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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독립운동사. 01편. (신민부).
Korea, Republic of 돌통 0 213 2020-07-17 22:16:53
신민부의 활동
 
 
***  교육 및 홍보활동
 
 
 
 
 

신민부는 교육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교육은 북만지역에서 생활하는 모든 동포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이었고,그들로부터 독립운동 및 민족주의진영에 대한 적극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활동은 청년들에게 항일민족의식 및 민족주의사상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따라서 신민부에서는 1925년 3월 10일에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이에 대해 천명하고 있다.
 
 
즉 100호 이상의 마을에 1개의 소학교를 설치할 것, 교육을 통일하기 위하여 교과서를 편찬 할 것, 기관에서 학교의 관리 방법을 제정하여 교수의 자격을 정하고 노등 강습 및 통속강습(通俗講習)에 진력할 것 등이그 주요 내용이었다.
1925년 10월에 열린 총회에서는 100호 이상의 지방 뿐만 아니라 30 호 이상의 지방에도 사립국민학교를 설치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였다.또한 1927년 8월 1일에는 북만한인교육대회(北滿韓人敎育大會)를 해림에서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독립혁명사상을 제2의 국민인 초등학생에게 주입하여 장래에 대비하도록 의결하였다.
 
 
그에 대한 실천으로써, 주하(珠河)·목롱·밀산·요하(饒河)·돈화(敦化)등 15개 지역에 50여 개소의 소학교를 설치하였다. 신민부에서 세운 학교로 명칭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을 도표로 작성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신민부에서 설립한 학교 일람표

 

 

 

학교명 설립년월 위치 학교장 교원수 학생수 신창(新彰) 1927년 10월 해림참 서두가(海林站 纖街) 권중인(權重仁) 3 60 원동(遠東)   목릉현   2 30 개신(開新)   아성현 아성(阿城縣 阿城)   2 30 동명(東明)   영안현 영고탑   - - 이충전자(二層甸子)   아성현 이층전자   2 25 신창(新昌)   모아산(帽兒山)   1 20 동원(同源)   아성현 취원창(聚源昶)   5 60 영신(永信)   위사하현 석두하자   1 21 부달(扶達)   아성현 탄자황산(坦子黃山)   2 40 삼가자(三家子)   채가하둔(蔡家河屯)   - - 삼인방(三人坊)   안도현(安圖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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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도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신민부 계통의 학교 규모는 교원 수가 2~3명, 학생수는 30명 내외였다.1개 지역에 3개 정도의 소학교가 있는 셈이다. 이것은 신민부의 당초 계획보다 훨씬 적은 숫자인 것 같다. 1934년 6월 말의 통계이긴 하지만 주하현(1189호), 목릉현(682 호), 밀산현(932호), 돈화(708호) 등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신민부에서 교과서를 편찬하고자 한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진 것 같다. 신민부에서는 수신(修身)·지리 및 역사교과서 등을 국문으로 편찬하여 항일민족의식의 고취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학교가 설립된 지역에는 교원을 파견하였다.1985년 3월 17일에 가졌던 이강훈과의 대담에서 청취.닫기 그러므로 교육을 통하여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은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노동강습소의 설치를 통한 재만동포의 교육계획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본 것 같다. 노동강습소를 부락마다 설치하고 교육부원이 강사가 되었다. 이들은 재만동포의 문맹퇴치에 주력하였다. 동포의 8할 이상이 문맹이었으므로 민족정신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노동강습소가 신민부 전역에 설치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신민부에는 교원자격을 갖춘 젊은 엘리트들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1985년 3월 17일에 가졌던 이강훈과의 대담에서
또한 신민부는 대종교적 민족주의와 대종교적 공화주의를 재만동포들 세게 고취시키기 위한 선전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신민부의 주위에는 적기단과 북만청년총동맹 등 공산주의 단체와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및 권농회(勸農會)등이 신민부에 대한 파괴활동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써 기관지인『신민보(新民報)』를 순간(旬刊)으로 선전문을 부정기로 간행하고자 하였다. 또한 필요에 따라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순회강연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 같다.『신민보』의 창간호는 1925년 4월 1일에 발행되었는데, 그해 8월 29일에 제12호가 나올 정도였다.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第二課, 「大國民國 7年(1925) 8月 29日」,『朝鮮民族運動年鑑』, 1932 ;『독립운동사자료집』7, 1973, pp. 1378~1379.닫기 신민보는 관할지역인 중동선일대는 물론 북간도에까지 배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민보』의 선전활동도 일제의 탄압에 의해 오래 지속 되지 못하였다. 1926년 4월에 김일성(金一星 ; 金奉煥)·강경애(姜敬愛) 등이 투고한 사실이 적색(赤色)의 경향을 띠었다고 일본의 하얼빈(哈爾濱) 영사관에서 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당시 동삼성(東三省)은 물론 중국의 전 지역에 걸쳐 공산주의자에 대한 취췌(取締)가 삼엄한 시기였다. 그 결과 신민부의 선전부위원장인 허성묵 및 이광진(李光鎭)이 체포됨으로써활동이 중지된 것이다.
 
