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편.
북한이 성립된지 60년, 식민지 지배도 전쟁도 진작에 끝났는데 민주화된 일본과 화해도 수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제선진국 일본과 경제협력도 포기하고 있다. 이것은 항일무장투쟁 역사의 과잉 통치이념화에 상당히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연구는 북한체제에 대한 다면적인 접근법의 하나로서 과거 역사를 통한 현재 이해하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현재의 선군정치가 북한에서 먹혀들고 있는 이유를 탐색하고자 한다.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되고 있기에 오늘날 21세기에 선군정치라는 구호가 나올 수 있으며 이것을 수용하는 국민들이 있다는 말인가?
이 연구는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역사학적 연구라기보다는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기존 역사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항일무장투쟁을 북한이 어떻게 왜곡하였는지를 비교?분석하는데 주된 목적이 있다.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내용은 이미 중국 조선족 학자, 일본학자, 우리 학자들에 의하여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존연구를 토대로 북한 역사학계와 당국이 항일무장투쟁을 어떻게 신화 화하여 국가 통치이데올로기로 발전시켰는지를 분석한다.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사실을 밝히는 작업을 위하여 이 연구는 내가 자가 개발한 일부의 구술 자료를 제외하고는 이미 이루어진 연구결과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성과를 종합정리하고, 전체적 시각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의 위상을 객관적으로 위치 지우는 노력을 하였다.
참조 이 사실 분석을 토대로 북한의 역사서들에 대한 내용분석하여 역사왜곡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분석하였 2002년~2005년 동안 통일연구원에서 추진한 학술진흥재단 과제 “북한체제의 형성과 발전에 관한 문헌 및 구술자료 수집” 수행과정에서 수집된 다수의 자료가 이 글 내용에서 활용되었다. 참조 1949년 ?조선민족해방투쟁사?, 1958년 ?조선통사?, 1958년?조선해방투쟁사?, 1961년, 1978년 책, 1979년 이후의 ?조선전사?, ?세기와 더불어?, 2002년판 ?항일무장투쟁사? 등을 분석한다.
** 1905년~1930년대 동북지역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투쟁
일제시기 항일운동의 큰 특징의 하나는 투쟁지역의 광범위함에 있으며, 다른 하나의 특징은 투쟁의 다양한 방법에 있다. 또 다른 특징은 19세기 말부터 1945년 8월 해방까지 장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국내, 만주, 중국의 관내, 노령, 일본, 미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이 광범위하게 장기간 전개되었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계보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만주지역 민족주의계열로서 남만의 조선혁명군과 북만의 한국독립군이 있고, 공산주의계열로 동북항일연군이 있으며, 중국의 관내(화북)에 조선의용군이 있다. 특이한 점은 동북항일연군내 김일성 부대 (2군 6사)만 우리 민족 군대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중국 군대의 일부로 편성되어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을 우리민족 전체의 항일운동의 맥락에서 조망하기 위하여 이들 3개 계보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개관해본다.
1. 1905년~1919년 문화계몽 운동
중국 동북은 한국과 인접되어 있으며 양국 간에는 매우 긴 국경선을 접하고 있다. 한민족은 17세기말부터 하나둘 씩 동북지방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동북에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주로 2단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첫째는 1869년(청조 同治帝 8년)에 한반도 북부에 역사상 가장 심각한 자연재해가 들어 많은 사람들이 중국 경계 내로 들어가 자리잡기 시작하였는데 그후 몇 년간 많은 한국교민들이 중국에 들어갔다. 둘째는 1910년 한일합방후 많은 한국교민이 일제의 잔혹한 통치를 피해서 동북지방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많은 반일지사와 의병들은 압박에 못이겨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이주하여, 만주지방은 독립운동의 중심기지로 되었다. 1931년 일본이 중국에서 9·18사변을 일으키기 전까지 동북에 거주하는 한국교민은 적어도 130만명~200만명에 달하였다. 동북의 한국교민들이 한국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반일지사를 수용하고 반일지사들이 조직한 반일 민족주의 단체나 반일무장역량에 참여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의 조선민족의 반일투쟁은 문화계몽운동의 방식으로 시작 되었다. 조선이 일본에 망한 것은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침략때문이지만, 대내적으로는 봉건통치와 유교사상때문이며 이를 개혁해야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고 보고 근대문화사상 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들은 비행기를 날리고 대포를 쏘는데 우리는 담배대를 물고 허세를 부리는 낡은 사상을 바꾸어야 하며 서양의 근대문화를 배워서 새로운 백성을 길러야 한다고 보았다. 1906년 8월에 건립된 최초의 조선족 사립학교인 룡정 서전서숙을 세운 것이 문화계 몽기 운동의 시작이다. 그때부터 조선민족은 많은 곳에서 근대적 사립학교와 군사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반일교육과 군사교육을 시킴으로써 반일투사를 양성하였다. 마을마다 1개 학교 1개교회를 세우면 조선이 독립될 수 있다고 보고 사립학교 운동이 전개되었다. 명동학교, 창동학교, 길동학교 등이 이때 설립되었다. 참조 진가외 (陳可畏),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동북의 한국교민”, 대한민국임시정부 옛청사관리처 편?김승일 역,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서울: 시대의 창, 2005), p. 89. 9 박창욱 연변대 교수 인터뷰 (2006년 6월).
