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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독재자 김일성의 인생 팩트.. 04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11 2020-07-17 19:18:23
 04..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쪽으로 항일운동의 방향을 선회하였다. 반일단체를 건립해서 무장을 갖추자는 의식각성이 일어나고, 수구파들이 무장투쟁은 시기상조라는 기존의 노선을 바꾸어 무장투쟁으로 돌아섰다. 민족학교에서 교육받은 젊은 청년들이 각 학교에서 일어나 수많은 무장단체가 조직되었으며 봉오동 전투, 청산리전투로 대표되는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20년에 1,651건에 4,643명의 독립군이 국내에 진격하였다. 일제는 만주지역이 항일민족운동 세력의 근거지가 되어 한국 국내의 치안까지 불안정해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보고 192010월 초 경신참변을 일으켜 11월 말까지 두달에 걸쳐 조선주 둔 제19사단 등 18,000명~20,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동만지방 일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연변, 동변도 일대에서 3,500명 사망하고, 2,500채의 민가가 소실되었으며, 28개 학교 소실되고, 5,400석의 식량도 소실되어 겨울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것이 경신년 대참안이라고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이에 대항한 전투의 일부가 청산리 전투이다. 생존한 병력은 대오를 다시 정돈?정비 편성함으로써 3·1운동과
1920
년대 초의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고조된 조선민족의 반일독립의식을 장기적이고 강인한 항일무장투쟁에로 이끌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가장 중요한 과제가 각 단체별 대동단결 통합문제였다. 1922년을 전후하여 당시 중국 동북지구에는 적어도 수십을 헤아리는 크고 작은 독립군단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참고  조선총독부경무국, 조선경찰지개요}(1925), pp. 123124;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19201945(서울: 아세아문화사, 1999), p. 55에서 재인용박창욱 교수 인터뷰,  (200606)

 



남만지역에서 무장단체들에 대한 통합운동이 가장 먼저 결실을 거두어 1922년 봄에 대한통군부가 결성되었고 대한통의부로 확대발전되었다. 대한통의부는 산하에 대한통의부 의용군을 두었는데 병력이 700여명이었다. 대한통의부의 결성은 통합의 오랜 숙원이 달성된 것이었지만 참의부와 정의부로 분열되었다. 동북
만주지역에서도 19228월부터 지역통합운동이 전개되어 1925년에 신민부가 창설되었다.

 


이같이 동북 3성의 독립군과 독립운동단체들은 거듭되는 이합 집산을 거쳐 19253월에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로 정립되었다. 그동안 각지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독립군단과 단체는 제각기 3부에 흡수, 통합되었다. 3부의 총병력은 1,600여명이었다. 3부의 재편성은 독립운동 역사상 일대 진전으로서 단결된 힘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새로이 벌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다. 그 당시 참의부의 관할구역은 봉천성, 정의부는 길림성, 신민부는 영안현이었다.3부는 군사조직체였을 뿐만 아니라 어느정도 자치정권의 성격을 띤 조선족단체였으므로 반일무장투쟁에 전력을 경주하는 외 에 조선족의 산업진흥, 문화계몽, 교육향상, 민권신장의 도모에도 진력하였다. 조직기구도 거의 다 입법, 행정, 사법 3권분립의 원칙
에 의해 설립하였고, 기본법에 해당하는 헌장을 제정 시행하였으
, 실무기관으로 민사, 법무, 군사, 교육, 실업, 교통 등 부서를 설치하였다.

 




이 시기 3부의 항일무장투쟁은 일제의 군경, 정부기관을 습격

 


참조  강기주, 중국조선민족 항일투쟁사 연구, (북경: 민족출판사, 1998), pp. 87




. 1905
년~30년대 동북지역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투쟁




하고 일본침략자들을 살상하고 그 통치기능을 마비시키고 일제의 밀정, 앞잡이, 반역자들을 숙청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동북지구에서 뿐만 아니라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조선경내에 깊숙이 진출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비록 뚜렷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끈질기고 피어린 항전을 수행하였다.