 
***  산업활동
 
 
 

신민부의 독립운동 및 사상운동은 재만동포의 세금으로 이루어졌던 만큼 산업의 발전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이러한 관심은 1925년 3월 10일에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구체적인 방안으로 실체화되었다. 토지의 매매와 조압(租押)은 기관의 지도 하에 할 것이며, 각 인은 노동역작(勞動力作)을 부지런히 할 것, 공농제를 실시하여 공동농지를 경영할 것, 식산조합을 둘 것, 부업을 장려할 것, 필요한 지방에 소비조합을 설치할 것 등이다.
이러한 계획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신민부에서는 실업부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이일세를 임명하였다. 또한 1926년 11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실업의 확장과 개선을 결의하는 한편,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모방하여 민생회(民生會)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공농제·식산조합·소비조합의 실시 및 설치 등 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것으로  1985년 3월 17일에 가졌던 이강훈과의 대담에서 보아 용이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다만 공판제(共販制)가 실시되어 중간상인의 악덕행위를 방지하고자 한 정도였다.  그 밖에 1926년 11월 28일에는 북만지역의 동빈현에서 민생회가 창립되었다. 이 단체는 재만동포의 생활개선을 추구하였다.  그런데 민생회의 활동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다.
 
 
***  무력투쟁
 
 

ㄱ. 군자금의 모집
 
 

신민부는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군자금이 필요했다. 군자금은 무기의 구입·독립군의 양성·무장활동을 위해서 절대적이었다. 신민부는 군자금의 대부분을 신민부의 관할구역에 거주하는 재만동포의 의무금에 의존하였다. 그래서 창립총회에서 논은 소상(小○) 2원(元), 대상(大○) 3원, 밭은 소상 1원, 대상 2원 5각(角)씩, 상인들에게는 소유재산의 20분의 1을 징수하도록 하였고, 1925년 10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매호당 6원의 의무금을 징수할 것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다. 우선 당시 북만동포의 대부분이 소작농으로서 경제사정이 좋지 못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북만청년총동맹 등 공산주의 단체의 조직적인 반대공작이 있었다. 그 결과 1928년 11월 18일에는 빈주사건(賓洲事件)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북만지역에 있던 재만농민동맹과 주중청년동맹(住中靑年同盟) 등이 빈주현의 주민들을 설득하여 신민부를 탈퇴하도록 한 데서 일어났다. 빈주현은 신민부의 관할구역으로 오래 전부터 의무금을 내던 곳이었다. 이에 신민부원인 이백호(李白虎) 등이 이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권총을 발사해 사상자를 낸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신민부는 해체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신민부에서는 모연대(募捐隊)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활동지역은 신민부가 관할하고 있지 않은 만주지역 및 국내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 같다. 1926년 12월에 모연대장인 황일초(黃一樵)는 대원 최보만(崔普萬)·채근우(蔡根宇)·이영조(李永祚) 및 박주찬(朴朱瓚) 등과 하얼빈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또한 훈춘(琿春)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신민부원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재만동포를 살해하기도 하였다. 1926년 11월 14일자.닫기 1927년에 신민부의 조직이 군사체제로 강화된 뒤에 군정파의 지도자인 김좌진은 국내의 경상도 지역에까지 이병묵(李丙默)·신현규(申鉉圭)·손허(孫許)·손봉현(孫鳳鉉)·윤창선(尹昌善) 등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군자금의 모집이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ㄴ. 독립군의 양성
 
