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 독재자 김일성의 인생 팩트.. 05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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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편..
남만에서는 국민부가 조선혁명군을 창설하였다. 국민부는 정의부 출신이 1929년 4월 1일 조직한 민족주의 계열 단체이다. 혁명(독립)과 자치를 분리한다는 방침에 따라 1929년 12월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다. 국민부는 1929년 5월 자신의 무장대인 조선혁명군을 창설하였다. 1개 중대에 30여명씩 10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전후해서 4개 중대로 축소되었는데 이는 국민부 좌파가 이탈해나갔기 때문이다. 국민부 좌파가 이탈한 것은 국민부가 반공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기 때문이다. 1929년 9월에 제1회 중앙위원회를 열고 모든 사회주의 운동 정파를 적으로 규정하였다. 민족주의운동 계열이 반공적이었던 것은 중국국민당과의 협력관계 때문이었다.국민부 좌파는 국민부의 반공 노선에 반발하여 국민부에서 이탈하고 1930년 9월에 조선혁명군길강성지휘부를 결성하였으며, 11월에는 중국국민당 관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민족단체를 표방”한 재만조선혁명군사령부로 바꾸었다.사령관에 이종락, 고문 고활신, 군사부 김광렬, 참모부 안붕, 정치부 장기명, 박진이다. 국민부좌파는 1931년 3월 “제3세력”을 지향한 단체로서 세화군(世火軍)군정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세화군정위원회는 공산당원과 연락하며 반국민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조직은 1931년 5월 동방혁명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민부 출신인 신영근, 박근원, 최창걸, 차광수, 김성주(김일성) 등이 동방혁명군 간부였다. 9·18만주사변 직후인 1932년 1월에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확대조직하여 1937년까지 장기간 활동하였다. 1933년 1월 총사령관에 양세봉이 취임하였다. 한국독립군과 마찬가지로 자금과 무기 참고..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1920~1945, pp. 201~202. ** 1905년~30년대 동북지역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투쟁 조달의 어려움 때문에 요녕민중자위군과 연합을 결성하고 공동으로 반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10월 일제의 치안숙청 공작으로 요녕민중자위군이 궤멸되자, 이번에는 1934년 3월 신빈현 홍묘자 회의 결정으로 중국공산당의 동북인민혁명군 1군 독립사와 연대투쟁을 하였다. 이념이 다른 사회주의계열 항일무장대와 연대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6년 10월부터 일제는 중국 본토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전쟁 (1937년 7월 7일의 중일전쟁)을 발동하기 위하여 동북지구에서 항일부대에 대한 ‘종합적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이리하여 동북지구 항일무장투쟁은 준엄한 시련을 겪게 되었고 조선혁명군 내부는 분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일부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투항하였고, 일부는 무기를 놓고 귀향하여 농민으로 돌아갔고, 김학규등 일부 대원은 관내로 이동하여 조선의용군에 가입하였으며, 1937년 초가을 조선혁명군 부사령원 박대호, 제2사사장 최윤구 등 60여명의 대원은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동북항일연군에 편입하였다. 조선혁명당에 의해 중국 관내에 파견된 김학규는 남경에서 정당의 통일논의에 참여하는 한편 만주의 조선혁명군을 지원할 방책을 논의하였다. 조선혁명당과 신한독립당은 1935년 7월 한국독립당의 김두봉, 조소앙, 조선의열단의 김원봉, 윤세위, 미국의 대한인독립단의 김규식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민족혁명당은 토지국유화하고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등 만주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의 주장과 유사하다. 참고.. 강기주, 중국조선민족 항일투쟁사 연구, pp. 122~123.
이처럼 관내로 이동한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당원들은 임시정부와 결합한 것이 아니라, 반임시정부 태도를 취하면서 정당형태로 관내지역의 민족운동 단체를 통일하고자 노력했던 세력과 결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조직한 것이다. 또한 만주지역에서파견된 김학규가 중국 관내의 민족운동 세력과 연계를 맺으려고 했던 것은 조선혁명군의 부족한 인적, 물적 자원을 해결하여 무장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중국관내로 계획적으로 이동한 경우는 김학규의 활동이 가장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의 형성과 활동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3·1독립운동 이후, 고무된 민족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국내외에서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 수립 노력이 결실을 이루어 1919년 4월10일 상해에서 임시의정원이 구성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제정되었고 4월 13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정체를 민주제로 하고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잇는 민주정부를 탄생시키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책임제적 지도체제도 출범하였다.
1932년 김구의 지도로 한 炸彈(작탄)멸왜운동을 전개하여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일제 요인 암살 작전이후, 임시정부는 일제에 쫓겨 상해를 떠나 남경, 항주 등을 거쳐 1940년 중경에 정착 하였다.
임시정부는 군사활동 분야외에 내정, 교통, 외교, 교육, 문화, 재정, 사법 등 8가지 기본 광복운동의 정책적 방침을 결정하고 국내외 독립운동을 관할하였다. 특히 외교활동에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선후책이기도 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등을 파견, 주 파리위원부를 중심으로 한국의 독립을 자유세계가 보장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21년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이승만, 서재필 등을 파견, 독립의 보장을 요구하는 외교공세를 폈으나 성과는 없었다. 소련, 구미 각국의 의회지도자나 유력하 재야정치인을 상대로 한 로비활동을 벌였다. 특히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발행은 국내외 동포를 고무시켰다. 조소앙 외무무장 등의 노력으로 카이로선언과 포츠담회담에서 독립보장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박성수, 이현희 논문 참조.
36pa 27쪼 까
이상.. 0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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