독립운동이 웅변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웅변을 떠나서는 그의 명성도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창호가 연설을 하면 여염집 아낙네들까지도 그 유창한 웅변술과 이상향론에 교화되어 가락지와 비녀를 뽑아 헌금을 한다는데 그게 과연 사실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연설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안창호와 같은 큰 인물이 미주나 상해가 아니라 여기 길림에 노상 와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라가 독립된 다음 나에게 대통령을 선거할 권리를 준다면 나는 그 첫 번째로 안창호 선생을 추대할 것이다.》


이것은 그날 밤 오동진이 나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은 안창호의 시국 대강연에 대한 나의 기대와 호기심에 부채질을 해주었다.


안창호는 조양문 밖에 있는 대동공창에서 의사 나석주의 추도회를 열고 겸하여 강연도 하였다.
추도회에 참가하려고 모여온 3부의 대표들과 시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 유지들, 청년학생들은 거의 다 강연회장에 모이었다.

 

바닥 자리는 다 차고 모자라 대부분의 청중은 바람벽 앞에 서서 강연을 듣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날 안창호는 《조선민족운동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는데 소문처럼 연설을 잘하였다. 그의 유창한 언변은 처음부터 군중의 찬탄을 자아냈다. 안창호가 동서고금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섞어가며 조선 민족의 출로에 대한 주장을 역설할 때 장내에서는 요란한 박수소리가 연방 터져 올랐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문제였다.


안창호는 강연에서《민족인격완성론》과 이상향론을 풀어나갔다. 그의《민족인격완성론》은《자아인격혁신론》과《민족경제확립운동론》의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있었다.


《자아인격혁신론》이란 우리 민족이 후진국으로서 왜놈들의 식민지가 된 것은 인격과 수양이 낮은데 원인이 있는 것만큼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일하고 서로 화목해지도록 각자가 자기 인격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안창호의 주장에는 어딘가《자아완성론》에서 표현된 톨스토이의 사고방식이나 자기 자신을 개조하고 단련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를 얻을 수 없다고 본 간디의 견해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당시로 말하면 세계적인 대 경제공황의 징조가 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 사람들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하던 때였다. 극도로 파쇼화된 제국주의가 대두하여 인간의 자주성을 총칼과 올가미로 참혹하게 교살하고 있었다.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철갑으로 무장한 제국주의의 위력 앞에서 전율하였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찾아낸 정신적 도피처가 바로 무저항주의였다.

 

무저항주의는: 혁명적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이 제국주의의 공세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찾아가는 마지막 안식처였다. 반 혁명에 맞설 힘도 없고 의지도 없으니 결국은 무저항을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무저항주의가 개량주의로 표현되었다. 민족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은 3·1 인민봉기 후 적극적인 항쟁의 방법으로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려는 혁명적인 입장으로부터 이탈하여 교육진흥운동과 민족산업진흥운동을 민족운동의 최대의 기치로 삼고 우리 인민의 정신적 자질과 경제생활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민족실력 양성운동을 맹렬하게 벌리었다.

 

민족운동의 중심 지도층을 이루고 있던 근대 지식인들은 토산품 애용과 민족기업의 육성으로 민족을 경제적 파멸로부터 구출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내 살림은 내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경제적인 자급자족의 길을 타개하기 위한 범국민적인 물산장려운동을 벌리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인 조만식은 토산애용의 상징으로 한 평생 무명으로 지은 조선 바지저고리와 조선식 두루마기를 입고 지냈다. 그는 명함장도 국산 한지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으며 신발도 외국 것을 신지 않고 조선 것을 신고 다니었다.


민족개량주의를 유포시키는데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많은 작용을 하였다. 이 논문을 읽으면 개량주의의 본질을 알 수 있고 그 위험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쉽사리 판단할 수 있다.


내가 《민족개조론》을 읽고 제일 불쾌하게 생각한 것은 이광수가 조선 민족을 열등한 민족처럼 여기고 있는 점이었다. 나는 우리 나라가 후진국이라는 생각은 해봤지만 조선 민족을 열등한 민족이라고 여긴 적은 한번도 없었다.


조선 민족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과 금속활자를 창조한 문명하고 슬기로운 민족이며 동방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우리 조상들은 일본 문화의 개척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외적의 침해를 용납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강건한 자위정신은 일찍이 아시아 만방에 맹위를 떨치었고 백지장처럼 깨끗한 우리 인민의 도덕은 세계의 찬탄을 자아냈다.

 
우리 인민의 인습이나 풍속 가운데는 물론 부족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이고 부차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부차적인 것을 가지고 민족성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편.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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