 
 

신민부에서는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전개할 지휘관을 양성하고 군인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여 연 2기의 속성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교직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교장(김혁)·부교장(김좌진)·교관(오상세·박두희·백종열외 5인)·고문(이범윤·조성환)(蔡根植, 앞 책, p. 108).닫기 이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본교를 졸업한 학생수는 500여 명에 달하였으며 , 이들은 신민부 군인의 근간으로서 활동하였다.
 
신민부는 군구제(軍區制)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즉 관할구역 내의 만17세 이상, 만 40세 이하의 남자를 군적(軍籍)에 기록하여, 이를 바탕으로 대오(隊伍)를 편성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일시에 독립군을 수용할 만한 병사(兵舍)가 없었으며 또한 군량도 큰 문제였다. 그러므로 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다가 농한기에 훈련을 받도록 하고 유사시에 정규군에 편입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군구제의 실시는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일본의 하얼빈 영사관의 방해가 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민부원이 군구제를 실시할 기미가 보이면 곧 중국 관청에 강력히 교섭하여 독립군을 축출하였다. 또한 직접 영사관의 경찰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신민부는 아울러 둔전제도 실시 하고자 하였다. 훈련을 받으며 농사도 지어 자급자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애초 신민부는 성동사관학교의 출신자와 대한독립군단·대한독립군정서 및 민병(民兵)들 가운데 일부를 흡수하여 정규군을 구성하였다. 이 들은 약 530명 정도였다. 처음엔 영안현의 산림에서 군사훈련을 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부대의 유지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무기, 의식주, 병사 등의 여러 문제는 모연금과 의무금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둔전제를 실시할 지역으로 처음엔 밀산을 택하였다. 이곳은 1920년에 서일(徐一)·김좌진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던 곳으로 독립운동이 활발하였던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신민부에서는 1926년 5월에 심판원장인 김돈과 그의 비서겸 수행원으로 이강훈(李康勳)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의 상황이 과거와는 달라졌다. 소련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인 만큼 그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사상에 무비판적으로 공명하는 경향이 짙었다. 게다가 이 지역으로 모여든 기독교의 일부 교역자들은 교인들만의 안일에 급급하여 독립운동을 배척하는 경향까지 보였다. 그러므로 밀산에서 둔전제를 실시하고자 한 당초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두번째로는 안도현(安圖縣)을 둔전지역으로 결정하였다. 안도현은 산림지대로서 독립군의 양성에 알맞는 지역이었다. 신민부에서는 1927년 5월에 별동대장 서리인 임강 및 김학(金鶴)·장치락(張致洛)·최병선(崔秉先)·이강훈 등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계획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마적의 습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험악한 산림지대였으므로 중국인은 농번기에는 농민이지만 농한기에는 5,6명 혹은 10여 명씩 집단을 이루어 마적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별동대의 실력으로는 이를 충분히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도현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미칠 후환을 고려하여 이를 피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28년 5월에 별동대 전원은 중앙으로 귀환하였다. 다만 이강훈만이 대사하(大沙河 ; 일명 三人坊)에 위치한 신민학교(新民學校)의 교원으로 잔류하였을 뿐이다.
 