1912년 이후 동만 즉, 연변 각 지방들에서는 각종 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는데 1916년까지만해도 연변에 조선족학교가 158개소가 있었으며 학생수는 3,879명이었다. 남만의 경우, 1922년 통계에 의하면 각종 조선학교가 165개소가 있었으며 학생수는 1,715명이었다. 북만의 경우, 22개소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1931년 통계에 의하면 전 동북지구에 조선족 반일지사와 민간이 꾸린 학교는 280여개소가 있었고 학생수는 7,070명에 달하였다. 종교 계통에서 설립한 학교는 103개소가 있었고 학생수는 6,433명이었다. 이 두가지 유형의 학교를 합하면 학교수는 388개소에 달하고 학생수는 13,503명이었다. 이것은 1916년에 비하면 배나 증가한 셈이다. 연변지구는 동부지구 조선족 집거지구 가운데서 교육사업이 가장 활발한 지구였다.
이 시기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만주에 이주하여 항일활동을 하였다. 이상용은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후, 국경을 넘어 동북 남부지역의 한국교민들의 집결지로 가서 扶民團(부민단)을 설립하고 단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이동녕은 동북 연길 일대의 한국교민 집결지인 용정촌에 서당을 세우고, 한국교민과 그 자녀들에 대한 민족교육을 진행하여 독립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시영은 통화에 신흥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항일 독립군의 간부를 양성하였고 조소앙 등도 이 시기에 동북의 한국교민의 집결지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항일투사들은 항일단체를 조직하고, 홍범도, 김좌진, 이청천, 서일, 류린석 등이 이끄는 여러 반일의병부대, 독립군에 참가하여 일제와 투쟁하였다.
참조 황용국외, 조선족혁명투쟁사}(심양: 료녕성민족출판사, 1988), pp. 175~177.
동북 각지의 조선족들은 1919년 3·1운동 직후, 일어난 3·13운동을 계기로 3월 6일부터 5월 1일까지 15개 현에서 93차의 반일집회와 시위행진을 단행하였으며 1만여명이 참가한 거족적인 반일투쟁을 벌렸다. 이것은 동북지구에서 시간이 가장 길고, 참가자가 가장 많으며, 범위가 가장 넓은 반일애국투쟁의 첫 번째 고조이다.
2. 1920년대의 무장투쟁
국내의 3·1운동은 동북지역 우리민족의 항일운동에 일대 전기로 작용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이 지역에서 대규모 반일시위가 일어났다. 한국교민의 거주지인 길림, 봉천, 흑룡강 등의 모든 지방에서 강력한 호응을 보였다. 그후 각 지방에는 신민회, 한민족회, 대한독립단, 서로군정서, 대한민국회 북로군정서 등 민족해방 독립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의병장군 출신인 홍범도는 연길 일대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이 군대는 설립되자마자 국내작전을 개시하여 수 차례나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대의 잔혹한 보복과 진압을 받았으나 대한독립군의 활동은 세계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3·1운동 이전까지 동만 연변에서는 수구파와 개화파가 항일운동의 방법을 둘러싸고 노선갈등이 있었으나 3·1운동이 진압당하자 새로운 각성이 일어났다.
참조. (연변: 연변인민출판사), p. 63; 강기주, 중국조선민족 항일투쟁사 연구}(북경: 민족출판사, 1998, pp. 9~10에서 재인용. 진가외 (陳可畏),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동북의 한국교민,” 대한민국임시정부 옛청사관리처 편?김승일 역,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p. 90.
이상.. 0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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