1920
년대 후반에 3부는 민족유일당 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실
패하고 국민부와 혁신의회 등 두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1930년대 들어 혁신의회는 김좌진을 수반으로 하는 한족총연합회를 구성하였고, 홍진, 이청천을 수반으로 하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한국독립군을 창설하였으며 주로 동북의 북부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국민부는 현정경, 현익철 등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혁명당을 조직하고 조선혁명군을 창설하였는데,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은 주로 동북의 남부지역에서 활동하였다.




3. 1930
년대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무장투쟁




1931
7월의 만보산사건 및 9·18사변이 일어난 후, 독립운동은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 이 시기부터 동북의 한국교민들은 중국 동북의 각 민족 인민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하게 되었다. 1931년 일제는 9·18사변을 일으키고 그 이튿날 심양, 장춘 등


참조  위의 책, p. 93.
진가외 (陳可畏),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동북의 한국교민,” 대한민국임시정부
옛청사관리처 편?김승일 역,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p. 91.
김일성

 



20여개의 도시를 점령하였으며, 4개월만에 동북3성을 자기들의 식민지로 전략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동북 제민족들은 중국 공산당의 호소와 영도하에 전면적인 항일구국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3부 통합운동은 실패하였으나 북만에서 한국독립군과 남만에서 조선혁명군이 창건되었다. 북만에서는 19319·18 만주사변
직후인 193111월 한국독립당이 한국독립군을 설치하였는데 이청천을 총사령, 남대관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병력 수는 500명~600명이었다. 2년여의 항일투쟁끝에 국내에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한국독립당이 만주사변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임하는 정세인식은 다음과 같다. , 왜적의 만주사변은 다만 만주 침략에 그치지 않고 장차 산해관 이내 중국 대륙과 기타 지역까지 침략할 것으로 정확히 보았다. 그렇게 되면 중국 중앙군과 공동작전을 펴서 무기 탄약과 일체의 보급을 얻어낼 수 있으며, 또 일보 더 나아가서 세계연합군의 교전단체로 참가하여 전후 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18 이처럼 한국독립당은 만주사변의 국제적인 성격을 잘 파악하였고 국제적인 모순관계가 전쟁이란 형태로 폭발하는 것을 이용하여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그들도 1920년대 민족주의운동 계열의 군사활동이나 조선혁명군처럼 대외정세활용론에 입각해있었다. 그러나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던 조선혁명군과는 달리 한국독립군은 독자적인 항일투쟁과정에서 교전단체로서의 자격을 획득하는데 목적을


참조 趙擎韓(한국독립군 지도자), 백강 회고록, (서울: 한국종교협의회, 1979), p.
94;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19201045(서울: 아세아문화사,
1999), pp. 324
325에서 재인용.

 



두고 있었다.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항일무장대 가운데 무기와 의약품 등을 제공해줄 수 있는 강력한 후원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동만지방으로 이동하여 시세영의 항일부대와 연합작전을 펴기로 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독립군은 한중연합군을 추진하여 1932129일 서란현성을 포위, 공격하여 적군 150여명을 살상하는 등 전과
를 올린 것이 한중연합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이다.

 

 



이외에도 그 해 9월의 1차 쌍성보공격전에서 위만군 1,000여명을 살상하고 2,000여명을 항복시키는 전과를 올렸고, 11월의 2차 쌍성보공격전에서는 일본수비대 한개 중대를 섬멸하고 많은 위만군을 살상,투항하게하였다. 특히 19336월의 대전자승첩에서는 한중연합
군이 일본군 2개대대를 완전히 격파하는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것은 한국독립군의 한중연합군의 항전역사에서 최대의 승전이며 독립군에 의한 항일무장투쟁중에서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 버금가는 대승으로 평가된다.




그러다가 한국독립군과 시세영의 구국군 사이에 불화가 생기고 전리품 분배과정에서 감정이 상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고 시세영 구국군의 용공노선과도 대립이 생겨서 구국군이 이청천을 포함한 수십명의 한국독립군 관병을 구금하고 전원의 무장을 해제하는 불상사가 생기면서 양국간의 연합군은 해체되고 말았다




또한 동변도지방에서 193310월부터 시작된 일제의 겨울철 치안숙정공작에 밀려 193310월 한국독립군의 주력은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하고 말았다.




 
참조 강기주, 중국조선민족 항일투쟁사 연구, p.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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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0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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