 
ㄷ. 무장투쟁
 
 

신민부가 추구했던 무장활동의 기본목표는 무장투쟁을 통하여 일제로 부터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함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신민부의 무장수준으로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530여 명의 군인을 보유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내진입을 수행하기 위한 예비공작은 1927년 8월에 군사부위원장인 김좌진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중삼 등 특수공작대를 국내에 파견하여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 지역의 작전지도의 작성과 일본 주재소의 위치 등을 파악하였다. 이 공작대의 임무는 성 공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한편 신민부에서는 국내에 사람을 보내 조선 총독인 재등실(齋藤實 ; 사이토오 마코토)의 암살을 기도하였다. 1925년 3월에 김좌진은 강모(姜 某) 등 신민부원에게 수십 개의 폭탄과 권총을 제공하고 총독의 암살을 지령하였다.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신민부가 만주지역의 활동에만 집착하지 않고 국내에까지 침투하여 총독을 암살하고자 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고 하겠다. 또한 북만 지역의 친일 한국인의 암살에도 주력하였다. 해림 지역의 초대 조선인민회의 회장인 배두산(裵斗山)의 암살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일본은 장춘(長春), 대련(大連) 사이는 물론, 국자가(局子街)·용정·하얼빈·훈춘·두도구(頭道溝) 등지에 영사관 및 그 분관(分館)을 설치하였는데 독립운동단체의 정보를 탐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타 지역에서는 보민회·조선인민회·권농회·시천교(侍天敎)·청림교(靑林敎) 및 제우교(齊愚敎) 등의 친일단체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남만주철도(대련~장춘) 연변 지역 및 북간도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북만지역에 위치한 신민부의 동정을 살피기에는 미흡했다. 그러므로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에서는 해림에 배두산을 조선인민회의 회장으로 파견하였다. 이곳은 중동선의 중심지역이며 신민부의 연락기관이 있는 곳이었다.
군정파는 1928년 5월에 일제와의 항쟁을 위해 중국 국민당(國民黨)과의 연합을 시도하였다. 당시 동삼성 군벌 총책인 장작림(張作霖)은 북경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1925년 6월 11일의 소위 삼시협정(三矢協定) 이래 일본 영사관의 경찰과 합세하여 독립군을 괴롭히고 있었다.국민당의 장개석(蔣介石)은 이에 맞서 북벌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민당과 신민부의 연합전선이 가능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중국 국민당에서 신민부에 교섭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김좌진이 불충분한 무장과 소수의 병력으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킨 위인이라는 데 착안하였던 것이다. 김좌진은 초청에 응하여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의 제13군 총사령관인 양우일(揚宇一)과 협의하고 한중연합전선을 구축할 것을 약속하였다.그러나 장작림은 이 정보를 알고 국민당의 만주지역 책임자인 공패성(貢沛誠) 및 사가헌(史可軒)을 체포하여 이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東方文化社, 1945), pp. 79~80. 신민부에서 세운 학교로 명칭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을 도표로 작성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신민부에서 설립한 학교 일람표 학교명 설립년월 위치 학교장 교원수 학생수 신창(新彰) 1927년 10월 해림참 서두가(海林站 纖街) 권중인(權重仁) 3 60 원동(遠東)   목릉현   2 30 개신(開新)   아성현 아성(阿城縣 阿城)   2 30 동명(東明)   영안현 영고탑   - - 이충전자(二層甸子)   아성현 이층전자   2 25 신창(新昌)   모아산(帽兒山)   1 20 동원(同源)   아성현 취원창(聚源昶)   5 60 영신(永信)   위사하현 석두하자   1 21 부달(扶達)   아성현 탄자황산(坦子黃山)   2 40 삼가자(三家子)   채가하둔(蔡家河屯)   - - 삼인방(三人坊)   안도현(安圖縣)   - - 자료 : 玄圭煥, 앞 책, p. 486 ; 李康勳, 앞 책, pp.79~82 ; 林堈, 앞 책, p. 21.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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